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는 19세기의 격렬한 사회적 흐름을 이끌었던 독일 출신의 학자이다. 철학자, 역사학자, 사회학자, 경제학자, 그리고 사상가까지 수많은 호칭으로 수식되는 마르크스는 인류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하나이다. 2018년 올해,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을 맞아 그의 생애와 사상, 그리고 세계에 미친 영향을 알아보자.

요동치는 시대를 살아가다
  카를 하인리히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독일 트리어(Rheinland, Trier)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하인리히 마르크스(Heinrich Marx)는 변호사이자 자유주의자로, 유년 시절의 카를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개방된 환경에서 자랐다. 나폴레옹과 프랑스 혁명군이 남긴 계몽주의와 급진주의 사상이 독일 전체에 퍼져 있었고, 프로이센 왕국은 세습 군주정으로의 복귀를 위해 프랑스의 흔적을 지우려 했다. 프로이센의 빌헬름 3세는 민주주의 혁명의 뿌리를 뽑고자 귀족과 기득권 위주의 정책을 펼친다. 그 결과, 프로이센 사회는 심각한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마르크스의 집안은 본래 유대인 집안이었다. 당시 유대인은 관직을 가질 수 없었기에, 하인리히는 개신교로 개종한 후 성을 마르크스로, 이름을 세례명인 하인리히로 바꾼다. 그는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유대인의 신분에서 주변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오른다. 그럼에도 억압된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소심하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하인리히의 삶은, 카를 마르크스의 유년기에 사회를 향한 분노로 각인되었다.
  하인리히는 아들이 자신을 이어 법학을 공부하기를 바랐다. 그 충고를 받아들여 카를 마르크스는 독일 본(Bonn) 대학 법학과에 입학한다. 대학에서 마르크스는 법학이 아닌 종교, 철학, 문학 등에 관심을 보였고, 베를린 대학 법학과로 옮긴 후에도 철학에 열중한다. 당시 독일은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헤겔주의*(Hegelianer)가 유행하고 있었다. 마르크스도 그 흐름 속에서 급진주의적 성향을 가진 청년헤겔주의(Junghegelianer)에 빠진다. 젊은 마르크스는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며 청년헤겔학파 내에서 인정받기도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사상은 정부의 탄압에 좌절된다.
  박사 학위를 받은 후, 마르크스는 라인 신문의 편집장으로 일하게 된다. 그가 편집장이 된 후 라인 신문은 급진주의적이고 반정부적인 기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결국, 1843년에 라인 신문은 프로이센 정부에 의해 폐간되고 마르크스는 아내와 함께 파리로 떠난다.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헤겔주의 사상에서 벗어나 더 많은 것을 보게 되고, 프리드리히 엥겔스(Friedrich Engels)를 만나 깊은 친분을 쌓는다. 마르크스에게 엥겔스는 헌신적인 친구이자 지적 성장을 이끌어준 동지였다. 그들은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며 함께 성장했다. 특히 엥겔스에게 마르크스는 새로운 삶의 이유이자 그의 세상을 함께 구축한 사람이었다.
  마르크스는 파리에서 2년을 보내며 많은 정신적 성장을 이룬다.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에게 필적하는 사람들을 만나 깊은 교류를 나눈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속한 비밀결사가 문제를 일으키면서 그는 파리에서 추방당한다. 뒤이어 벨기에 브뤼셀에서 1848년 혁명을 지켜본 마르크스는 혁명의 실패에 좌절하며 영국 런던으로 망명하며 자본론을 집필한다.

