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화학공학과 학사08 윤수현

“그래서, 도현아, 나 그 오빠랑 사귀기로 했어!”
나는 먹던 떡만둣국에서 고개를 들어 하리를 쳐다보았다. 반짝거리는 하리의 눈이 어서 물어봐, 얼른 어떻게 된 건지 물어봐, 하고 외치고 있었다. 아우, 계집애.
“그럴 것 같더라.”
“뭐? 왜 그럴 것 같아? 뭐가 그럴 것 같았는데?”
“너 전윤섭이랑 깨질 거라고 말 할 때부터 그럴 것 같았어. 내가 네 연애사를 한두 번 들었니? 그 오빠 얘기 자주 했잖아. 술집에서 팔에 어깨가 어쨌느니, 바래다줄 때 스쿠터에서 저쨌느니, 하면서.”
“아, 정말? 티 났나? 하긴 정수오빠가 그때부터 막 그렇게 티를 냈다니까! 있잖아, 내가 윤섭이랑 헤어지고 나서 바로 다음날인가 그 다음날에 나한테 그러더라니까. 그래도 이젠 너랑 술 마실 때 윤섭이 눈치 안 보여서 다행이라고……”
아, 그러셨어요. 끝없이 흘러나오는 말을 귓가로 흘리며 나는 다시 만둣국에 집중했다. 그래 봤자 뻔한 얘기니까 말이다. 그 오빠랑 어제 어디서 데이트를 했다, 요즘 또 문자건수가 엄청 늘었다, 그런 이야기겠지. 정말 하리는 지치지도 않는다. 어쩜 고등학교 때부터 저렇게 연애가 끊이는 일이 없을까? 이번의 상대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서 알게 된 선배단 사람으로, ‘훈남’이라고 작년부터 하리의 수다에 자주 오르내렸다. 그 때야 다른 사람을 사귀고 있었으니까 남자친구는 아니었지만. 그런데 드디어 남자친구로 삼았구나- 하여튼 저것도 능력이다.
“……그래서 오늘 저녁때 같이 나갈 거야. 오빠가 홈플러스에서 장 봐야겠다고 하더라고. 같이 영화 보고 나서 장 보고 들어오려고. 전에 내기를 했는데 내가 이겨서, 오늘 밥도 오빠가 사기로 했어. 부럽지?”
“부럽네, 참. 근데 같이 장 본다는 게 조금 웃긴다.”
“뭐가 웃겨?”
“아니, 그냥, 거의 신혼부부 같아서.”
신나서 이야기하던 하리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계집애, 아주 좋아서 죽네.
“근데 그 오빤 요리를 직접 해? 장을 보게?”
“어, 내가 얘기 안 했어? 정수오빠 궁동에 자취해. 연차초과라서 기숙사 배정을 못 받았잖아.”
“맞다, 연차초과랬지. 군대도 갔다 왔나?”
“응, 이학년 여름에 갔다 왔어. 우리 학교에서 박사까지 할 거 아니면 이학년 때 다녀오는 게 제일 좋다던데.”
“흐응, 군대까지 다녀오고, 제대로 삭았네. 연상은 처음이시죠, 최하리 양?”
“뭐야 너. 놀리지 마라? 원래 남자는 나이 차이가 좀 나야 정신연령이 맞는 거거든? 너 전윤섭 하는 짓 다 봤잖아! 완전 초등학생이 따로 없었잖아, 걔는!”
“내가 직접 본 적이야 없지. 이야기는 네가 다 해 줬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네가 얘길 안 하는데 내가 해야지 그럼 어떡하니? 야, 너도 얼른 남자친구 만들어서 나한테 수다 좀 떨어봐! 맨날 나만 말하기도 이젠 질린다.”
“됐거든. 다 먹었으면 수업 들어가자.”
포카리스웨트를 하나씩 뽑아 들고 하리와 나는 각자의 강의실로 들어갔다. 강의가 귀에 들어오지 않아서 나는 계속 딴 생각을 했다. 최하리, 내 친구, 고등학교 동창. 나랑 같이 유명 자립형 사립고를 졸업해서 카이스트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2,3학년 때는 같은 반이었고, 키와 몸무게, 심지어 생일마저도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남자친구의 존재 여부. 하리는 이번으로 벌써 다섯 번째 남자친구를 사귀는데 그에 비해 나는 한 번도 남자친구가 없었다. 왜일까? 나라고 해서 연애에 관심이 아예 없는 게 아닌데……하리에게는 남자를 사귀는 것도 헤어지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그게 잘 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리처럼 막 사귀고 막 헤어지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한숨을 쉬며 나는 공책에 아무 말이나 끄적거리던 샤프심 끝을 똑, 부러뜨렸다. ‘너도 얼른 남자친구 만들어서 나한테 수다 좀 떨어 봐’란 말이지. 하지만, 최하리, 난 그게 안 된다고.

