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한 사회 속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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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한 사회 속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
  • 류제승 기자
  • 승인 2018.02.28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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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차 세계대전이 낳은 최악의 비극, 홀로코스트. 이런 거대한 악행은 역사 속에서 수차례 반복되며 상처를 남겼다. 당연하게도, 대규모 악행은 한 사람의 악한 의도와 광기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모두 얽혀있는 사건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어떤 책임을 물어야 할까? 잔혹한 학살에 동조한 모든 사람들이 정말 악한 사람이었을까? 물음에 답하기 위해, 1961년 예루살렘의 재판장에서 한나 아렌트는 평범한 악을 마주한다.

재판장에서 탄생한 새로운 악의 가능성
  한나 아렌트는 스스로를 독일의 정치이론가로 일컬으며 권력과 전체주의 등을 주제로 연구를 진행한 학자이다. 그녀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의 개념이 처음으로 제시되었으며 역사학, 정치철학과 같은 많은 분야에서 파격적으로 받아들여져 격한 논쟁을 낳았다. 인간의 악행에 악의가 항상 선행하지 않는다는 이론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따라서 아렌트의 생각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따지기 이전에,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배경에 대해 먼저 알아보도록 하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1961년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나치 간부 아돌프 아이히만의 공개재판에 대한 보고서로부터 탄생했다. 피고인 아이히만은 홀로코스트의 실무책임자로, 약 6백만 명에 달하는 유대인 학살을 지시하고 실행한 혐의를 받았다.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드러난 이 끔찍한 악행은 전 세계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재판장에 선 아이히만은 너무나도 뻔뻔한 태도로 터무니없는 진술만을 반복한다. 그는 ‘상부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한 것’이라며 자신의 책임을 부인했고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는 태도를 유지한다.
  홀로코스트의 실재적 책임에 대해 관심을 가졌던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직접 참관한다. 그리고 아이히만의 뻔뻔한 주장에 세상이 분개하고 있을 때, 그의 삶에 조금 더 주목하면서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아이히만은 가정과 직장에 충실하고 항상 근면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터무니없게 들리는 아이히만의 주장에 홀로코스트를 겨우 피해간 유대인인 아렌트가 일부 동의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아이히만의 처벌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아렌트는 처벌을 위해서는 기존의 사법적, 도덕적 관점과 다른 개념의 필요를 지적하며 악의 평범성을 주장한다.
  악의 평범성은 악의 없는 개인이 일상적으로 행하는 일도 악행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모든 악행은 악한 개인, 악한 동기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것은 아니며 강압 또는 무의식적인 복종으로 인해 발생하기도 한다. 이는 집단에 의해 저질러지는 대규모 악행에 대한 설명이며 전체주의 정부의 권력 집행과 깊은 연관이 있다. 동시에, 사회에 의해 악행을 실행하게 된 개인의 책임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행동은 강한 명령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각자의 본성과 자유의지는 권력에 의해 무시될 수 있다. 전체주의 사회에서는 사회의 목표나 지시가 개인의 양심, 도덕적 가치관보다 우선시된다. 이런 사회는 자유의지를 가진 개인의 집단을 넘어 구성원에게 어떠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하나의 실체로 해석된다. 사회가 개인에게 압박을 가하는 과정에서 개인은 사유 능력을 잃고 사회에 종속된다는 것이 아렌트의 논지이다.

일상 속에서 평범한 악을 찾다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의 제시는 당시 학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근대 철학의 한 축을 차지하는 칸트는 합리론의 범주 내에서 악을 설명하기 위해 악행에는 악한 의지가 선행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아렌트는 거대한 악과 개인의 의도를 완전히 분리해버렸다. 악행이 항상 악한 사람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간단해 보이지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 이 문장은 생각보다 많은 사례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한나 아렌트가 독재 정권의 사례를 들어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세웠듯, 전체주의, 독재 정권하의 사회는 악의 평범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회이다. 강하게 세워진 수직 권력 구조에 속한 개인은 지도자의 명령에 따라야만 한다. 이는 그 사회의 규범으로 개인의 행동을 제한하고 사고의 주체성을 빼앗는다. 역사에 기록된 수차례의 대량 학살사건, 부패한 정부가 저지른 대규모 사기극 그리고 정부가 유도한 특정 민족, 인종에 대한 극심한 혐오 등이 대표적인 예시이다. 과연 우리는 이런 범죄를 저지른 사회에 속한 구성원 모두를 악한 사람으로 치부하는 것이 가능할까?
  악의 평범성은 사법적 책임보다 도덕적 책임을 물을 때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대부분 사회에서 사법적 판단은 실재적인 죄의 유무를 따지기 때문에 악행의 동기보다는 결과적인 측면에서 먼저 접근한다. 반면 도덕적 판단은 죄에 선행하는 악한 동기를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역사 속 대규모 악행에서, 중간 책임자와 묵인한 대중에게 악한 의도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은 어렵다. 만일 그들이 정말로 사회 규범에 의해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면, 그들의 선하지 않은 행위에 대해서는 실제로 악한 개인과는 다른 판단 기준이 필요하다.
  일상적인 집단에서 적용되는 악의 평범성의 사례는 어쩌면 우리가 모두 악한 사람이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들게 한다. 단적으로, 군대에서 벌어지는 부대 내 폭력과 부조리에서도 악의 평범성을 찾을 수 있다. 강압적인 집단의 규율 속에서 개인은 사유 능력을 잃고 후임자에 대한 압박을 가한다. 누군가의 우스갯소리처럼, 군복만 벗으면 일반인과 다를 것 없는 사람들이 규율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 잔인한 선임이 되곤 한다. 부대 내 질서를 유지하는 데에는 다른 합리적인 방법이 충분히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율적인 명령이행과 관습이라는 이유로 폭력을 행사하는 악의 없는 군인들은 강압적 규율 속 악의 평범성을 잘 보여준다.

