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탠바이

강 보 라
문화기술대학원 석사과정

 

 

“총 칠백 정도 예상하시면 될 것 같네요.”

“네? 치치치치치치치일백이요?”

 

 남자의 안구가 눈꺼풀을 휘 집고 나오는 듯했다. 뱅그르르 도는 도수 높은 무테 안경을 쓴
창백한 얼굴의 여의사는 뭘 그렇게 놀랐냐는 듯이 그를 다시 쳐다본다. 남자는 귀를 의심한
듯 다시 물었다.

 

“아니, 요즘 가격 많이 다운됐다는데 이거 좀 너무 하시는 거 아녜요?”

“저희는 원래 코스트보다 퀄리티 위주로 가기 때문에 다른 곳과 비교하시면 좀 곤란해요.”

“아무리 그래도…선생님. 물론 제가 선생님이 이쪽 업계에선 최고라는 거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제가 생판 남도 아니고. 어유. 제가 이래봬도 명환이 그 자식이랑, 아니지.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박명환 선생이랑 불알친구에요, 불알친구.”

“환자분. 공과 사는 좀 구별해 주셔야죠. 제가 저희 허즈번드, 그러니깐 우리 닥터 박 친구분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생판 남이랑 다를 게 뭐나 있나요? 말씀 드렸다시피, 저희는 퀄리티 위주로 시술을 하기 때문에 디스카운트를 해 달라고 하시는 건 고객님이 실질적인 데미지는 안고 가도 상관없다는 말로 들리네요. 그래도 괜찮으시겠어요?”

 

남자는 친구 와이프고 뭐고, 자신 앞에서 눈을 흘기고 있는 여의사와 한바탕 하려던 마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퀄리티니 데미지니 왜 쉽게 할 수 있는 말들을 모조리 꼬부랑 발음으로
해대는 건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야 좀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건가.’ 진료실 문을
여닫는 그의 손이 짧게 파르르 떨렸다.

‘쓰읍. 숨 한 번 크게 들이쉬고. 내쉬고. 에이씨. 이게 뭐냐, 쪽 팔리게.’

왜소한 체구의 남자는 결국 ‘괜찮으시겠어요?’라고 하이톤으로 대꾸하던 여의사를 뒤로한 채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따라 그의 눈에 강남역 6번 출구의 아치모양이 서글프게 보였다. 초록빛의 문양이 조금씩 일그러지더니 어느새 초록 물결로 넘실거렸다. 누가 볼까 싶어 남자는 재빠르게 옷소매로 눈가를 닦아냈다.

**

성명 나현석. 나이 만 스물 여덟. 미혼. 현역예비역. 직장경력 지역 케이블방송 사내 안내방송 담당 아나운서 2년. 마포구 공동체 라디오 ‘마포 FM’ 새벽 2-4시 타임 디제이 활동 1년.
지방 국립대 신문방송학과 출신. 신체조건 예쁘장한 얼굴에 왜소한 체격. 안짱다리. 2대독자
외아들. 여친 없음. 특이체질 커피 향을 맡으면 붉은 반점이 생긴다. 버릇 1. 밥과 반찬이 입
안에서 섞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래서 꼭 밥을 먹고 물로 입을 헹군 후 반찬을 먹는


다. 버릇 2. 당황하거나 할 말을 잃거나 어떤 상황에서든지 의성어를 내뱉고 싶으면 일괄적으로 ‘어이쿠야’라고 말한다. 별 뜻은 없다.

 

**

덜컹거리는 2호선 순환선 4706번 열차에는 매캐한 냄새가 가득했다. 교대, 사당, 낙성대, 서울대 입구 할 것 없이 금요일 저녁은 술요일 저녁이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들, 초점 없는 눈빛들, 그리고 마늘냄새, 숯냄새, 사람냄새. 그러나 그 열차 칸 안에 한 사람만은 멀쩡했다. 멀쩡한 게 어지러울 만큼 정신이 멀쩡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살 거야?”

