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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년에 걸친 공방, 미인도 논란을 살펴보다
[440호] 2017년 10월 31일 (화) 김선규 기자 seongyukim@kaist.ac.kr

 

   
미인도, 1977 ⓒ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대표 여성 화가인 천경자 화백은 그녀만의 특이한 화풍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구축해냈다. 그러나 1991년 시작된 미인도 위작 논란으로 인해, 천경자 화백은 절필한다. 미인도 위작 논란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미인도 전시로부터 시작된다. 천경자 화백은 전시된 미인도가 자신이 그린 그림이 아닌 위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화가협회는 미인도를 진품이라고 감정 및 결정지은 후, 천경자 화백이 자신의 그림을 못 알아보는 것이라 주장했다. 화가가 인정하지 않은 그림에 대한 진위 논쟁은 한국 미술계에서 큰 파란을 일으켰다. 이후 20여 년간 계속되어 온 이 논쟁은 최근 천경자 화백의 차녀가 책 <천경자 코드>를 출간하면서 재점화되었다. 이 긴 사건의 경위를 끈질기게 따라가며 우리는 한국 미술계가 품은 수많은 이면을 다시 보게 된다. 이 기사에서는 천경자 화백과 미인도 논란 사건의 경위를 살피고, 본 호 10면에서는 미술사를 전공한 우리학교 인문사회과학부 조현정 교수와의 인터뷰를 함께 담아내 사건의 이해를 돕고자 한다.

꽃과 여인의 화가, 천경자 화백
천경자 화백은 한국화의 수채화 분야에서 이름을 날린 여성 화가이다. 천경자 화백은 1954년부터 74년까지 20년간 홍익대학교 교수직을 역임하였고, 60~80년대 사이에 왕성한 창작 활동으로 명성을 떨쳤다. 주로 인물을 꽃, 뱀, 새 사이에 배치하는 식의 초상화와 누드화를 즐겨 그렸는데, 독특한 소재와 더불어 매력적인 채색 방식을 통해 화단과 대중 모두에게 사랑받은 화가로 꽃과 여인의 화가로 불리기도 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그녀는 그림을 배울 기회가 많았다. 광주공립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미술 교사에게 처음 그림을 배웠으며, 그 길로 일본 유학에 올라 동경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데생과 채색을 배웠다. 그녀는 근대 서양화 대신 동양화를 전공으로 택해 섬세히 소묘하는 법을 배웠다. 아직 회화의 사실적 표현이 완벽하지 않았으나, 자신도 모르게 그림의 윤곽이 잡히고 있었다.

독자적인 화풍에 환상을 담아내다
천경자 화백은 재능과 열정을 모두 겸비하고 있었기에 화가로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유학 생활 중, 작품 <조부>와 <노부>를 조선 미술전람회에 출품해 연달아 입상하였다. 이후 활동을 이어갔으며, 1952년에는 개인전에서 데뷔작이라 할 수 있는 <생태>를 발표해 화단에서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작품 <생태>는 여동생이 폐렴으로 떠나, 느꼈던 아픔을 잊기 위해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는데, 35마리의 뱀이 똬리를 틀며 어지럽게 엉켜있는 이 그림 속에서 우리는 역경을 딛고 일어서려는 작가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생태>를 시작으로 꽃핀 그녀의 화폭 아래에서 꿈과 정한이 선과 색으로 재탄생했다. 천경자 화백은 자신을 한 여인의 몸에 투영하고, 그 여인을 아름다운 색과 꽃에 둘러싸이게 만들어 아름다움을 한껏 돋보이게 했다. 하지만 동시에 여인의 가슴 속에 숨겨져 보이지 않는 애환, 희망, 슬픔을 보이게 만들어 우리를 그림 속에 빠져들게 만든다. 천경자 화백의 그림이 멕시코의 프리다 칼로 등의 작품과 비견되기도 하는데, 다른 화가들과 비교되기에 앞서 그녀의 작품들은 독특한 기법과 분위기를 품고 있으며, 감상하는 이들에게 하여금 기존에는 느끼지 못한 몽환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작품 활동과 동시에, 세계 곳곳을 두루 여행하였다. 대표적으로 타히티, 세네갈 등에서 그린 그림이 잘 알려져 있다. 그녀가 그린 그림을 보고 있으면, 이국적 인물화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고유의 은은한 미소와 행복한 눈을 찾게 된다.

