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기 정도 전에, 마틴 부버라는 지식인이 있었다.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태어난 유태인으로, 나치가 집권하자 일찌감치 저항의 표시로 스스로 교수직을 내어놓고 이스라엘로 떠났던 사람이다. 그는 언론인으로 활동하면서 히브루 대학에서 사회학과 철학적 인류학을 강의했고, 유럽과 중동의 민족 갈등 상황을 모두 겪은 경험을 토대로 타인에 대한 인정과, 진정한 대화를 통한 타인과의 만남을 강조하였다. 철학적이면서도 문학적인 글솜씨 덕분에 노벨 문학상 후보 명단에 열 번, 노벨 평화상 후보 명단에 일곱 번이나 지명되었으나 수상하지는 않았다.

  모든 생명과 삶은 만남으로 이루어진다는 표현이나, 진정한 대화를 통해 타인을 만날 때에 비로소 더 큰 존재 또는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표현은 부버의 글에서 나온 것이다. 부버는 사람의 소통 관계를 대상과 타인에 대한 두 가지로 구별한다. ‘나’와 ‘그것’의 관계는 거리를 두고 관찰하며 개인적인 의지에 따라 경험하고 활용하는 관계이다. 반면, ‘나’와 ‘너’의 관계는 대상에 대한 내 의지만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호응을 통해 온전한 인격체인 타인을 마주했을 때 가능해지는 진정한 대화와 만남이다. 여기에 헌신과 책임감이 덧붙여져야만 사랑이 된다. ‘나-그것’의 관계는 사물 또는 환경과의 상호작용이나 타인과의 표면적 관계라면, ‘나-너’의 관계는 타인과 공감을 형성하는 진정한 만남의 관계이다.

  단순하게 타인과 표면적으로 스쳐지나거나, 어떤 특정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으로 만나는 경우에는 다른 맥락과 목적이 있기 때문에, ‘나-너’ 사이의 대화와 공감을 통한 진정한 만남의 관계까지 형성되지는 않는다. 내가 일상에서 만나고 있는 사람이 진정 나와 만나는 것인지, 내가 수행하는 역할 또는 내가 가진 지위 때문에 만나는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진정한 만남을 일방적으로 강요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를 분간할 판단 능력이 없는 경우에나, 성추문을 방지하려면 남녀 단둘이 있는 상황을 피하라는 말이 그럴 듯한 해결책처럼 들릴 것이다.

  며칠 전, 이른바 ‘펜스룰’이 미디어에서 조명되면서 성추행을 방지할 수 있는 방법으로 널리 화제가 되었다. 미국의 복음주의 목사 빌리 그레이엄이 처음 실천하여 유명해졌던 이 원칙은 남성의 성욕을 억누를 수 없는 타고난 것으로, 그리고 여성은 그러한 성욕의 대상으로 전제한다. 그래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레이엄 목사는 배우자를 대학에서 만났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딸들에게는 대학 진학을 허용하지 않았다. 딸들 중에서 유일하게 대학 교육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의지로 결국 마흔이 넘은 나이에 대학을 졸업하였다.

  우리 사회에서도 여성은 흔히 누구의 아내, 누구의 딸, 누구의 엄마로 규정하여 사람 자체보다는 관계 안에서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여성을 욕망이나 의지의 대상으로 보는 시선으로부터 보호하거나, 여성의 사회적 활동을 안전하게 보장하지 못했다는 점이 최근에 드러나고 있다. 부버의 말대로, ‘나-너’ 사이의 진정한 만남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타인을 단차원적으로 대상화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는 한 인간으로서 인정하고 대하는 근본적인 마음의 성찰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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