멀건 국 한 사발을 내려놓은 엄마의 뿌루퉁한 표정은 현석을 늘 불편하게 했다. 말 없이 국에 숟가락을 집어넣는 현석을 엄마는 답답하다는 듯 잠시 흘겨보았다.

“이제 지겹지도 않니? 내가 다 지겹다, 야. 언론고신지 뭔지.”

“난 아직 스탠바이인 것 뿐이라니깐.”

“큐 싸인 들어올 거였으면 애저녁에 들어왔겠다. 큐큐큐! 하고.”

엄마와의 대화는 늘 이런 식이었다. ‘넌 할 수 있어’라던가 ‘역시 내 아들이 최고야’ 따위는
엄마에게 어울리는 어휘가 아니었다. 스탠바이. 그렇게 따지고 보면 아들 대학 집어넣고 힘들게 살았으니 좀 놀아야겠다며 뜬금없는 황혼이혼을 한 엄마의 인생도 스탠바이가 아닌가.
뭘 원하고 뭘 하고자 하는 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무조건 일을 저지르고 보는 엄마도 그렇게
한심하게 여기는 아들의 인생과 별반 차이가 없지 않은가. 누군들 ‘스탠바이네요’하면서 마냥 언제 올지도 모를 인생의 열차를 기다리고 싶겠나. 하다하다 지치면 진짜 이게 내 길인지 싶어 애초의 목표마저도 흔들리겠지만, 이왕에 거기까지 간 거 조금만 더 버티면 뭐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였으니. 최소한 그때까지의 시간과 정성을 봐서라도 뭐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제 와서 다른 곳에 기웃거리기엔 너무 늦어버린 것 같고. 마흔의 눈으로 보면 서른도 한창 때이겠지만, 알 수 없는 무기력함에 매일의 호흡이 턱턱 막히는 것은 또 어찌할 것인가. 젠장. 스탠바이. 나도 지겹다, 지겨워. 누군 좋아서 이러고 있나. 할 수 없어서 이러고 있지. 대안이 없는 변화는 무의미하다. 할 수 있었다면 마냥 이러고 있지만은 않았을 거라고!

**

헉헉거리는 숨을 참으며 겨우 도착한 곳에는 호루라기를 불고 있는 남색 유니폼의 경비원만이 서 있었다. 현석은 이리 저리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신입사원 실기시험장과 관련된 안내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 경비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저….여기 혹시 아나운서 시험장이 어딘 줄 아세요? 여기 근처라고 하던데…”

“공채 말씀하슈? 이봐요, 여긴 별관이에요, 별관. 공채는 본관에서 하는 거에요. 잘못 찾아
왔구만.” 젊은 사람이 정신을 어디다 두고 다니는가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것만 같아 현석은 재빨리 고맙다는 말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아, 병신. 그러길래 아까 택시 기사한테 제대


로 물어보고 말할 껄. 괜히 본관이라고 우기는 기사 꼴이 보기 싫어 별관으로 왔건만, 현석은 자신의 소심함을 탓하기 시작했다.

9시 15분 전. 가까스로 방송국 본관의 철제 문을 통과한 현석은 건물 입구 벽면에 붙은 대기자 명단을 확인했다. 수험번호 38098-251 나현석 스튜디오 A-7 오전 9시 뉴스리딩. 현석은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하고 속으로 ‘스튜디오 A-7’을 되 내이며 발걸음을 성큼성큼 옮겼다. 그날따라 방송국 네모난 바닥재가 유난히 우글거리는 것처럼 보였다. ‘장마철도 아닌데 이상하네’라고 생각할 즈음, 그는 어느새 스튜디오 A-7앞에 당도했다.

 스튜디오 A-7이 있는 복도에는 스튜디오 A-1에서부터 A-10까지 총 10개의 스튜디오가 굳건한 방음 문의 위엄을 뽐내고 있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잡음’으로부터 자유롭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듯했다. 열 개의 스튜디오 앞에는 서 너 명의 대기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대본을 외우고 있었다. 순간 스튜디오 A-5에서 진행요원이 툭하고 튀어나왔다.

