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르고스 란티모스 - <더 랍스터>

사랑이란 무엇일까. 아마 이 단어의 의미는 이 세상 사랑하는 이들의 숫자만큼이나 많을 것이다. 요르고스 감독은 사랑의 정의를 찾아 헤매는 관객들을 자신만의 기괴한 세계로 초대한다. 45일 안에 사랑을 찾지 못한 이는 짐승으로 변해야 하는 <더 랍스터>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주인공 데이비드는 지독한 근시라는 이유로 12년을 함께한 아내에게 이별을 통보받는다. 독신은 곧 위법인 세계이기에, 그는 곧 강제로 시외의 한 호텔로 이송된다. 독신자들을 커플로 만들기 위해 세워진 그곳의 규칙은 간단하다. 모든 남녀는 45일 이내에 그 안에서 자신의 짝을 찾아야 하며, 실패할 시 동물로 변하게 된다. 그곳에서는 사랑이 아닌 짙은 불안감만이 스멀거린다.

호텔은 다양한 방법으로 독신자들의 불안감을 자극하여 짝을 찾도록 종용한다. 독신자들은 매일 커플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우스꽝스러운 극을 감상하는 동시에, 기한을 넘긴 이들이 동물로 변하는 것을 본다. 인간으로 남기 위해 그들은 자신의 감정을 사회의 틀 속에 구겨 넣는다. 주인공 역시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채 냉혹한 여자와 연인이 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거짓된 관계는 결국 들통이 나고, 그는 처벌을 피하고자 호텔에서 탈출한다. 그를 맞이하는 것은 그처럼 호텔에서 도망쳐 숲에 머무르는 ‘외톨이’들이다. 그들은 사랑이라 불릴 법한 모든 친밀한 인간관계들을 부정하며 살아간다. 음악 마저 혼자 춤출 수 있는 일렉트로닉만을 들어야하는 숲에서는 연애를 시도하는 모든 자에게 극형이 내려진다. 호텔과 숲은 정반대이면서도 서로를 지극히 닮아있다.

모순적이게도 데이비드는 숲에서 자신과 같이 근시를 가진 여자를 만나 남몰래 사랑을 키워나간다. 그들은 사랑의 탈출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그녀는 장님이 되는 대가를 치른다. 하지만 그녀를 여전히 사랑하는 그는, 눈먼 그녀를 이끌고 결국 도시로 탈출한다. 도시의 한 카페에 앉아 데이비드는 자신 역시 장님이 되기로 결심하고, 칼을 든 채 화장실로 들어간다. 그가 스스로 눈을 찌르고 나오기를 기다리는 그녀를 비추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화는 잔인하고 선정적인 장면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정작 불편함을 주는 것은 그런 장면이 아닌 감정과 사회의 불협화음이다. 영화 속 모든 인물은 이야기 내내 자신을 타인이 정의한 사랑에 끼워 맞추려 한다. 그러기에 호텔에서도, 숲에서도, 단둘이 사랑의 도피를 해도 그들의 ‘사랑’은 어딘가 기괴하다.

데이비드 역시 자신과 비슷한 이만을 사랑할 수 있다는 관념에 매여 있다. 하지만 그는 영화에서 단 한 순간 그에서 벗어난다. 눈이 먼 직후, 그를 사랑할 수 없다 말하는 연인에게 데이비드는 그녀가 자신과 다르더라도 여전히 사랑한다 고백한다. 그 찰나 영화에는 따스한 온기가 돈다. 타인이 정의한 사랑을 좇을 때는 느낄 수 없던 이 온기가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사랑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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