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영화시장 규모 세계 6위, 1인당 연간 평균 영화 관람 횟수 4.22회로 세계 1위, 거의 매년 천만 관객 영화가 나오는 명실상부 영화 강대국이다. 근래 한국에 있어서 영화의 위치와 역할은 그 어떤 것 보다 중요해졌다. 데이트 코스에 영화가 빠지는 법이 없고, 가장 대중적인 취미는 독서에서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대중들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전문적인 시선을 원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방증으로 평론가들의 위상이 웬만한 감독들보다 높아졌고, GV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질문들의 공통적인 주제가 ‘이 영화는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가?’이다. 그렇다면 정말 영화를 제대로 보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우리는 영화와 진심으로 마주볼 수 있는 것인가? 그러기 위해선 어떤 방법으로 영화에 가까이 다가가야 할 것인가? 이에 대한 본인 나름대로의 방법 세 가지를 소개하려 한다.
  첫째는 사진과 영화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사진을 본다는 것은 거기에 존재하는 대상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이미 있었던 대상을 겨냥하는 것이다. 반면 크리스티앙 메츠에 따르면, 영화는 사진보다 매우 강력한 투사의 힘을 내포하고 있어 영화 관객은 거기에 있었던 것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살아 움직이는 것을 경험한다. 즉, 영화는 이미지의 비현실성에 움직임의 현실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다름 아닌 카메라다. 하지만 관객들은 영화를 볼 때 의외로 카메라를 간과하고 내러티브를 따라가기 급급하다. 사실 이는 사람의 본능이라 불가피한 부분이다. 심지어 우리는 아방가르드 영화를 볼 때에도 그 안에서 주인공을 찾고 스토리를 만들려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항상 카메라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이는 다소 추상적일 수 있지만 의외로 간단하다. 영화를 볼 때 속으로 ‘지금 이건 카메라로 찍고 있는 거야’라고 자각하는 순간 신세계가 열릴 것이다. 카메라가 배우들의 눈높이 보다 높은지 낮은지, 여기서 왜 카메라가 앞으로 다가가는지 뒤로 멀어지는지, 윤리적 갈등이 생길 때 배우들을 직면하는지 외면하는지 등등 무궁무진한 논쟁과 사유가 발생한다. 즉, 영화에 있어서 속히 말하는 출제자의 의도 파악하기가 카메라라는 영화 언어를 통해 가능해진다.
  둘째는 영화 속에 자신을 참여시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네오리얼리즘의 거장 로셀리니는 ‘결국 영화는 moral의 문제이다.’ 라고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moral의 함의는 흔히 말하는 도덕이 아닌 프랑스어로의 moral과 가깝다. 프랑스에서 moral은 인간 내면과 연관이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칭한다. 로셀리니는 저 테제와 같은 한 문장을 통해 영화는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우리는 다양한 선택의 기로에 직면한 주인공들을 만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주인공의 선택을 구경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고 감정이입을 충실히 하라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다. 마치 모험을 하듯이 영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의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깎여 나가거나 덧붙여져 완성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가 영화를 철저히 이용할 수 있는 방법이자 영리하게 보는 방법에도 부합한다. ‘킬링 타임’이라는 신조어처럼 영화를 보는 것이 정말 시간을 죽이는 행위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허무하게도 ‘영화를 보는 방법에 정답은 없다’이다. 그럼 앞의 두 가지 방법은 의미 없는 것인가 라고 반문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대답은 움베르트 에코의 ‘닫힌 텍스트/열린 텍스트’ 이론으로 대신하겠다. 이 이론에 따르면, 영화가 완성되어 감독의 손을 떠나는 순간 감독은 죽은 것이다. 오직 그 영화와 관객만이 살아있는 것이다. 결국 당신이 진정 고민하고 사유하며 영화를 보았다면 그 방법론과는 무관하게 그것이 옳은 것이다. 다른 예로는 시청각장애를 가진 분들을 위한 ‘Barrier free 영화’가 있다. 한번 상상 해보자, 사운드 없이 보는 영화와 사운드 만이 존재하는 영화를. 극단적으로 영화를 보는 방법이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오히려 전혀 다르거나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얻을 수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쇼트 하나하나를 분석하며 보는 것과 단순히 감정에 충실해 몰입하여 보는 것 사이에 정답은 없다. 단 깨어있는 채로 영화 속 텍스트를 힘껏 열어 직면해야 한다.
  다소 순서가 잘못되었지만 이 글의 제목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겠다. 영화의 신 중 하나라 불리는 고다르는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인생)>(1980)이라는 작품을 통해 ‘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각자의 인생을 알아서 구하라’ 라는 다소 무책임한 메시지를 던진다. 최근 영화 시장이 걷잡을 수 없게 성장하는 동안 프로파간다가 상업영화의 주된 전략이 되었다. 사람들의 사회적인 분노를 장사꾼들은 영화 속 절대악을 무찌르는 것으로 환원하였고, 그 사이에 존재했던 다양한 시선들은 사라져 버렸다. 영화 속 프로파간다를 통해 본인들의 인생을 구하려 하지 말자, 천만 영화의 필요 조건이 되어버린 해피엔딩에 감정이입하며 기뻐하지 말자. 그렇게 해선 결국 영화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다. 이에 대해 들뢰즈는 다소 비관적인 어조로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람들이 현실을 영화적 순간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걱정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다시 돌아가, 우리는 영화를 제대로 보아야 한다. 나의 세가지 방법을 모두 수용하지 않아도 된다. 이 글을 읽으며 본인들만의 방법을 스스로 깨달았을 수도 있다. (모레티가 자신의 데뷔작 <나는 자급자족한다>(1976)에서, 브레송이 <아마도 악마가>(1977)에서, 링클레이터가 <보이후드>(2014)에서, 까르네가 <인생유전>(1945)에서, 애커만이 <잔느 딜망>(1975)에서, 타르코프스키가 <거울>(1975)에서, 로메르가 <모드의 집에서 하룻밤>(1969)에서, 몽테이루가 <오고가며>(2002)에서, 키에슬로프스키가 <십계>(1988)에서 한 만큼은 아니더라도) 당신이 영화를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당신 할 수 있는 대로 구하라,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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