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회 카이스트 문학상 수필 부문 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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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치게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서라면, 할 말이 머릿속에 가득 찬 나머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 김사과 작가가 꼭 그렇다.

 

*

 

너는 훌륭하고 나는 거지 같지. 하지만 두고 보자. 결국 다 똑같아질 거야. 결국엔 모두 다 똑같이 좆같아진다. 노력해도 소용없어. 너도 알잖아. 그러니까 너도 노력하지 마. 일도 하지 마. 아무것도 하지 마.

(<나와 b> 중)

 

김사과의 작품을 처음 만난 것은 2008년 겨울 무렵이었다. 교과서에 나올 법한 예의 바른 문학 작품들만 접해 왔던 나는 계간지 <창작과 비평>에 수록된 <나와 b>를 읽고, 여지껏 무의식적으로 갈증을 느껴오던 불온한 무언가를 발견한 기분에 휩싸였다. 줄거리는 간단했다. 주인공 '나'는 친구 b와 함께 깡패와 사귀며 본드를 불고 죽은 깡패의 몸에 불을 지른다.

 

이어서 읽게 된 장편 소설 <미나>, 단편집 <영이>에 담긴 이야기는 더 충격적이었다. 좋아하는 친구를 살해하게 되는 여고생, 아빠를 개가 될 때까지 패는 엄마, 식당에 가서 여자를 칼로 찌르고 집에 돌아가 엄마와 아빠를 때리는 회사원. 어느 하나 정상적인 이야기가 없었다. 폭력과 욕설이 난무했다. 단순히 엽기적이고 갈 곳 잃은 분노가 가득 찬 공격적인 묘사에서 느껴지는 카타르시스가 김사과 작가의 유일한 미덕이라고 지레짐작하기 쉬울 만큼 그녀의 소설은 피투성이였다.

 

1. 더 나쁜 쪽으로

 

2010년 발표된 첫 단편집 <영이> 이후로 7년의 시간이 흘러, 김사과 작가의 두 번째 단편집 <더 나쁜 쪽으로>가 얼마 전 출간되었다. 1부와 2부는 2011년부터 2016년까지 발표된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고, 3부는 미발표된 형식 파괴적인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본 단편집은 광기와 폭력이 들끓던 전작에 비해 외견상 차분해 보인다. 극단적인 묘사가 줄어든 대신 그 자리를 냉소, 꿈결과 같은 모호함이 안개처럼 채우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이번 소설집이 온순해졌거나 만만해졌다고 짐작한다면 큰 오산이다.

 

<더 나쁜 쪽으로>는 여전히 쉽게 읽히는 소설집이 아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예전보다 더 난해해졌다. 차라리 잔인하고 공격적인 묘사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라도 독해 자체는 쉬울 텐데, 한층 모호하고 분열된 서사, 꿈과 현실이 녹아드는 듯한, 혹은 서사 없는 서사의 흐름 속에 분열적이고 자폐적인 텍스트가 나열된 작품들, 심지어 다양한 언어가 오가는 실험적인 글들을 읽다 보면 명확한 줄거리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어 버린다.

 

김사과의 이번 작품집, 특히 1부와 3부의 글들은 그런 의미에서 음악에 가깝다. 서사가 희미한 대신 순간의 감정과 이미지가 선명하다. 그 밀도가 음악의 리듬처럼 변하고 클라이맥스와 추락이 있다. 파편화된 이미지와 메시지들은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서사에 얽매이지 않고 감각적인 리듬으로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그리고 좋은 음악이 깊은 감정과 인상을 남기듯이, <더 나쁜 쪽으로> 역시 읽고 난 뒤에 어떤 이미지와 주제 의식이 머릿속에서 불길한 멜로디처럼 반복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전작 장편 소설 <천국에서>에서 정점에 달했던 문제의식을, 외적인 표현 방식과 내적인 주제 의식 모두에 걸쳐 마치 깔맞춤 한 듯 전방위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더 나쁜 쪽으로>가 가지는 의미가 크다. 김사과는 본 작품을 통해 현시대의 세련된 문제적인 '천국', 그 안에서 필연적으로 개인이 느끼게 되는 불안과 분노, 외로움을 집요하게 포착해내고, 이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한다. 그녀의 소설 속에서 욕망과 자포자기 혹은 '망함'의 정서는 혼란스럽게 뒤섞인 채로 꿈틀거린다.

