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6년, 평안남도 평원에서 한국 근대 화가 이중섭이 태어났다. 이중섭은 한국의 얼과 정서를 담은 다양한 그림을 그려, 한국의 대표 화가로 평가되기도 한다. 그의 짧은 인생은 혼란스러웠던 한국 근대사를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이중섭의 삶과 예술세계를 따라가보며, 고독했던 그의 삶을 살펴보자.
 

소를 사랑한 화가 이중섭
사람들은 이중섭을 소를 그리는 화가로 기억한다. 실제로 그는 유년시절부터 소를 즐겨 그려 주변 사람들에게 소에 미쳤다는 평을 듣기도 했다. 그의 내면세계를 표현하는 역동적인 소의 모습은 이중섭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그의 개성과 독창성을 우리에게 깊이 각인시킨다. 그러나 그의 삶은, 사람들이 흔히 상상하는 천재 화가의 인생처럼 화려하지 못했다.

일본으로의 유학, 화가로 인정받다
어린 시절부터 그림을 좋아했던 이중섭은 화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그는 우선 도쿄에서 활동하는 화가들이 설립한 지유미즈츠가쿄카이의 공모전(이하 지유텐)에서 평론가들의 호평을 얻었다. 이후, 이중섭은 1940년 제4회 지유텐에 <서 있는 소>, <망월>, <소의 머리>, <산 풍경>을 출품해 큰 찬사를 받았다. 1941년에는 일본 유학 중인 미술가들과 조선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기도 했다.
이중섭은 도쿄에서 야마모토 마사코라는 일본 여성과 교제했다. 원산으로 휴가를 올 때면, 늘 마사코에게 그림엽서를 보냈다. 한 해에 90점 가까이 그려 보내기도 했다. 마사코와 결혼한 뒤에도 그림엽서를 보내 가족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다.

향토적 소재로 민족정신을 담다
이중섭은 후에 부인이 일본인이라는 이유로 친일파로 취급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중섭은 오히려 유년 시절부터 민족정신을 예술로 승화시킨 화가다. 16세 때 그는 일제의 우리말 말살정책에 반발해 한글 자모로 된 그림을 그렸고, 그 이후부터 평생 그림에 한글 서명만 사용했다.

또한, 그의 작품세계에는 향토적인 면모가 돋보인다. 민족의 얼과 전통이 담긴 소는 그를 대표하는 소재 중 하나다. 그가 그린 작품의 소재 대부분은 어린이, 가족, 물고기, 연꽃 등으로 향토적이었다. 표현 도구와 표현 매체 또한 향토적이다. 그의 이러한 특징은 어린 시절 오산학교에서 교육받은 민족사관에서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시련 속에도 꽃피는 예술의 열정
그의 고난은 1943년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의 이중섭은 일제의 징병을 피하느라 그림을 거의 그리지 못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예술동맹 회화부원이 되고, 화가 박수근, 오장환과의 교류를 계속했다. 이중섭은 미술 교사로 일하고 속표지그림을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다.

6·25전쟁이 터지자 그는 부인, 두 아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을 떠난다. 전쟁이 지속되자 다음 해에는 가족과 제주도로 건너가 <피난민의 첫눈>, <서귀포의 환상>, <섶섬이 보이는 풍경> 등의 작품을 남겼다. 제주로 이주한 뒤 이중섭과 그의 가족은 끔찍한 피난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여전히 해초와 게로 연명하는 어려운 생활을 해야만 했다. 너무나 많은 게를 잡아먹어서 그 미안함에 게가 그의 작업 속 중요한 소재가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게 어려운 와중에도 이중섭은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이 시기의 작품에는 가족과 자연이 주요 모티브가 되어 그의 이상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희망이 담겼다.

가족을 떠올리며 희망을 꿈꾼 화가
부인과 두 아들이 일본의 친정으로 떠난 뒤, 이중섭은 오랜 시간 외로움에 지쳐 가족들을 보기 위해 1주일간 일본에 다녀온다. 그 직후, 지인의 초청으로 통영을 방문한 이중섭은 그곳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한다. 통영에서는 오로지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통영에서의 시간은 그의 대표작인 <도원>, <황소> 등이 제작되는 등 그의 예술 세계가 확립되는 시기였다. 특히 <황소>는 활력이 넘치는 붓 터치와 과감한 묘사, 그리고 황소의 기운을 순간적으로 잘 포착한 강렬한 모습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이 시기의 작품은 가족과 함께 희망적인 미래로 나아가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나타난다.


일상의 재료로 새로운 시도를 하다
이중섭은 힘든 상황 속에서도 미술을 놓지 않았다. 재료를 살 돈이 없을 만큼 생활고에 시달렸던 그는 은박지, 합판, 종이, 책의 속지 등 다양한 곳에 그림을 그렸다. 또한, 유화물감뿐만 아니라 연필, 크레파스, 철필, 못, 송곳 그리고 손톱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그림을 그렸다. 생활고가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예술적 실험이었다는 의견도 있다. 생활 속 다양한 재료를 이용해 예술을 행했던 이중섭의 예술세계는 현대에 와서 또 다른 가치로 평가받고 있다.

담배를 싸는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은지화는 상감기법과 닮았다. 은박을 긁어 그 위에 물감을 바른 뒤, 이를 닦아내 긁힌 부분에만 물감이 남아있게 했다. 이중섭은 사춘기 시절부터 이 방법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생전에 인정받지 못했다. 연필화와 은종이 그림을 비롯한 소묘들은 춘화라는 이유로 철거되거나 그림값을 떼이기도 했다. 인정받지 못한 예술성과 지속되는 생활고에 그는 극심한 우울증으로 빠져들었다. 이중섭은 사람들이 자신의 예술 세계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괴로움에 저녁마다 술로 지내며 자신을 학대했다.

정신병원에서 그린 작품 <싸우는 소>, <피 묻은 소>는 다른 소들과는 다르게 광기가 가득해 이 시기의 이중섭의 절망적인 심리가 잘 반영되었다. 조현증, 영양부족, 간염 등으로 고통받던 이중섭은 1956년 홀로 숨을 거두었다.


현재, 그는 한국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유명한 화가다. 그러나 그의 삶은 평화로운 날 없이 불행하고 쓸쓸했다. 찬사받는 이중섭의 작품 뒤에는, 그의 처량한 삶이 숨겨져 있다. 혼란스러운 근대 역사의 흐름 속에서 자신만의 순수한 예술세계와 향토적인 정서를 표현해낸 이중섭, 그의 예술혼은 한국인에게 오래도록 깊은 인상으로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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