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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카이스트 문학상] 수필평론 부문 가작 | 나는 너를 말할 수 있을까(김연수로 이청준 읽기)
[415호] 2016년 02월 16일 (화) 카이스트신문 kaisttimes@gmail.com

나는 너를 말할 수 있을까
(김연수로 이청준 읽기 )


김병준(문화기술대학원 석사과정)

목차
1. 들어가며
2. 언어와 타자 - 『 언어사회학 서설 』 분석
-빈 껍데기만 남은 언어들
-복수는 나의 것, 음모의 글쓰기
-이제 나는 무엇을 말하지?

3.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음에도 쓴다
-총동원하여 당신에게 간다
-불립문자의 말

4. 문학이 말할 수 있는 것
5. 마치며
6. 참고문헌


1. 들어가며


나는 이 세계에서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 순간, 그 말(言)에서 빠져나온 숨결과 기운들로 이뤄진 영(靈)이다. 나는 거대한 눈(目)이자 입(口). 하루치 목숨으로 태어나 잠시 동안 전생을 굽어보는 말(言)이다. 나는 단수이자 복수, 안개처럼 하나의 덩어리인 동시에 낱낱의 입자로도 존재한다. 나는 내가 나이도록 도운 모든 것의 합, 그러나 그 합들이 스스로를 지워가며 만든 침묵의 무게다. 나는 부재(不在)의 부피, 나는 상실의 밀도, 나는 어떤 불빛이 가물대며 버티다 훅 꺼지는 순간 발하는 힘이다.1)

여기 “나는 말( 言)이다 ” 라고 시작한 소설이 있다. 마치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의 서장으로 여겨지는 이 소설은 언어가 가지는 양면성을 보여준다. 김애란은 두 가지 상반되는 성질을 엮어 아포리즘으로 쓰면서 언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언어인 ‘나’는 개별자에게서 발화되는 파롤이자 공공재인 랑그이다2). 그리고 언어는 때로는 부재의 부피라는 침묵인 동시에 꺼지는 순간 발하는 발화이기도 하다. 소설에서 화자는 사멸한 언어의 영(靈 )으로 소수언어박물관에서 한 언어의 마지막 화자로서 ‘전시’ 되다 죽음을 맞은 노인을 그린다3). 2013년 이상 문학상 대상작으로 선정된 이 소설은4) 문학과 언어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여전히 ‘지금, 여기’에서도 유효함을 보여준다. 인간이 말을 하는 동물인 이상 그리고 그러한 인간이 말로서 글을 쓰고 발화하는 이상, 작가는 어떻게 언어를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에 천착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앞으로 살펴볼 이청준의 『언어사회학 서설 』 연작의 문제의식은 30여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도 영향을 끼치며 아니 어찌 보면 더욱 중요해졌다. 각종 소셜 네트워크부터 인터넷 뉴스까지 우리는 말의 홍수에 살고 있으며 , 말의 부피는 커졌으되 그 무게는 그만큼 늘어나지 못한 듯하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원고지는 140자( 트위터)로 줄어들었으며, 말은 또 말을 낳고 그 말은 소문으로서만 존재한다 . 세월호 사고 직후 우리가 목도한 껍데기만 남은 빈말들 그리고 그 말들이 가한 폭력은 국가의 침몰을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청준과 김연수
때문에 2014 년 4월 16일 이후 나는 국가가 부재한 이 상황에서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고민해왔다. 그래서 나는 이청준의 연작 소설집 『언어사회학 서설』 을 이렇게 읽어보려 한다. 기존연구에서 이청준만큼 ‘ 언어’에 대한 문제의식을 소설의 화두로 본격화한 작가가 드물었다는5) 사실을 『언어사회학 서설』 분석을 통해 재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이청준이 언어의 재현 불가능성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이 연작 이후에도 끝까지 이 문제를 포기하지 않고 천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을 밝혀내고자 한다.
이 작업을 위해서 김연수의 소설들 6) 을 이청준의 연작과 비교·분석 할 것이다. 나는 이청준의 소설을 읽는 내내 김연수의 단편이 떠올랐고, 반대로 김연수를 읽는 동안 이청준이 생각났다 . 이 두 작가를 비교하려는 작업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 대조하는 작업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작가를 통해 또 다른 작가를 이해하는 ‘ 상호 텍스트성’에 가까운 작업이 될 것이다. 김연수를 통해 읽는 이청준, 이청준을 통해 읽는 김연수 말이다. 김연수의 소설은 그가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7) ,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음 혹은 나는 너를 언어로 그려낼 수 없음을 전제하는 글쓰기이다. 이를테면 이청준과 김연수는 자신이 타인이나 타인의 고통에 닿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이를 포기하지 않는 작가라 할 수 있다 . 마지막으로 이렇게 불가능해 보이는 시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지, 요컨대 내가 너를 ‘말’한다는 시도는 어떤 의미인지 밝혀낼 것이다.