동측식당은 줄이 빨리 생긴다. 수업 끝날 때 즈음 나갈 준비를 마치지 않았다간, 이십 분씩 줄 속에서 기다리기 일쑤다. 수업을 마치고 화장실에 들렀다가 식당에 간 나는 이미 끝없이 늘어진 줄의 맨 뒤에 서야 했다. 이제 사월에 접어들었는데도 바람은 여전히 추웠다. 팔을 감싸 안고 서 있는 데 뒤에서 누가 날 탁 하고 쳤다. 하리였다.
“미안, 기다렸지.”
“뭐 어차피 식권 뽑으려면 기다려야 되는데. 오늘 수업은 왜 안 왔어?”
“아, 늦잠 잤거든. 어제 늦게 자서. 세 시쯤에 잠들었나.”
“별로 늦게 잔 것도 아니네.”
“그렇긴 하다. 근데 내 핸드폰 배터리가 다 떨어져서 알람 소리를 못 들었어. 그것만 아니었어도 제때 수업 올 수 있었는데. 오빠네 집에 내 핸드폰 충전용 잭도 없고…….”
“응?”하리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저만큼 당황스러운 표정일까? 곧 하리는 겸연쩍은 듯 머리를 긁더니 헤헤,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 어제 정수 오빠네 집에서 잤거든.”
나는 멍한 얼굴로 하리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학생, 닭곰탕이야 부대찌개야? 하는 아주머니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식권을 집어넣었다. 부대찌개요, 부대찌개.
“근데 나만 자고 간 건 아니고. 어제 오랜만에 새터 반 사람들이랑 술 한잔 했는데, 방에 들어가기가 귀찮아서 그냥 거기서 자 버린 거야. 나 취하면 잘 못 걷잖아. 나랑 부반장 언니랑 오빠네 집에 가서 라면 끓여먹고 잤어. 그러고 보니 나 얼굴 붓지 않았니? 라면 먹는 게 아니었는데!”
“……별로 안 부었어. 그러니까 사람들이랑 다 같이 그 집 간 거야?”
“그런 거지 뭐. 근데 아침에 일어나보니까 부반장 언니는 없더라. 혼자 일어나서 수업 갔나 봐. 그 언니가 또 엄청 성실하거든. 나랑 정수오빠 일어나서 서로 보는데, 와 진짜 장난 아니었어! 세수도 안 하고 자서 후줄근하고……”
말을 하다 말고 킥킥대는 하리가 왠지 낯설어 보였다. 결국 그 화제에 대해서는 더 말을 못 하고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리고 말았다. 묻고 싶은 말은 있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헤어져서 각자의 수업에 들어가자 묻고 싶은 말은 더욱 많아져 머릿속에서 뭉게뭉게 부풀어올랐다.
‘잤다’, 는 게 무슨 말일까. 그냥 자고만 온 걸까? 그렇겠지. 그럴 거다. 다른 사람도 같이 갔다는데 다른 일이야 없었겠지. 그런데 정말 다른 사람과 함께 가기는 한 걸까? ‘나만 자고 간 건 아니고’ 라고 말할 때의 하리의 목소리와 표정은 왠지 변명조였어. 게다가 그 부반장 언니라는 사람이 자기만 혼자 일어나서 수업에 갔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것 같은데……. 하지만 하리가 나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는 걸. 아니, 없는 걸까? 그러고 보니 요즘 하리는 아침수업도 자주 늦고, 정수오빠란 사람과 늦게 데이트를 나가는 일도 많다고 했다. 하지만 나한테 다 얘기해 준 걸 보면 떳떳한 것이겠지? 아니 그런데, 난 지금 뭐에 대해서 ‘떳떳하다’ 라는 표현을 쓴 거야?
설마, 하리가, 그 오빠랑 ‘잔 건’ 아니겠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나는 정신이 덜컥 들었다. 수업이 시작하고 벌써 이십 분 이상이 지나 있었다. 정말이지, 매번 이러다간 이 수업 학점은 남아나질 않겠네. 정신차려 정도현! 하리 연애에 신경 쓰다가 네 장학금을 날릴 셈이야?
나는 다시 수업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잘 되지 않았다.

쪼르르르륵.
텅 빈 커피컵이 꼴꼴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커피잔 위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앞을 보고, 턱을 괴었다. 오월 햇빛이 학생식당의 창문을 건너 떨어진다.
‘세시에 학식카페에서 나랑 얘기 좀 할 수 있어?’ 이게 아침에 하리가 보낸 문자 내용이었고, 나는 그러마 하고 답장을 보냈다. 중간고사 이후로 하리가 나에게 보낸 첫 문자였다. 나한테는 원래 문자를 잘 안 하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키읔 자 하나 안 찍히고 띄어쓰기까지 한 문자라니, 더 이상하다. 진지한 얘기를 할 건가?
“연애상담이라도 하려나.”