  더 가깝고 일반적인 사례로는 학교, 직장에서의 수직적 부조리가 있다. 이러한 집단은 전체주의 사회와 달리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명령에 가까운 강한 압박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개인이 사회에 속하기 위해 지켜야 하는 암묵적 규율과 관행, 일종의 분위기가 구성원을 억압하는 요소가 된다.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것이라는 두려움이나 집단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얻고자 하는 욕심, 부조리를 당연하게 여기는 다른 구성원들의 태도 등이 개인이 윤리적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한다. 악의 평범성이 한나 아렌트가 주장한 것보다 더 넓은 의미로 적용될 수 있다.

아이히만이 유죄인 이유를 논하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출간한 후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아이히만을 감싼다는 이유로 유대인 사회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비난의 기저에는 악의 평범성이 전체주의에 순응한 이들에게 하나의 면죄부가 될 것이라는 의견이 있었다. 하지만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악의 평범성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통해서, 기존과는 전혀 다르게 그의 죄를 판단하고자 하였다. 한나 아렌트는 수동적 존재가 된 인간의 사유 불능을 죄의 근거로 제시한다.
  인간은 서로 다른 가치관과 특성, 그리고 강한 자유의지를 가진다. 인간의 복수성(Human plurality)은 정치적 삶의 기반이 된다. 복수의 사람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서로 충돌하는 것은 정치의 시작이자 성숙한 사회를 만드는 시작점이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인해 사회가 구성원들을 강한 규율로 제한한다면 자유의지에 근거한 판단 능력은 쉽게 흐려진다. 아렌트는 악의가 없는 인간이 악행을 저지르는 이유이자 그 책임의 근거를 여기서 발견한다. 생각의 무능, 언어의 무능, 행동의 무능으로 구성되는 사유 불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생각의 무능은 악행을 저지르는 사회 구성원이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인지하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일상이 곧 악행이 되기 때문에, 깊은 성찰 없이는 이를 인지할 수 없다. 생각의 무능은 곧 언어의 무능과 행동의 무능으로 이어진다.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악이라고 말하지 않고, 저항할 이유가 없다. 결국, 사유 불능성은 생각하지 않는 개인에게 타락한 사회에 대한 어떤 책임을 부여한다.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절대악’이라고 칭했다.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악이라는 의미이다. 그렇기에 전체주의는 한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질 수 없으며, 수많은 사람의 동조를 요구한다. 마침내 전체주의가, 절대악이 거대한 악행을 저질렀을 때, 그 책임은 과연 누가 지는 것이 옳을까? 아렌트는 전체주의 지도자와 수뇌부 외에도, 이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고 반성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그 책임을 묻는다. 명령만을 충실히 이행했다는 것은 변명이 되지 못한다. 사회에 속한 모든 개인은 끊임없는 사유하고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현대 정치철학에서 보는 악의 평범성
  악의 평범성이 발생하는 이유나 그 범위에 대해서는 당시 한나 아렌트의 주장에서 조금 수정된 이론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명령과 강압 때문에 개인의 판단이 마비된다고 생각했고, 악의 평범성에서 책임은 온전히 그곳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작고 규율이 비교적 약한 집단에서도 악의 평범성이 나타난다. 또한, 집단 속에서 개인의 도덕적 판단 기준이 변화하기도 한다. 더 넓고 일반적인 사례에 악의 평범성이 적용되면서, 한나 아렌트의 이론은 그녀의 생각과는 약간 다르게 변화한다.
  확장된 악의 평범성이 드러나는 일상의 사례로, 왕따 사건을 들 수 있다. 직접 피해자를 괴롭힌 사람 외에도, 방관자들 또한 왕따 사건의 간접적 가해자가 된다. 이 간접적 가해자 중 대부분은 자신들의 부작위가 피해자에게 어떤 결과를 부를지 알고,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도 알지도 모른다. 즉, 그들은 죄를 인식하는 데 있어 무능하지 않다. 그렇다고 그 사람들이 모두 악한 의도로 행동했다고는 볼 수 없다. 단지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들에게 생각의 무능은 악행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 행동을 결심하지 못하는 무능을 의미한다.
  현대 정치철학자들은 악의 평범성이 직접적 가해자에게 적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아렌트와 다른 견해를 보인다. 한나 아렌트는 규율과 명령이 악의가 없는 개인의 판단 능력을 빼앗는다고 생각했다. 반면 현대 학자들은 집단이 구성원들의 가치관 자체를 변하게 할 수 있다고 본다. 악의가 없었던 개인이 집단적 자기 형성을 거치며 악한 성질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학교폭력 피해자들에게 직접 폭력을 가하는 가해자들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렇게 사회에 의해 변질된 가치관을 가지게 된 개인은 더는 악의 없는 선량한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을 정의하지 않았고, 인간의 가치관이 흔들리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아렌트는 고려하지 못한 부분이다.
  한나 아렌트가 만든 이론이 많은 부분 수정되어 받아들여짐에도 불구하고, 현대 철학에서 악의 평범성은 큰 의미를 가진다. 개인의 가치관보다 명령과 역할이 우선시되는 상황은 사회가 단순한 인간 집단을 넘어 실재적 힘을 가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철학적으로는 악한 의도와 악행을 분리하는 것으로 선악 개념을 발전시켰다. 또한, 역사적 악행에 가담한 개인의 도덕적, 사법적 판단 기준을 마련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사유 능력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강한 믿음을 보여주었다.