1) 김애란, 「침묵의 미래」, 『2013 이상문학상 수상집』, 문학사상, 2013, 13~14 쪽
2) 안서현, 「침묵의 미래 작품론」, 『2013 이상문학상 수상집』, 문학사상, 2013, 87 쪽


2. 언어와 타자 - 『언어사회학 서설』 분석


이청준의 『 언어사회학 서설 』 은 총 5 편으로 구성된 연작소설로 언어의 폭력으로 시작하여(「 떠도는 말들」 , 「 자서전들 쓰십시다」 ) 소설가인 주인공이 나오는 일종의 메타픽션으로서 언어에 대한 천착과정(「지배와 해방」 , 「 몽압발성」 )을 통해 결국 언어를 통한 용서와 화해(「 다시 태어나는 말」 )로 나아간다. 『 언어사회학 서설』 은 단편 연작소설이지만 각 작품이 하나로 이어지는 구조를 가진 하나의 장편소설로 봐도 무방할 정도로 작품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 이 장에서는 각 단편의 구조를 분석하고, 5편의 연작을 관통하는 지점을 정리한다.
빈 껍데기만 남은 언어들 「 떠도는 말들 」에서는 혼선된 전화기의 말처럼 껍데기만 남은 말들이 유령처럼 돌아다닌다. 자서전 작가인 윤지욱이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잘못된(아니 의도적인) 전화는 계속 걸린다.

나의 말은 나의 말이 아니며 나의 웃음은 나의 웃음이 아니다. 나의 말은 청중의 말이요, 나의 웃음은 청중의 웃음이매8)

이미 이 말들의 주인은 발화하는 자의 것이 아니다. 자서전 작가로서 윤지욱은 자신이 쓰는 글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모순을 갖고 있으며, 그 자신을 괴롭히는 말 역시 전화 혼선으로 이미 자신의 것이 아닌 말들이다.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의 자의성은 기의와 기의를 표상하는 기표의 관계가 그 자체로 자의적이기 때문이며 이는 기표와 기의가 언제나 분리될 수 있음을 뜻한다 . 따라서 이렇게 유령처럼 부유하는 언어는 기의를 잃고 기표만 남은 껍데기이다. 말이 껍데기로서 존재할 때 말들은 복수를 시작한다.

우리들의 말은 과연 많은 것이 그 존재의 집에서 추방되어 그의 실제와의 약속에서 결별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중략) 다만 집단의 꿈과 소문에 필요한 말들만이 계속해서 그 소문의 명분과 선동성에 봉사할 따름입니다. 그 때 실체를 떠나 버린 말들은 깃들 곳을 잃고 덧없이 우리의 주위를 떠돌면서 또 다른 헛소문을 지을 기회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것은 애초에 말을 만들고 그것을 부려온 우리 인간들의 말에 대한 배신과 학살 행위며 그에 따른 그 말들의 처참스런 복수인 것입니다.9)

이청준에게 떠도는 말들은 이제 스스로 소문을 재생산하며 칼끝을 말의 화자에게 돌린다. 그리고 더 나아가 자신이 내뱉은 말이 소문이 되고, 그 소문은 커져 화자에게 복수를 시작하는 것이다. 결말에서 윤지욱이 아가씨를 영영 만나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언어의 진실을 영원히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촉발된 언어의 배반과 타락은 연작 제2편, 「 자서전들 쓰십시다 」 에서 구체적인 두 인물로 확대된다. 피문오와 최상윤이 그들이다. 피문오는 자신의 자서전을 ‘화려한 도배지 ’로 여기며 자기기만의 글쓰기를 보여주고, 최상윤은 ‘ 맹목적 가식’으로 자신을 꾸미려한다. 지욱은 이제 거의 글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말들은 과연 이제 정처가 없었다. 말이 존재의 집이라면, 말의 집은 또한 존재의 실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말들은 이제 그 실체의 집을 떠난 지 오래였다 . 집을 떠난 말들은 그가 깃들였던 실체와의 약속을 잊어버린 지도 오래였다. 그것은 일견 말들의 자유스런 해방처럼 생각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실체와의 약속을 저버림으로써 얻을 수 있었던 말들의 해방은 그 실체에 대한 지배력도 함께 단념을 해야
했다.10)

