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과 석박사 통합과정 양성호

잠이 든 지 한참이 지난 것 같다. 어디선가 희미한 벨소리가 들린다. 꿈속에서 들리는 소리 같았지만, 이내 그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해졌고, 난 그 소리가 현실이라는 걸 알았다. 잠에서 깨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한 번 잠에 들면 절대 일어나지 않는 히로가 전화를 받을 리가 만무했다. 스탠드를 켜고, 힘겹게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모시모시”
전화 반대편에서는 흐느끼는 한 여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혜령짱, 히로 있어?”
히로의 어머니였다.
“네. 있습니다만, 무슨 일이세요? 왜 울고 계세요?”
“히로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어. 히로를 바꾸어줘.”
“네? 어머나, 어떻게…….”
순간 산소 호흡기를 달고 힘겹게 숨 쉬면서도 농담을 건네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히로짱! 오키로(일어나)!!”
난 그의 몸을 세게 흔들었다. 그는 몸을 좌우로 여러 번이나 뒤척였다. 어렴풋이 정신이 드는지, 귀찮은 투로 말했다. 
“무슨 일이야? 이렇게 깊은 밤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 빨리 전화 받아. 어머니야.”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앉았다. 그리고는 내 손에 든 전화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어머니, 뭐라구요?”
전화선을 따라 온 어머니의 흐느끼는 목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려왔다. 전화를 하는 히로의 목소리도 조금은 흔들렸다. 그는 전화를 끊고 잠시 앉아 있었다. 난 그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올리고 있었다. 그가 입을 열었다.
“함께 갈래?”
난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일어나서 옷을 챙겨 입었다. 히로는 아무 말 없이 운전을 했다. 슬픈 표정이었다. 평소 밝고 과감한 그의 성격에서는 볼 수 없었던 심각함이 묻어 있었다. 히로와 눈을 마주치기가 어색해서 창밖만 내다보았다. 고베의 밤거리는 현란한 조명으로 화려하지만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아 조용했다. 겉으로 웃고 있지만 속으로는 애가 타는 듯했다. 나에게는 항상 관대했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랐다. 할아버지는 히로가 나를 만나러 간다고 하면, 히로에게 천 엔짜리 몇 장씩 지폐를 꺼내어주시곤 했다. 한번은 방을 얻을 돈이 부족해서 쩔쩔맨 적이 있었다. 히로는 어디서 구했는지 모자랐던 돈을 해결해 주었다.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할아버지가 주신 돈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얻은 직장의 두 번째 월급날, 빚을 갚기 위해서 할아버지를 찾았지만 끝내 돈을 받지 않으셨다.
“혜령짱, 그냥 내가 주고 싶어서 준거야. 이 할아버지가 늙었어도 그 정도 능력은 있으니 걱정 말아. 나에게 갚을 필요는 없어. 대신 히로에게 그만큼 잘 해줘.”
아무리 눈물을 쏟아도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게는 잘해 주신 분이셨다. 히로가 보여주는 의외의 담담함 때문일까, 아직은 눈물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곧 눈물이 날 것만 같다.

할아버지는 병실 침대 위에 누워계셨다. 히로의 어머니는 침대 바로 옆 의자에 앉아 한참은 울었을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히로의 아버지는 창밖을 내다보고 계셨다. 아버지는 히로와 나를 잠시 쳐다보시고는 밖으로 조용히 걸어 나가셨다. 히로는 어머니 곁으로 가서, 어머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어머니는 어깨로 손을 내밀어 히로의 손을 잡았다. 할아버지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잠든 모습이셨다. 가까이 가서 보니 숨을 쉬어야 할 가슴이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았다. 이렇게 다시는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에 눈물이 났다. 가끔 엄마가 만들어준 김치를 싸들고 찾아뵈면, 눈이 없어지도록 좋아 웃으시던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선했다. 히로보다도 나를 더 챙겨주시던 할아버지 생각에, 참지 못하고 뜨거운 입김을 내뱉으며 울고 말았다. 내가 우는 모습을 보더니, 히로의 어머니도 우셨다. 어머니와 나는 껴안은 채로 울었다. 히로가 내 곁으로 와 내 귀를 가볍게 만지작거렸다. 장례는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화장으로 치러졌다. 할아버지의 유골은 할아버지께서 미리 준비해 두신 가족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소중한 누군가를 떠나보낸 기억이 없는 나로서는 요 며칠이 가장 많이 울어본 날들이었다. 히로는 슬픈 눈으로 내 손을 꼭 잡고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평소에는 긍정적이고 제 멋 대로이지만 큰 일이 닥쳤을 때는 차분히 감정을 조절하는 히로의 성격은 할아버지의 성격을 꼭 닮았다고 한다. 눈물로 부어버린 눈과 제대로 자지 못한 피곤함 때문에 장례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잠에 빠져들었다.

“혜령, 뭐라도 먹고 더 자는 게 어때?”
약간 어지러웠지만 꽤나 오랜 시간을 잤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히로가 쟁반에 음식을 담아왔다. 히로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혜령, 12시간이면 충분히 잔 것 같은데, 일어나야지?”
“응. 많이 잔 것 같기는 하네. 히로짱도 좀 더 자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
“나도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었어. 어머니께 전화가 오는 바람에 일어났어. 오늘 저녁은 같이 먹으러 집으로 오라고 하시네.”
“그랬구나. 히로짱, 괜찮아?”
“뭐가?”
“할아버지…….”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
히로는 잠시 말이 없었다. 난 괜한 말을 꺼낸 것 같다는 후회가 들었다.
“자. 먹고 일어나자. 이거 내가 오랜만에 특별히 만든 거야. 세계 최고의 라면 솜씨를 혜령을 위해서 발휘했어.”
히로는 빨리 회복한 듯 했다. 히로의 남자다운 면 그리고 낙천적인 면은 언제나 마음에 든다.

한 숨을 더 자고, 부모님 댁으로 향했다. 어머니께서 미리 저녁 식사를 준비해 두셨다. 피곤하던 터라 어머니의 초대가 반가웠다. 다들 서로를 위해서 아무런 일이 없다는 듯이 행동하려 했지만, 그런 배려가 오히려 분위기를 더욱 어색하게 만들었다. 전처럼 떠들썩하지는 않지만, 생각했던 것만큼 슬픔을 머금은 분위기는 아니었다. 식사를 끝내고 차를 마시고 있는데, 아버지께서 나무 상자 하나를 가지고 오셨다.
“히로, 이건 할아버지의 글을 모아 놓은 거야. 손수 묶어 두신 것 같구나. 첫 장을 읽어보니, 히로 너에게 남기는 글인 듯하구나. 가져가서 읽어 보거라.”
히로는 나무 상자에서 빛이 바랜 종이 묶음 하나를 꺼내었다. 얼핏 보기에는 종기 크기도 조금씩 다르고 종이의 바랜 정도도 모두 다른 것 같았다. 히로는 슬쩍 한번 훑어보더니 다시 나무 상자에 종이 묶음을 넣었다.
“나중에 천천히 읽어보겠습니다.”
히로가 아버지께 물었다.
“다른 유품들은 어떻게 정리가 되었나요?”
“아버지께서 평소에 워낙 정리를 잘 해두셔서 크게 정리할 것도 없었지. 서재 책상에 나무 상자가 있기에 한 번 보았더니, 네게 남긴 글 같더구나. 남은 책이나 유품 중에서 특별히 가지고 싶은 것이 있으면 가지고 가거라.”
“아니에요. 괜히 할아버지 생각만 더 날 것 같아요. 그냥 여기 두는 게 좋겠어요.”