 

그렇다면 그 문제 의식의 실체는 대체 무엇인가? 쉽고 재미있는 소설도 많은데, 왜 고통스럽기까지 한 노력을 들여가며 난해한 작가의 작품을 읽어야 하는 걸까? 음악 같은 소설이라면 차라리 음악을 들을 것이지, 서사가 희미한 소설 따위를 쓰거나 읽는 것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2. 김사과를 읽는 이유

 

김사과는 '나를 마조히스트로 만드는 소설가'라는 제목의 에세이에서 미셸 우엘벡의 장편 <지도와 영토>를 다루며, "지금 시대의 퇴폐와 쇠멸의 리얼리티를 제대로 담아내는 흔치 않은 작가이기 때문"에 우엘벡을 읽는다고 밝힌 바 있다. "그의 소설을 읽는 것은 꽤 피곤한, 종종 역겨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모조리, 반복해서" 읽는다.

 

내가 난해하고 불편한 김사과 작가의 글을 읽는 이유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김사과 작가에 의하면 우엘벡은 "소설 쓰기를 통한 지도 그리기"를 하고 있는 셈이며, 이로써 세상을 이해하고 싶었던 것이다. 우엘벡의 작품 <지도와 영토>에는 "지도가 영토보다 흥미롭다."라는 구절이 등장하기까지 한다. 이러한 김사과 작가의 '지도'에 대한 생각은 이번에 발표된 단편집 <더 나쁜 쪽으로>에서 간접적으로 확장된다.

 

1부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3개 국어가 정신없이 교차하는 단편 <지도와 인간>의 제목은 <지도와 영토>의 오마쥬로 보인다. 소설에서 엄마는 딸에게 말한다. 완벽한 지도가 있고 그 위에 사람들이 있으며 딸 역시 거기에 있다고. 하지만 딸은 그것이 거짓말이고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녀는 지도가 필요했다 그녀는 인간들이 필요했다 그녀는 나를 가졌다

그녀는 지도를 가졌다 그녀는 인간들을 가졌다

그녀는 충분히 가졌다 아니 그녀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도가 될 것이다 그녀는 인간이 될 것이다

 

그러면 나는?

(<지도와 인간> 중)

 

자신이 그려놓은 지도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엄마. 그리고 "또 다른 개소리도 많이 들려주었다. 모르는 사람을 믿지 마라, 어른을 공경해라…… 그것을 신줏단지처럼 모시며 살아왔다."고 붕괴된 믿음을 이야기하는 딸.

 

흥미롭게도 김사과는, <지도와 인간>에서 '지도'로 상징되는 한 개인의 바람 혹은 환상이 개소리에 불과하다는 태도를 취하는 화자를 등장시켰지만, 소설집 전체적으로는 우엘벡의 글쓰기에 담겨 있는 방식과 유사한 시도를 했으며, "시대의 퇴폐와 쇠멸의 리얼리티"를 담은 '지도'를 그림으로써 세상을 이해하는데 어느 정도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소설을 쓰는 행위는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지도 그리기에 다름 아니며, 그러나 그렇다고 지도가 영토보다 흥미롭다는 얘기는 아니다. 나는 심미적인 지도를 그리기 위해 영토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영토를 제대로 바라보고 그 위에 나 자신을 위치하기 위해 지도가 필요하다. 김사과는 본 단편집 <더 나쁜 쪽으로>와 작품 외적인 글 모두를 통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면 그녀가 제대로 바라보고 이해하고 싶었던 그 영토는 무엇일까?

 

3. 욕망으로 빚은 천국

 

난 말이야. 저렇게 관념적인 물질을 본 적이 없어. 저건 욕망이란 관념 그 자체야. 갖고 싶다, 갖고 싶은 마음 그것 자체. 그렇잖아? 그게 아님 저게 뭐겠어? 그게 아니면 저 괴상한 물건이 도대체 뭐겠냐고. 날 갖고 싶지? 날 사고 싶지? 이런 데서 살고 싶지? 그렇게 외치고 있잖아. 이건 내 귀에만 들리는 거야? 나는 저게 갖고 싶으니까? 근데 너는 그렇지 않으니까?