중얼거리고 나서 나는 픽 웃었다. 연애상담이라니, 내가 말했지만 말이 안 된다. 반대로 내가 하리에게 연애상담을 하면 모를까, 하리가 나에게 뭘 물을 일이야 없겠지. 그럼 무슨 일일까. 진로 고민? 과 아이들하고 사이가 안 좋나? 아니면, 그냥 노트 빌려달라는 이야기 이려나? 내가 노트 필기 안 하는걸 알 텐데. 설마 정수인가 하는 오빠 생일선물이라도 같이 골라달라는 얘기는 아니겠지. 그런 거면 진짜 자리 박차고 일어나버릴 거야, 최하리…….
“야.”
“으악!”
고개를 돌려 보니 내 어깨를 친 하리가 초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는 벌렁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하리에게 애매하게 웃어 보였다. 아우, 놀래라.
“왔네?”
“응. 늦어서 미안. 나, 커피 사 올게.”
라고 말하는 하리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하나도 없었다. 무슨 일이지? 커피를 사 오겠다고 말하고 카운터 쪽으로 가는 뒷모습도 어딘가 기운이 빠져 있었다. 아주머니께 돈을 치르고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하리는 왼다리를 조금씩 떨었다. 나는 기분이 점점 이상해졌고, 커피를 받아서 자리로 돌아온 하리의 손을 본 순간 기묘한 불안이 확고해졌다. 늘 꼼꼼하게 매니큐어를 바르던 하리의 손톱 주위 살이 군데군데 뜯겨 있었다. 오른손 검지에는 조그만 딱지까지 앉아 있었다. 머리카락을 뽑으면 뽑았지, 네일 아까워서라도 자기는 손톱은 못 건드리겠다고, 스트레스가 아무리 쌓여도 그럴 일은 없을 거라던 애였는데.
하리가 커피를 한 모금 빨더니 내려놓았다.
“무슨 일 있어?”
커피잔의 물기를 손가락으로 훑어내던 하리가 날 쳐다보았다.
“무슨 일?”
“뭐든지. 아, 무슨 얘기 하려고 보자고 한 거야?”
“일없이 보자고 하면 안 돼?”
“당연히 되지. 그런 뜻이 아니잖아, 알면서 왜 그래.”
내 목소리가 조금 재촉하는 듯 들렸을까. 하리는 커피를 다시 한 모금 마시더니 왼손으로 오른손 중지손톱 근처를 지분대기 시작했다.
“하리야.”
“응?”
“손톱, 아깝다.”
멍하니 날 쳐다보던 하리가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아, 하고 중얼거렸다.
“뭐 어때. 네일도 안 했는데.”
“그건 아니다 야…….”
“있잖아, 도현아.”
응, 하고 대답하고 나는 내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빨았다. 자연스러워 보이려고 한 행동이었는데, 텅 빈 내 커피잔에는 얼음 녹은 물밖에 없었다. 그래도 민망한 꼴꼴꼴 소리는 안 나서 다행이었다.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하리가 말했다.
“나, 임신한 것 같아.”

“도현아?”
내가 제대로 들은 건가.
“야, 정도현.”
“어, 응. 들었어.”
침묵이 흘렀다. 우리 사이로 떨어지는 햇빛이 환했다.
“그거…… 확실한 거야?”
주저하는 목소리로 내가 꺼낸 말이었다. 하리는 잠깐 동안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대답했다.
“잘은 모르겠는데, 그런 것 같아. 아마 거의 맞을 거야. 나 벌써 이 주 전에는 생리 시작했어야 되는데, 그럴 기미도 안 비치고. 전에는 이런 적 한 번도 없었거든. 그리고, 배에 이상한 느낌도 들어……. 뭐라고 설명하기가 힘든데 불편해. 그리고 허리에 이상한 두드러기 같은 것도 나고……. 찾아보니까 임신 초기증상 중에 두드러기도 있다고 그러더라.”
“그건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잖아.”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까.”
다시, 잠시 조용해졌다. 내 목 뒤로 흐르는 땀이 느껴졌다.
“그건 해봤어?”
“뭐?”
“그 왜 있잖아……. 확인하는 거. 테스트기.”
“아, 그거. 해봤는데…….”
“맞다고 나왔어?”
“그건 아니었는데,”
하리는 어느 새 다시 손톱 근처를 뜯고 있었다. 왠지 또 말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내가 처음에 오빠랑 그런 게……. 너 무슨 말인지 알지? 하여튼, 처음 한 게, 삼월 말이거든. 그때, 좀 취하기도 했고……. 그랬어서 아무 것도 없이 해 버렸어. 그러고 나서 겁이 나서, 사흘 뒤에 그걸 약국에서 사가지고 테스트를 해 봤거든. 그때는 아니라고 나온 거야.”
“그럼, 아니겠네.”
“들어 봐. 그래서 난 안심해가지고 그냥 넘어갔는데……. 그 뒤에도, 오빠랑 한번인가 더 했고……. 하여튼 그러다 보니 어느새 생리예정일이 한참 지나 있는 거야. 나, 지금까지 한 번도 생리불순 없었거든. 매번 예정일에서 하루나 이틀 정도밖에 차이가 안 났어. 그래서 이상해서,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니까 너무 일찍 테스트하면 결과가 확실하지 않다고, 예정일 지나서 확인해야 확실하다고 그러더라고. 그러니까 그때는 아니라고 나왔지만 그건 믿을 수 없는 것 같아…….”