한 시간쯤 어색한 대화가 오갔다. 평소와 달리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움직이는 소리가 들린다.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눈을 떠보니 스탠드 등이 켜져 있다. 그 빛 아래에서 히로가 무언가를 읽고 있다. 저녁에 건네받은 할아버지의 글인 것 같다. 어렴풋이 눈을 떴지만, 졸리는 마음에 다시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된 것 같다는 생각에 눈을 떴다. 히로는 침대에 기대어 멍하니 생각을 하고 있었다.
“히로짱, 자지 않은 거야? 괜찮아?”
“응. 괜찮아.”
히로가 갑가지 내가 누워있는 쪽으로 오더니, 얼굴을 내게 가까이 가져다 대었다. 그리고 내 귀를 살짝 잡아당겼다. 히로는 내 큰 귀가 콤플렉스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짓궂게도 일부러 계속 귀를 잡아당긴다.
“혜령?”
“응.”
“한국에 같이 가지 않을래?”
“에? 뭐라고? 잠을 못자서 이상해진 거 아니야? 갑자기 무슨 한국이야!”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한국에 가고 싶어졌다고.” 
“회사는 어떻게 하고? 벌써 삼 일이나 가지 않았잖아.”
“그야 장례식 때문이었지. 며칠 더 휴가를 내면 되지. 이번 여름에도 휴가를 못 갔잖아.”
“갑자기 한국에 가자고 하는 이유가 뭐야?”
히로는 일어서서 책상으로 가더니, 할아버지의 글 묶음을 가지고 와서 내게 내밀었다.
“할아버지…… 조선인이래.”
“뭐라고?”
난 조금 멍해져서 글 묶음을 쳐다보았다. 할아버지가 나와 같은 재일교포라고?
“혜령. 나 정말 한국에 가고 싶어졌어.”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야. 비자도 준비해야 하고 비행기도 예약해야 하잖아. 조금 천천히 생각해 보자.”
히로는 책상으로 가더니, 컴퓨터로 이것저것 알아보기 시작했다. 히로는 다시 긍정의 힘을 찾아버렸다. 갑자기 히로가 친근하면서도 낯설게 느껴진다. 중학교 시절에 딱 한 번 이런 낯설음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유키코가 자이니치(在日)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녀에게서 그런 낯설음을 느꼈었다. 유키코는 하얀 피부와 빨간 입술이 인상적이고 유달리 영어를 잘 하던 세련된 아이였다. 그녀의 입에서 영어는 나와도 한국말은 나올 것 같지 않았다. 실제로 유키코는 한국말을 전혀 못했지만, 어떤 공통점이 우리 사이에 생겼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그날 이후로 낯설음은 조금씩 친근함으로 바뀌어갔다. 나뿐만 아니라, 유키코도 나에게 그런 친근함이 생겨났던 듯하다. 그 날 이후로 바로 친해지지는 않았지만, 조금씩 서로에게 의지하기 시작했다. 영어 공부를 하다가 모르는 게 생기면, 꼭 유키코에게 물어보게 되었다. 얼마 후부터는 항상 붙어 다녔고, 중고등학교 내내 베스트 프렌드가 되었다. 유키코가 도쿄에 있는 대학에 가게 되면서 잠시 관계가 멀어졌지만, 유키코가 첫사랑에게 실연을 당하면서 다시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도쿄에서 만난 대학동기들에게는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겠다며, 거의 매일 밤 울면서 내게 전화를 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유키코는 삼 개월 동안 매월 거의 이십만 엔 가까이를 전화요금으로 내었다고 했다. 가끔 전화해서 위로해 준 나에게도 그 동안 거의 매달 삼만 엔의 전화요금이 청구되었으니,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유키코는 어마어마한 전화요금을 내기 위해서 외국계 기업에서 영어통역을 인턴을 시작했다가, 졸업 후에 그대로 그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지금은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는 커리어 우먼이 되었다. 지금은 한국 지사에서 일 년 째 일하고 있다. 이제는 멀리 떨어져있어도 서로를 베스트 프렌드로 여기는 사이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자이니치라는 사실을 안지 십 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유키코에게와 같은 친근함이 할아버지에게도 느껴진다. 할아버지를 더 자주 찾아뵈었어만 했었다는 의무감, 그리고 어쩌면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할아버지와 친했었을 수도 있다는 착각이 밀려온다. 유키코와 나를 이어주는 희미한 어떤 끈과 할어버지와 나를 묶어주고 있는 끈이 같은 재질로 만들어져 있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히로가 자이니치라는 사실은 너무도 낯설다. 더 이상한 것은 그 낯설음이 쉽게 동질감으로 바뀌지 않을 것 같다는 사실이다. 할아버지도 유키코도 엄격하게 말하자면 남일 뿐이다. 거의 십 년이 넘게 알고 지냈고, 십 년 가까이 연인으로 사귀었고, 이 년간 동거를 했던, 나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이 남자가 자이니치라고? 순간 우리가 다투었던 기억들이 스쳐지나간다. 난 그 다툼의 이유를 우리는 피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서로 다른 부분이 더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수없이 다투었던 기억들이 어이없게 느껴진다. 심하게 다툴 때면, ‘넌 일본인이고, 난 자이니치라서’라고 말했었다. 그 말은 우리 사이의 다툼을 끝내는데 특별한 효과가 있었다. 서로의 이질감을 확인함으로써 다툼의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었고, 우리는 아주 조금이나마 편안해졌었다. 서로에게 이물감을 느껴서일까, 그 말의 끝에는 언제나 어색한 침묵이 따라붙었다. 십 분전, 우리 사이에 일어났던 혹은 일어날 모든 다툼을 끝낼 수 있었던 이유가 사라져버렸다. 히로가 낯설어 보이는 이유는 아마도 내 복잡한 심경 때문이 아니라, 히로의 천연덕스러운 행동 때문일지도 모른다. 평소의 긍정적이고 즉흥적인 성격이 이 상황에서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일본인이라고 알고 있었던 자신이 자이니치라는 사실을 알았는데, 정작 히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보인다. 일본인이라고 믿고 삼십 년을 살다가 한순간에 자신의 몸에 한국의 피가 흐른다는 알았다면, 조금은 충격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어쩌면 할아버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이 신기할 뿐, 아직 자신의 정체성에까지는 고민이 닿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심경이 복잡해서 우선 아침식사를 준비하기로 했다.
“히로짱. 밥 먹어.”
컴퓨터를 두드리다가, 몇 장의 종이를 들고 와서 식탁에 앉았다.
“혜령. 여기 봐봐. 한국은 비자가 필요 없어. 그리고 비행기보다는 배가 좋을 것 같아.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부산에서 기차를 타면, 한국을 볼 수 있을 거야.”
“히로.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잖아. 천천히 생각 좀 해 보자고.
“글쎄. 빨리 가야만 할 것 같아.”
갑자기 저러는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지만, 진지한 눈빛은 반드시 그곳에 가야만 한다는 시위를 하는 듯 했다.
“혜령. 꼭 같이 가주어야 해. 난 한국말을 못하잖아.”
“목적지는?"
“도라산!"
도라산? 처음 듣는 산이다. 내가 아는 한국의 산은 딱 세 개뿐이다. 백두산, 금강산, 한라산.

