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이 최근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240번 버스’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사건은 한 인터넷 커뮤니티에 “서울시 240번 시내버스에서 아이만 내리자 엄마가 문을 열어달라고 부탁했는데도 버스가 계속 운행했다”라는 글이 올라오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240번 버스 안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본 듯한 내용의 글이 언론과 각종 SNS를 통해 순식간에 퍼지면서 240번 버스 기사에 대한 거센 비난이 쏟아졌고, 청와대에는 해당 버스 기사의 처벌을 요구하는 청원까지 제기됐다. 그러나 현장 CCTV를 확인한 결과 해당 버스 기사는 아이가 내린 정류장에서 16초간 정차했다가 출발했고, 아이 엄마가 뒤늦게 하차를 요구했을 때는 이미 3차로에 진입한 상태였음이 밝혀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아이 엄마가 아이를 방치한 것 아니냐”며 사람들의 화살이 아이 엄마에게 돌아갔다.
“그런데 이 일이 이렇게까지 논란이 될 일인가?” ‘240번 버스’ 사건의 경과를 지켜보면서 가장 많이 한 생각이다. 다행히 아이 엄마는 아이를 곧바로 만났고, 그 과정에서 누가 죽거나 다친 것도 아니다. 전후 과정을 면밀히 따지고 보면 해당 버스 기사나 아이 엄마가 어떤 잘못을 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이 받은 비난은 마치 그들이 살인죄를 저지른 범죄자인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로 무차별적이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는 수많은 사람이 240번 버스 기사를 피도 눈물도 없는 사이코패스로, 아이 엄마를 무개념 맘충으로 만들어놓았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쉽게 증오에 휩쓸려서 분노하는 걸까. 사람들은 마치 사냥할 준비를 마치고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 떼 같았다. ‘240번 버스 기사’가 눈에 들어오자 앞뒤 가릴 것 없이 물어뜯었다. 한참을 뜯다가 이번에는 ‘아이 엄마’가 나타나자 순식간에 목표물을 바꾸고는 달려들었다. 사냥하기 전에 조금만 더 생각을 해보고 행동해도 늦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각박해진 우리 사회 때문인지 요즘 사람들은 언제든지 분노할 준비가 되어있는 것 같다. 분노할 대상이 발견되면 사실관계를 따지기도 전에 맹렬히 비난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SNS의 익명성에 기댄다면 못할 말도 없다. 별다른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하니까.
분노하는 사람들보다 더 나쁜 사람들도 있다. “바로 저 사람에게 분노해야 한다!”라고 소리치는 사람들이다. 대체로 언론이 그 역할을 맡는다. 사실관계를 충분히 검증하고 공론화 여부를 판단해야 할 언론이 제대로 확인해보지도 않은 정보를 확대하고 재생산하였다. 언론사와 기자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조금이라도 더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뽑아 이슈를 만들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빛의 속도로 정보가 공유되는 세상에서 기자들은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기사를 써야 한다. 하지만 이번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우리 사회의 언론은 그 역할을 잘 해내지 못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240번 버스 기사와 아이 엄마가 겪고 있는 정신적 피해에 대한 보상은 아무도 해주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번 사건이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을 것이다. 버스 기사도, 아이 엄마도 그저 여느 때와 같이 하루를 시작했던 우리와 같은 일반인이다. 단지 그날따라 지지로도 재수가 없었을 뿐이다. 누구나 제2의 ‘240번 버스’ 사건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비난하지 말자. 비난하기 전에 전후 과정을 충분히 알아보고 행동하자. 그리고 누군가가 실수했더라도 용납할 수 있는 아량을 베풀자. 자신만의 잣대로 잘잘못을 가리는 행동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아니다. ‘정의’는 타인에 대한 따뜻한 이해와 공감이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나는 이 ‘240번 버스’ 사건이 우리 사회를 송두리째 바꿀만한 계기가 될만한 사건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른 사건들과 다를 바 없이 시간이 지나면 사람들의 기억 속으로부터 자연스럽게 사라질 것이다. 분노할 준비가 된 사람들은 여전히 분노할 대상을 찾을 것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이런 사건이 반복될수록 자정의 목소리도 높아질 테니 말이다. 혹시 자신만의 잣대로 남의 일에 간섭하거나 험담을 하는 친구가 있다면 이렇게 말하자. “잘 알지도 못하면서.”

저작권자 © 카이스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