주목받은, 그래서 더 상처 받기 쉽던
천경자 화백은 작품 외적으로도 세간의 주목을 이끄는 화가였다. 조현정 교수는 “천경자 씨는 한국 미술계 내에서 거의 처음으로 명성을 얻은 화가이며, 동시에 미술 외적인 부분이 많이 강조된 화가”라고 말했다. 조현정 교수는 천경자 씨가 여성이라는 점, 수필, 기행문 등 다양한 글을 남겼다는 점에서 대중의 흥미를 끌었으며, 동양 채색화를 시도한 천경자 화백이 한국 정통 미술사의 흐름인 앵포르멜-모노화-민중미술-신세대 미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한 “천경자 화백이 어떤 화가 그룹에 속해있지 않았기 때문에, 화가에 대한 진지한 분석이 이뤄지기 어려웠고 이 때문에 저평가된 면이 있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천경자 화백은 말년에 모든 작품을 기증한 뒤 자취를 감추고 잠적하는 등 복잡한 말로 속에서 탄생한 무성한 소문이 그녀에 대한 관심을 더 높였을 것이다.
이처럼 작품 외적인 면이 주목받기도 했지만, 단지 작품 외적으로만 화려했던 화가는 아니다. 천경자 화백이 작품에 대한 애정과 끈질긴 도전 정신으로 자신만의 경지를 일궜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천 경자 화백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너무 아껴 평생 자신의 작품을 소장하기를 바랐다. 남에게 그림을 파는 것을 굉장히 꺼렸으며, 어쩌다 그림을 팔게 되면 온종일 우울해했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고 그림 속에 체현해 온 세계를 사랑하는 화가였다. 그녀는 평생을 그림과 함께 호흡했고 그림을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가 노년을 맞았을 때, 그녀는 작품과 예술성으로 평가받기보다는 소문과 논란의 대상일 뿐이었다. 바로 미인도 위작 논란이 그녀를 자신의 작품도 알아보지 못하는 노망난 화가로 내몰았고, 그녀가 실망감을 보이며 절필한 이후에도 논란은 끊이지 않았다.

오해, 끝없는 공방의 시발점이 되다
미인도 위작 논란은 한 화가를 절필하게 했고, 그 논란은 종결되지 않고 소송까지 진행되고 있다. 미인도 위작 논란의 시작은 1979년 10월 26일이다.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한 10•26 사건 이후, 김재규의 재산은 몰수된다. 환수 재산 목록에 문제의 <미인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정부의 소유가 된 미인도는 재무부, 문화공보부를 거쳐 1980년 4월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이관된다. 이관 이후 약 10년 동안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있던 미인도는 1990년 출간된 금성출판사의 <한국근대회화 선집>에서 처음으로 천경자 화백의 작품으로 소개된다. 이 당시에는 접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미인도가 화제가 되지도 않았고, 천경자 화백도 이 작품을 아직 보지 못한 상태였다.
1991년 3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움직이는 미술관’ 순회전의 전시 목록에 미인도가 포함되면서 이 논란의 작품이 세상에 소개되었고 본격적인 논쟁이 시작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미인도를 천경자 화백의 대표작으로 소개하며 포스터로 제작 및 판매하였다. 박현령 시인은 이 포스터 속의 미인도를 접하고, 기존의 천경자 화백의 화풍과는 다른 그림이 천경자 화백의 작품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박 시인은 천경자 화백에게 미인도의 존재를 알렸고,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천경자 화백은 국립현대미술관에 확인을 요구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졸지에 위작을 소장하고 있는 셈이 되었고, 정황을 엄밀히 확인해야 했다.
1991년 4월 1, 2일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직원을 보내 천경자 화백을 방문하여 천경자 화백이 오해를 한 것인지 미인도를 가져가 보여주며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천경자 화백은 미인도와 포스터를 두고 “미인도는 명백히 가짜”라며 현대미술관 직원들이 그림을 가져가기를 거부했다. 천경자 화백의 단호한 태도에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4월 2일에 학예관 이인범을 파견해 천경자 화백을 방문하였으나 직접 만나지는 못하고 자필 편지를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때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 측에서 포스터 제작 및 전시에서 작가에 대한 사전 협의가 없었음을 사과하는 등 배려를 보여 작가와 미술관 사이의 작은 해프닝으로 끝날 것으로 보였다.