배는 오사카 항을 떠난다. 오사카 항이 멀어져간다. 서쪽 하늘이 노을 져 있다. 고등학교 때, 수학여행으로 하와이를 다녀온 것 말고는 외국에 나가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이렇게 급작스럽게 외국으로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아직 실감나지 않는다. 히로가 한국에 가고 싶다고 한지 딱 이틀 만에 일어난 일이다. 큰 배를 처음 타보아서 조금 들뜨기도 했지만, 갑판에 나가서 바다를 보기에는 날씨가 꽤나 쌀쌀했다. 그냥 선실에서 차를 마시는 편이 나아보였다. 오전에 히로는 고베시 외곽에 있는 납골당에 들러서 길게 참배를 했다. 어쩌면 할아버지에게 자신에 대해서 물어보았을지도 모른다. 히로는 지금 혼란스러운 걸까? 아니면 아직도 갑자기 알아버린 자신에 대해서 실감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걸까?
“아, 벌써 춥네. 꽤나 쌀쌀하네. 한국은 북쪽이니까 더 춥겠지?”
히로가 옆으로와 배 난간에 기대었다.
“혜령. 같이 가주어서 고마워. 한국에 가는 기분이 어때?”
사실은 내가 물어보고 싶은 말이다. 난 어릴 적부터 자이니치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살아가는 동안 그것이 크게 문제된 적은 없었다. 윗세대에서는 자이니치라는 이유만으로 길을 가다 폭행을 당하거나 살인을 당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우리 세대에서도 취직이나 결혼에 불리하다든가 법을 어겼을 때 귀찮아진다든가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지만, 나에게 그런 문제가 직접 와 닿았던 적은 없다. 우리 세대 아니면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자이니치라는 사실은 서류상의 문제일 뿐이었다. 하지만 굳이 자이니치라는 사실을 밝히지는 않았다. 어쩌면 스스로도 자이니치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살았을 수도 있다. 부모님에게 배워서 한국말을 할 줄은 알지만 쓸 일이 없으니까, 자신이 한국말을 할 줄 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
“나야 부모님 세대까지 국적이 한국이었으니까,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살았지. 한국이라는 나라가 조금 특별하기는 하지만, 하와이를 갈 때만큼의 설렘은 없어. 히로야 말로 갑자기 자신이 한국계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데, 혼란스럽거나 하지 않아?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할아버지가 자이니치이면 나도 자이니치가 되는 걸까…….”
히로는 침묵했다. 이 주제로는 길게 대화가 될 것 같지 않았다.
“기억나?”
“뭐가?”
“우리 십년 전에 하와이 갈 때도 함께였던 거?”
“엉? 혹시 수학여행 말하는 거야?”
“그럼, 나 말고 다른 여자랑 하와이 간 적 있어? 내 인생의 해외여행은 전부 히로랑 가는 것 같다. 이대로라면 신혼여행도 히로랑 가겠지?”
“아하하. 그렇게 되나? 그때는 우리가 사귀기 전이니까 수학여행은 무효야.”
“에에? 그때도 나 좋아했었잖아. 모른 척 했었지만, 다 알고 있었어.”
“노. 코. 멘. 트.”
히로가 팔을 내 목에 두르고 헤드록을 걸었다. 장난인 줄 알지만, 너무 어릴 적부터 알던 사이라서, 여자 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 점이 아쉽다.

“혜령, 일어나. 이제 한 시간만 있으면 부산항이래.”
“벌써? 몇시야?”
“오전 아홉시야. 한국이 한 시간 느리니까, 곧 여덟시가 되겠지.”
히로는 이미 짐을 다 챙겨두었다. 간단히 세수를 하고, 갑판으로 올라갔다. 부산항이 바로 앞에 보인다. 
“저거 봐. 부산항이야. 히로, 혹시 이 노래 알아? 꽃 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아아, 나도 아는 노래야.”
히로가 뒷부분을 이어 부른다.
“아쯔이 소노무네니 카오우즈메떼 (뜨거운 그 가슴에 얼굴을 묻고), 모이치도 시아와세 카미시메따이노요 (다시 한 번 행복을 음미하고 싶어요), 도라와-요 부산한-에 아이따-이 아-나타 (돌아와요 부산항에 보고 싶은 당신).”
히로의 ‘도라와요’라는 발음이 너무 귀여워서 크게 웃어버렸다.
“에에? 내 노래가 별로야? 왜 그렇게 웃어?”
“아니, 아니. ‘도라와요’라는 발음이 너무 재미있어서 그래. 히로짱은 이 노래를 어떻게 알아?”
“할아버지의 레퍼토리였어. 가라오케에 가면, 항상 부르시던 노래야. 어릴 적부터 많이 들어서 그런지 가사도 안 잊어버리네.”
“이 노래 원래 한국 노래야. 일본 가사는 남녀 간의 이별에 대한 연가이지만, 한국 가사로는 어디론가 떠난 형제를 그리워하는 노래야. 이 노래가 나왔을 시기가 자이니치들이 고국 방문을 많이 하던 때였대.”
“그래? 어느 쪽이든지 그리움에 대한 노래구나. 그런데 ‘도라와요’가 무슨 뜻이야?”
“한국말로 돌아와 달라는 뜻이야.”
“지금 우리 상황에 정말 잘 맞는 노래네.”
히로가 우리라고 하는 말을 듣자, 왠지 뭉클하다. 한 전시회에서 본 전쟁의 폐허를 배경으로 천진하게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 기억난다. 만약 사진 속의 아이가 울고 있었더라면, 흔한 전쟁 사진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비록 우리가 그 아이만큼 비극적이지는 않지만, 웃고 있는 아이의 모습과 지금 히로의 모습이 닮아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렇지 않게 지금을 받아들이는 그의 단순함 때문에 더 뭉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거의 제일 앞에 서있었던 까닭에 입국수속은 놀랄 만큼 빨리 끝났다. 줄지어 있는 택시에 오르려는 찰나, 여기저기서 항의하는 택시기사의 소리가 들린다. 당황해서 무슨 말인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아가씨! 저쪽 제일 가에 있는 택시부터 타이지요.”
“네? 무어라고 하셨습니까?”
뒤쪽에서 다른 기사가 소리친다.
“손님들, 이 차 타면 되요. 빨리 타이소.”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히로는 짐가방을 들고 주위를 신기한 듯 둘러보며 내 뒤를 따라온다. 조금은 어렵게 택시에 탔다. 택시기사가 시원스럽게 말한다.“여 규칙이 있어서 그렇심더. 제일 가새부터 타야지 안부터 탔다하면, 생난리를 친다 아입니까.”
“아, 네.”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했지만, 알아들은 척을 해 버렸다.
“어데 가십니까?”
“부산역 부탁합니다.”
“말투가 부산 사람도 아이고, 서울 사람도 아이고, 꼭 북한사람 같네요.”
소학교 때까지 조총련계 학교를 다닌 탓에 내 한국어는 남쪽보다는 북쪽에 훨씬 가까웠다. 택시기사가 그런 것까지 알아챈 것이 조금은 놀라웠다.
“재일교포입니다.”
“그러면 일본사람이네요. 한국말도 잘 하시고, 대단하십니다. 한국은 처음입니까?”
“네.”
일본사람? 자이니치가 일본인인가? 내가 자이니치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당연히 나를 일본인으로 알고 있다. 내가 자이니치라는 사실을 알고 나면, 사람들은 나를 조선인 혹은 한국인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택시기사는 내가 자이니치라는 사실을 알고도 나를 일본인이라고 한다. 나는 일본에서는 한국인이고, 한국에서는 일본인인가? 유키코, 엄마, 할아버지, 히로, 그리고 나……. 옆에서 히로가 내 옆구리를 찔렀다. 순간 놀라서 히로를 바라보았다.
“혜령짱, 뭐하고 있어? 기사분이 뭐라고 물어보는데.”
일본사람이라는 말이 꽤나 충격이었나 보다. 기사가 하는 말도 듣지 못했다.
