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LG, 현대 같은 유명 기업의 이름을 들었을 때 당장 떠오르는 것은 기업의 CI일 것이다. 거리에서 얼핏 보이는 노란색 M자 로고를 보고 그곳이 맥도날드라는 것을 알고, 녹색으로 크게 박혀 있는 간판 글씨를 보고 그곳이 스타벅스라는 것을 안다. CI는 기업의 얼굴이자 또다른 이름이다. 기업의 모든 것을 시각적으로 함축한 CI에 대해 알아보자

CI, 기업 이미지를 담는 시각적 표현
CI란 ‘Corporate Identity’의 약자로, 문자 그대로 기업의 정체성을 뜻한다. 이는 기업에 관련한 모든 가치를 드러내는 수단으로, 기업의 이념, 철학, 비전을 함축적으로 표현한다. CI는 흔히 기업의 로고 자체를 일컫기도 하지만, 본래 기업이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 더욱 유리한 경영 환경을 만들어 내는 문화전략 전반을 지칭한다. CI 디자인은 기업이 추구하는 가치를 담아야 하므로, 보기에 좋고 기억에 남는 조형성을 갖추어야 할 뿐만 아니라 기업의 정체성을 효과적으로 표현해야 한다.

기업의 이미지란 소비자가 그 기업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좋은 이미지를 가진 기업은 소비자에게 우선으로 선택된다. 이는 단순한 매출액 증대에 그치지 않고, 소비자에게 신뢰를 주어 대중과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기업의 이념을 하나로 담아내는 것이 CI인 만큼, 기업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고 그에 맞는 전략을 짜는 등 기업 내에서 조직적인 사고를 유도하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또한, 좋은 이미지를 가진 기업에는 그만큼 입사 희망자도 많아, 인재를 확보하는 데 훨씬 유리한 자리를 점할 수 있다.

상인조합의 상징에서 핵심 경영 전략까지
CI는 비교적 역사가 짧다. 19세기 유럽에서 사용되던 상인조합의 상징이 오늘날 CI 디자인의 원형이다. 당시 상인조합은 다른 상인조합과 구별되는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독자적인 상징을 사용했다. 이러한 상징은 상인조합의 간판, 상품의 포장 등 모든 것에 쓰여 현대의 브랜드 로고와 비슷한 역할을 수행했다. 비슷한 시기 독일의 페테 베렌스가 알게마이네 전기회사(AEG)의 상징을 디자인했는데, 이것이 CI의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1930년경 대공황으로 기업 대부분이 난항에 부딪혔을 즈음, 코카콜라 패키지 디자인으로 유명한 레이먼드 로위를 비롯한 여러 디자이너가 CI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불황을 이겨내는 하나의 수단으로써 다른 기업과 차별되는 마케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CI가 기업 경영에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 IBM의 성공이 있고 나서부터다. IBM은 ‘Inter- national Business Machines Corporation’이라는 긴 기업명을 축약한 파란 알파벳 로고를 사용하고, 임직원 역시 청색 양복을 입게 해 소비자에게 IBM의 이미지를 각인시키는 데 성공했다. CI를 의식적으로 경영에 도입해 성공한 사례로, 기업 이미지가 향상된 것은 물론이고 매출액도 크게 증가했다. 이후 기업이 CI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되고 디자인 분야가 성장하면서 기업 경영에 CI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CI는 1936년 버드나무를 형상화한 녹색 상징을 사용한 유한양행의 것이 시초다. 하지만 이는 기업의 정체성이 아닌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로서의 CI(Cor-porate Image)에 가깝다. 따라서 우리나라 기업이 현재 통용되는 의미의 CI를 사용한 것은 1974년 동양맥주가 OB맥주의 CI를 도입해 체계적으로 경영에 활용한 것이 첫 사례라 할 수 있다. 이후 기업은 창립, 인수 합병, 이미지 쇄신 등 여러 가지 이유로 CI를 도입했고, 1990년대에 세계화 바람이 불기 시작한 이래 지금까지 이러한 움직임은 더욱 확산되었다.

