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학년이다, 삼학년. 진부하게도 시간이 참 빠르다. 내가 다니던 고등학교에선 삼학년을 고인(故人)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참 짧은 시간이었다. 입학식, 첫 룸메이트, 첫 동아리. 첫해의 첫 방을 여전히 눈 감고도 찾아갈 수 있다. 그러니 이 년 사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면 다행일 것이다.
  카이스트에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웠다. 오토캐드, 솔리드웍스, 아두이노, 안시스, 매트랩을 다룰 수 있게 되었고, 쇠도 깎아봤다. 3D프린터도 대학에 와서야 처음 써봤다. 기계 장치에 수명이 있다는 것도, 기계를 제어하려면 피드백 컨트롤을 해야 한단 것도 이곳에서 처음 알았다. 물리학의 세계에서 기계공학의 세계로. 추상의 세계로부터 실재의 세계를 향해 왔다. 지평선 너머에 아직도 길과 마을들이 남아 있다.
  일 학년 시절 일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전문연구요원 폐지 논란과 일련의 소동들이다. 열여섯일 적부터 막연히 카이스트 대학원에 진학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던 내게 솔직히 2년의 군 생활은 남들 얘기였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사실은 당연하지 않다는 것. 그 날 후 몇 주는 행인들의 그림자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심란하고, 또 우울했다. 내가 가졌다고 생각한 것들을 너무도 쉽게 비틀 수 있는 큰 힘이 있다는 것. 여름엔 그렇게 질기고 풍성하던 잎들도 겨울이면 땅바닥에서 바스러지고, 따라서 나뭇잎조차 나무의 소유가 아닌 것처럼. 완전한 ‘내 것’은 없다는 것을 배웠다.
  그럼에도 나는 독립적인 삶을 살고 싶다. 내 의지를 관철할 수 있는 삶. 얻을 수 있는 것들만 원하지만, 원하는 것들은 모두 얻어낼 수 있는 삶. 그래서 이 학년이 되어선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이 될 수 있는지 많이 생각해봤다. 취업 생각도 해봤고, 주식도 시작해봤다. 무기에 대해서도 공부해봤다. 연애를 하며 성격이 많이 바뀌었단 것도 느낀다. 연어 같은 삶을 지향하는 바이고, 그래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문장은 이것이다. “Life is inevitably consisted of fate, coincidence, and desire.” 하기오 모토의 만화 <A,A’>에 나오는 대사다.
  그렇지만 항상 걱정스러웠다. ‘내가 이걸 해서 잘 먹고 살 수 있을까?’ 관심 가지는 연구 분야도 매번 바뀌어, 최적설계, 제어, 열전달 등 이 년 내내 갈팡질팡했다. 주요 고려 사항은 산업계의 수요가 있는지, 그리고 카이스트에 유명한 교수님이 계시는지. 그러니 일관성 없이 우왕좌왕할 수밖에. 지금은 내가 진심으로 관심있는 것, 하면서 즐거운 것을 기준으로 전공을 정하려는 생각이다. 지도교수님이 용기를 많이 주셨다. 뭘 해도 잘 살 수 있을 거라고. 사실 아직 확신은 없다. 그저 가진 바 재능과 끈기를 믿고 곧게 나가는 수 밖에. 연어처럼.
  이런 글을 적으려던 것이 아니었는데, 이런 글이 되어버렸다. 너무 공개적인 지면에 너무 내밀한 글을 썼다. 부끄럽지 않은 것은 저 고민들과 감정들이 이미 내 안에서 종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감정에 대한 관음증은 아마 카이스트서 문학 동아리를 다니며 생긴 습관일 것이다. 이것도 이 년간 배운 것이라면 배운 것일까? 혹시 마음에 아니 드신 분들께는 죄송할 따름입니다. 그래도 이번 학기 다 같이 파이팅 해서 잘 헤쳐 나가봅시다. 근데 이번 학기엔 창시구를 듣는다. 아, 벌써 휴학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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