“아, 죄송합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뭔 일로 한국에 오셨는지 물어봤심니더.”
“단순한 여행입니다. 제가 한국말이 서툴러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재빨리 히로의 어깨에 기대었다. 기사가 계속 말을 걸 것 같아서 외면해 버렸다. 히로는 바깥의 풍경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다행히 부산역은 얼마 걸리지 않았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히로는 호들갑을 떨었다.
“와! 혜령도 봤지? 택시, 엄청 나게 빨랐어. 차를 앞지르고, 신호도 그냥 무시하고! 액션 영화 같아. 우하하하, 마음에 엄청나게 드는데.”
“바보, 뭐가 그렇게 좋아? 과속운전이?”
“아아, 한국 마음에 들어.”
그렇게 말하고는 나에게 또 헤드록을 걸었다.
“아아, 나도 여자 대접 좀 받아보자.”
“내가 짐도 들어주잖아.”
아랑곳 하지 않고, 히로는 헤드록을 한 채로 역사를 향해 걸어갔다.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열차 안은 한산했다.
“열차는 언제 출발해? 서울은 언제 도착해?”
히로는 오사카항을 출발하는 순간부터 완전히 아기가 되어버렸다. 나를 엄마로 생각하고 졸졸 쫓아다니고, 주변에 신기한 것이 있으면, 이게 뭐냐 저게 뭐냐 물어본다. 건네어 준 차표에 분명히 출발시간과 도착시간이 적혀져있을 텐데도, 숫자마저 모르는 아기로 돌아간 듯하다.
“히로짱, 아기가 되어버린 거야? 출발시간과 도착시간은 차표에 숫자로 적혀 있잖아.”
“흐흐, 혜령짱이 가이드해주니까, 편해서 좋네. 일본으로 돌아가면 혜령짱이 아기가 되도록 해.”
그냥 웃어주기로 했다.
“이건 한국의 신칸센이니까, 2시 전에 서울에 도착할거야.”
“2시라고? 그럼 밥은 어떻게 하지. 이거 배가 엄청 고플 것 같은데. 한국 기차에도 판매원이 있을까?”
“글쎄. 그런 것까지는 잘 모르겠네.”
열차가 움직였다.
“오오, 간다. 간다.”
바보 같다. 때때로 바보 같지만, 그 덕분에 가끔 찾아오는 나의 우울함이 오래가지 못한다.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지만, 나와 다르기 때문에 히로가 좋다. 남자다움, 단순함, 명랑함 그리고 헤드록까지도. 확실히 히로에게는 일본 남자들과 다른 점들이 있었다. 삼일전만 해도 히로는 일본인이었다. 삼일 전에도 난 히로가 일본남자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가. 히로의 할아버지가 자이니치라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나는 히로가 일본남자들과 다른 점들을 찾아내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다. 어쩌면 히로를 자이니치라고 부르기에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히로의 할머니 그리고 어머니가 일본인이라면, 히로는 적어도 사분의 일만 자이니치이지 않을까? 히로의 정체성이 크게 흔들리지 않는 건 아마도 그 이유때문일지도 모른다. 정체성의 혼란도 딱 사분의 일 만큼이지 않을까?   
“히로? 할머니와 어머님은 일본인이셔?”
“음. 그런 건 물어보거나 들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어. 당연히 그런 부분이 궁금했던 적이 없었거든. 할아버지가 남긴 글로 추측해 보면, 아마도 할머니는 일본인이셨을 거야.”
“그래?”
“응. 할아버지는 원래 개성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서, 스무 살도 되기 전에 대전(大戰)에 강제로 나가게 되셨어. 전쟁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갈까 고민을 하셨는데, 전쟁 중에 오키나와에서 만난 할머니와 결혼을 하고 일본에 정착하게 되었대. 그러니까 아마도 할머니는 일본인이셨을 거야. 조선인 전우들과 고베에서 조선인들에게 싸게 집을 지어주면서 건축업을 시작하셨어. 일본인들과 달리 집을 엄청 빨리 짓기로 유명했었나봐. 그런데 사업이 점점 커져나가면서, 문제가 생겼대. 조선인 회사라는 이유 때문에 관청에서 건축허가도 잘 내어주지 않고, 야쿠자들도 노골적으로 돈을 뜯어가서 사업이 점점 어려워졌었지. 결국 사업이 망할 지경에 이르게 되었지. 회사가 망하면 같이 일하던 자이니치들도 모두 일자리를 잃을 상황이어서, 끝까지 버티다가 할아버지가 일본으로 귀화하기로 한 거야. 귀화한 이후에는 관에서 하는 공사도 많이 할 수 있게 되고, 야쿠자들도 덜 괴롭혔대.”
“그 시대에는 그런 차별이 있었구나. 원치 않게 일본인으로 귀화해야했던 할아버지의 심정은 어땠을까?”
“사업이 망할 지경이 되어서야 귀화를 선택한 걸 보면, 아마 무척이나 힘드셨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게다가 함께 일하시던 분들은 모두 조선 국적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만 일본인이 된 거니까 더 마음이 안 좋지 않았을까 싶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내심 조국을 등진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으셨던 것 같아. 어릴 적에 들은 이야기인데, 결혼할 때 아버지와 어머니가 결혼할 때 할아버지가 엄청 반대하셨다고 했어. 그래도 아버지는 어머니와 결혼을 했고, 내가 세 살 때까지는 할아버지랑 아버지가 서로 연락도 하지 않고 살았었대. 지금 드는 생각이지만, 어쩌면 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일본인이어서 결혼을 반대하신 게 아닐까?”
“설마 그 이유 때문에 결혼을 반대를 하셨을까?”
“사실 잘 모르겠어. 방금 그런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왜 있잖아. 유키코도 그 녀석의 집안에서 반대해서 결혼을 못 했잖아.”
무언가 말을 하려고 히로를 쳐다봤더니, 히로는 다른 곳을 쳐다보며 웃고 있다. 판매원이 우리가 탄 차량으로 들어와 있었다.
“왔다. 왔어. 배고파 죽는 줄 알았네. 마구 먹어버려야지.”
지나가는 판매원을 요란하게 불러 세웠다. 말이 통하지 않지만, 손가락만으로 과자, 초콜릿, 소시지, 삶은 달걀, 우유를 샀다. 난 녹차만 샀다. 히로는 허겁지겁 먹었다.
“이 우유 봐봐. 요상하게 생겼네. 바나나 맛이야. 한번 마셔 봐”
“아니, 난 괜찮아. 별로 배 안 고파.”
“나중에 배고프다고 하기 없기야.”
히로는 항아리 모양으로 생긴 병에 든 우유를 한번에 들이켰다. 바깥 공기는 쌀쌀했지만, 차창 밖의 풍경은 따뜻해 보였다. 기차는 넓은 강을 따라서 빠르게 흘러갔다.

“지금 도착하는 역은 대구, 대구역입니다. 내리시는 손님 안녕히 가십시오. 마모나꾸 대구 에끼니 도차꾸잇데 시마스. 오오리노 오갸꾸사마와 도오조 오오리 고자이마스.”
방송 안내음이 들려온다. 이틀만에 듣는 나 아닌 사람의 일본어가 반가웠던 모양이다.
“에에? 일본어로도 알려주네.”
“그러게. 신기하네.”
기차가 서고 사람들이 내리고 탔다. 창밖으로 내리고 타는 사람들을 보는 것만으로는 여기가 한국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없었다. 까만 머리, 까만 눈, 옷매무새, 아이를 안아서 기차에 태우는 엄마, 담배를 피우고 서 있는 할아버지, 간이매점에서 우동을 퍼 올리는 아주머니, 김이 나는 우동을 한 젓가락 먹고 있는 아저씨. 모두 고베의 풍경과 다를 바가 없었다.