거기까지 말하고 하리는 후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물을 마셨는데도 이상하게 입이 말라서 말을 꺼내기가 조금 힘들었다.
“그러면, 다시 해 보면 되잖아.”
“그거 테스트기 오류도 있대. 잘 모르겠어. 그리고,”
“그리고?”
“그걸로 또 보기는 싫어……. 기분 나쁘단 말이야. 차라리 산부인과에 가서 제대로 확인하고 싶어. 그래서 말인데 도현아,”
도현아, 라고 내 이름을 부르며 하리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겁에 질렸다. 설마.
“나랑 같이 산부인과 좀 가 주면 안될까?”
“싫어!”
나는 깜짝 놀랐다. 방금 그게 내가 낸 소리인가? 내가 왜 그렇게 소리를 쳤지? 날 보는 하리의 얼굴도 나만큼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하리가 입을 열어서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는데 내가 먼저 말을 내뱉었다. 하리가 무슨 말을 할 지 불안해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너, 그 오빠랑 가면 되잖아. 정수오빠란 사람이랑. 네 남자친구랑.”
네가 잔 사람이랑. 마지막 말은 입 안에서 삼켰다. 하리는 약간 상처받은 것 같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네가 가 주면 안 돼?”
“몰라. 싫어……. 좀 그렇잖아. 나 산부인과 한 번도 가본 적 없어.”
“나도 없어.”
“어쨌든 내가 갈 이유가 없잖아. 남자친구 데려가는 게 낫지 않아?”
“나도 싫어, 그건.”
“왜 싫은데? 어차피 그 사람이랑……. 그러니까, 그 사람이 원인을 제공한 거고, 그러니까 둘이 같이 가는 게 낫잖아.”
“모른단 말야, 정수 오빠는!”
반쯤 소리지르듯 그 말을 하고 나서 하리는 자기 앞에 놓인 컵을 꽉 쥐었다. 플라스틱 커피 컵이 우그러지면서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컵을 꽉 쥔 채로 하리는 날 쳐다보았다-아니, 노려본다고 하는 게 맞는 눈빛이었다.
“정수오빤 몰라. 계속 모를 거야. 얘기하기 싫어.”
“무슨 말이야 그게. 그 사람한테 얘기 안 하면 누구한테 하겠다고?”
“그런 거 알아서 정수오빠가 좋아할 리가 없잖아. 난리가 날 텐데. 부담 주는 것 같아서 싫단 말이야. 커플링 같은 것도 싫어해, 정수오빠. 매달리는 것 싫어하는 사람이고…….”
“장난해? 지금 그런 얘기 할 때야?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 이건.”
“그럼 이게 무슨 문젠데? 어쨌든 난 얘기하기 싫다니까?”
“그게 무슨 남자친구야! 서로 좋아하기는 하는 거야?”
“그거랑 상관 없어. 나랑 정수오빠 당연히 서로 좋아해. 안 좋아하면 잘 리가 없잖아!”
“자고 나서는 어떻게 돼도 상관없고? 그게 뭐야. 애초에 그 사람이 제대로 주의만 했으면 네가 이런 걱정 할 필요도 없잖아. 원인제공을 한 게 그 사람이고, 네가 지금 그것 때문에 이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그 사람한테는 얘기도 안 하겠다고? 그럼 그 사람은 그냥 너랑 잠이나 자고 그걸로 끝이야? 그게 여자친구가 맞긴 해? 야, 최하리, 그게 사귀는 거야?”
“시끄러워!
귀가 얼얼했다. 이번에는, 제대로 비명이었다. 카운터의 아주머니와 식당의 몇몇 사람들이 우릴 빤히 쳐다보았다.
“네가 뭘 알아!”
“좀 조용히 말해, 최하리. 사람들이…….”
“네가 뭘 아냐고, 정도현. 넌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나한테 말을 그 따위로 해? 나랑 오빠 사이에 대해서 네가 뭘 안다고 그렇게 말해!”
“야, 너야말로 무슨 말이 그래! 난 널 걱정해서 지금 말하는데,”
“그게 걱정하는 거야? 너 지금 날 혼냈잖아! 무슨 언니라도 되는 것처럼, 아무것도 모르면서! 표정은 썩어가지고, 아주 뭣같이, 완전 막 굴러먹은 애 본다는 눈빛으로 날 쳐다보면서!”
“너 진짜 말이 너무 심하다, 야. 지금 나한테 부탁하고 있는 거면…….”
“부탁은 무슨. 됐어, 필요 없어! 그거 알아? 애초에 너한테 얘기를 하는 게 아니었어. 자기는커녕 태어나서 남자친구조차 한 명도 없었던 애한테 무슨 얘길 해. 야, 정도현, 너 키스는 해 봤냐?”
나는 하리를 빤히 쳐다보았다. 내 표정이 이상할 것 같았다.
“그 얘기가 왜 나오는데.”