“정재형씨! 수험번호 38098-176 정재형씨!”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리부리한 이목구비를 자랑하는 한 대기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수험번호 38098-176 정재형입니다!”

군대 훈련장에서 갓 튀어 나온듯한 그 남자의 목소리에 다른 대기자들이 피식거리기 시작했다.

“들어가서는 그렇게 구령하는 것처럼 하실 필요는 없구요. 사운드는 저희가 알아서 조절하겠지만, 시험장에 있는 건 초감도 마이크라 평소에 말씀하시듯 하시면 되요. 아시겠죠?”

“네!”

여지없이 40데시벨에 육박하는 성량으로 답하는 그 대기자를 흘끔거리며 현석은 시간에 쫓긴 자신에게 안정의 최면을 걸었다. ‘괜찮아, 나현석. 넌 할 수 있어. 한 두 번도 아닌데.’

 

**

Q. 이번에 M사가 서류에서 몇 명 걸렀는지 아시는 분?

A. 인사업무 알바하는 지인에 의하면 작년보다 더 걸렀대요. 거의 200명 정도 붙은 듯.

 

Q. [아나] 신촌 주변에 머리 잘 하는 데가 어디있나요? 좀 알려주세요.

A. 정석대 후문 쪽에 쌜리 미용실이라고 있어요. 아나 지망생들 많이 가니 잘 알아서 해 주실 꺼에요. 모두들, 파이팅!

 

Q. 작년에 K사 아나 최종면접까지 갔는데 이번에 서류에서 미끌어졌네요. 대체 뭐가 문제일까요? 나이 때문인가. 되신 분들 스펙 좀 알려주세요, 제발.

A. 저는 스카이 중에 하나 나왔구요. 영문과고. 학점은 4.5만점에 4.25받았고. 토익은 외국에서 좀 살다와서 만점이구요. 영어방송에서 6개월 인턴경험 있구요. 군대는 면제 받아서 나이는 스물 다섯입니다. 저보다 좋으신 분들도 많던데, 저도 역시 운이 좋았던 거 같아요. 이제부터가 시작 아니겠어요? 아자아자!


 

미이치인- 현석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욕이 나왔다. 인터넷 포털에 유명세를 떨치고 있던
언론고시 까페의 한 줄 게시판에 질문들을 훑어가다 보니 말도 안 되는 ‘엄친아’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4.25에 토익 만점에 군 면제? 그래, 너 젊어서 좋겠다. 얼마 전 현석은 자신의
생일날 케이크 위에 꽂혀있는 초를 보고 놀랬던 참이었다. 이게 대체 몇 개야. 하나, 둘, 셋,
넷, 다섯. 허걱. 모두 열 개. 큰 초 두 개에 작은 초 여덟 개. 고작 스물 여덟에 초를 이렇게나 많이 꼽아야 하는 건지, 그 개수만큼이나 팍삭 늙어버린 것 같아 착잡한 심정이 들었었다. 근데 잠정적 경쟁자 중에 자신보다 세 살이나 어리고 학점도 영어도 경력도 모두 화려한 놈이 활개를 치고 다니다니. 게다가 현석은 정회원으로 활동한 지 2년여가 되어가는데,
이 놈은 보아하니 고작 지난주에 등업 신청을 받은 터였다. ‘너, 위닝은 잘 하냐?’고 딴지라도 걸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이내 이십 대 후반의 고상함을 지키자고 스스로를 달랬다. 회원
수 이만 팔천 사백 육십 칠 명. 투데이 수, 사천삼십팔. 개중에는 언론사에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혹시나’하는 심정으로 매년 원서를 넣는 이들도 상당수
있을 것이다. 학교에서 회사에서 복학생이란 이름으로, 노처녀란 이름으로, 또는 좋게 말해
취업 준비생 직접적으로 말해 백수란 이름으로 ‘미래의 언론인’을 꿈꾸는 젊은이들. 하하. ‘미래의 언론인’이라. 퓰리처상이라도 따자고, 바바라 월터스처럼 되자며 원대한 포부를 가지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들의 속사정은 다 제 각각일 것이다.