현대미술관과 천 화백의 엇갈린 주장
국립현대미술관 측과 천경자 화백 측의 주장이 조금씩 엇갈리기 시작하며, 사건은 걷잡을 수 없이 크게 불어난다. 1991년 4월 4일 국립현대미술관의 유준상 외 3명의 직원이 동산방 표구사의 액자를 갖고 천경자 화백을 찾아갔다. 그들은 원래 미인도의 액자였던 동산방 표구사의 액자를 들고 천경자 화백을 만났다. 미인도를 액자에 끼워 보여주며 기억이 나지 않냐며 천경자 화백을 설득하려 했다. 이 대화에 대해, 천경자 화백의 차녀인 김정희 씨는 저서 <천경자 코드>에서 천경자 화백이 "조금은 매끄러워 보인다"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천경자 화백이 미인도가 진품이라고 시인했다”고 주장했고, 천경자 화백은 자신이 “미인도가 진짜라고 말한 적이 없다”라며 양측의 말이 엇갈리고 갈등이 시작되었다. 같은 날,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화랑협회 소속 감정위원회에 미인도 진품 감정을 의뢰하였다. 한국화랑협회는 건전한 미술시장 형성을 목표로 1976년 12개 화랑 경영자들이 만든 단체로 당시 문화공보부 산하의 사회단체로 등록되어 있었다. 급하게 구성된 감정위원은 가람화랑, 조선화랑 등 한국화랑협회를 구성하고 있는 화랑의 대표, 화가, 미술평론가를 비롯한 9명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한국화랑협회는 신문에 미인도가 진품이기를 바라는 글을 기고하는 등 중립적인 위치에 서 있는 기관은 아니었다.

천경자 화백, 끝내 절필 선언하다
천경자 화백은 이처럼 자신이 위작이라고 밝힌 작품을 두고 진위 감정을 하는 세태에 환멸을 느꼈으며, 결국 1991년 4월 7일, “붓을 들기 두렵습니다.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풍토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습니다”라고 선언하며 절필하였다.
화가의 절필 선언은 충격적이었지만, 미술계에 생긴 파장은 크지 않았다. 4월 11일 감정위원회는 천경자 화백의 절필 선언과 무관하게 미인도 감정 결과를 발표한다. 3차에 걸친 심의 끝에 ‘미인도는 진품이다’라는 결론을 발표한다. 감정위원회는 진위를 발표하는 동시에, 감정 결론에 한계가 있으며, 위작 경위가 드러난다면 수용할 것을 밝혔다. 한국화랑협회의 발표에 힘을 얻은 국립현대미술관 이경성 관장은 바로 다음 날 미인도를 진품으로 발표하였다. 당시 ‘천경자 화백이 나이가 들어 자신이 그린 그림도 못 알아본다’라는 불명예스러운 소문이 돌기도 했다. 온갖 수모를 겪으며 지친 천경자 화백이 정신적 고초를 달래고자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면서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천경자 화백은 비록 절필 선언을 하였지만, 그림을 그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그녀를 더 괴롭게 만들었다. 그랬기에 천경자 화백은 다시 붓을 잡고 호암미술관 등에서 ‘천경자 회고전’ 등을 개최하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으며, 1940년대에서 90년대 사이에 그려진 자신의 대표작 93점과 저작재산권을 서울시에 기증하였다.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라는 그녀의 뜻대로 우리는 천경자 화백의 그림을 서울시립미술관 상설전시실에서 볼 수 있다.