“키스는 해 봤냐고. 남친 없었던 거야 내가 아는데, 진짜 불쌍한 인생이다. 당연히 못 해봤지? 너, 누가 좋아해 준 적이나 있어? 누구 좋아해 본 적이나 있어?”
“하지 마, 너. 그렇게 말하지 마.”
“네가 누굴 좋아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알기는 하냐고!”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소리치고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급하게 움켜쥔 가방이 휘둘리면서 커피컵을 쳐 굴렸다. 땅에 떨어진 컵 뚜껑이 열리면서 몇 개 안 남은 얼음이 바닥에 쏟아졌다. 아까부터 우릴 쳐다보던 카페 아주머니가 어어, 하는 소리를 낸 것도 같은데, 나는 그냥 그대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뒤에서 하리가 뭐라고 하는지 혹은 아무 말도 없는지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학생식당 문을 열고 쏟아지는 따가운 햇빛 아래로 한참을 뛰다시피 걷고 나서야 정신이 든 것 같았다. 아름관과 소망관 사이에 멈춰 서서 숨을 고르는 얼굴 위로 땀이 흘렀다.

그날 밤은 잠이 오지 않았다. 온갖 생각에 머릿속이 복잡해서 이불 속에서 끊임없이 뒤척여야 했다.
‘누굴 좋아한다는 게 어떤 건지, 알기는 하냐’고?
네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아무리 내가 남자친구 한번 못 사귀어 봤기로서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넌 그렇게 잘나서 지금 그 꼴이니? 사랑 운운하고 연애에만 몰두하더니 지금 꼬락서니를 좀 보라지. 조심성 없이 굴다가 임신을 하게 된 기분은 어떤데? 그래 놓고서 남자친구도 아니고 친구에게, 네 말마따나 연애 한 번 못해본 친구에게, 함께 산부인과에 가 달라고 하는 네 모습은 우습지 않느냔 말이야. 스스로도 한심하다고 생각 안 해? 하긴 난 네가 그럴 줄 알았어. 언젠가 그럴 것 같았지. 데이트랍시고 연습반을 밥 먹듯 빠지고, 시험공부도 안 하고 이벤트나 준비하다가, 장학금 떨어질 때부터 이미 눈치챘다고. 그 연애란 것 때문에 네가 언제고 한 번 제대로 망가질 줄 알았다니까. 아, 이렇게 말해줬어야 하는데!
연애 못 해본 게 그렇게 잘못인가? 내가, 이상한가? 하지만 남자친구 한 번도 없었던 애들쯤이야 우리 학교에는 수두룩한걸. 당장 내가 아는 애만 꼽아 봐도, 지연이, 현정이, 이솔, 그리고……. 어쨌든 제법 되잖아. 당연하지. 여긴 뉴욕이나 도쿄가 아니잖아. 여긴 카이스트란 말이야. 밤낮 공부에 집중하고 책을 파다 온 성실한 애들이 모이는 곳인걸. 그런 속에서 남자친구를 몇 번이고 바꾼 하리가 오히려 이상한 거 아냐? 남자친구만 사귀면 다행이게, 대학 2학년이 벌써 남자랑 자기까지 하고! 이렇게 말하면 하리는 내가 구식이라고 하겠지? 하지만, 여긴 대한민국이고 카이스트이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혼전 순결은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는데, 내가 그렇게 뒤떨어진 건 아니잖아? 내가 뒤떨어진 건가?
그리고, 난 하리를 뭣같이 쳐다보지 않았어. 그렇지 않았어. 친구인데. 난 하리를 걱정했을 뿐이야……. 약간은 한심하게 생각했던 것도 같지만, 드러내놓고 경멸하는 눈으로 보지는 않았어. 하리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건 자격지심이 있었기 때문이야. 스스로 한심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쳐다 본 양 느꼈던 걸 거야. 그래서 괜히 나한테 화나 내고. 난 어쨌든 하리를 돕고 싶었던 건데. 도우려고 그런 건데! 아, 하지만 산부인과는……. 어떻게 해야 되지? 민망해서 어떻게 가, 산부인과를. 꼭 내가 가야 하나? 하리를 설득해서 그 오빠랑 가게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그 오빠란 인간이 같이 가 줄 위인인지는 모르겠지만. 휴우, 최하리, 왜 하필 나한테 얘기해가지고. 말마따나 연애 한 번 못해본 나한테.
‘정말, 왜 하필 나한테 얘기한 거야.’
하리가 왜 나한테 얘기한 걸까 - 생각해 보다가 나는 잠에 빠져들었다.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어젯밤에 늦게 잠든 탓 이려나. 어차피 화장할 생각도 없었으니 상관없다 싶은 마음으로 아침 수업에 들어갔다. 하리와 같이 듣는 수업이었다. 강의실이 넓어서 하리를 찾을 수는 없었지만, 여기 어딘가에 하리가 앉아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결국 문자를 하고 말았다. ‘수업 끝나고 자연과학동쪽 뒷문에서 보자’.