 

**

“아, 생각보다 덥네요. 처서가 한참 지났는데 말이에요.”

번쩍거리는 은색수트, 일명 ‘은갈치 수트’를 입고 연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 내리던 옆의
대기자 한 명이 현석에게 말을 건넸다.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이신가 봐요?”

긴장된 마음에 현석이 대꾸했다.

“네. 요즘 운동 좀 한다고 식사량을 줄이고 보조 약을 복용했더니 예전보다 땀이 많아진 것
같아요. 오늘따라 유난히 덥기도 하고, 긴장도 되어서…. 그쪽은 이번에 몇 번째세요?”

“저요? 저 두 번째에요. 공중파는.”

“아, 그러시구나.”

‘은갈치 수트’는 공중파가 두 번째라는 현석의 대답에 머쓱해 졌는지 먼 산을 쳐다보며 깊게
한 숨을 내쉬었다.

대부분의 언론고시생들에게 공통된 구분법이 있었다. 공중파냐, 아니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메이저리그 그라운드에 한 번만이라도 야구화 끝을 비벼보고 싶은 마이너리그 4년 차마냥 ‘공중파 vs. 비공중파’라는 명백한 이분법에 스스로를 구분 짓고 있었다. 거기서 더 세세히 들어가자면 ‘서울파 vs. 지방파’, 나아가 ‘뉴스파 vs. 버라이어티파’등으로 서열화가 자연스레 형성되었다. 공중파 20년 차 아나운서 선배들 중에는 이름도 얼굴도 생소한 이들도 많았다. 주로 라디오 뉴스 진행이나 비인기 프로그램을 진행하다 보니 그런 일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모두들 ‘제2의 백지현’, ‘손성희 주니어’가 되리라는 포부를 안고 어떻게 해서든 공중파, 그것도 수도권에서 승부를 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공중파라는
파이는 적은데 지원자 수가 지나치게 많다 보니 매번 치열한 경쟁을 치를 수 밖에 없었다.
몇 해 전부터는 아나운서를 뽑는데 ‘외모지상주의’가 판을 친다는 둥, ‘예전만 못하다’는 둥
채용과정 자체에도 말이 많았었다. 격세지감이었다. 십 년 전만 하더라도 뉴스를 진행하는
여성앵커는 실력과 외모를 다 갖춘 것에 반해 남성앵커는 실력만을 가지고 전체 뉴스를 리드하지 않았던가. 이 ‘은갈치 수트’만 보더라도 몸을 만들고 약을 먹고 하는 행위들이 모두
오늘의 카메라테스트를 위한 것이었을 게다. 배우의 몸이나, 아나운서의 몸이나 적절한 운동은 필수적인 요소라고 일찍이 채용설명회에서 교육받은 터이다. 뉴스 진행 시에는 바스트
샷만 나오니 상반신에만 신경을 쓰면 되지만, 요즘처럼 아나운서가 버라이어티 쇼에도 종종
등장하는 경우에는 풀 샷에도 대비해야 하는 법이다.

‘치밀한 자식 같으니라고. 지금 날 간 본거냐?’

현석은 ‘은갈치 수트’를 연신 흘끔거렸다. 방송사 시험 중에서도 아나운서 지원자들끼리는
신경전이 대단한 편이다. 통상 5,6차까지 진행되는 선발과정에서 눈치껏 누가 자신과 가장
비등한 위치에 있는지 파악하고 그(들)의 단점을 자신의 장점으로 눌러버리면 게임오버. 옆의 ‘은갈치 수트’처럼 분위기상 자연스레 말을 걸다가도 자신의 레이더망에 걸리지 않는다
싶으면 다시 ‘침묵모드’로 돌변한다. 방금도 비슷한 수법이었던 셈이다.