권춘식의 발언으로 재차 시비 불거져
1999년 위조범 권춘식이 고서화 위작 및 사기판매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위작 시비가 다시 불거졌다. 주로 동양화를 위조해 그리던 권춘식이 검찰 수사 과정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친구의 요청에 따라 돈을 받고 달력 그림 몇 개를 섞어서 미인도를 그려주었다”라고 발언한 사실이 알려지며 위작 시비가 재연되었다. 그러나 국립현대미술관 정준모 학예연구실장은 “미인도는 진짜이며 현대미술관이 현재 소장하고 있다. 동양화 위조범과 현대미술관 중 어느 쪽을 믿느냐”라며 진위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은 회피했다. 또한, 정준모 실장의 발언 이후,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권춘식 씨가 그림을 그렸다는 1984년보다 미인도의 현대미술관 인수 시기인 1980년이 앞선다는 등 몇 가지 근거를 제시하며 권춘식 씨의 주장을 반박한다.
이후 후속 조치로 국립현대미술관 측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 미인도 감정을 요구했다. 감정 이후, 국립현대미술관은 두 기관의 정밀조사에 따라 미인도가 진품인 것을 재확인했다고 발표했다. 이 당시에는 천경자 화백 측의 거센 항의가 없었기 때문에, 한 위조범의 자백에도 불구하고 의혹만 남았을 뿐이다. 그러나 미인도 위작 시비는 수면 위로 완전히 떠 오르지 않았을 뿐 한국 미술계 최대의 논란거리가 될 조짐을 보였다.

천경자 화백 별세, 새 국면 맞은 논란
2015년 천경자 화백은 끝내 미인도가 위작이라는 논란을 해소하지 못하고 별세하게 된다. 2015년 10월 30일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천경자 화백의 추도식이 개최되면서 미인도에 관한 관심이 다시 일기 시작했다. 특히 천경자 화백의 차녀이자 몽고메리대 교수 김정희는 국립현대미술관이 허위 사실을 유포하고 감정 결과를 허구로 보고했다며 진상조사 및 사과 요구를 했다.
거의 동시에 국립과학수사연구소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이 미인도에 대한 정밀 감정 기록이 없다는 폭로를 하며 위작 사건에 대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주장은 힘을 잃게 된다. 이후, JTBC 뉴스, SBS 등에서 미인도 위작 사건에 얽힌 의문점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보도하며 대중에게 더 널리 알려진 사건이 되었다.
대중적인 관심에도 불구하고 국립현대미술관은 김정희 씨의 진상조사 및 사과 요구를 무시한다. 이에 천경자 화백의 차녀 김정희는 2016년 4월 27일 국립현대미술관 전•현직 관계자 6명을 허위사실 유포 등으로 고소 고발했다. 검찰은 미인도 논란 관련 조사에 착수했고, 국내 기관 대신 뤼미에르 테크놀로지 멀티스펙트랄 연구소(Lumiere Technology Multispectral Institute, 이하 뤼미에르 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했다. 뤼미에르 연구소는 멀티스펙트럼(Multi-spectrum) 사진 촬영 기법으로 그림을 분석하는 연구소로, 루브르 박물관 소장 작품인 모나리자의 분석을 맡기도 했다. 이들은 수학, 물리학, 광학 등을 사용한 총 9가지 측정 방식을 통해 그림의 진위를 가리며, ‘객관적 진실만을 탐구할 것’임을 검찰과 유족 측에 밝혔다. 2016년 11월 3일 뤼미에르 연구소 측은 몇 달간의 감정 끝에 미인도가 진품일 확률은 0.0002%라고 발표했다. 유족 측은 이에 긴 논쟁이 끝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서울 중앙지방검찰청은 뤼미에르 측의 검사를 불신임하는 동시에 안목 감정 등을 근거로 미인도를 재차 진품으로 판단하였다. 당시 몇몇 언론은 검찰의 결과를 전하며 25년 만에 미인도 논쟁이 끝나고 미인도가 진품으로 결정되었다고 전했다. 이러한 결정에 유족 측은 항고 의사를 밝혔으며, 뤼미에르 연구소도 크게 반발해 연구소 소장 장 페니코는 한국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법정 공방을 통해서도 끝나지 않고 논란 시비가 점점 심해지면서, 국민적 관심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시 한번 위작 미인도 사건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을 방송했고, 여론은 작가가 아니라는 것을 왜 맞다고 주장하는지 의아해하는 방향으로 조성되고 있다.