(…)

물론 너는 저게 싫어. 전혀 원하지 않아. 하지만 이미 너도 우리들 중의 하나야. 그건 너나 내가 정하는 게 아냐. 그냥 이렇게 되어버린 거야. 니가 아무리 아니라고 주장해도 소용없어. 세상은 이따위로 생겨먹었어. 세상은 너 혼자 아름답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아. 그렇게 되면 자기들이 무너져내리고 마니까. 그러니까 막으려고 들거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가 저것들을 사랑하게 만들려고 할거야.

(…)

너는 절대로 지면 안 돼.

(<풀이 눕는다> 중)

 

과시적이지 않은 과시, 낡지 않은 낡음, 오만하지 않은 오만함, 오직 타인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나를 봐, 갖고 싶잖아? 속삭이는 듯한 그들을 나는 외면하지 못한다.

(<더 나쁜 쪽으로> 중)

 

<풀이 눕는다>에서 위와 같은 장황하지만 순수한 외침과, "사랑 안에서 굶어 죽겠다"는 낭만적인 선언 및 행동을 통해 물질과 자본주의에 저항하던 화자는 <더 나쁜 쪽으로>에서 더 이상 그것을 "외면하지 못한다". 이러한 화자의 태도 변화는, 지난 세기의 '악'이 식민지 지배나 군부 독재, 강남으로 대표되는 천민자본주의와 같은 알기 쉬운 형태를 보였던 반면 21세기에서는 보다 교묘해진 형태로 우리 사회에 녹아들어 있는 상황과 맞물리며 작가의 문제의식이 보다 섬세해졌음을 짐작하게 해 준다.

 

과거, 비교적 명확하고 적은 수의 '적'이 존재하던 시절에 대해 김사과는 이렇게 묘사한다.

 

아직 우리의 조국이 충분히 촌스러웠을 때, 아직 지드래곤이 힙스터 삘 양년들이랑 뉴욕에서 뮤직비디오를 찍지 못했을 때, 우리의 적은 오직 코엑스, 타워팰리스, 대치동, (진부하게) 강남, 어, 그때, 병신같이 폼을 잡고 선 우리를 누구도 섣불리 비웃지 못했을 때, 그때, 아직 우리가 거기 없었을 때,

(<세계의 개> 중)

 

좀 더 단단하고 확실한 윤리와 정의가 존재하던 그 시절, 우리는 우리의 욕망을 경계하고 우리 자신을 통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윤리와 정의에 대한 기준이 모호하고 개인화된 지금, 우리는 좀 더 안심하고 유혹에 빠져든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놓고 누군가를 해치지 않으며, 좋은 것이니까. 우리는 세련된 젠트리피케이션 지역을 방문하여 맛있는 것을 먹고 풍족한 경험을 하며, 거대 기업의 편리한 전자 제품과 서비스를 누린다. 그 누구도 직접 다치게 하는 일 없이. 그렇다면 우리가 그 욕망을 거부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따라서 욕망을 가진 우리들은 더 이상 모호한 적을 구분하지 못하며, "아무 조건 없이, 원한 없이 우리는 투항한다" (<세계의 개> 중)

 

자본주의 질서에 투항한 우리들은, 소셜 미디어와 유튜브, 아프리카 TV, 아이돌, 매끈하고 새련된 아우디 혹은 아이폰 따위로 보다 쉽게 만족하고, 주저앉는다. 그것들은 마침내 우리를 안전한 천국으로 이끌어 준다.

 

4. 천국에서

 

여기 되게 좋아. 무서워할 게 하나도 없거든. 모든 게 쉬워. 창밖 풍경은 평화로워. 나무로 만든 탁자가, 그 탁자 위로 비치는 햇살이 예뻐. 벽에 걸린 스피커에서는 근사한 노래가 나와. 커다란 개가 난로 옆에서 졸고 있어. 너무 평화로워. 모든 나쁜 것은, 해로운 것은 죄다 아주 멀리 있고, 좋은 것들만 나와 함께해. 아니, 그런 기분이 들어. 어, 여긴 요즘 내가 제일 좋아하는 수족관이야. 근데 나 더이상 여기 못 있겠어. 못 견디겠어. 나 망했나봐. 이 안에서 나 더이상 즐겁지가 않아.