 

**

신문방송학과. 현석은 일찍이 신문과 방송에 대해서 배우기 이전에 깨우친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잔머리’. 현석이 대학을 입학하던 해인 99년도에만 해도 신방과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 덕이었는지 몰라도 유난히 현석이 다니던 신방과에는 ‘난다 긴다’하는 녀석들이
판을 쳤고, 그 안에서 치열한 경쟁을 하며 생존해야 했기에 주는 건 ‘말 실수’요 느는 건 ‘잔머리’뿐이었다.

“자, 언론인의 자질은 딱 한가지다. 얕고도 넓게. 팔방미인이 되면 되는 것이다.”

유명한 심야토론 쇼의 책임프로듀서를 맡고 있었던 한 겸임교수는 매 시간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우리는 공학도들처럼 실험실에 처박혀 데이터를 분석할 필요도 없고, 음악학도처럼 매일 연습을 하라고 강요 받지도 않는다. 그저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끼어들 수 있을 정도의 지식, 딱 그 정도의 눈치’만 있다면 사하라 사막 한 복판에서도 방송을 진행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석도 덩달아 기세등등하게 학창시절을 보냈다. 인기학과에 갔으니 과외자리도
쉽게 얻을 수 있었고, 소개팅도 어렵지 않게 성사되었다. 혹여나 누군가 ‘졸업하면 뭐 할꺼야?’라고 물으면, ‘네. 언론사에 가려구요.’라고 대답하면 그만이니, 참 생각만 해도 그럴싸했다. 군에 가기 전에는 방송 모니터 동아리도 열심이었고, 복학하고 난 다음에는 교내 언론고시 스터디도 직접 꾸려가며 열심을 내던 그였다. 모의 카메라테스트에서도 다른 이들에게
줄곧 진심 어린 충고를 던져주기도 했다. 그때까진 모든 게 순조로웠다. 남은 일은 방송사
사원증을 다는 일밖에 없는 듯 했다.


 

**

초감도 마이크는 현석의 생각보다 작았다. 진행요원이 다가와 ‘잠시만 실례할게요’하더니 셔츠 안으로 핀 마이크를 빼내어 넥타이 윗부분 옆에 살짝 달아주었다.

“자, 준비되셨으면 큐 싸인 갈 겁니다. 두 번째 스트레이트 기사부터 갈게요.”

짙은 네이비 컬러의 수트를 차려 입고 스튜디오 안 뉴스 진행자 자리에 앉은 현석은 덜덜
떨리는 다리를 한 손으로 애써 진정시켰다. 옷 매무새를 짧게 다듬고 마지막으로 머리를 한
번 쓸어 내린 그는 헛기침을 살짝 내뱉었다. 시이자악. 현석이 고개를 끄덕여 카메라맨에게
싸인을 주자 맞은편 정면에 붉은 색 불이 들어왔다. ON AIR.

“오늘 새벽 3시 10분경, 서울시 강동구 천호동 한 빌라에서 끔찍한 강도 살인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경찰에 의하면 당시 빌라에서 잠을 자고 있던 이모씨와 일가족 3명이……”

“네. 됐습니다. 다음 8번 기사 가죠.”

“방금 들어온 속보입니다. 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씨가 탑승한 우주선이 성공적으로 발사된 이후 처음으로 우주에서 보내온 발신메시지 입니다. 이호영 기자가 전합니다.”

“네. 수고 하셨구요. 나현석 씨는 스포츠에 관심 있나요?”

“네? 아직 부족한 편이지만 더 관심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요즘 우리 채널 메인스포츠 뉴스는 여성캐스터가 진행하는 데 어떻게 봤어요?”

“음. 매끄럽게 진행 잘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요? 나현석씨는 더 잘할 수 있겠어요?”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그럼 한 번 야구 생중계 5분만 해볼래요?”

“네?”

“아니 편하게. 지금 눈 앞에서 롯데와 두산이 경기한다 치고. 자유롭게 한 번 해봐요.”