교수님께서 수업을 마치겠다고 말하시자마자 나는 강의실을 나와서 창의학습관 뒷문으로 갔다. 가 보니 하리가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었다. 나도 수업 끝나자마자 나온 건데, 참 빠르기도 하네,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도 잠시, 나를 발견한 하리가 주룩 눈물을 흘리는 바람에 나는 깜짝 놀라버렸다.
“하리야, 야! 울지 마!”
내 말은 들은 척도 않고 하리는 계속 흐느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내가 다가가서 손을 뻗자 하리는 내 손을 쳐내고는 얼굴을 감싸고 더 크게 울었다. 수업이 끝나고 몰려나온 아이들이 우리를 흘끔거렸고, 나는 민망해서 얼굴이 시뻘개졌다. 제발 그만 울라고 하리를 달래는데, 하리가 갑자기 계단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울음 사이로 뭔지 모를 말을 내뱉었다. 가만히 들어 보니 너무해, 너, 어떻게 네가, 그런 말인 것 같았다.
나는 하리의 옆에 주저앉아서 하리의 등을 어색하게 두드렸다. 누군가가 내 앞에서 이렇게 서럽게 우는 건 본 적이 없었다. 내가 얘를 그렇게 상처 준 건가, 막말은 자기가 다 해놓고 이렇게 우는 법도 있나 싶어서 조금 울컥했지만, 흐느껴 우는 하리를 보니 탓하는 마음도 곧 사라졌다. 오히려 내가 미안해졌다. 그렇게 단칼에 싫어-라고 거절하는 게 아니었구나 싶었던 것이다. 울먹이며 정도현, 네가 그럼 안 돼, 너무해, 그런 말을 계속 중얼거리는 하리를 보자 점점 더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내가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고등학교 때부터 하리에게는 여자친구가 별로 없었다. 남녀 분반에다가 교내연애라면 치를 떠는 학생주임이 있는 학교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리는 이 개월 이상 남자친구가 없는 시기가 없었고, 또 그 사실을 자랑으로 삼았다. 입시 때문에 눈에 핏발이 선 대부분의 아이들은 그런 하리를 아니꼽게 여겼다. 여자아이들의 수군거림이란 무서운 것이어서, 삼 학년 말쯤 되자 하리에게 친한 여자친구라 할 만한 아이는 나밖에 남지 않았다. 그조차도 내가 하리에게 깊은 정이 있었다든가 하는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단지 내가 하리의 수다나 아이들의 소문을 무던히 들어 넘기는 성격이었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하리와 내가 함께 카이스트에 진학했지만-나는 동아리에 들어가 새로운 사람들과 친해지느라 곧 하리와 붙어 다니지 않게 되었다. 어느 동아리에도 들지 않은 하리가 무학과 1학년을 변변한 사람사귐 없이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사실을 대수롭지 않게 넘기곤 했다. 그러다가 하리가 새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말을 하면 다행이구나 싶어서 언제나처럼 수다를 들어주고 헤어졌던 것이다.
남자친구를 바꾸고, 시험 끝나고 술 한잔 할 무리들을 사귀지 못하고, 학점은 떨어지면서, 하리가 조금씩 더 연애에만 매달려가는 동안, 나는 하리에게 마음 쓰지 않아도 좋을 핑계만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느끼는 열패감과 질투를 외면하기 위해서.
하리에게, 내가 어떻게 해야 했던 걸까.
“야.”
간신히 울음을 멈춘 하리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너 아이라인 다 번졌어, 최하리.”
하리가 눈물 젖은 눈으로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그런 하리를 보며 킥킥 웃었다. 나도 약간 눈물이 날 것 같았기에, 화장을 안 한게 다행이다 싶었다.
“너는, 지금 그런 말이 나와?”
그러면 달리 무슨 말을 할까? 해야 할 말이 있을까?
“최하리.”
“왜.”
“미안해.”
하리가 멍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뭐가 미안한데?”
“여러 가지. 특히, 어제 막 말 한 거.”
“……나도 미안해.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
“됐어. 너 내일 수업 몇 시에 끝나?”
“내일은 한 시부터 두시 반까지 교양 하나밖에 없어.”
“난 두 시에 끝나는데. 내일 너 수업 끝나고 병원 가자.”
하리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는 왠지 쑥스러워져서 그런 하리를 째려보았다. 뭐라고 위로를 해야 될 것 같은데 그런 말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정말? 같이 갈 거야?”
“그래, 가 준다. 내가 안 챙기면 누가 챙겨, 너를.”
“뭐? 네가 언제부터 날 챙겼다고! 웃기지도 않아.”
“까불어라? 언니가 착해서 참아 주는 줄 알아.”
“장난해? 언니? 내가 너보다 생일 이틀 빠르거든!”
“아, 어쨌든!”

금요일, 수업이 끝나고 하리와 나는 택시정류장에서 만났다. 평소에 힐을 즐겨 신던 하리가 웬일로 플랫슈즈를 신고 있었다. 신경 썼나? 나는 하이힐을 신고 있었기에 괜히 또각거리는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택시에 타고 나서 내가 목적지를 말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하리가 갤러리아타임월드요, 하고 말했다. 내가 하리를 쳐다보자 하리는 작게 그 근처에 있대, 검색해봤어, 하고 속삭였다. 아하, 그렇구나.