마르크스 주의의 탄생
  마르크스의 사상은 그의 일생을 따라 발전했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의 시대를 겪었던 아버지 하인리히의 생각은 카를 마르크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마르크스는 아버지를 통해 합리주의를 배웠다. 하지만 합리적 논증만으로 행위에 영향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계몽주의자들과 구별된다. 마르크스는 인간의 생활조건이 더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는 역사적으로 사회가 이상에 가까워지는 시도를 반복하는 동안 인간의 고통과 소외가 증가했다는 진보의 모순을 지적했다. 그럼에도 합리주의자이자 완전론자로서, 사회발전과정을 완전히 이해하면 합리적 이상향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르크스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타당한 논증과 경험적 접근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익혔다. 그는 모호하고 검증되지 않은 사상과 비현실적 환상, 비합리적인 생각을 혐오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헤겔 철학에 의해 만들어지고 낭만주의의 형이상학적 체계에 의해 다듬어졌다. 하지만 그는 자신만의 논증과 비판적 수용으로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아 사상을 선택적으로 수용했다. 그와 엥겔스는 독일의 철학자인 포이어바흐(Ludwig Andreas von Feuerbach)의 유물론을 이어받았지만, 포이어바흐보다 더 실증적인 사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그 친구들로부터 전해진 합리주의는 그가 낭만주의에 휩쓸리지 않고 사유의 현실성과 구체성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마르크스의 청소년기는 검열의 시대였다. 반계몽과 전통이 대표하는 프로이센 왕국의 관료와 지주는 시대를 되돌리려 강압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탄압 속에서 철학은 독일인에게 유일한 사상의 창구였다. 19세기 중반은 헤겔주의의 시대였다. 헤겔의 생각을 그대로 적용해 보수적인 성격을 띠었던 우파 헤겔주의와 달리, 마르크스가 지지했던 청년헤겔주의는 다소 과격하고 진보적인 사상을 주창했다. 마르크스와 청년헤겔주의자들은 헤겔의 반유토피아적 사상을 부정하며 프로이센의 사회체제에 급진적인 비판을 가했다. 마르크스를 이루는 모든 것이 헤겔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헤겔주의에 깊게 빠져든다. 결과적으로, 헤겔주의는 마르크스 사상의 토대가 된다.
  마르크스가 이주한 19세기 중반의 파리는 사회적, 정치적, 예술적으로 들떠 있었다. 유럽 전역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을 활발히 교류했으며 낙관과 이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마르크스는 이곳에서 프랑스 사회주의자, 영국 경제학자와 교류한다. 그는 낭만주의를 일체 거부하고 비판적 관찰만 수단으로 삼는 정치적 현실주의에 영향을 받는다. 마르크스는 초기 사회주의자들의 사상과 경제학자들의 이론을 새롭게 해석하고 거기에 역사학을 더해 이론을 정립했다.

