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 <몬스터 콜>

 황량한 대지에 한 소년이 서 있다. 건물이 무너지고, 소년과 그의 어머니는 낭떠러지에 놓인다. 소년은 힘에 부쳐 어머니의 손을 끝내 놓치고 만다. 이 꿈의 끝에서 소년은 비명을 지르며 일어난다. 끔찍한 악몽의 한 장면은 그의 삶에서 몇 발자국 떨어져 있지 않다. 그의 어머니는 고질적인 병으로 투병 중이고, 소년은 학교에서 따돌림과 폭력을 당한다. 소년은 이 아픔을 애써 외면하려 한다. 하지만 상처를 씻어낼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몬스터 콜>은 이 소년이 상처를 인정하고 치유하는 모습을 잔잔하면서도 감동적으로 담아낸다.
아이라기엔 성숙한 표정의 소년 코너는 묵묵히 자신의 고통을 감내한다. 그는 손을 짓밟혀도, 자신을 돌봐주던 어머니가 무기력한 얼굴로 누워있어도 전혀 힘든 내색을 하지 않는다. 하나의 기폭제만 있으면 순식간에 분노와 광기에 휩싸일지도 모르는 열다섯의 이 어린 소년은, 슬픔을 숨기려는 듯 입을 다물고 있다. 무엇을 숨기려 하는 것일까? 분명 멍들었을 그의 마음 속 상처는 스스로 들춰내지 않는다면 평생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고 그의 가슴 속 어두운 곳을 헤엄치는 심해어가 될 것을 지레짐작할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와 크게 다툰 날의 12시 7분, 기괴한 모습을 한 괴물, 일명 몬스터가 나타나 코너의 문을 두드린다. 앳된 소년과 대조되는 강인하고 큰 이미지를 가진 몬스터 앞에서, 소년은 당황하지도 도망치지도 않는다. 학교에서, 집에서는 꺾인 풀처럼 체념한 채 살아가던 소년은 역설적으로 몬스터가 나타날 것을 알았다는 듯이 당당하게 맞서고 자신의 요구를 한다. 하지만 몬스터는 아이의 바람과는 달리 자신이 한 그루의 나무로 살면서 봤었던 일을 들려줄 뿐이다.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 속에서 소년은 관찰자가 되어 각 이야기의 주인공인 왕자와 마녀, 목사와 제약사, 투명인간을 지켜본다. 이 동화들은 행복하게 끝나지 않는다. 대신 선과 악, 믿음과 욕망 사이의 뚜렷한 경계가 없음을 소년으로 하여금 깨닫게 하며 변할 기회를 준다. 소년은 마침내 이 이야기들을 자신의 삶에 접목하고 진실에, 문제에 마주 선다.
여느 판타지 영화처럼 몬스터가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만능의 존재였다면 감동이 아닌 카타르시스가 극장을 가득 채웠을 것이다. 그러나 몬스터는 영웅도 선지자도 구원자도 아니었다. 단지 소년의 한 부분에 불과한 몬스터는 소년이 스스로 응어리를 뱉어내게 한다. 주변 아이들도, 아픈 어머니도 아닌 자신의 이기심을, 부족한 용기를 탓하는 소년의 모습 앞에서 흐르는 우리의 눈물은 부끄러움이기도, 경외이기도, 참회이기도 할 것이다. 상실의 고통은 치유하는 과정마저도 아프지만 우리는 이겨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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