서울역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2시였다. 히로가 밥부터 먹자고 졸랐지만, 종합안내소를 찾아 목적지로 가는 방법을 물어보기로 했다. 안내소에는 유니폼을 입은 두 명의 여자가 앉아있었다.
“안녕하세요. 길 좀 물어보려고 합니다.”
“네. 손님, 어디를 가십니까?”
“도라산역이라는 곳을 가려고 합니다. 인터넷으로 알아보니, 기차로만 갈 수 있는 곳이네요.”
“네, 도라산역은 문산역에서 출발하는 열차가 1시간마다 한 대씩 있습니다."
“문산역은 어떻게 가면 됩니까?”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하시면, 가실 수 있습니다. 기다리시는 시간 포함해서 넉넉히 1시간정도 걸립니다. 그런데 지금 시간이 2시가 넘어서 도라산역으로 가시기에는 조금 촉박할 듯합니다. 도라산역은 특수한 역이어서 5시 30분인 막차를 타고 다시 문산역으로 나오셔야만 합니다. 지금 서둘러 문산역으로 가시면, 한 시간정도 도라산역에 머무실 수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고맙습니다.”
히로는 안내소에 배치된 여행 안내서를 읽어보고 있었다. 일본어로 된 안내서도 있었다.
“히로짱, 지금 바로 출발하면, 도라산역에서 한 시간정도 머물 수 있대. 특수한 역이라서 다섯 시 삼십 분까지밖에 있을 수 없대.”
“그래? 그럼, 우선 밥을 먹고, 내일 가는 게 어때?”
히로는 태평스럽다. 기왕 늦었으니, 밥을 먹고 보자는 식이다. 능청스러운 표정을 보니, 밥을 빨리 먹을 수 있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는 듯하다.
“혜령짱은 배 안 고파? 먹고 싶은 거 없어? 한국에 왔으니, 한국 음식을 먹어 봐야지.”
“난 한국 음식에 익숙하니까, 그다지 생각나는 게 없는데…….”
“그럼, 된장국 한번 먹어보자. 혜령짱의 어머니 된장이랑 비교 한 번 해보자.”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히로는 역 안에 있는 한국 식당 쪽으로 발을 옮겼다.
히로는 된장찌개를, 나는 불고기 덮밥을 주문했다. 히로는 된장찌개가 나오자, 후후 불어가며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아, 뜨거워. 된장찌개는 일본 된장보다 훨씬 진하네. 혜령짱의 어머니 된장보다도 훨씬 진해.”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돌아가셨고, 엄마는 생계를 위해서 반찬가게를 하셨다. 다쿠앙, 우메보시, 된장, 간장 같은 것을 팔았다. 어릴 적에는 몰랐지만, 자라면서 우리 집의 된장 맛이 다른 집과 다르다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우리 집 된장은 일본인이 먹기에는 진하고 자이니치가 먹기에는 조금 묽었다. 엄마는 일본인과 자이니치 모두에게 된장을 팔기 위해서 중간 정도의 맛으로 된장을 만들었을 거다. 아니면 엄마도 한국의 된장 맛을 정확하게 몰랐기 때문에, 어중간한 맛이 되었을 지도 모른다. 반찬가게는 엄마와 내가 겨우 살아갈 수 있는 정도의 돈만을 벌어다 주었다. 고등학교 2학년 무렵이던가, 뜻하지 않게 우리 집 된장이 유명해지면서 갑자기 형편이 좋아졌다. 우리 집 된장이 유명해진 것은 된장이 맛있어서가 아니었다. 엄마는 십 미터 밖에서도 원하는 된장 항아리에 정확하게 주걱을 꽂는 재주가 있었다. 그것도 손잡이 부분은 반듯하게 하늘을 향하도록 말이다. 오래 된장을 팔면서, 저절로 생긴 능력이었다. 어느 날 고베 지역 방송에 엄마의 주걱 꽂는 실력이 소개되었다. 지역의 명물이나 재미난 사람을 찾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날 이후로 엄마의 주걱 꽂는 실력을 보기 위해서, 손님이 줄을 서서 기다렸다. 엄마의 일하는 자리는 된장 항아리 옆이 아니라, 된장에서 몇 미터 떨어진 가게 입구가 되어버렸다. 학교에 다녀오면, 나는 엄마가 던져서 꽂은 주걱을 빼어서 된장을 퍼서 담아주는 일을 해야 했다. 덕분에 학교에서 내 별명은 미소히메(된장공주)가 되어 버렸다.
“혜령짱도 먹어 봐. 미소히메가 미소를 먹어야지. 이게 진짜 된장이야.”
히로가 놀리며 된장찌개를 담은 숟가락을 내밀었다. 난 살짝 눈을 흘긴 다음에, 된장찌개를 한 술 받아먹었다. 일본의 된장보다 냄새가 훨씬 강했다.
“맛있네.”
“그렇지? 할아버지가 한국인이라서 그런가? 이 된장이 더 친하게 느껴지는데.”
“바보. 우리 엄마 된장 맛에 익숙하니까, 당연히 이 맛이 더 친근하겠지. 네가 일주일 한 달에 한 번씩은 우리 집에 된장을 사러왔었잖아.”
“아아, 그건 말이야. 할아버지가 시켜서 그래. 이상하게 된장 심부름은 꼭 나에게 시키셨다니까.”
“정말 할아버지가 시켜서 심부름 온 거야? 난 나 보려고 일부러 네가 계속 오는 줄 알았는데......”
“에에? 그런 착각을! 그 때는 절대 아니었다. 정말 할아버지가 된장 심부름은 꼭 나를 시켰었어. 안 하려고 하면, 심부름 값으로 천 엔씩 주셨거든. 나에게는 짭짤한 아르바이트였지."
“거짓말쟁이. 지금 지어내는 이야기 아니야?”
“아니래도 그러네. 내가 그 날만 생각하면 끔찍하다. 나 너희 어머니 주걱에 맞은 적도 있어.”
“정말? 언제? 왜?”
“된장을 사러갔는데, 갑자기 주걱이 날아와서 내 뒤통수를 때리더라고. 너무 당황해서 막 달려서 집으로 왔는데, 머리가 된장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어. 아무리 씻어도 된장 냄새가 안 없어져서 죽는 줄 알았어.”
“아! 그 일 기억난다. 엄마는 도둑인 줄 알고 주걱을 던졌다고 하셨어. 누가 우리 가게를 기웃거려서 말이야. 그게 너였구나. 보나마나 내가 있나 보려고 기웃거리니까 엄마가 도둑인 줄 알고 던졌겠지.”
“된장공주님, 제발 꿈에서 깨어나세요. 그 때는 아.니.었.어.요.”
여자에게는 직감이 있다. 처음에 히로는 정말 된장 심부름을 왔었지만, 나와 눈이 마주친 다음부터는 가게에 와서 곁눈질로 나를 쳐다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학교에서 마주치면 애써 눈을 피하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했다. 히로가 고분고분 자수하지 않으니 이쯤에서 져 주기로 하고, 밥을 먹었다. 이 식당의 불고기 덮밥은 별로였다. 난 아직 반도 먹지 않았는데, 히로는 벌써 다 먹어버렸다. 식사 속도를 맞추어주는 매너가 있었으면 좋겠다. 히로는 배를 채운 후에야 이후의 일정에 대해서 고민하기 시작했다.
“도라산은 못 가지만, 서울을 즐길 시간은 충분하네. 어디를 가볼까? 혜령짱은 가보고 싶은 곳 없어?”