이제 말들은 완전히 실재를 떠난다. 하나의 이름이 고작 다른 이름 하나를 겨우 지시할 수 있었던 언어라는 얇은 실은 끊어져 버린 것이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소설이 끝나도 할말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청준은 여기서 포기하지 않는다. 윤지욱이 부유하는 말을 강박적으로 잡아두려는 행동을 보이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지욱은 포기 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언어의 불완전함, 작가가 한 대상을 아무리 성심을 다해 재현하더라도 실재와 가까워 질 수 없는 그 간극을 알게 되었음에도 그는 왜 글쓰기를 그만두지 못하는가? 때문에 다음 연작 「 지배와 해방」 에서는 이에 대한 나름의 답을 제시한다.

복수는 나의 것, 음모의 글쓰기
현실의 질서에는 자신이 굴복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번에는 그 세계가 거꾸로 자신에게 굴복해 올 수밖에 없도록, 그 세계 자체를 아예 자기 식으로 뒤바꿔 놓을 수 있을 어떤 새로운 질서를 음모하기 시작한단 말입니다. 좀 더 문학적인 표현을 빌어 말한다면, 자기의 삶의 근거를 마련하려는 일종의 복수심이지요.11)

즉 위에서 말하는 현실의 질서에 굴복하고 실패했다는 것은 인간이 언어를 잘못 부리게 되자 언어가 인간을 배반하게 되었음을 뜻하며, 이제 새로운 질서를 음모한다는 것은 현실이 개인을 억압하는 상황과 대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음을 말한다12) . 그리고 그 대결 상황에서 작가는 무엇을 해야 하나 ? 작가는 이제 복수심을 ‘ 창조적인 생산 질서 ’로서 지배욕으로 승화할 때 ‘자유의 질서’ 를 향한 꿈이 이뤄진다. 또한 그 ‘ 복수심’은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를 배반하는 행위가 아니다. ‘창조적인 화해 관계’로서 지배라는 어휘가 가진 구속, 억압 등의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독자는 그것들로부터 삶의 해방과 자유를 얻는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문학의 정치를 행하는 것으로 보인다 . 작가 자신이 처한 세계의 질서 , 그러니까 언어의 질서에 의심하고 제 나름대로 그 질서를 자신의 언어로 재배치한다. 여기서 언급된 음모의 글쓰기는 소설로서 시로서 즉 문학으로서 비가시적인 것을 가시화하려는 시도인 것이다 . 윤지욱은 이정훈의 문학론 강연을 들으면서 매우 만족한다.

지욱의 얼굴에 비로소 조금 안도의 빛이 떠돌기 시작한 것은 그런 일련의 작업을 끝내고 나서 그가 모아들인 수많은 말들이 감급되어 있는 서랍의 자물쇠를 굳게 다시 잠그고 난 다음이었다.13)

유령처럼 떠돌던 말들을 이제 자신의 서랍에 넣고, 앞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사상적 배경(이정훈의 문학론)을 얻었으니 이제 그는 다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청준은 여기서 소설을 멈추지 않는다. 공고해보였던 이정훈의 문학론은 다시 와르르 무너진다.

"윤형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지만, 자기 눈으로 보지 않고 이야기나 듣는 건 부질없는 일이야. 자기 눈으로 보는 것도 이제 우리는 다만 볼 수 있을 뿐 그것을 옮게 말할 방법은 없거든. (중략) 내가 직접 보고 겪은 일이라도 입을 열어 말을 하는 순간 그것은 금세 소문으로 변해 버리거든, 현장에서부터 소문이 생기는 건 그 때문이지 . 뭐니뭐니해도 이젠 윤형 자신 부터가 내 말을 곧이들을 수 없게 되어 있을걸 뭘. 내가 지금 윤형한테 무슨 말을 한대도 말야."14)