기업도 옷을 갈아입는다

긴 역사를 가진 기업은 자칫 고리타분한 옛 이미지에 발목을 붙잡힐 위험이 있다. 기본적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변화된 시대 양상에 발맞춰 이미지를 쇄신할 필요가 있다. 기업이 외국에 진출할 때는 언어와 문화 차이를 염두에 두는 것이 기본이다. 이때 특히 고려해야 하는 것이 CI인데, 그러한 차이 탓에 기업 이미지가 엉뚱하게 왜곡되어 전달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업이 이미지를 관리해야할 때 가장 먼저 시작하는 것이 바로 CI를 바꾸는 일이다.

“CI 하나 바꾸었을 뿐인데…”
롯데가 론칭한 테이크아웃 커피 전문점 자바커피(Java Coffee)는 처음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단순히 커피 원산지를 뜻하는 자바는 소비자에게 감성적 가치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부드러운 커피 향처럼 음미해보고 싶어지는 이름’을 목표로 한 엔제리너스(Angel-in-us)로 상호를 변경하고 여성스럽고 따뜻한 이미지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도입한 다음에야 비로소 다른 업체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

한국도로공사는 2008년 창립 40주년을 맞아 CI를 변경했다. 건설이나 개발보다는 도로 교통 서비스 전문 기업으로 위상이 심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객 지향적이고 친근한 이미지를 주고자 새로운 CI를 도입했다. ‘ex’는 고속도로(expressway), 뛰어남(excellence), 전문가(expert), 흥분(exciting) 등 한국도로공사의 정체성과 가치를 모두 담고 있다. 시각적인 주목도가 높은 붉은색을 주색으로 사용해 열정과 희망을 표현하고자 했다.

해태제과는 영문 CI 일색이던 우리나라 시장에서 한글을 활용한 CI를 탄생시켰다. 모음과 자음을 조합한 이 CI는 같은 색상끼리 보면 ‘해’가 인식되고, 가까운 것끼리 보면 ‘태’가 인식된다. 이는 해태제과의 경영 철학인 ‘즐거움’을 표현한 것으로, 패키지에서도 소비자가 즐거움을 느낄 수 있도록 했다.

같은 CI 다른 해석…산업화의 역군이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기아자동차의 초기 로고는 공장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산업 발전 붐이 일어나던 때라 이 푸른색 로고는 별 무리 없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이후 미국 시장에 진출하고자 했을 때 미국의 딜러들이 기아자동차의 로고에 난색을 보였다. 한창 산업 공장이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는데, 공장에서 나는 연기를 연상시키는 로고를 매연을 뿜어대는 자동차에 달아 놓으면 도저히 팔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기아는 로고색은 당시 현대적이라는 이유로 자동차 업계의 대세를 이루던 푸른색에서 과감히 붉은색으로 바꾸고, 영문 로고를 전면에 내세워 미국 수출길을 열 수 있었다.

과거 선경그룹은 회사명이 영어권 나라에서 ‘Sun Kyong’이 아닌 ‘Sunk Young’으로 인식되어 어려움을 겪었다. ‘타락한 젊은이’라는 뜻으로 퇴폐 집단이라는 오해를 샀기 때문이다. 선경그룹은 잘못된 해석을 막기 위해 이니셜을 따 ‘SK’를 탄생시켰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딱딱한 중화학공업 업체라는 이미지를 벗기 위해 CI를 대대적으로 변경해 감성을 중시하는 시대 변화에 발맞췄다. 나비를 연상시키는 행복 날개를 형상화하고,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으로 소비자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가고자 했다.

제일제당의 예전 영문 표기는 ‘Cheil Sugar&Corporation'이다. 이는 감옥(jail)을 연상케 할 뿐만 아니라 사탕수수농장(sugar)의 노예를 떠올리게 했다. 결국 제일제당은 CJ홈쇼핑 인수를 계기로 ‘CJ'로 탈바꿈했다. 각각 건강, 즐거움, 편리함을 뜻하는 빨강, 노랑, 파랑 로고를 도입해 소비자에게 더욱 쉽게 인식되도록 했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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