 

**

“뭐? 야아. 그런 건 내가 전문인데, 씨. 날 부르지 그랬어, 임마.”

지글거리는 불 판 사이로 돼지껍데기를 우적거리며 성한이 말했다.

“어이쿠야. 그럴 새가 어딨어. 머리 속이 다 하얗더라.”

“그래서 어쨌어? 지어서라도 해야 할 꺼 아냐.”

“했지. 하긴. 근데 무슨 말을 한 건지 아직도 기억이 안 나.”

“그러길래 평소에 애들이랑 야구장 가자고 할 때 같이 좀 가지.”

“그러게.”

솔직히 야구야 어떻게 되든 관심 없었다. 공중파 아나운서 되려고 벅적거리는 야구장을 전전한다는 것도 우스웠다. 되고 싶은 게 있다면, 간절히 바라는 게 있다면 저승사자 밑이라도
기꺼이 닦겠다고 호언장담하는 성한의 말이 공허하게 들릴 뿐이었다. 저승사자 좋아하네. 동물원에 호랑이도 덮치면 무서워서 덜덜 거릴 자식이. 넌 군대나 갔다 와라. 서른 되어서까지


요리조리 뺀질 거리지 말고. 저 새끼도 그러고 보니 스탠바이구만. 군대 가기 일보직전. 털어서 먼지 안 나올 인간이 어디 있을까 만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관여하는 행위 자체가 경멸스러울 때가 있다. 물론 그 또한 스스로 속이 배배 꼬여 남이 옳은 얘길 하면 못
참아 하는 성격이라고 핀잔 받기 일쑤지만. 그렇다고 남이 던지는 얘기, 실제론 그다지 관심도 애정도 없으면서 무심코 흘리는 얘기에 인생이 엎치락 뒤치락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 않는가. 나조차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때가 이리도 많건만, 너인들 알리요. 각자 인생
나름대로의 하자는 알아서 처리하자는 식. 그게 현석이 생각하는 삶의 본질이었다.

 

**

지어서 하는 얘기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평소 즐겨보지도 않던 야구중계를 하자니 그깟
5분이 더 이상 ‘그깟’이 아닌 게 되어버렸다. 현석이 자신의 정면에 보이는 디지털 시계를
흘끔거리며 ‘이사만루’의 상황에 대해 어줍잖은 이야기를 내뱉고 있는 동안 면접관의 표정은
점점 굳어가기 시작했다.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해지던 순간 면접관 한 명이 ‘그만,
수고하셨어요!’라고 했다. 매번 느끼는 부분이었지만 면접장에서의 ‘수고하셨습니다’만큼 차갑게 들리는 ‘수고’도 없지 싶었다. 왠지 뭔가 잘못해서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 것만 같아서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현석씨는 나이가 조금 있네요.”

“네. 이것저것 경험을 많이 쌓느라…”

“우리 회사에는 총 몇 번째 시험 보는 거에요? 작년에도 본 걸로 기록되어 있는데…”

방송사의 기록 시스템은 의외로 치밀했다. 언론고시 스터디를 같이 하던 멤버의 얘기에 따르면 지난 번에 PD로 지원했다 올해 방송기자로 지원하는 바람에 그 이유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했다. 솔직히 언론사에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지원분야는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일단 그 ‘판’에 들어가는 게 문제였다. 들어가기만 하면 신문기자든 방송기자든
언론이라는 명실상부한 권력을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이다. 손에 마이크를 잡건 타다닥 거리며 노트북을 쳐대건 방법은 별반 의미가 없다. 내가 말하고 내가 쓰는 것이 대중의 눈과 귀로 들어간다는 사실이 짜릿하게 느껴질 뿐인 것이다.

“마포 공동체 라디오라….거기는 뭐하는 데에요?”

“네. 말 그대로 소출력 라디오로써 마포 주민을 위한 방송을 하고 있는 곳입니다.”