네 번째 연작 소설 「몽압발성」 에서는 서랍에 가두었다고 생각했던 말들이 다시 소문으로 바뀌어 떠돈다 . 다시 말이 떠돌기 시작한 이유는 「 지배와 해방 」에서 소설가 이정훈의 주장 속 전제에 있다. 이정훈의 문학론은 “ 우리의 삶과 문학은 언어의 질서를 통해 인식할 수 있다” 는 전제 15)에서 출발한다. 이청준은 이 전제를 의심한다. 유령처럼, 빈말뿐인 언어를 다시 잡아두고 ‘ 올바르게’ 구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 결국 인간의 언어로서 떠도는 언어를 잡아두려는 시도이다 . 요컨대 이청준은 언어를 언어로 다시 묶어둔다는 자가당착을 꼬집는다. 때문에 「 몽압발성 」 에서는 앞의 연작소설과 다르게 , 비합리적인 구원의 문제가 다뤄진다 . 윤지욱은 지금까지 소설가의 합리성 ( 언어의 합리성) 이나 재현 가능성에 대하여 말하던 그리고 그것을 믿으려 노력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비이성적인 종교의 구원 앞에서 가위눌림을 당한다 . 「 떠도는 말」에서 혼선된 전화로 노이로제를 앓았던 것처럼, 이제 가위눌림이 그를 괴롭힌다.
그것은 바로 말의 가위눌림이었다. 깨어나야지, 깨어나야지, 아무리 인간힘을 써대도 잠이 깨지지 않는 안타까운 가위눌림, 희미한 영상을 끄나풀 삼아 눈앞에 살아있는 현실을 안으려 아무리 기를 써대도 자꾸 도로만 되풀이되는 무서운 가위눌림, 우리는 바로 그런 말의 가위눌림에 걸려 있었다. 한욱도 그랬고 나도 그랬다. 아니 이 세상 사람 모두가 그런 꼴이었다. 그런 가위눌림 속에서의 말은 원래부터 힘이나 믿음이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아예 발음이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설령 발음이 되는 경우라도 제 뜻을 옳게 지녀내질 못했다. 그러면서도 자꾸 같은 시도를 되풀이하게 되는 게 가위눌림의 고통이었다.16)

이제 나는 무엇을 말하지?
이제 지욱이 갈 곳은 없다 . 믿었던 이정훈의 문학론도 , 그리고 차라리 소문을 믿고자했던 의도적인 눈감음도 실패했다. 이제 그는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인간이 언어로서 대상을 재현하거나 너를 그려낸다는 것은 가능한가 ? 소설가의 일은 결국엔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인가 ? 이청준은 그 해답으로 용서와 화해를 꺼내든다 . 바로 연작의 마지막 편 「다시 태어나는말 」 이다.


"하지만 자신을 부인하려 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난 그때 이미 그 사내의 모습에서 초의 스님의 차마심의 마음을 더없이 분명하게 읽고 있었으니까요. 글쎄 그게 그보다 분명할 수가 없는 것은 그때 무언가 내 마음을 뜨겁게 덥혀 오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마음 속 깊은 곳이 뜨거워 오는 것, 그렇게 그것을 만날 수 있는 것보다 분명한 것은 있을 수가 없지요. (중략) 다름 아니라 그건 용서였습니다"17)

용서란 타자를 이해하는 가장 높은 수준의 윤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용서는 복수를 택하는 날카로운 말이 아니라 타자와 화해할 수 있는 언어이다. 하지만 윤지욱은 김석호의 답변에 공감은 하지만 궁금증을 완벽하게 채우지는 못한다 . 어찌보면 선문답의 형태로 이청준은 결말을 내려한다. 때문에 연작말미에 남도사람 연작의 이야기가 합해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다 . 말이 아닌 소리의 힘은 타자와 화해하고 용서하는 최고의 방법으로 그려진다 . 하지만 독자인 나도 혹은 화자인 윤지욱도 이러한 답변에 이해는 하나 만족하지 못한다. 소리라는 신묘한 매체로 비어버린 말의 공간을 채울 수 있을 것인가?