 

여기는 천국이고 나는 울고 있어.

 

근데 써머, 여기가 진짜 천국이야? 써머 넌 그렇게 생각해? 정말? 진짜? 어떻게 여기가 천국이야? 내가 진짜 원하는 단 한가지가 빠졌는데? 아아, 나 이제 진짜 알겠어. 여기가 왜 이렇게 좋은지. 그건 제일 중요한 한가지가 빠져 있으니까. 내가 원하는 거, 내가 진짜 원하는 거, 그게 없으니까. 그래서 이렇게 평화로운 거야. 이 평화는 내가 원하는 그 딱 한가지를 버리고 얻은 거야. 그러니까, 여기는 천국이 아니야. 여기는 지옥이야. 여기는 지옥이야, 써머. 근데 문제가 뭔지 알아? 도대체 뭐가 빠져 있는지를 모르겠다는 거야. 완벽한데, 여기는 너무나도 완벽한데...... 어떻게 뭐가 빠져 있을 수가 있지? 난 진짜 모르겠어. 근데 그 뭔가가, 그 빠진 뭔가가 밖에는 있을까? 확실해? 그게 뭔데? 나가면 보여? 손에 넣을 수가 있는 거야? 모르겠어. 난 정말이지...... 뭐가, 대체 여기에 없는 건지, 밖에는 대체 뭐가 있는지......

 

(<천국에서> 중)

 

김사과는 전작 <천국에서>를 통해, 유래 없이 풍족한 물질의 소유가 가능해진 현시대의 우리가 맞이한, 물고기들이 안전하고 단조롭게 살고 있는 수족관에 비견할만한 '21세기형 천국'의 비극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그녀는 이런 천국에 대해 크게 두 가지 관점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표백되고 파편화된 '개인주의자들을 위한 천국' 혹은 '이불속의 천국'.

 

둘째, 유명 연예인 혹은 부러움을 살만한 타인의 상대적인 천국, 즉 욕망과 시샘, 증오 심지어 혐오를 자아내기까지 하는 '비교 대상으로서의 천국'.

 

4-1. 파편화된 천국

 

첫 번째 '개인주의자들을 위한 천국'에 대해, 김사과는 소설과 에세이에서 각각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다시 눈을 뜨면 지금 여기 천국 안에서 우리는, 우리들만의, 눈과 귀가 먼 우리들만의 천국 안에서, 바깥의 지옥을 잊는다. 좀 더 완벽하게 잊기 위해, 우리는 인도로 떠날 수 있다. 이비사 섬으로 향할 수도 있다. 물론 결국 아무데도 도착하지 못할 테지만.

(…)

춤 속에서 우리는 거리를 유지한다. 껴안지 않는다. 각자의 춤에 몰두한다. 그렇게 우리들은 개인주의자들을 위한 천국으로 간다.

(<더 나쁜 쪽으로> 중)

 

어쩌면 천국은 계속되고 있다. 우리들은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공짜로 많은 것을 얻고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고 정보를 얻고 소식을 즐기고, 그 결과 그들은 돈을 번다. 그들은 그렇게 번 돈으로 우리의 인터넷 아파트를 계속해서 새것으로 유지하고 보수하고 이따금은 더 멋진 집으로 이사시켜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안에서 계속해서, 기분 좋게 살아가면 되는 걸까? 그런데 왜 자꾸만 우리가 이상한 우산 속 세상에 살게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

결과적으로 우리들은 몹시 바빠졌다. 너무 쉽기 때문이다. 손쉽게 '라이크'를 누르고, 손쉽게 전송하고, 손쉽게 리트윗한다. 더 자주, 더 많이 보고, 더 빨리 결정하고, 더 쉽게 욱하게 된다. 저 드라마는 지루하니까 쓰레기통에 버리고, 이놈은 나쁜 놈이니까 언팔, 자 여기 이달의 신상이 있다. 어서 더 빨리, 더 많은 것을 해야 한다. 더 많은 것을 봐야 하고 그러니까 더 빨라져야 한다.