잠자코 있던 오른쪽의 여자 면접관이 물었다.

“청취자는 몇 명이나 되요?”

현석은 순간 멈칫거렸다.

 

**

“야, 뭐라고 했어? 한 십만 명은 된다고 하지.”

성한은 태연한 듯 말했다.

“무슨 소리야. 마포 인구가 사십 만 명인데. 그럼 그 중 사분의 일이 우리 방송을 들었다고


해? 걔네들이 바보냐, 그걸 모르게?”

“그래도 임마. 일단 좀 뻥도 섞어 가면서 얘길 해야 심사하는 사람들도 귀가 쫑긋 설 거 아냐. 너도 네 입으로 그랬잖아. 언론사 들어가고 싶어 안달 난 애들이 매해 수 만 명씩 쏟아지는 판에 경쟁력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고. 안 그래?”

성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판 자체가 작은 상황에서 지원자는 매해 늘어나니 경쟁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방송 한 번에 서른 명이 될까 말까 한 청취자를 십만 명으로 둔갑시키고 싶진 않았다. 아니, 그보다는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공중파에 들어가고 싶은
건지 잘 몰랐다. 그렇게 생각하면 벌이는 시원 찮았지만 마포 라디오에 있을 때가 훨씬 속이 편했다. 처음엔 몇 명 안 되는 청취율에 신경이 쓰이긴 했었지만, 시간이 지나니 수가 중요한 게 아니란 결론에 다다랐다. 애청자들이 올려주는 게시판 후기와 신청곡, 사연 등을 꼼꼼히 읽다 보면 공중파 라디오 부럽지 않은 보람도 느꼈다. 발렌타인데이나 크리스마스 때
자그마한 선물을 보내오는 청취자도 있었다. 소소한 낙이 모여 도란도란한 한 때였다. 라디오 방송이다 보니 외형적인 것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아도 되어 편한 부분도 있었다. 다른
아나운서 지망생들이 성형이다 뭐다 할 때 현석은 캐주얼한 복장으로 목 관리에나 치중하는
정도였다. 라디오 방송이라는 게 스트레스가 극심하진 않았지만 매일 조금씩 하는 모양새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축적되는 피로가 있긴 했다. 그런 부분만 빼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직장이었는데… 역시나 그 놈의 돈이 문제였다.

 

**

현석은 끝내 야구중계가 마음에 걸렸다.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줄곧 굳어있는 것도 그것 때문인 것만 같았다. 정적이 흐르는 가운데 현석의 입사지원서를 넘기는 소리만이 파스락 거렸다. 날렵한 티타늄 안경테를 쓰고 있던 한 남자 면접관이 물었다.

“혹시 성형한 곳이 있나요?”

“아니요.”

재빠른 현석의 대답에 면접관은 잠시 희미한 미소를 짓더니 이어 물었다.

“그럼 성형을 하실 의향은 있는 건가요?”

“….글쎄요. 해야 할 곳이 있다면야….”

말끝을 흐리는 현석에게 그 면접관은 더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시나 요즘은 아나운서도 연예인 못지 않은 미모를 가져야 한다는 게 정설인가 보다. 몸에 칼 대는 것도 께름칠 하고 고칠 돈도 없지만, 외모 때문에 미역국을 먹는 거라면 투자라도 해야지 하는 오기가 생겼다. 그러고 보니 초등하교 동창 놈 와이프가 잘 나가는 성형외과 의사라는 얘길
들은 적이 있던 것 같다. 강남역 근처라고 했던가. 수소문해서 거기라도 찾아가봐야겠다. 그나저나 엄마한테는 뭐라고 하지. 오늘 면접이라고 얘기도 못 했는데. 만년 백수 노릇 하는
게 탐탁지 만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이왕에 아들한테 크게 인심 한 번 썼으면 좋겠는데. 그게 잘 될지 모를 심산이다.

“나현석씨는 왜 아나운서가 되려고 하죠?”