"어젯밤에도 말씀드린 일이 있습니나만, 전 그저 말 같은 말을 좀 찾아보고 싶었으니까요. 사람의 동네에서 떠나 버린 말, 죽어 냄새로 떠돌아다니는 말, 그런 말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아직도 살아서 숨을 쉬고 있는 말, 믿음을 지니고 살아 있는 말, 그런 말을 만나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윤선생은 어디서 그런 말들을 만나셨다는 겝니까?”18)

다시 말의 문제를 꺼낸 윤지욱에게 김석호는 다시 반문한다. 김석호의 반문은 지욱에게 아직 삶과 말이 하나가 되는 진정한 말의 모습을 만나지 못했다는 회의를 던져 준다19). 이로 미루어 보아 『 언어사회학 서설』 연작은 용서와 화해라는 가장 높은 수준의 ‘ 말과 삶’의 융화를 보여주었지만, 그러한 경지가 사실상 불가능 하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텍스트인 것이다 . 즉 윤지욱은 연작의 첫 번째 편처럼 다시 말을 찾아 헤매는 상황으로 돌아온 것이다 . 그리고 소설 마지막에 등장하는 여인의 빗질과 기묘한 분위기는 말이 다시 태어났으며 이제 우리는 그 말을 다시금 찾으러 가야함을 뜻한다. 이청준이 남긴 작가의 말에서도 이러한 결말을 엿볼 수 있다.


그것으로 나는 이제 우리의 삶에 대한 완벽한 분석적 논리언어와 총체적 직관의 언어를 찾아낼 수가 있게 될 것인가. 나는 줄기차게 희망하지만 아직은 만족할만한 것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나는 다만 빛의 불완전성 자체를 망각하지 않으려 할 뿐이다.20)

이청준 스스로 자신이 ‘ 완벽한 분석적 논리언어와 총체적 직관의 언어 ’를 찾아내지는 못했다는 고백이다. 다만 언어의 불완전성 자체를 망각하지 않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차이 / 연기 그리고 미끌어짐
앞에서 살펴본 『언어사회학 서설』 의 구조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 자크 데리다의 차이 /연기(이하 차연)의 논리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단 한번의 획에 의해 생각될 수 없다는 것 (중략) 차이/지연이란 지연시키다란 낱말의 이중적 의미에서 차이/ 지연시키는 것의 생산을 지칭하기 위한 경제적 개념이다. 존재-존재론적 차이와 < 거기 있음의 초월성> 속에서, 그 토대가 절대적으로 근원적인 것은 아니다. 간단히 말하면, 차이/ 지연은 < 근원적>이겠지만 그것을 더 이상 < 근원> 이나 < 토대> 로 부를 수 없을 것이다.21)

요컨대 차연은 기표의 기의 사이에 간극을 벌리면서 그 뜻을 하나로 고정시키지 않고 연기한다 . 때문에 데리다는 ‘모든 것이 단 한번의 획에 의해 생각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언어가 낱말의 이중적 의미 (차이 )를 벌리며 연기된다면 무엇이라 고정될 수 없다. 『 언어사회학 서설 』 구조 역시 그렇다 . 「 떠도는 말들 」에서 전화 속 여자의 목소리는 존재하지만 , 그 여자를 만나려고 나가면 만날 수는 없다. 문자와 음성은 있으나 실체 (여자)는 없는 것이며 결국 윤지욱은 실체(여자)를 만나지 못하고 영원히 유보된다. 이러한 데리다의 차연은 각 연작과의 관계에서도 적용된다. 제 3편, 「지배와 해방」 에서 정체를 드러낼 줄 알았던 언어와 문학과의 관계는 다음 편 「 몽압발성」 에서 다시 미끌어진다. 그리고 5편 「다시 태어나는 말」 에서 용서와 화해로 문학과 언어는 정체를 드러낼 뻔했지만, 분명히 정해지지 않고 빗질하는 여자가 나오며 다시 판단은 연기된다. 때문에 『 언어사회학 서설』은 좌절의 텍스트일지도 모른다.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소설가는 말에 대해 고민하면서 돌을 다시 굴려야 한다. 하지만 이 지점이 소설가가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이 되는 것은 아닐까 ? 실어증 환자가 등장하는 등단작 「퇴원 」 에서부터 『 언어사회학 서설』 과 그 이후 많은 텍스트까지 이청준은 언어의 문제를 천착해왔다. 이를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이청준이 글을 쓰는 원동력은 타자를 언어로 재현해 낼 수 없다는 불가능성이다.