(<문학3 2017년 1호> '우산 속 세계' 중)

 

인터넷을 통해 쉽게 연결되고 쉽게 처리하고 쉽게 욱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어느새 더 쉽고 안전하게 고립된다. 사회학자 엄기호 역시 소셜 미디어가 주는 즉시성의 환상은, 사실상 연속성의 단절을 의미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페이스북의 타임라인에는 수백 명의 삶의 일부가 파편화된 채 뒤섞여 나열된다. 심지어 그마저도 우리의 취향을 고려한 알고리즘에 의해 필터링되어, 미디어 버블에 갇힌 채로.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입맛에 맞고 안전한 이불속 천국에 도래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의 삶이 파편화되고, 더 즉시적이 되며, '동물화'하는 것을 누구도 막지 않는다. 아니 인식조차 할 수가 없다. 우리는 마치 점점 데워지는 냄비 속의 개구리 혹은 꽃신에 익숙해져 맨발로 걸을 수 없게 된 원숭이가 되어가고 있는 듯하다.

 

그리고 <더 나쁜 쪽으로>의 서사와 표현 방식은, 그렇게 파편화된 우리의 서사를 쏙 빼닮았다. 단편적으로 흘러가는 우리의 감정과 인상, 단순한 욕망, 정신보다 물질과 육체에 집중하는 지금 이 시대를 표현하는 충격 요법으로, 일종의 ‘미러링‘을 구사한 셈이다. 김사과의 1부, 3부 작품을 보면서 혼란스럽고 산만하며 역겹기도 하고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느끼는 것은 따라서 자연스럽다. 김사과는 지금 우리 삶의 양태 역시 그러한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거울에 비추어진 그 모습을 다만 사실적으로 묘사하듯이, 같은 방식으로 작품을 그려낸 것뿐이다.

 

그런 천국에서 우리가 결국 마주치게 되는 피할 수 없는 감정은 외로움이다. 새하얗게 표백된 인공 천국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이미 사람들은 단절되었고, "이곳에서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 관심이 없다."

 

텅 빈 맥도날드에 앉아 빅맥을 먹는데 정말이지 외로웠다.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거리에, 내 옆에, 벽 안에, 벽 너머에...... 아무도 만나지 않는다. 누구도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카레가 있는 식탁> 중)

 

4-2. 지옥은 천국의 부재

 

두 번째로 '비교 대상으로서의 천국'이 있다. 첫 번째 천국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우리는 소셜 미디어를 통한 초연결 사회에 살고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는 즉각적으로 많은 것들을 쉽게 얻고 만족하는 듯 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로 인해 더 불행해지기도 한다. 인스타그램을 통해 엿본 유명 연예인 혹은 주위 사람들의 화려한 삶은, 순간 자신도 저 천국에 속해 있는듯한 착각에 기쁨을 선사하기도 하지만 그곳에 도달하지 못할 자신의 현실을 깨닫는 순간 그 감정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만다. 그로 인해 상대적 박탈감, 결핍에 대한 저주와 부풀어 오르는 욕망 -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최소한 사진 만이라도 비슷하게 - 과 같은 왜곡된 감정이 자라나기도 한다. 도달할 수 없는 천국을 엿본 사람이 느낄 수 있는 극단적인 감정에 대해 김사과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하지만 언제나 그리워했던 듯한, 누군가는 오직 그 풍경을 위해 목숨을 바칠 수도 있을 법한 그런 풍경이었다. 이런 곳이 세상에 존재하다니! 민정남은 덜컥 겁이 났다. 뭔가 봐서는 안 될 것을 엿본 기분이었다. 하지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민정남은 눈물을 흘렸다. "여기가 당신이 사는 곳이란 말이야?"