“네. 저는 국민의 귀와 입이 되고자 합니다. 바른 언어를 사용하고 또한 신속한 정보를…”

“아아, 잠깐만!”

현석이 답을 이어나가는 데 면접관 중 하나가 말을 툭 끊었다.

“그렇게 판에 박힌 대답 말구요. 진짜 속마음을 한 번 얘기 해봐요. 왜 방송국에 들어오고
싶은 거죠?”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심사가 아무리 지겨워도 그렇지, 세태가 아무리 솔직하고 파격적인
걸 좋아한다고 해도 그렇지 이건 너무 하는 심사가 아닌가 싶었다. 게다가 왜 하필 내가 걸린 걸까. 다짜고짜 ‘진짜 속마음’을 한 번 얘기해 보라니. 무슨 얘기를 듣고 싶다는 건지 현석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임기응변에 강한 성한이라면 이때 어떻게 답했을까. 아니 올해 합격자가 될 사람들은 이 상황에서 어떤 말을 했을까.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왜 하필
나람.

“나현석씨?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말고 편하게 한 번 말해봐요. 우리도 그냥 궁금해서 하는
말이니깐.”

면접관은 생글생글 웃고 있었지만 현석은 죽을 맛이었다. 그 어떤 면접 족보에도 이런 유형은 본 기억이 없었다. 솔직한 대답? 그런 게 왜 궁금하지? 솔직한 대답? 그런 건 나도 없는데. 심사위원의 눈빛과 정면에 보이는 시계가 현석의 대답을 재촉하는 것만 같았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현석은 아차 싶었지만, 이왕 뱉은 말을 주어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잘 모르겠다구요?”

심사위원들은 일제히 황당하다는 듯이 현석을 바라보았다.

“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어이쿠야. 어떻게 하다 보니 여기 와 있네요. 허허.”

면접관석이 잠시 술렁였지만 이내 익숙한 말투로 ‘수고하셨습니다’를 외치고 현석을 내보냈다. 면접장 스튜디오 문 위에 켜있던 ‘ON AIR’ 불도 풀썩 꺼졌다.

 

**

드르르르륵.

한참 단잠을 자고 있던 현석의 귀에 진동이 울려 퍼졌다.

드르르르륵.

희미하게 보이는 휴대폰 액정 사이로 조그마한 글씨들이 오밀조밀 모여있었다.

‘축하 드립니다. 귀하는 카메라 테스트에 합격하셨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현석은 순간 정신이 버쩍 들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잘못 본건가? 이럴 리가 없는데. 성한이 자식이 장난치는 거 아냐? 진짜인가? 현석은 몇 번이고 문자를 확인했다. 급기야 컴퓨터를 켜고 메일을 확인하고 난 후에야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잠시 멍하게 앉아있던 그는
방 문을 뻥 하고 찬 뒤 크게 소리쳤다.

“엄마! 엄마아아아! 아드님, 시장하시다. 얼른 밥 차려줘!”


 

**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는 세대에 자비란 없는 법이다. ‘우리 땐 그러지 않았었는데’하며 젊은 세태를 한탄하는 모양새야 어제오늘 이야기가 아니지만, 매번 규격에 맞는 대답을 요구하는 것도 상 고문에 속하지 싶다. 무기력함에 대고 호통을 치면 돌아오는 건 메아리 없는 한숨뿐이다. 나도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좀 알고 싶어요-하는 게 호환마마와 같은
병은 아니지 않은가. 그저 자연스러운 시대의 모습이랄까. 뭐라고 불러도 좋으니 그냥 내버려두어도 어떻게든 되지 않겠는가. 현석은 자신이 영원히 ‘스탠바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큐 싸인’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어쩌면 그런 건 처음부터 없는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했다. 그리고 그게 또 뭐 어떠냐고, 원래 인생도 물 흐르듯, 미래도 물 흐르듯 이뤄지는 게
아닌가. 그리고 자신에게 한없이 얼굴을 붉히는 세상에 대고 ‘스탠바이’이라고 외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자, 스탠바아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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