“별로 없는데.”
“갑자기 오다보니 어디가 좋은지도 잘 모르겠네.”
히로는 여행 안내소에서 받아온 안내서를 뒤적거렸다.
“맞다! 유키코가 서울에 있잖아. 서울 안내를 부탁해 보면 어떨까?”
“유키코? 한국에 온다고 연락도 안 했는데, 어떻게 연락을 해.”
“혜령짱이랑 유키코는 베스트 프렌드잖아.”
“그래도 갑자기 불쑥 연락하는 건 좀 미안한데…….”
“노, 노, 노. 혜령짱이 한국에 왔다가 연락도 안 했다는 걸 알면, 나중에 유키코가 더 섭섭해 할 거야.”
확실히 히로의 말은 설득력이 있었다. 너무 상대를 배려하다보면 서로가 친해질 수 없다. 히로의 스스럼없음에 비하면, 난 너무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한다. 마치 일본인처럼. 일본인 속에서 살다보니, 일본인처럼 생각하고 행동할 수밖에 없다.
“히로짱 말이 맞아.”
전화기를 꺼내들고, 유키코에게 전화를 했다. 벨소리 대신에 빠른 템포의 한국 가요가 들려왔다. 히로를 보니, 잔뜩 기대한 눈빛이다.
“여보세요.”
유키코는 일 년정도 한국에 살더니, 이제 한국말로 전화를 받는가보다.
“유키코, 나 혜령이야.”
나라는 걸 알고는 다시 일본말이다.
“아, 혜령. 전화번호가 이상하네?”
“응. 사실 지금 서울이거든?”
“에에? 정말 서울이라고?”
“응. 히로와 함께 왔어.”
“정말? 오기 전에 미리 연락 주었으면 공항으로 마중 갔을 텐데.”
“미안. 사실 배를 타고 부산으로 왔어. 너무 갑자기 오는 바람에 연락을 못 했어. 히로군이 갑자기 가자고 해서 말이야.”
“아아, 어찌되었든 잘 되었네. 지금 서울 어디야?”
“지금은 서울역이야. 방금 여기서 밥 먹었어.”
“그래? 그럼 이후에 계획은?”
“사실 계획이 없어.”
“그럼, 한 시간만 기다려줄래. 내가 조금 일찍 마치고 서울역으로 갈게.”
“아니, 우리 때문에 일부러 일찍 마치지는 않아도 돼.”
“괜찮아. 혜령이 한국에 왔다는데, 당연히 가야지. 게다가 가끔 조기퇴근도 해주어야 해. 아니면 너무 열심히 일하는 사람으로 취급당해서 일이 몰린다니까.”
“너무 급하게 오지 말고 천천히 와.”
“늦어도 한 시간 뒤에는 도착하니까, 한 시간 후에 서울역 앞에 택시 타는 곳에서 보자.”
“알았어. 있다가 봐.”
전화를 마치자, 히로가 기뻐서 들떠있다.
“역시 친구란 좋은 거야. 이렇게 갑자기 불러내도 오고 말이야.”
“조금 미안하네. 그래도 오랜만에 보니까 반갑네.”
“난 거의 삼 년만에 보는 것 같네. 네덜란드로 출국할 때, 배웅한 게 마지막이었을 거야. 유키코는 세계를 돌아다니는 커리어 우먼이 되어버렸구나. 멋지네.”
우리는 식당을 나와서, 바로 옆에 있는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며 유키코를 기다렸다.

차가 멈춰 섰고, 우리는 복잡한 거리를 함께 걸었다. 히로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유키코, 여기가 어디야?”
“인사동이라는 곳이야. 한국 전통 상품을 파는 유명한 거리지. 외국인들이 오면 꼭 들르는 관광 코스 중에 하나야.”
가끔 한국적인 물건을 파는 가게들이 있기는 했지만, 건물에서 특별히 전통적인 느낌이 나지는 않았다. 건물은 모두 새 것이었다. 히로는 저만치 뒤에서 부채, 탈, 전통 인형 같은 물건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나에게는 익숙한 것들이지만, 히로에게는 새로운 것들이다.
“혜령, 이렇게 갑자기 한국에 온 이유가 뭐야?”
“사실, 히로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
“저런……. 어쩌다가?”
“예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으셨거든.”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일이랑 한국에 온 일이랑 무슨 상관이야?”
“히로의 할아버지가 자이니치였대.”
“정말? 그럼, 히로도 자이니치?”
“글쎄다. 할아버지가 자이니치인 건 맞지만, 히로를 어떻게 봐야할지…….”
“그래도 신기하다. 우연치고는 너무 기막히잖아. 너랑 히로는 천생연분인가보다.”
“천생연분이라기에 우리는 성격이 너무 달라. 성격 차이 때문에 너무 많이 싸웠었거든. 요즘은 서로 잘 아니까 덜 다투지만 말이야. 어쩌면 다투기 싫어서 피해주는 걸 수도 있고. 그때는 다투는 이유가 피가 달라서라고 생각했거든. 한국인과 일본인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라고. 히로의 할아버지가 자이니치라는 걸 알고 나서는 내가 믿던 이유들이 사라져버렸어. 그래서일까, 히로가 마치 다른 사람처럼 어색하게 느껴져.”
“그건 갑자기 어떤 공통점이 생겨나서 그런 걸지도 몰라. 예를 들면, 같은 자이니치라는 어떤 동질감 같은 거 말이야. 만약 너와 히로가 서로 성격이 다른 이유에 대해서 여기 사람들에게 물어봤다면, 아마도 너희 둘의 혈액형이 뭔지를 물어 봤을 거야.”
“그건 무슨 뜻이야?”
“한국에서는 남녀가 서로 다투는 이유가 혈액형 때문이라고 생각하거든. B형 남자와 A형 여자는 잘 안 맞는다는 식이지. 어째든 한국 사람들도 피가 달라서 서로 잘 맞다 안 맞다 생각하는 건 혜령과 마찬가지인 것 같네.”
“혈액형이라…….”
그건 좀 말이 안 되는 것 같다. 인간의 종류가 네 가지 밖에 없을 리는 없으니까. 한편으로는 차라리 일본보다 나아보였다. 일본에는 일본인과 일본인이 아닌 두 종류의 인간만이 있다. 일본인이 아닌 인간을 다시 두 종류로 나누면, 자신들과 똑같이 생긴 사람과 다르게 생긴 사람이 있다. 그리고 굳이 순위를 따지자면, 똑같이 생긴 사람은 다르게 생긴 사람들보다 아래쪽에 있다. 똑같이 생겼으면, 동질감 때문에 순위가 더 높을 거라는 예상은 철저히 빗나간다.
“유키코, 중학교 때, 자이니치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았을 때 반응이 어땠어? 기억이 나?"
“기억은 나지. 굳이 비교하자면, 난 동성연애자입니다 하고 커밍아웃하는 정도라고 보면 될 거야. 친했던 친구들의 충격이 좀 컸었지. 대부분은 관심이 없을 거고, 열려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렇지 않지만, 닫혀있는 사람에게는 다소 혐오감을 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닐까."
“그 정도였어?"
“매일은 아니지만, 때때로 그런 혐오감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지."
“난 어릴 적부터 알고 있어서, 그렇게 큰 충격은 없었던 것 같아."
“맞아. 나처럼 다 커서 알게 되는 것보다 어릴 때부터 아는 게 나을지도 몰라."
뒤를 돌아보니, 히로가 없었다.
“어? 히로가 안 보이네.”
유키코와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히로는 가게에서 이상하게 생긴 탈과 한복을 입은 여자 인형을 사고 있었다.