공산주의 혁명을 이끌다
  파리로 이주하기 이전의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라는 사회 계급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파리에서 마르크스는 공상적 사회주의 이론을 일부 받아들이면서 사회의 발전에 대해서 논한다.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준 대표적인 사회주의자로는 생시몽(Saint-Simon, Comte De Claude Henri De Rouvroy)과 푸리에(Charles Fourier)가 있다. 생시몽은 과감한 산업화를 통한 생산력의 끝없는 증대를 믿었으며, 푸리에는 강력한 중앙집권화와 관료제를 통한 평등한 분배를 주장했다. 마르크스는 상반되는 두 의견에 프롤레타리아 계급 투쟁의 개념을 더하며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마련한다.
  마르크스 철학은 헤겔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사상이 정립된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헤겔 법철학 비판>에서 헤겔을 크게 비판한다. 그는 사회적 갈등의 원인, 국가의 의미, 역사관 등에서 헤겔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특히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일부 받아들이면서 역사와 사회에 대해 자신만의 이론인 역사적 유물론(유물사관)을 정립한다. 이는 세계정신(Welt geist)의 자기 전개과정이 역사이며 물질적 생산력을 인과적 요인으로 본 헤겔의 관념 사관과 정반대이다.
  역사적 유물론은 역사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을 인간의 의식이나 관념이 아닌 물질적 생산력으로 본다. 사회 구성원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계급과 그렇지 못한 계급으로 나뉘며 계급 간 끊임없는 갈등이 역사를 이룬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본주의 사상과 사유재산제도를 하나의 역사적 현상으로 해석했다. 그리고 인간 사회가 원시 사회에서 근대 자본주의까지 도달하는 과정을 실증적, 이론적으로 규명한다. 마르크스는 인간 사회가 결과적으로 공산주의에 도달할 것이며 이를 계급이나 차별이 없는 합리적 사회로 보았다. 그에게 조직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힘은 사회를 발전시키고 새로운 사회를 이끌 원동력이었다. 오직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봉기만이 마르크스의 이상인 공산주의 사회를 달성할 수 있었다.
  공산주의자로서의 사상을 정립한 마르크스는 여러 국가에서 골칫거리 취급을 받는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준비하기 위해 노동자 계급을 훈련하는데 일생을 바치려 했으며, 혁명적인 사상을 가진 단체를 여럿 만든다. 그에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사회의 숙명이자 과제였다. 과업에 충실했던 마르크스의 삶은 다른 혁명가들의 격정적인 삶과는 다르게 반복적이고 단조로웠다.
  1848년 초, 마르크스의 노력은 끝내 결실을 본다. 그는 엥겔스, 바쿠닌(Mikhail Alexandrovich Bakunin) 등이 속한 "공산주의자 동맹"을 통해 <공산당 선언>을 집필, 출판한다. <공산당 선언>에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의 이름으로 현존 질서를 고발하며 프롤레타리아의 봉기를 촉구한다. 선언은 마르크스와 동료의 생각을 담은 산문이며 혁명을 찬미하는 송가였다. <공산당 선언>이 발표된 지 몇 주 후 프랑스에서 2월 혁명, 한 달 후 독일에서 3월 혁명이 터지면서 마르크스의 이상은 빛을 보는 듯 했다.
  1848년의 혁명은 실패했다. 프랑스에서 공화정을 수립하는 데 성공하지만, 독일 전역을 비롯한 다른 국가에서는 성과가 없었다. 유럽 어디에도 <공산당 선언>을 능가하는 이론이나 선전 자료는 없었다. 하지만 선전 활동에도 불구하고 대중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이뤄내지 못했다. 독일의 공산주의자, 급진주의자들은 부르주아지들보다 정치적으로, 조직적으로 뒤떨어져 있었다. 프롤레타리아 대표자들은 부르주아지의 정당한 요구와 정치적 단계를 무시했고, 혁명은 지반이 부족했다.

마르크스를 이어받은 사람들
  <자본론> 이후 집필 활동을 이어가던 마르크스는 1881년 아내의 죽음으로 충격 받아 병을 얻는다. 이후 알제리로 요양을 떠나, 1883년 그곳에서 사망한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사망에 크게 상심했으며 마르크스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남은 그의 일생을 보낸다. 마르크스 사후, 평가는 크게 갈리지만 사회 및 경제의 많은 부분에서 거대한 인물임은 이견이 없다.
  사회 체제에 있어 마르크스의 이론은 20세기를 이끈 두 이념 중 하나인 공산주의의 원형이었다. 마르크스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사상가로는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Vladimir Ilyich Ulyanov)이 있다. 레닌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을 실제로 적용해 러시아 혁명을 이끈다. 그의 공산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라 불린다. 마르크스-레닌주의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주장한 공산주의적 이상 사회를 미래상으로 하였으며, 세부적인 경제 계획 및 사회 체제는 레닌에 의해 확립된다. 레닌은 혁명에 의한 사회주의 정권을 공산주의의 제1단계로 보았다. 마르크스가 제시한 이상적 공산주의 사회는 공산주의의 제2단계에 해당하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이상적인 공산주의에 도달하기 위한 중간단계에 해당한다.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노동은 단순한 생산 활동이 아닌 궁극적인 삶의 지향점과 제일의 욕구이다. 이 생각 속에서 사회의 생산 능력은 극대화되고 사회의 소외와 차별이 사라지게 된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 정권을 통해 이상적인 공산 사회를 실현하려 했다. 그는 현대 공산주의를 이루는 대부분의 체계와 원리를 창제했다. 그리고 러시아에서 실제 혁명을 일으켜 사상을 실현하려 한 사상가로 평가받는다.
  이소시프 스탈린(Joseph Vissa-rionovich Stalin)의 사상 또한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시작되었다. 본래 마르크스는 헤겔의 관념론적 변증법과 포이어바흐의 유물론을 통해 변증법적 유물론을 제시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지양**하는데, 레닌과 스탈린은 이 변증법적 유물론을 소련의 고정세계관으로 공식화한다. 특히 스탈린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공식을 극대화해 의식에 반한 물질의 절대 우위를 제시한다. 결국, 공식화된 변증법적 유물론은 역사에 있어 인간의 자유와 능동적 역할을 부정하면서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스탈린주의를 정당화하는데 인용된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자본주의 체제의 발달에도 영향을 미쳤다. 산업혁명 직후 영국 사회의 빈부격차가 심화하고 있는 것은 분명했다. 마르크스의 저서와 생각들은 자유주의자 진영에 영향을 주었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정부가 가져야 할 분배의 책임과 상대적 평등에 대한 발전을 야기한다. 자유주의 진영의 사회학자, 정치학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시장 방임주의와 빈부격차에 대한 그의 경고를 수용했다.
  이외에도 마르크스의 사상은 많은 인문학 분야에서 논쟁과 발전을 불러왔다. 문학적으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사조의 시작이 되었고, 역사학에서는 새로운 연구법을 제시했다. 특히 생산 수단의 발전이 의식의 발전에 선행한다는 역사적 유물론은 현재까지도 많은 역사학자가 받아들이고 있다. 정치, 사회학에서는 계층 간 갈등을 통한 사회 발전이라는 갈등론을 본격적으로 제시하였으며, 경제학에서는 자본주의의 맹점과 그 보완에 대해 많은 논쟁을 일으켰다.