 

대답은 없었다. 민정남은 홀로 그 신비한 홀로그램 정원에 남겨졌다. 그는 울고 또 울었다. 그는 자신이 죽는 날까지 이 환상에 사로잡혀 있을 것임을 알았다. 현실을 역겨워하며, 죽음을 저주하며. 하지만 아무것도 손에 쥐지 못한 채. 끔찍한 증오 속에서, 무력감 속에서. 천천히 썩어갈 것임을 직감했다. 영원한 그리움 속에서.

(<이천칠십X년 부르주아 6대> 중)

 

소셜 미디어나 여행을 통해 천국을 잠시 혹은 종종 맛보게 된 사람들이 그 천국에 자신이 영원히 속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을 때, 충족될 수 없는 욕망에 대한 갈증이 생기는 경우가 있다. 타인에 대한 비교가 지옥을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타인의 천국 - 비록 그것이 '인공 천국'일지라도 - 에 접근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우리는 그 비극을 거부하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진다. 그리고 정확히 그런 방향으로 우리의 천국은 조성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렇게 나아갈 예정이다. 비교할 천국이 눈앞에 즐비한 상황, 천국을 인지하게 되어 그곳에 도달하고픈 욕망이 생겨나는 경우 개인이 취할 수 있는 쉬운 행동은 두 가지다. 돈이 있다면 그 천국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돈을 탕진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곳에 절대 도달할 수는 없다는 불가능의 정서가 지배적인 상황에서 수동적인 공격성과 무기력에 압도당한다.

 

2부에 수록되어 있는 <카레가 있는 식탁>은 현 사회에 만연한 혐오 역시 이런 비정상적인 '천국'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가난한 고시원 생활을 하는 '나'는 스스로를 인간 혐오자라 생각한다. 누군가가 아주 역겨울 때, 혹은 따뜻할 때, 자신의 마음이 풀어지려는 상황이 오면 '나'는 혐오 기제를 이용하여 스스로를 통제한다. 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정신 승리에 불과하다. 작중에서 '나'는 버블티 여자에 대한 호감을 혐오 기제로 통제하는데, 이는 자신이 도달하고자 하는 '천국'(그녀와의 연애)을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결국 타인(그녀의 남자 친구)의 세계를 잠시 엿보는 것에 불과하고, 자신이 속할 수 없는 세계임을 자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버블티 여자를 혐오하고 그녀를 스토킹 하거나 이불속에 파묻혀 있는 것 이외에 의미 있는 행동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비틀린 천국 안에서 과잉된 소외감과 박탈감을 키워나간 개인들은, 물질적으로 이전 세대보다 많은 것들을 누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해하려는 이 강렬한 욕망을 막을 길이 없다." (<자음과 모음> 2015년 겨울호, '카레가 있는 식탁' 중)

 

부정적인 감정을 타인에게 돌리지 않고 자기 안으로 삭힌다 하더라도, 김사과 작가의 눈에 비친 현실은 그리 희망적이지 않다. 이 경우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자라나기 쉬운 허무주의, 노력해도 안 될 것이라는 좌절감 혹은 절망감으로 인해 제자리에 주저앉기 쉬운 연약한 상태가 되어 버린다.

 

아마 우리는 실패할 것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누군가를 필요로 하며, 결국 아무데도 닿지 못할 것이다.

(<샌프란시스코> 중)

 

나는 아무것도 넘어서지 못했고, 결국 아무데도 닿지 못했다. 지도를 버렸지만 여전히 지도 안에 들어 있었다.

(<더 나쁜 쪽으로> 중)

 

김사과는 이렇듯 번지르르한 21세기 '천국'에 속해 있는 개개인의 마음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지옥'을 면밀히 포착하고 집요하게 묘사한다. 우리의 욕망을 자극하는 천국, 그리고 그 욕망을 지속적으로 충족시키는 데에 실패할 때마다 자라나는 분노 혹은 만성적인 좌절감과 같은 질척거리는 감정들.

