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스트에 입학하기 직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던 사랑하는 나의 과고 반-사회 전우들과 각자 다른 대학(고려대-S, 성균관대-L, 카이스트-나)로 찢어지며 우린 이리 다짐했다.
‘우리 딱 2년 학교 다니고 1년 휴학해서 돈 모으고 같이 유럽여행 다니는 거다!’
입학한지 4년차. 계획대로라면 유럽에 갔어야 할 작년에 무엇을 했냐, 그냥 평소같이 울면서 과제를 했다. (나는 산업디자인학과) 나의 반-사회 전우들은 무엇을 했냐, 각자 잘 먹고 잘 살았다. 끔찍한 입시에서 피어난 반-사회 감성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적응으로 깊은 곳에 가라앉았다. 남자 공포증이던 L는 가슴 깊은 첫사랑을 하는 듯 했고, 끼를 발산 못하던 S는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난 듯 했다. 각자 행복한 듯 보였다.
새로운 사회에서 기억을 잊은 듯 적응해버린 그들과 달리, 나는 이렇다 할 새로움을 마주하지 못했다. 나의 학교, 카이스트는 과학고등학교의 연속이었고 한 번도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몇 년 전 미안했던 그 친구를 아직도 그리고, 얄미운 걔도 재수없던 걔도 상처받은 마음도 가슴 한 켠 떠난 적 없이 어딘가를 부유하고 있었다. 잊지 못하고 지우지 않고 오히려 그 기억만을 곱씹고 되뇌었다. 지나간 상황에 동반되는 미련한 후회와 떠난 마음에서 받는 부질없는 상처가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 때 내 마음에 긍정적인 것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 중 하나는 되게 대단하면서도 정말 별거 아닌 어떤 자존심이었는데 내가 이 비합리적인 학벌 중심 사회 속에 승리자로 남았다는 것이었다. 독하게 입시를 버텼다. 그 당시 L이 S를 위해 그려주던 만화에 나는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창 밖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그림과 함께) ‘도식이가 엉엉 울기 시작했어.’ 시간이 흘러 지난 일이 된 뒤에 L은 이렇게 덧붙였다. ‘너는 그때 창 밖만 보면 울었어.’
지난 일이 되기 전, 기억에 사로잡혀 있던 대학교 1학년 때에, 나는 나의 악몽을 이렇게 그렸다. 무엇이든 담으려 하던 도자기가 깨져 가루가 된 채로 계속 버티기만 했다고. 도자기는 빚을 엄두도 못 내고 깨진 조각만 바라보던 시절이었다. 사는 것 자체가 두렵게 느껴졌는데, 아무리 곱씹고 미련하게 굴어도 내 그릇으로는 모든 일들이 어쩔 수 없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무엇도 안고 가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포기했던 것은 마음 그 자체였다.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입시 사회의 승리자 타이틀과 맞바꿨는지.
그 이후로 나는 시험 자체에 반감이 생겼다. 약사, 변호사 수많은 전문직들이어- 안녕
악몽이라고 치부해 버릴 것을 기억하는 데에는 덮을 만큼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13년도 봄날의 그날을 기억한다. 중간고사 기간에 L과 S와 함께 자습실에서 도망쳐 나왔다. 벌레가 기던 풀밭에 누워 우쿠렐레를 쳤고 조용한 시험기간, 노래는 울려 퍼졌다. ‘괜찮아, 열심히 했으니까~내가 이렇게 노래를 부르는 데 뭐가 그리 걱정이 돼 울고 있니’ 한창 노래를 부르다 학교 뒷산에 올랐다. 노랗게 핀 개나리를 바라보다 서로 페이스 페인팅을 해주고 급식을 먹으러 내려왔다. 모든 게 다 괜찮아지는 기분이었다.
수빈아, 유정아. 너희를 사랑해. 까다롭고 더러운 성격마저 말이지.
과학고-카이스트 전형적인 KAIST-ian의 길을 걸으며, 나는 이 끔찍하게 징그러운 공대 사회에 적응해버렸다. ‘다들 미쳤어’ 라고 말할 때에도 나 또한 그들과 아주 같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사회와 동화되면서도 완전히 속해질 수는 없었는데, 반-사회성은 나를 떠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이 사회에서 나는 이상한 존재이다. 가끔 한복을 입고, 길거리에서 춤을 추는 것을 즐기고, 여자들이랑 잘도 뽀뽀를 하고 다닌다. 이런 모습 그대로 나를 사랑해주던 사람들도 많았지만, 요즘은 그 사랑마저 벅차다.
오래도록 이어져 오던 반-사회 엄도의 어은-라이프는 잠시 멈출 때다. 가을과 겨울, 스위스로 교환학생을 간다. 대학 왔을 때의 다짐과 약간은 다르지만 결국 바라던 대로 잠시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별에 별 일이 다 있던 어은동, 정신없이 일에 치이고 춤을 추고의 반복이었다. 치열하게 울리던 춤을 잠시 끊고 멈춤이라는 새로운 춤을 출 때. 앞으로의 여정에 새로움이 끊이지 않기를 바란다.

저작권자 © 카이스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