한나 아렌트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
  1961년 12월 15일, 9달 하고도 3일이라는 긴 재판이 끝나며 아돌프 아이히만은 사형을 선고받는다. 그는 교수형을 당하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죄를 인정하거나 뉘우치지 않았다. 누구보다 충실하고 성실한 관료, 그러나 반유대주의와 권력욕으로 점철된 최후는 어쩌면 한나 아렌트가 틀렸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하게 한다. 과연 아렌트는 그의 최후를 글로 남겨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한 것일까?
  사회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만들어진다. 동시에 사람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묶인다. 한나 아렌트는 사회가 규범과 분위기를 통해서 사람들의 행동을 억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전체주의 사회에 의해 억압받는 사람들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아내고자 했다. 그리고 악한 사회에 속한 구성원들이 저마다의 가치관을 가지고 계속해서 성찰하고 목소리를 내는 것으로 그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민중의 힘으로 절대악을 몰아낼 수 있기를 바랐다.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이라는 개념을 통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한 것은 단순히 선악 개념의 확장은 아닐 것이다. 그녀는 생각의 무능, 언어의 무능, 그리고 행동의 무능이라는 세 가지 요소를 제시하며 전체주의 사회를 겪지 못한 우리에게 경고한다. 악한 사회는 생각하지 못하는 개인에 의해서 완성된다. 그들은 사회의 발전을 방해하고, 그렇게 완성된 악한 사회는 다시 개인을 타락시킨다. 절대악으로 이어지는 굴레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개인의 끊임없는 성찰과 집단의 성숙을 꾀하는 적극적인 행동밖에 없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한나 아렌트의 저서 중 유일하게 일반 대중을 향한 교양서적으로 쓰인 책이다. 어쩌면 아렌트는 평범한 악에 대한 물음을 학자들이 아닌 대중에게 던지고자 했을지도 모른다.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는 사회를 이루고 그에 속해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경고이다. 아렌트는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지 못하고, 옳지 않은 것을 당당히 거부하지 못하는 것이 개인에게, 그리고 사회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려주었다. 더 성숙한 자신과 사회를 위한 끝없는 실천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다.

참고도서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한길사
<전체주의의 기원 1>, 한나 아렌트, 한길사
<전체주의의 기원 2>, 한나 아렌트, 한길사
<인간의 조건>, 한나 아렌트, 한길사
참고논문 |
김선욱. (2007). 근본악과 평범한 악 개념. 사회와 철학, (13), 31-50.
윤평중. (2006). '악의 평범성'과 역사청산. 철학과 현실, (71), 5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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