여전히 끝나지 않은 논란, 그 끝은...
김정희 고소인은 2017년 1월 24일 검찰의 피의자 불기소 조치에 불복해 항고를 신청하나, 서울고등검찰청은 4개월 뒤인 5월 24일 항고를 기각했다. 김정희 고소인과 변호인단은 서울고등법원에 재정신청을 제출했으며,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서울고등법원의 결정에 따라 앞으로의 논쟁 향방이 정해질 것이다.
만약 재정신청이 기각된다면, 법적으로 위작 논란의 시비는 진품이 맞는 것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하지만 법정이 미인도를 평가한 결과가 진실이라 일컬을 수는 없을 것이다. 유족과 국립현대미술관 사이의 갈등이 끝나지 않는 한 미인도 사건은 진실에 다가서지 못한 채 의문만을 남긴 사건이 될 것이다.

참고문헌 |

<천경자 코드>, 김정희
<꽃과 영혼의 화가 천경자>, 천경자

참고전시 |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2층

 

 

미인도 논란, 예술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고 고민하게 하다

미인도 위작 논란은 단지 어떤 작품이 위작인지 아닌지를 가리는 미술관과 화백 사이의 다툼을 넘어서, 감춰져 있던 한국 미술계의 정황이 일반인에게 노출되는 기회였다. 이 사건의 경위를 잠시 뒤로 하고, 미인도의 진위가 끊임없이 재조명되고 있는지 고민하는 것은 이 사건의 진면목을 보게 할 것이다. 본 기사는 독자의 이해를 돕고자 우리학교 인문사회과학부 조현정 교수(이하 조)와 기자(이하 김) 사이의 문답을 재구성하고 사건 경위 속에서 관련된 부분을 이끌어와 주석(이하 주)을 덧붙이는 식으로 작성되었다.

미인도 논란, 역설 속에서 탄생하다
김: 작가가 살아있는 경우에, 위작 감정을 하는 일이 흔한 일인가.
조: 흔하지 않은 일이다. 물론 현대 미술에서 작품의 가치를 정하는 주체가 예술가가 아니게 되었으며, 작품의 권리도 소유주에게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전히 작품에 대한 절대적 권리는 작품을 창작한 미술가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화가가 직접 위작임을 밝히는 경우는 논란이 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사건의 경우, 천경자 화백의 말을 인정하게 되면 국립현대미술관은 가치가 떨어진 위작을 소장하고 있게 되기에, 미인도를 진품으로 주장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주: 실제로 한국화랑협회는 생존 화가의 작품을 감정하는 경우, 화가의 의견을 가장 먼저 수용하는 것을 내부 원칙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미인도를 감정하는 경우에서는 천경자 화백이 위작임을 강하게 피력했으나 화백 의견이 거의 수용되지 않았고, 감정 결과 발표 당시 '천경자 선생은 이 작품이 절대적으로 위작임을 주장하고 있음'을 발표문에 포함하는 것에 그쳤다.
미인도 위작 논란과 함께, 이우환 작품 위작 논란이 일었다. 이 화백의 경우는 작품을 진짜로, 천경자 화백의 경우는 가짜로 주장한다는 차이가 있지만, 두 경우 모두 화가의 의견이 위작 판별에 있어서 거의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김: 유족이 미인도 위작 논란과 관련해서 계속 공방을 벌이는 이유가 무엇인가.
조: 화백과 미술관 사이의 진위 시비는 예술가와 예술계의 세력 다툼으로 볼 수 있다. 한편, 화가의 별세 이후 이해관계에 직접 속해있지 않은 유족이 위작임을 증명하려고 하는 세태는 설명하기 어렵다. 보통의 경우 유족에게 있어서 화백의 작품이 유명한 진품으로 남고 논란을 남기지 않는 것은 유족에게도 좋은 일이다.
김: 유족이 그림의 진위와 더불어 천경자 화백의 명예 손실을 회복하기 위해서 법정 공방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할 수는 있는가.
조: 그런 측면에서는 유족과 현대미술관 사이의 공방의 당위성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주: 천경자 화백의 차녀이자 고소인인 김정희는 2017년 5월 24일 고소인 진술서에서 “저는 어느 특정인이 ‘<미인도>가 진품이다’라고 자신의 미학적인 견해를 폈기 때문에 고소 고발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피고인이 허무맹랑한 허위사실 유포로, 거침없이 한 작가의 영혼과 인생을 짓밟은 범죄 행위들을 고발하는 것입니다”라며, 자신의 고소 이유가 천경자 화백의 명예 회복과 미술계의 거짓 유포에 대한 고발임을 분명히 하였다.