3) 위의 책, 86쪽
4) 사실 이상 문학상은 작품의 탁월함보다는 그 당시 가장 인정받는 작가를 위한 상이라는 말이 많았다 . 작품상이 아니라 작가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작품이 대상으로 선정 된 것은 작금의 상황이 소설에서 그리듯 소수언어가 사라지는 것처럼 언어의 위기라거나 ‘유령’으로 변한 껍데기 언어가 횡행한다는 반증은 아닌가?
5) 한순미, 『가의 언어 이청준 문학연구』, 푸른사상, 2009, 160쪽
6) 김연수의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와 『세계의 끝 여자친구』의 몇몇 단편소설을 대상으로 한다.
7)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문학동네, 2009, 316쪽
8) 이청준,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문학과 지성사, 1981, 28 쪽
9) 이청준, 「존재적 언어와 관계적 언어 사이에서」, 『말없는 표의 속말들』, 나남, 1986, 143쪽
10) 이청준,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문학과 지성사, 1981, 65쪽
11) 위의 책, 114 쪽
12) 권오룡 엮음, 『이청준 깊이 읽기』, 문학과 지성사, 1999, 197 쪽
13) 이청준,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문학과 지성사, 1981, 134 쪽
14) 위의 책, 233~234 쪽
15) 권오룡 엮음, 『이청준 깊이 읽기』, 문학과 지성사, 1999, 213 쪽
16) 이청준,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문학과 지성사, 1981, 242 쪽
17) 위의 책, 264~265 쪽
18) 위의 책, 276 쪽
19) 한순미, 『가의 언어 이청준 문학연구』, 푸른사상, 2009, 31쪽
20) 이청준, 「존재적 언어와 관계적 언어 사이에서」, 『말없는표의 속말들』, 나남, 1986, 143 쪽
21) 자크 데리다, 김성도 역, 『그라마톨로지』, 민음사, 1996, 51~52 쪽


3. 나는 너를 이해할 수 없음에도 쓴다
- 김연수의 경우


나는 이러한 소설가가 말을 포기하지 않는 원동력을 김연수의 작품에서 보았다. 타자를 재현할 수 없지만 노력해보겠다는 김연수의 태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청준의 작품과 다르게 김연수의 작품에는 재현하려는 자 (소설가 )와 그 재현의 대상 ( 타자 ) 의 구도가 분명히 나타난다 . 이를테면 이청준의 소설에서는 그 대상이 소설가가 재현할 수 있는 모든 것으로 다소 불분명했다면 , 김연수는 당신이라는 타자를 재현하려고,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상술했듯 김연수는 작가의 말에서 이를 자신의 문학론으로 표명한다.


나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이다. 우리는 대부분 다른 사람들을 오해한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22)

요컨대 소설가의 일이 언어로서 대상 (타자 ) 를 재현하는 일이라면 그리고 더 나아가 대상을 이해하는 일이라면 , 이는 언제나 불가능하다 . 그럼에도 타자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 이 시도마저 포기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이청준이 말했듯 빈말이 가득한 세상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 . 하지만 타자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언제나 차연되면서 결실을 맺지 못한다면 , 과연 그것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 분명 작가의 말은 심정적으로 이해하나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마 작가의 말보다 중요할 김연수의 작품을 보아야 이 문제가 해결 될 것이다.

총동원하여 당신에게 간다
김연수의 소설 「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이하 설산 )은 연애소설이다. 이른바 연애 소설이라고 하는 표상에는 가벼움이나 로맨틱 코미디라는 표상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 소설은 이러한 예상을 빗겨간다. 주인공은 여자친구의 자살로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그는 세상과 단절하고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닥치는대로 읽어내면서, 여자친구가 왜 자살을 했는지 그리고 유서에는 왜 남자친구인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왜 한마디도 없었는지 알기위해 소설을 쓴다. 그것도 자신을 총동원하여.