택시는 부웅 기세 좋게 달려갔다. 타임월드 앞에서 내려서 위쪽으로 길 건너 걸어가자 번쩍거리는 간판글씨를 단 ‘모태산부인과’라는 건물이 보였다. 나는 약간 긴장해서 침을 삼켰다. 산부인과 병원이 원래 이렇게 거대한가? 무슨 건물이…… 하나, 둘, 거의 칠팔 층은 되어 보이네. ‘친절의원, 편안한 몸’이라고 적힌 커다란 현수막을 앞에 건 그 건물은 정말이지 위압적이었다. 옆을 보니 하리도 놀란 것 같았다.
내가 머뭇거리며 말을 꺼냈다.
“여기 좀 너무…… 으리으리하지 않아?”
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다른 데 찾아 볼까? 적당히 작고 편할 것 같은 데로.”
“그러자. 응, 그러고 싶어.”
그 길로 더 올라가서 작은 간판을 단 ‘홍산부인과’라는 곳을 찾아내었다. 나와 하리는 주뼛거리며 삼층 계단을 올라 그 안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는 손님은 하나뿐이었고, 지루한 얼굴을 한 간호사 언니가 보험증 있어요? 라고 물었다. 하리는 손을 휘저으며 아, 아뇨, 하고 대답했다. 언니는 하리의 주민등록번호와 연락처를 받아 적더니 물었다.
“무슨 일로 왔어요?”
“……그……. 확인을 해보려고요.”
“뭐를?”
“임신했는지요.”
그 말을 하고 하리는 입술을 깨물었고, 간호사 언니는 나와 하리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했다.
“옆에는 무슨 사이에요?”
“어, 음, 무슨 사이냐 면요,”
“언니에요.”
하리가 고개를 돌려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언니에요.”
내가 거푸 말하자 간호사 언니는 고개를 숙여 컴퓨터에 뭔가를 탁탁 치더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하고 말했다. 우리는 대기자 의자에 가서 털썩 주저앉았다. 하리가 날 보며 찡그린 얼굴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시키지도 않은 짓을, 이라고 한 것 같은데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마땅한 대꾸가 생각나지 않아서 얼굴만 마주 찡그려주었다. 내가 왜 그랬지?
간호사 언니가 진료실로 들어가라고 말하기까지 십오 분 정도가 걸렸다.
태어나서 제일 긴 십오 분 인 것 같았다.

“이리로 오세요.”
의사선생님은 그 말을 하면서 고운 미소를 지었다. 여의사 분이었다. 진료실 문을 열고서도 반쯤 굳어 있던 하리와 나는 그 말을 듣고서야 의사 선생님이 있는 탁자 쪽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임신 여부를 확인하러 왔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아, 네, 맞아요. 저에요. 그럼 옆방에 가서 간호사 안내 받고 치마로 갈아입으세요. 하리가 부리나케 옆방으로 건너가고 나서 의사 선생님도 옆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에라 모르겠다 싶은 심정으로 곧 따라 들어갔다.
옆방에 들어가니, 하리가 아랫도리를 펑퍼짐한 긴 치마로 갈아입은 채였다. 타이트하고 스팽글이 박힌 하리의 연두색 티셔츠와 페이즐리 무늬가 들어간 할머니 치마가 어우러져서 놀랍도록 웃긴 모양새였다. 정말이지 너무 안 어울려서 나는 그만 깔깔 웃고 말았다. 그런 나에게 하리가 한 대 칠 듯 손을 올렸다가, 의사 선생님이 보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참아준다는 듯 손을 내렸다. 나는 웃음을 참느라 고생해야 했다. 의사 선생님이 그런 우릴 보다가 말했다.
“환자분 이 의자에 앉으세요.”
나는 웃음이 싹 가셨고, 하리의 얼굴에도 핏기가 가셨다. 하리는 머뭇머뭇 의자에 앉았다. 의사 선생님이 하리의 치마를 들출 때 나는 반대쪽으로 돌아섰다. 으아, 민망해.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어서 벽을 바라보던 나에게 의사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임신이 아니네요.”
“네?”
경악하여 대답한 것은 하리였다. 나는 급하게 돌아서서 의사 선생님을 쳐다보았다. 의사 선생님이 웃으며 초음파 영상이 비치는 모니터를 가리켜 보았다.
“임신이 아니라고요. 자궁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습니다. 단순한 생리불순 같은데요.”
“진짜요?”
“그럼, 진짜죠. 내가 뭐하러 환자분한테 거짓말을 해요.”
멍해 있는 우리 둘은 아랑곳하지 않고 의사선생님은 진찰을 계속하셨다.
