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구의 나이를 신앙적으로 믿는다”는 발언이 정치권과 과학계에서 화제가 되었다. 여기에서 신앙이라는 용어는 종교라는 표현을 피하기 위해 사용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유일신에 대한 자신의 믿음에 충실하다는 의미로도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신앙이라는 말이 교계에서는 자신의 믿음만 포함하고, 자신과 다른 믿음들만 “종교”라고 지칭하는 맥락을 감안한다면, 유일하고 절대적이라는 의미로 사용된 “신앙”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종교와 다른 종교, 그리고 종교와 과학이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견과 시각은 여러 가지가 존재하고, 특히나 과학과 종교를 동일선상에서 논의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종교와 과학은 개개인의 삶을 통해 어떤 방식으로든 항상 접점을 형성해 왔다. 아이작 뉴튼이 지구의 나이에 대해 두 가지 상반된 의견을 제시한 것이 좋은 역사적 사례이다. 17세기 영국에서는 아일랜드 성공회의 어셔 대주교가 성서와 고대사 자료를 근거로 하여 지구가 기원전 4004년에 창조되었다고 계산하여 널리 인용되고 있었다. 이 시기 직후에 살았던 뉴튼은 자신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자연철학(1687)>에서는 열역학을 응용하여, 지구 크기의 물체가 가진 열이 당시 지구 기후의 온도 수준으로 식는 기간이 50,000년 정도 필요할 것이라고 계산한 반면, 사후에 출판된 고대왕국편년(1728)에서는 성서와 지구 자전축의 세차운동에 근거하여 지구의 역사가 기원전 3998년에 시작되었다고 추정하였다.
뉴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현대 과학의 대가들도 피하지 못했던 종교와 과학에 대한 어려운 질문을 우리는 여전히 마주하고 있고, 모든 이에게 보편적으로 준비된 주어진 정답은 없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어쩌면 이 문제는 개개인이 정신적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해답을 찾아 가야 하는 평생의 숙제인 듯하다. 사람은 일상에서 매 순간을 과학적인 시각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존재이다.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없는 의미와 가치의 영역이 있기도 하고, 때가 잘 맞거나 초자연적인 힘이 도와주기를 바라는 주술적인 사고나 상상을 하기도 한다. 이러한 다양한 사고와 의미 부여, 그리고 세계관은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상, 양심, 종교의 자유로서 존중받을 수 있다. 자신의 가치나 세계관을 절대시하여 남에게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창조과학이나 문자 그대로의 창조론을 믿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창조과학이라는 종교 운동은 근본주의와 성서 문자주의를 바탕으로 한 독특한 역사적 궤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 운동이 대전을 중심으로 1980년대에 시작되었고, 현재 용문동에 있는 창조과학 전시관이 우리학교에 있었던 시기도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회적 맥락을 고려하면서 종교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타인의 종교와 양심에 대한 존중, 정교와 공사의 구분, 그리고 종교적 관용이 어떻게 실천되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는,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과 성찰의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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