“이거 사서 집에 장식해 둬야겠다.”
인형은 마음에 들었지만, 탈은 집에 걸고 두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는 두 시간 가량을 걸었다. 청계천, 시청을 지나 명동까지 왔다. 히로는 해가 저물자 배가 고프다고 야단이었다. 유키코는 명동의 유명한 갈비집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방이 따로 되어 있는 제법 고급 식당이었다. 식당에 들어서 코트를 벗은 유키코는 놀랄 만큼 짧은 치마를 입고 있었다. 음식이 하나씩 준비되어 나왔다. 갈비 굽는 냄새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오늘은 내가 낼 테니까 마음껏 먹어.”
“잘 먹겠습니다. 역시 한국 갈비가 최고야.”
히로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넙죽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는 걸신이 들린 듯 갈비를 먹어치웠다.
난 조금 난처했다. “멀리서 왔으니까, 내가 사는 거야. 여기는 한국이니까 한국식으로 할게. 그러고 보니, 히로는 정말 한국 남자들 같다. 히로가 항상 나랑 혜령을 만날 때면 밥값을 내어주었잖아. 한국 남자들은 원래 여자 친구 밥값도 내어주거든. 항상 혜령짱이 부러웠는데, 나도 한국 와서 마음껏 누리고 있는 중이야.”
히로는 머리를 긁적인다.
“사실 할아버지가 혜령을 만날 때는 항상 돈을 주셨거든. 혜령을 만나러 간다고 하면, 꼭 천 엔씩 주셨어. 남자는 여자 만날 때 돈이 있어야 자신감이 생긴다고 하시면서 말이야.”
“아, 히로. 좀 전에 혜령에게서 들었어. 할아버지 돌아가신 거. 명복을 빕니다.”
유키코는 자세를 바로 하고 히로를 향해서 합장을 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히로도 합장을 했다. 히로는 다시 밝은 표정으로 돌아왔다. 유키코의 손에 낀 반지가 눈에 띄었다.
“유키코, 그 반지? 요즘, 만나는 사람 있어?”
“하하. 내가 이야기를 못 했구나. 알고 지낸지는 몇 달 되었는데, 두 달 전부터 사귀고 있어. 회사에서 알게 된 남자인데, 덕분에 한국말이 많이 늘었어. 한국 남자들은 로맨틱 하더라고. 사귀자면서 반지를 주던데.”
“그렇구나. 어때? 잘 맞는 것 같아?”
“잘 맞는 부분도 있고, 그렇지 않은 부분도 있어. 사실 난 일본인이나 마찬가지니까 문화 차이도 있고 말이야. 처음 만나서 영어로 대화할 때는 서로 싸울 일도 별로 없었는데, 내가 한국말을 조금씩 하게 되니까, 다툴 일이 생기더라고.”
“말이 더 잘 통하게 되었는데, 왜 다투어?”
히로가 물었다.
“뭐랄까. 불만이나 감정 표현이 조금씩 자유로워지면서 부딪히는 것 같아. 서로 모를 때는 싸울 이유도 없거든.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인 것 같아.”
“예쁘게 사귀어. 이제 울면서 혜령에게 전화하기 없기야.”
난 깜짝 놀라서, 히로의 팔을 건드렸다. 히로의 팔이 안으로 꺾이면서 내 쪽으로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유키코는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혜령. 그 일은 이제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벌써 몇 년 전 일이잖아.”
유키코는 대학교에서 사 년 내내 만난 남자와 졸업 후에 결혼을 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집안은 유명한 전통 키모노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고, 유키코가 자이니치라는 이유만으로 결혼을 결사반대를 했었다. 사실 유키코의 부모님은 자이니치였지만, 유키코 자신은 태어날 때부터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었다.
“네가 많이 힘들어 했었으니까, 난 될 수 있으면 말을 꺼내지 않으려고 했었지.”
“괜찮아. 생각해보면, 그 녀석의 집안은 고리타분했어. 지금 생각하면 그 녀석도 마음에 안 들어. 다 큰 녀석이 부모님이 반대한다고 헤어지고 말이야. 난 부모님이 반대해도 용기 있게 나를 택할 줄로 믿고 있었는데. 그래서 충격이 더 컸었던 것 같아. 어쩔 수 없는 일이였어. 내 피를 바꿀 수는 없잖아.”
유키코는 맥주를 한 잔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것도 벌써 거의 십년 전 일이잖아. 지금이었으면, 아마 그 녀석 집안에서 그렇게까지 반대하지는 않았을 거야. 요즘은 시들해졌지만, 한동안 일본에서 한류가 유행이었잖아. 그때부터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 나도 그때는 왠지 가슴 한 구석이 뿌듯해지더라고. 내가 자이니치라는 사실이 자랑스럽기까지 했으니까. 내 생각에는 일본인들이 처음으로 한국을 인정한 사건이었으니까. 자신이 자이니치라는 사실을 숨기고 살았던 사람들도 모두 가슴 속으로 한국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었으니까.”
유키코는 담담함을 넘어서서 당당한 것처럼 보였다. 몇 년 간의 외국 생활이 그녀를 이렇게 강하게 만든 것일까? 아직도 세상이 무섭다고 생각하는 나와는 너무 많은 차이가 생진 것 같아서 내심 뒤쳐진 것 같은 생각도 든다. 히로가 갑자기 물었다.
“이제 난 축구 경기를 하면, 어느 편을 응원해야 하나? 혜령과 유키코는 어느 쪽을 응원해?”
유키코가 답했다.
“당연히 한국이지. 모든 자이니치들, 심지어 자신이 자이니치라는 걸 숨기고 사는 자이니치들도 모두 한국을 응원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그러고 보니, 나도 언제나 한국을 응원했었다.
“나도 한국을 응원하지. 사실 괴로워. 한국이 골을 넣었을 때, 환호를 지를 수가 없으니까.”
“여기서는 나만 일본을 응원하는구나.”
히로의 말에 갑자기 분위기가 냉각되었다. 유키코가 화제를 바꾸었다.
“너희 결혼은 안 할 거야?”
히로는 먹던 갈비를 잡은 채로, 나를 바라보았다.
“결혼?”
난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히로와 이미 함께 살고 있기 때문에, 결혼과 같은 것은 절실하지 않았다. 다만, 어릴 적부터 모든 소녀들이 꿈꾸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언젠가는 입어 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만이 있었다.
“그래. 결혼. 둘이 사귄지 십 년이 넘었어. 이제 우리도 내년이면 서른 살이야.”
“서른이라......”
히로가 갑자기 자세를 고쳐서 무릎을 꿇고 앉아서 엉덩이를 뒤로 쑥 뺀 이상한 자세로, 젓가락으로 갈비를 집어 내 쪽으로 내밀었다.
“나랑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반지 대신 갈비는 어떻습니까?”
나와 유키코는 그대로 쓰러져서 웃어버렸다. 만화책에서나 봤을 법한 히로의 추한 자세 때문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히로는 집어든 갈비를 자신의 입으로 가져갔다.

어제는 새벽까지 놀았다. 유키코의 가이드로 소주, 막걸리, 폭탄주 그리고 노래방까지, 유키코는 한국에서 배운 모든 유흥을 우리에게 전수해 주었다. 히로는 막걸리가 마음에 들어서 양껏 마셨다. 주인이 놀라서 더 마셔도 되겠냐고 걱정해줄 정도였다. 술을 즐기지 않는 나도 어제는 흥에 겨워서 근 몇 년 만에 가장 많이 마셨다. 노래방에 일본 노래가 있는 것도 참 즐거운 일이었다. 눈을 뜨니 머리가 깨어질 듯이 아팠다. 히로와 나는 침대에서 자고 있었다. 조금씩 기억이 되살아난다. 여기는 유키코의 오피스텔이다. 히로와 나를 침대에 재우고, 자신은 소파에서 잤을 것이다. 힘겹게 일어나서 화장실로 갔다. 유키코는 벌써 출근을 하고 없었다. 냉장고에는 유키코의 메모가 붙어 있었다.
