흩어지는 것들, 스며드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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흩어지는 것들, 스며드는 것들
  • 김기섭 KAIST 건설및환경공학과 12학번
  • 승인 2016.09.28 03: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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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에는 냄새가 배어있다. 가을의 냄새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

어렸을 때, 키가 지금의 반쯤이었을 때, 우리 집은 도심 외곽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실강이 천천히 흘렀다. 폭이 꽤 넓어지는 구간이긴 했지만 강물은 다시 굽어 어디론가 흘러가는 듯했다. 그 허리 즈음 강가 반대편에, 당시로선 높지만 색이 바랜 아파트 몇 채가 늘 서 있었다. 외딴 섬에 있는 요새 같았다. 민들레아파트. 저긴 어떻게 가는 걸까. 강을 건너면 저곳엔 누가 살까. 어린 생각은 아무리 고민해봐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물론 당장 데려다준대도 왠지 무서워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섬 위에 떠 있는 것 마냥 낯설게 우뚝 서 있는 민들레아파트로 향하는 길목은 어디에 있는 걸까, 분명 있긴 있을 텐데, 많이 고민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굽어 호기심은 흩어졌다. 그리고 강 너머 미지의 세계와는 정반대 방향으로, 자꾸만 나아 왔다. 더 큰 세상을 향해 나왔다. 우리 동네에서 시내로, 대구에서 대전으로 떠나오게 되었다. 이제는 이곳이 더 편하다. 심지어 집에 가면 내가 손님 같다. 한때 내 방이었던 공간은 서재가 되어있다. 어떤 공간은 낯설기까지 하다. ‘지난달에 더워 죽겠는데 화장실이랑 부엌 싹 다 뜯어고치느라 완전히 고생했다. 그래도 해 놓으니 좋지?’ ‘네, 완전 새집 같네요.’ 어머니의 인테리어 감각은 정말 최고다. 기분이 한결 상쾌했다. 그렇지만 그 기분도 잠시, 이제 내 집에서 새 집이 된 공간에서 나는 하루 이틀 머물 숙객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싹 다 바꿔 놓으셨을까, 그 호기심도 잠시, 나는 잠시 궁금해하다 다시 떠나게 될 뿐이었다.
긴 추석 연휴를 보내고 학교에 돌아오니 친구들의 대학원 합격 소식들이 전해져 온다. 4년 동안, 혹은 5년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었는데. 이제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그 일들을 뒤로한 채 각자의 길을 향해 떠나고자 한다. 세상에 갓 발을 내디뎠을 때에는 모든 것들에 관심이 있었고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주는 데 공을 들였다면, 이제는 내가 택한 관심을 지키는 데에 온 힘을 들이고 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벅차다. 처음엔 내가 어떤 관심들을 선택했지만 이제는 그 관심들이 나를 흔들며 만들어 나간다.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기차는 선로를 따라가는 법이다. 친구들 역시 그러할 것이다. 각자의 일이 바빠 연락도 뜸해지지만 각자가 누구보다 잘 해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무소식이 희소식! 그래서 페이스북에 대학원에 붙었다며 스스로 먼저 소식을 올려주는 친구가 오히려 밉기보다는 고맙기만 하다. 너, 그동안 매우 열심히 잘 살고 있었구나. 역시 내 친구야. 앞으로도 우리 힘내자.
1년 전만 해도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아 초조한 마음이었는데, 이제는 한고비 넘겼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제 딱 1년 전의 나와 같은 감정을 겪고 있는 후배를 보고 있으면 측은하다기보다는 멋있다는 생각이 든다. 힘든 시기일 텐데 힘들어하지 않고 아주 잘 해내고 있구나. 남은 시간 잘 마무리하고 더 큰 세상에서 함께 동료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지속적인 응원과 관심과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
가을에는 냄새가 배어있다. 밤길을 잠시 나섰을 뿐인데 벌써 겉옷 가지와 긴 바지 깊숙이 스며들고 있다. 여름 향기가 벌써 기억나지 않는다. 한때 여름이 있었다는 건 누가 알아줄까. 가는 여름을 모른 체 다소 쌀쌀한 가을을 그냥 반갑게 맞이해주면 되려나. 또 무얼 더 할 수 있을까. 가을이 벌써 이렇게나 스며들어 버렸는데.

가을은 그런 계절인 것 같다. 이제 겨우 절반의 시간을 넘겼을 뿐이지만, 아무도 모르게 벌써 내년을 슬슬 준비하는. 그립게만 느껴지는 여름도 아직은 낯설게만 느껴지는 가을도 모두 똑같이 소중하며, 우리는 새로운 환경에서도 여전할 것이다. 잘 준비한 만큼, 새로운 환경에서 우리는 모두 잘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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