“난소에도 이상이 없고……. 자궁에도 문제가 없고. 생리가 예정일보다 이 주쯤 늦었다고 했죠? 만약 임신이라면, 지금쯤 초음파 영상에 태아가 확실하게 보이거든요. 그러니 임신하지 않았다고 확실하게 말씀드릴 수 있겠네요. 환자분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하리는 뭐라 할 말이 생각이 안 난다는 얼굴로 나를 보다가 간호사를 따라 탈의실로 들어갔다. 마찬가지로 놀라 있는 나에게 의사 선생님이 말했다.
“보니까 학생인 것 같네요. 언니 분도?”
“아, 네.”
의사 선생님은 초음파 화상 화면을 끄고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날 보고 웃었다.
“그럼, 언니분이 얘기 좀 해줘요.”
“네?”
“제가 말 할 수도 있지만, 가족이 얘기하는 편이 듣기에 좋잖아요. 설득력도 있고.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아, 저, 네…….”
“나 갈아입었어, 도현아!”
의사 선생님의 말에 어리둥절해 있던 나는 깜짝 놀랐다. 고개를 돌리니 하리가 제 바지를 입고서 그보다 더 밝을 수 없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이상하다는 듯 나와 하리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언니한테 이름 불러요? 이상하네?”
으악, 최하리 이 멍청이.
“아, 네, 그게 저기……”
“저희가 좀 독특해요, 하하! 그럼 안녕히 계세요!”
“학생, 처방전 받고 가야죠! 생리불순 처방전!”
“맞다, 네!”

처방전을 받아 들고 우리는 일층의 약국으로 내려왔다. 약사에게 처방전을 전하는 하리는 희희낙락해 있었다. 거의 노래라도 부를 것 같은 표정이었다.
“좋기도 하겠다.”
“그럼, 좋지.”
“너 확실하다고 나한테 그러더니. 무슨 난리야 이게 다.”
“난 진짜 그런 줄 알았어! 날짜도 한참 지났고, 배도 이상하고…….”
“배가 뭐가 이상해? 아, 튀어나왔다고? 그래 보이긴 하네.”
“죽는다, 너?”
“아니, 진짜, 배 보면 네 기분이 좀 이해되기도 한다. 한 사 개월쯤은 되어 보이는 게 말이야,”
“야, 정도현, 그만해! 꺅, 치지 마!”
약국을 나서서 우리는 택시를 잡아 어은동으로 돌아왔다. 어은동 술집거리 고깃집에서 배가 터지도록 고기를 먹고, 카페에 가서 커피도 한 잔씩 마시고, 마지막에는 편의점에서 하겐다즈까지 하나씩 사 들고 돌아오면서 우리는 내내 수다를 떨었다. 온갖 얘기가 다 나왔고 얘기 끝머리마다 웃어대었다. 하리는 기필코 뱃살을 빼리라고 다짐했고 나도 그 다짐에 동참했다. 팔월까지는 살을 쫙 빼서 이효리 몸매를 만드는 거야. 우리, 비키니 입고 캐리비안 베이 가자. 이천원짜리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할 말이 아니지 않나? 오늘은 괜찮아!
“오늘은 괜찮아.”
아름관 앞에서 하리는 그렇게 말하면서 배부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리를 바래다 주러 따라 올라온 나는 마주 웃으며 잠시 서 있었다. 할 말이 있다는 티가 빤히 났는지, 하리가 들어가지 않고 아름관 문가 돌담에 기대 앉았다. 녹은 아이스크림을 핥으며 하리에게 말했다.
“야, 최하리.”
“응.”
“너 말야,”
그러지 마, 라고 말하고 싶었다. 관두라고. 그런 남자랑은 헤어지라고. 아직 대학생이니까, 우린 스물한 살밖에 안 되었으니까, 손만 잡고 키스까지만 하는 귀여운 연애를 하라고 말하려고 했다. 아니, 연애 따위는 아예 관두고 이제 슬슬 정신을 차리라고. 학점도 챙기고 진로 생각도 해야 하지 않겠냐고, 술자리에서 노는 남자 친구들보다 같이 밤새고 고민을 얘기할 여자 친구를 사귀라고……. 하리에게 그런 말을 해야지 싶었는데.
“할 거면 콘돔 쓰자고 해.”
정작 내 입에서 나온 것은 그 말이었다. 하리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나를 노려보더니, 입을 삐죽 내밀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놓였다.
“약속해라?”
“알았어.”
“꼭 얘기해, 네 남자친구한테. 그, 정수오빠란 사람.”
“알았다니까!”
하리가 발끈 쏘아붙이고 뒤돌아 섰다. 들어가려는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자니 하리가 몸을 돌렸다. 입을 벌렸다 닫았다 미적거리던 하리가 말했다.
“……고마워, 도현아.”
“알면 나한테 잘해.”
내 대꾸에 우리 둘 다 피식 웃었다. 하리가 씩 웃더니 말했다.
“보답하는 의미로 소개팅 시켜줘? 나 아는 07중에 진짜 괜찮은 오빠 있거든?”
“필요 없어!”
팩 쏘아붙이고 낄낄거리면서 나는 돌아섰다. 내 뒤로 하리의 밝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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