 

이러한 수동적인 공격성, 자포자기의 정서는 ‘탕진잼’, ‘시발비용’, ‘YOLO’와 같은 유행어로 대표되는 지금 세대의 동물성, 혹은 즉물성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김사과는 이런 현상이 온전히 우리 세대 탓은 아니라고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목표를 향해 경주마처럼 달려가는 것. 그게 한국에서 태어나 자란 내가 배운 인생이다. 몰아붙이기만 하는 삶을 사는 것에 대해서 미친 짓이라는 얘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적의가 있다.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똑똑한 말을 늘어놓기 위해 벼랑 끝에 설 것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향한. 대체 뭘 위해서 그런 식으로 거듭 나아져야 하는 걸까? 나는 삶을 살아가는 법을 알고 싶은데, 이런저런 것들을 위해 삶을 제물로 바치라는 이야기만 들려온다.

(<0 이하의 날들> 중)

 

남보다 더 앞서기 위해 “삶을 제물로 바치”면서까지 “경주마처럼 달려가”야 한다며 “몰아붙이는” 기성 사회의 분위기를 거부할 수 없었던 아이들은, 결국 열심히 달려 “벼랑 끝”에 도달한 채로 어른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곳이, 여기가, 바로 우리들의 비틀린 천국이다. 우리가 이런 현실을 외면한 채 임시적인 천국에 만족하는 순간, 악순환의 고리는 더 견고해질 뿐이다.

 

5. 천국에서, 더 나쁜 쪽으로

 

그래서 김사과 작가는 <더 나쁜 쪽으로>를 통해 지금 어디까지 왔고 어디까지 더 나아갈 생각일까.

 

<더 나쁜 쪽으로>는, 매너리즘에 빠지고 싶지 않은 그녀의 전방위적인 시도와 실험, 성공, 그리고 실패가 고스란히 담긴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녀는 '영토'를 담은 '지도'를 그리고, 또한 버리고자 하는 상충하는 욕망을 끌어안은 채, 일관된 목소리를 다양한 결의 글들이 모인 작품집의 형태로 구체화하는 쉽지 않은 작업을 해 냈다. 표백된 천국 안에서, 물질과 편리함에 휩싸여 스스로를 소외시키고 마는 우리들의 욕망과 절망, 그리고 외로움에 대해 이토록 집요하고 세밀하게 묘사해온 작가를 나는 김사과 이외에 알지 못한다.

 

1, 3부에 수록된 실험적인 작품들은 글의 형태와 외적인 묘사 자체에 메시지를 녹여 넣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었으며, 미학적으로도 유의미한 결과를 낳았다. 일종의 미러링의 부작용으로써 난해함과 거부감을 극복하지 못했던 것은 아쉽지만 흡인력 있고 정제된 스토리텔링과 주제 의식이 돋보인 2부의 작품들을 통해, 추후 타협을 거부하면서도 대중적인 설득력이 가미된 글이 탄생할 가능성에 기대를 하게 된다.

 

"앙팡 스키조"라 불리며 주목받던, 문단의 발칙한 이단아 김사과가 "배가 나온 지방 유지 행세를 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오랜 시간 치열한 사유와 실험을 이어온 결과가 이백 페이지 가량의 책 한 권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기서 여전히 더 나아가려는 태도가 엿보이는 그녀가 선택한 표제작의 제목은 의미심장하게도, <더 나쁜 쪽으로>.

 

더 나쁜 쪽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은, 더 안 좋아질 여지가 남아있는 현재가 그나마 좋은 상황인 셈이니 여기에 만족해라는 식의 긍정적인 메시지라고 보기 어렵다. 다른 누구도 아닌 김사과 작가가 붙인 제목이라면 더욱이. 열심히 하면 잘 될 거라는 식의 긍정주의 혹은 낙관주의에 대해 김사과는 그렇지 않다고, 이대로라면 우리는 우리의 본성에 의해 자연스레 더 나쁜 쪽으로 가게 될 것이라는 말을 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헬조선'이라는 이름의 '천국'안에서, 김사과는 매번 더 나쁜 쪽으로 우리보다 한 걸음 더 앞서 나아갈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가 '동물화 하는' 우리를 스스로 발견하고 구원할 수 있도록. 그런 그녀의 무겁고 고통스러운 여정은 아마도 좀처럼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고, 나는 그 긴 궤적을 언제까지나 좇을 생각이다. 희망도 절망도 없는 그녀의 종국을 향한 발자취를, 기꺼이 지지하며 응시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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