오늘도 내가 안내해주고 싶지만, 꼭 출근을 해야 하는 날이어서 미안해.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신나게 놀아보자. -유키코-
“히로짱, 일어나.”
히로의 몸에서는 아직도 술 냄새가 났다. 히로가 팔로 내 허리를 감싸 안았다.
“혜령짱, 몇 시야?”
“10시야. 이제 준비하고 출발해야지.”
우리는 천천히 준비를 하고, 문산역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는 내내 속이 거북했다. 술기운이 남아있는데다가 지하철 냄새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산역에서 도라산으로 가는 표를 샀다. 차표는 왕복만 살 수 있었다. 갈 수 있지만, 반드시 돌아와야만 하는 길인 것이다. 열차에 올랐다. 지하철과 크게 차이 나지 않는 작은 열차였다.
십 분쯤 달리고는 임진강역에서 모두 내려서, 신분증을 검사한 다음에 다시 탔다. 그리고 열차는 오 분을 더 달려서 도라산역에 도착했다. 십일월이지만 유달리 따뜻해서 늦은 봄과 같은 날씨였다. 역에 비치된 안내 책자를 하나 집어 들었다. 도라산의 유래와 평화누리공원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 도라산(都羅山)의 전설 : 신라가 폐망하자, 경순왕은 신라 도읍 경주에서 머나먼 송도를 찾아 고려 태조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고려 태조는 딸 낙랑공주를 아내로 맞이하게 하고, 경주를 식음으로 하여 사심관(事審官)을 파견하였다. 낙랑공주는 경순왕의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고 도라산 중턱에 암자를 짓고 머물게 하였는데 영원히 이곳을 지키겠다는 뜻에서 영수암(永守菴)이라고 이름 지었다. 경순왕이 조석으로 이 산마루에 올라 신라의 도읍을 사모하고 눈물을 흘리었다하여 도라산(都羅山)이라 불리게 되었다.-
“뭐라고 쓰여 있어?”
내가 자세히 읽고 있자, 히로가 물었다.
“조금 어려운 말이라서 정확하게는 모르겠는데, 도라산의 전설에 관한 이야기야. 신라라는 나라가 망하자, 왕은 새로 세워진 고려라는 나라의 왕에게 항복을 했대. 그러자 고려의 왕이 신라왕을 자신의 딸과 결혼을 시키고, 신하로 삼았대. 신라왕이 슬퍼하자 공주가 남편을 달래려고 이 산에 절을 하나 지었는데, 신라왕이 매일 절에 올라가서 신라의 도읍을 그리워했대. 그래서 도라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대.”
“도라산이라……. 슬픈 이야기네. 그 왕, 할아버지와 닮은 것 같네.”
히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리고 내 손을 꼭 잡았다.
“가자. 저기 공원으로.”
“이 공원은 통일을 기원하면서 만들어 진거래.”
안내서에서 읽은 내용을 히로에게 말해주었다. 공원에는 잔디가 깔려 있었고, 키가 크지 않은 나무들이 이 공원이 만들어진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여기 저기 통일을 염원하는 조각상과 장식물들이 있었다. 평일 오전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낙엽은 이미 반 정도 떨어져 있었다. 날씨가 따뜻하지 않았다면, 황량한 느낌이 들었을 것 같다. 히로와 함께 공원 여기저기를 걸었다.
“혜령. 여기까지 같이 와 주어서 고마워.”
“정말? 고마운 줄은 알아?”
“그럼. 물론이지.”
“히로, 왜 하필이면 한국에서도 이곳이 오고 싶었던 거야?”
“지금 그 이유를 나도 찾고 있어.”
히로와 나는 다시 공원을 걸었다. 히로가 한 조각상 앞에서 멈춰 섰다. 두 명의 남녀가 서로 손을 맞잡고 돌고 있는 모습이었다. 히로는 그 조각상에 다가가서 여기저리 살피기 시작했다. 난 히로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혜령. 이리 와봐. 찾았어.”
“뭘 찾았다는 거야?”
“여기 찾았어. 빨리 와봐.”
히로는 조각상 아래에 적힌 조각가의 이름을 보고 있었다.
“이거 봐봐.”
히로는 조각상 아래에 적힌 조각가의 이름을 보고 있었다.
“이거 봐봐.”
기증. 재일교포 윤일중. 자이니치?
“혹시 히로가 아는 사람이야?”
“응. 아주 잘 알지. 할아버지의 한국 이름이야.”
“정말?”
“응. 할아버지가 이 공원을 만들 때, 기증하신 조각상이야.”
“어째서 이런 조각상을…….”
“할아버지 고향은 북한이니까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이지. 도라산역이 생겨서 북한과 철도가 놓인다는 소식을 듣고, 통일을 기원하면서 조각을 기증하신 거야.”
“정말?”
“응.”
히로는 내 손을 잡고, 조각상이 다 보일 수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조각상을 자세히 봐봐. 닮지 않았어?”
두 조각상은 서로 닮지 않았다.
“별로 닮은 것 같지 않은데. 한 쪽은 남자고 한 쪽은 여자잖아.”
히로는 조각상과 같은 모양으로 내 손을 맞잡았다.
“그 말이 아니라. 자세히 봐봐. 남자는 나를 닮았고, 여자는 혜령을 닮았잖아.”
상당히 추상적인 형태의 조각이어서 히로의 말에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계속 쳐다보니, 정말 히로와 나를 꼭 닮아 있었다. 약간 크고 튀어나온 나의 귀가 확실히 닮아 있었다. 히로의 넓은 이마도 닮아 있었다.
“자꾸 보니까 정말 닮은 거 같네.”
“할아버지가 조각가에게 혜령과 내 사진을 보여주고, 만들게 한 거래.”
보고 있을수록 더 닮아보였다.
“할아버지는 예전부터 혜령을 마음에 두고 계셨나봐. 매번 된장 심부름을 시키신 것도 혜령을 만나러 갈 때마다 용돈을 주신 것도 어쩌면 할아버지의 계획이었는지도 몰라.”
코끝이 찡했다. 조금 더 하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어째서…….”
“글쎄. 나에게 한국 여자 친구를 만들어주려고 하셨던 게 아닐까. 항상 조국에 대한 미안함 같은 게 있으셨던 것 같아. 혜령과 내가 만나게 된 건 어쩌면 할아버지의 계획 때문이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런 게 전혀 중요하지 않아. 할아버지의 도움이 있었지만, 혜령을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아했었거든.”
난 순간 웃음이 났다.
“맞지? 고등학교 때부터 나 좋아했었지?”
히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우리의 피가 같던 다르던, 그건 정말 의미가 없어. 혜령과 십 년도 넘게 함께 있으면서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어 버렸어.”
손가락에 무언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혜령. 앞으로도 나와 함께 해줄래?”
반지였다. 웃으면 안 되겠지만, 히로의 심각한 표정이 너무 익숙하지 않아서,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억지로 웃음을 참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하하하”
“에? 프러포즈했는데, 폭소라니?”
“히로, 정말 미안해. 히로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 웃음이 나왔어.”
히로는 머리를 긁적였다.
“아, 프러포즈 실패인가?”
“아니!”
난 히로를 꽉 껴안았다. 히로의 팔이 내 등을 감싼다. 따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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