미술계와 화가 사이, 질 수 없는 논쟁
김: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화랑협회가 한국 미술계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 기관인가.
조: 둘은 한국 미술계를 대표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국립인 동시에, 많은 대중에게 작품을 노출하는 곳이기도 하다. 국립현대미술관에 작품이 걸리는 화가는 자신의 작품을 선보이고 유명해질 수 있기 때문에, 국내 순수 예술에 있어서 가장 권위 있는 곳이다. 이와 반대로, 한국화랑협회는 미술을 사고파는 것에 있어서 중심이 되는 단체이기 때문에, 상업 미술의 중심으로 볼 수 있다.
김: 국립현대미술관과 한국화랑협회가 위작임을 주장하는 것에 이유가 있나.
조: 국립현대미술관은 만약 위작임을 인정한다면, 가치가 없는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된다. 또한, 이제는 미인도에 대한 의견을 25년이 지나 번복하게 된다면, 현대미술관의 권위가 떨어질 것이다. 한국화랑협회의 경우, 그림을 판매하는 단체라는 점에서 미인도가 가짜임을 인정하는 것은 위작 시장의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위작이라는 주제 자체에 껄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김: 논란 당시 천경자 화백의 미술계에서의 위치가 어땠는가.
조: 천경자 화백이 대중적인 화가임은 틀림없지만, 세력이 큰 화가는 아니었다. 천경자 화백은 어떤 화가 그룹에 속하지 않았으며, 후학을 형성했다고 보기도 어려운 독자적인 활동을 한 화가이다.
만약 미술계에서 더 큰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면, 사건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또한, 천경자 화백의 작품 자체에 대한 진지한 분석이 부족했던 탓에, 위작 논란이 끊기지 않기도 했다.

예술, 전시관이 아닌 법정에 서다
김: 미인도 위작 사건처럼 그림이 소송에 가게 되는 경우가 많은가.
조: 미술 작품이 소송에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일례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전의 예술 작품 관련 소송에서는 작품의 가치나 저작권 문제 때문에 법정에서 판결받는 경우가 많으며, 진위에 대한 공방을 해결하는 경우로 법정에 가는 경우는 흔하지는 않다.
일본의 네오다다로 볼 수 있는 하이레드센터는 위조 지폐를 만들어 유통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서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이들에게 사건이 알려지기도 했고, 쇼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것도 하나의 예술 활동으로 해석될 수도 있고, 흥미로운 미술 사건으로 남았다.
주: 하이레드센터의 활동이 위법으로 보여 법정에 서게 되면서, 일반 시민들에게는 예술에 대해서 다시 고민해보고 그들의 활동을 알게되는 기회가 되었다. 이는 법정 공방이 예술 활동을 위한 일종의 수단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대중의 언어로 번역되기 시작한 미술
김: 위작 논란이 미술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다고 생각하는가.
조: 아직 위작 판정이 마무리되지는 않은 시점이지만, 한국 미술계에서 미술이 대중의 언어로 설명되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할 수 있다. 이전에는 미술계의 일은 미술 관계자들 사이에서만 통용되었다. 미술 외의 사람들이 미술에 대해 얘기하려 하면, 그림에 대해 무엇에 아느냐는 듯 반문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사건에서 미술계는 기자 회견이나 법정 등에서 미술의 언어가 아닌 대중의 언어로 풀이되어야 했고, 한국 미술계가 일반 언어를 통해 대중에 노출되기 시작했다. 또한, 정점에 있는 두 기관의 권위가 타격을 입고 의심받기 시작하며, 더 투명해지는 효과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이 사건의 경우는 진위성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며 끊임없이 담론 생산의 기제가 되고 있다. 덧붙여 이 사건의 재판 결과는 위작 논란에 대한 최초의 판례가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더 크다.
주: 스타 화가인 천경자 화백과 관련된 작품이 논란이 되면서, 미술계뿐만 아니라 언론도 이 사건에 주목하였다. 따라서 미술계가 세상에 미술에 관해 설명하는 한편, 언론이 역으로 미술의 안 보이는 면을 들춰내는 쌍방향적 작용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김정희 저 <천경자 코드>에서 밝히기를, 조선일보 등의 언론에서 천경자 화백에 대한 전면 기사를 내려고 시도했으며, SBS, JTBC 등에서도 전면 기획 프로그램을 편성해 미술계가 대중에게 노출되었다.