자신이 쓰는 소설 속에서 그는 조금씩 지워지고 있었다. 자신이 간절하게 원했던 꿈이며 그럴듯하게 보였던 미래며 삶의 목적이 되었던 몇몇 순간들이 하나씩 사라졌다. 그와 여자친구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오직 그 마지막 순간 , 그러니까 여자친구의 투신에 논리적으로 부합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문장으로 남길것이냐, 그렇지 않을것이냐가 결정됐다. 하여 둘이 사랑했던 모든 순간들은 그가 쓰는 소설에서 사라졌다. 결국 그가 쓸 수 있는 문장들은 등반일지에 적는 것과 같은 것들, 식사의 시기와 장소와 종류, 혹은 그날 불어온 바람의 세기와 방향, 그것도 아니라면 만난 장소와 대화를 나눈 시간 등이 다였다. 그러니까 그와 죽은 여자친구가 서로 소통하지 못했던 부분만 빼고, 소통할 수 있었던 것들만 문장으로 쓸 수 있다면 그게 다였다.23)

죽은 여자친구를 이해하기 위해 쓰기 시작한 소설은 정작 여자친구와 자신의 사랑이야기는 빠진채로 결말을 맺으려 한다 . 자신이 사랑했고 , 그녀의 죽음으로 자신은 폐인처럼 살아가는데도 결국 그는 여자친구와 자신의 이야기는 소설로 옮기지 못한다. 등반일지처럼 혹은 비인칭주어 문장처럼 날씨 , 시간 같은 지극히 객관적인 이야기를 서술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가 여자친구를 소설로 옮겨내는 순간 자신은 그녀를 제대로 재현해낼 수 없으니까. 이는 마치 『 언어사회학 서설』 의 윤지욱이 글을 쓰지 못하는 순간과 비슷하다. 재현해내면 재현할수록 그 대상은 진실과 점차 멀어진다 . 그럼에도 우리는 말하는 동물이자 쓰는 작가이다 . 침묵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 사이를 원래 그대로 틈으로 남겨두고 살아가는 일뿐이었다. 결국 그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여자친구는 죽는 순간까지도 그를 생각했거나, 혹은 죽는 순간에도 그를 생각하지 않았다. 확실한 것은 없었다. 『왕오천축국전』의 원문을 상상하면서 주석을 다는 나나 내 일상을 상상하면서 괴로워하는 그나 서로 목숨을 의지하면서도 그런 점에서는 모두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은 그저 서
로를 짐작할 뿐이었다.24)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가 죽기 직전 마지막으로 읽은 책인 『 왕오천축국전』의 원문을 읽는 일, 그리고 그 책의 주석을 단 여교수를 찾아가 해석을 묻는 일이다 . 여기서 언급된 ‘틈 ’은 문학의 공간으로 , 소설가가 재현한 타자와 본래의 타자 사이의 간극이 만들어낸 것이다. 만약 소설이 이렇게 주인공 남자가 죽은 여자친구를 소설로 써내는 데 실패하였다는 결말로 맺는다면, 김연수는 자신의 한 작가의 말을 배반하는 일이 될 것이다. 김연수는 여기서 더 나아간다.


하지만 나는 그의 마지막에 대해 다르게 상상한다. 가장 많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상상이 아니라 나만이 할 수 있는 상상의 힘으로.25)


여기서 화자인 ‘ 나 ’는 남자친구의 소설을 읽어본 『 왕오천축국전』 의 주석자 (교수 ) 이다 . 남자와 죽은 여자친구의 이해나 소통이 실패하였을 지라도 이제 또 다른 층위의 소통이 벌어진다. 히말라야 설산(낭가파트)에서 일종의 자살은 한 그의 등산일지를 보고 교수는 그를 다시 언어로 재현한다. 그것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상상의 힘으로 말이다. 이는 의미가 큰데, 『 왕오천축국전 』 의 주석(누구나 인정해야하는 다수의 의견을 반영해야 하는 주석 ) 을 달던 사람이 이제 새롭게 그만의 언어로 죽은 남자를 재현해 내는 것이다. 남자가 자살한 여자친구를 그려내는 데 실패했지만 , 이번에는 교수가 그 남자를 그려낸다 . 정리하자면 주인공 남자가 여자친구를 그려내는 시도를 하다 차연되고 이번엔 교수가 그 남자를 그려내려한다. 이청준의 소설에서처럼 말은 다시 되돌이표처럼 건설과 붕괴를 반복하는 것이다 . 그리고 그 과정에서 끝끝내 산정상에 도착하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과정에 사랑이 탄생한다. 이청준이 말했던 화해와 용기는 다름 아닌 사랑이었던 것이다. 다른 소설을 더 살펴보자.
 