현대인의 시선으로 본 마르크스
  19세기 이후 정치, 사회, 경제의 발전을 논함에 있어 마르크스를 빼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만큼 많은 분야에 큰 영향을 준 마르크스이지만, 공산주의의 창시자라는 사실 때문에 평가는 크게 갈린다. 특히 자본주의 세력과 공산주의 세력 간 경쟁이 극심했던 냉전 시절, 한쪽에서는 위대한 학자로 받아들여지면서도 반대편에서는 금기시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현대에 이르러, 마르크스의 사상은 많은 부분 비판, 수정되고 있지만 여전히 학문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의 사상은 현대 공산주의의 시작이 되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 등으로 대표되는 현대 공산주의의 설계자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많은 경우에, 마르크스의 후계자를 자처한 사상가들이 일궈낸 사회는 공산주의의 첫 단계인 프롤레타리아 독재 이상의 사회를 이뤄내지 못했다. 공산주의의 실패와 병폐는 대부분 마르크스가 아닌 이후의 사상가들이 만든 사회에서 드러났다.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이루는 수많은 노동자가 자신의 역할을 깨닫고 계몽되는 것을 우선으로 보았다.
  현대에 이르러 마르크스의 사상은 재평가되고 다시 연구되고 있다. 그의 사상은 사회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필수로 배워야 할 요소가 되었고, 수많은 자유주의 학자가 마르크스를 이해하며 새로운 이론을 정립했다. 영국의 자유주의 정치철학자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은 마르크스주의를 “일부 결론상의 오류가 있었지만, 마르크스 사상이 갖는 중요성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고 평가하며 “그의 사상은 역사, 사회를 바라볼 때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인간의 인식을 높여주며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고 강조했다. 단순한 이념 논쟁을 넘어 마르크스의 사상이 가지는 학문적 가치와 마르크스가 가졌던 학문에 대한 열정을 인정한 것이다.

  카를 마르크스는 사회 구조와 낭만주의적 사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론을 만들어냈다. 그는 모든 것에 있어서 비판적이었으며, 완벽한 논증을 꾀했다. 그렇게 탄생한 마르크스의 사상은 냉철한 이성의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미래와 인간에 대한 믿음 위에 지어졌다. 현대의 관점에서 볼 때 마르크스의 사상은 완벽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의 시선과 생각들은 아직도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전해주고 있다.

헤겔주의*
독일의 철학자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의 관념론을 계승한 철학 분파. 헤겔 사후에 우파 헤겔주의와 청년 헤겔주의로 분열한다.

지양**
변증법상의 주요 개념. 모순되는 여러 요소를 대립과 투쟁의 과정을 통하여 발전적으로 통일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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