여성 미술가의 지위를 재조명하다
김: 천경자 화백이 여성이라는 점도 이 논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점이라 생각한다. 1980년대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국미술계에서 여성의 지위는 어떻게 변했나.
조: 80년대에는 천경자 화백과 함께 몇 이름 알린 화가만 있었을 뿐 많은 여성 화가가 알려지진 않았다. 90년대부터는 여성 화가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이 당시에도 눈에 보이는 차별이 있지는 않았다. 미술계 내의 여성에 대한 처우는 점점 개선되었고 미술사 등의 분야에서는 활동하는 남녀의 비율이 거의 비슷하다.

위작 검증의 주체는 누가 되어야 하나
김: 이 사건에서 위작 검증의 주체는 화가가 아닌 한국화랑협회, 검찰이었다. 이들은 위작 검증의 주체일 수 있는가.
조: 위작을 검정할 때 과학적인 방법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방사성 동위 측정이나 단층 분석 방법 등을 통해서 작품의 진위성을 판단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믿어야 할지는 고민해 보아야 한다. 과학을 모두 빼고 남는 예술의 고유한 무엇이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의 경우도, 검찰에 의해서 진위가 가려지지만, 그것이 그 작품의 화가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려주지는 못한다.
주: 이 사건에서도 뤼미에르 광학연구소,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한국과학기술연구원, 한국화랑협회 소속 감정위원회 등 많은 감정 기관이 등장하고 있지만, 이 감정에는 항상 완벽한 감정이 있을 수 없다는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다.

미인도 26년을 정리하며, 결실이 없다고 이 시간이 부정되랴

앞서 논란의 중심에 선 천경자 화백, 미인도 위작 논란의 경위, 논란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 알아보았다. 법정 공방은 아직 진행 중이고, 유족과 미술계 사이의 갈등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공방이 끝나지 않았다고, 끝내 끝나지 않는다고 이 26년의 긴 시간이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허무한 것은 아니다. 미인도 논란이 우리에게 남긴 것은 손에 잡히지 않을지언정 작지 않다.

아직은 종지부를 맺지 못한 논란
미인도 위작 논란은 1991년 3월 31일에 천경자 화백이 미인도의 존재를 알게 되며 시작됐다. 2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공방이 이뤄지며, 미술계에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다양한 감정 기관에서 진품 혹은 위작이라는 감정 결과를 내놓았지만, 이렇다 할 결론을 얻지 못한 채 갈등 관계가 남아있을 뿐이다.
몇몇 사람들은 이 사건을 두고 당연해 보이는 것을 두고 힘을 뺀다며 혀를 끌끌 차기도 하고, 제대로 된 결론도 없이 왜 26년을 허비했냐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미인도의 진실이 밝혀지지 않은 지금도, 미술계, 미술가, 대중이 모두 변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미술계는 천경자 화백이 얽힌 미인도 위작 사건 이후로도, 이우환 위작 논란 등 수많은 논란을 겪으며 골머리를 앓았으며, 이전만 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지는 않는다. 이제는 예전과는 다른 위치에 서 있는 기관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미술가들은 미술계의 행태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게 되는 기회가 되었으며, 예술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보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대중들에게는 예술에 더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미인도 논란을 바라본 서로 다른 눈
미인도 위작 논란은 끝나지 않았기에, 미인도의 진위에 대해서 아직 왈가왈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진위를 판별하는 것을 넘어 미인도 사건은 우리에게 예술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주었음이 틀림없다. 이 사건을 통해서 누군가는 미술계의 추한 이면을 보았을 수도, 예술 작품을 다시 한번 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수도, 예술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을 수도, 작가의 억하심정에 공감했을 수도 있다.

끝내 판결될 작품의 진위는 결국 하나의 사실을 담고 있을 뿐이지만, 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서 하게 된 수많은 생각은 옳거나 그르지 않으며, 단지 우리를 성숙하게 했다. 미인도 사건은 우리에게 예술을 보게 하는 새로운 창이 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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