불립문자의 말
김연수의 또 다른 소설 「모두에게 복된 새해, 레이먼드 카버에게」 (이하 새해 )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레이먼드 카버의 대표작 「대성당」 을 오마주한 작품이다. 김연수는 이 소설에서 앞서 소개한 「설산」 보다도 더 큰 소통의 층위에 도전한다. 「새해」 에서 소통의 대상 혹은 재현되는 타자는 외국인 노동자인 사트비트 싱이다. 서로의 언어에 서툰 화자와 인도인 사트비트싱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선문답으로 이뤄진다 . 오히려 짧은 대화 속에 더 큰 공감과 소통을 자아내는 것이다. 마치 「다시 태어나는 말」에서 윤지욱과 김석호의 짧은 대화처럼 혹은 「 서편제 」 에서 아예 말이 아니라 소리로 소통하는 그들처럼.

그리고 이 친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lonely'라는 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만, 다만 한국어로 어떻게 말하는 것인지 알지못해서.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나는 가만히 우리가 흔히 볼 수 없는 숲과 잠에서 깬 아이와 사원의 기둥처럼 늠름한 다리를 가진 코끼리를 바라보고 있다가 혼자 중얼거린다. 저는 외롭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저는 고독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저는 쓸쓸합니다. 그것도 아니라면 마치 눈이 내리는 밤에 짖지 않는 개와 마찬가지로 저는.......26)

영어 단어 ‘lonely'와 한국어 ‘외롭다 ’ 기표는 다르다 . 아니 기의도 온전히 일치한다고 말할 수 없다. 두 단어의 뉘앙스 차이가 있으므로 .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겠는가 ? 이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와 인도인 싱은 코끼리를 생각한다. 그리고 서로 알게된다, ‘너( 나)는 외롭구나 ’라고 . 소설가가 아니 주체가 타자를 그려내려 노력한다는 건 이제 언어를 매개로하지만 동시에 언어를 뛰어넘는 일이 된다. 이청준의 『 남도 사람』 연작에서 강조했던 소리로 타자를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는 김연수의 작품에서도 통용되는 것이다.

22) 김연수, 작가의 말, 『세계의 끝 여자친구』, 문학동네, 2009, 316쪽
23) 김연수, 「다시 한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나는 유령작가입니다』, 창비, 2005, 124~125 쪽
24) 위의 책, 143~144 쪽
25) 위의 책, 154 쪽
26)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문학동네,2009,140~141쪽 . 신형철 , 「세계의 끝 여자친구 해설」, 같은
책 312 쪽에서 재인용.

4. 문학이 말할 수 있는 것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쓴 『세계의 끝 여자친구 』 해설 결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인용돼있다.
 

모든 슬픔은, 말로 옮겨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에 관해 이야기를 한다면, 참을 수 있다27)(아이작 디네센)

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 제5 장(행위)편의 제문으로 인용된 이 문장은 문학이 말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문학이 만들어내는 공간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요컨대 위에 한 문장은 '문학 '이 품고 있는 규정할 수 없는 힘을 내포하고 있다 . 아이작 디네센의 저 문장의 핵심은 슬픔을 이야기로 만들면 해소할 수 있고 하지 않고  '참을 수 있다 ' 고 표현 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 문학은 슬픔을 비롯한 세계 속에 버려진 인간이 대면해야만 하는 불가항력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문제를 전유하는 오래된 양식일 것이다 . 문학을 통해 슬픔은 존재를 희미하게 하거나 소멸시키는 폭력이 아닌 존재를 더욱 뚜렷하게 만들고 바로 세계의 불가항력적인 힘과의 대면이 존재를 미학적으로 갱신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슬픔을 이야기화 한다면 그것을 '참을 수 있다'고 한 구절 속에 내장되어 있는 의미일 것이다. 문학이란 차라리 세계에 버려진 존재가 존재의 터로서의 '장소'를 구축하기 위한 쟁투라고 해도 좋겠다 . 나는 그것을  문학의 공간이라 부르고 싶다 . 그리고 이 공간은 우리가 지금까지 다뤘던 이청준과 김연수의 작품들, 그러니까 결국 언어로서 구축된다.


모든 사람들이 행위와 말을 통해 세계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시작할지라도,  어느 누구도 자기 삶의 이야기의 저자이거나 연출자일 수 없다.28)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슬픔을 이야기하는 자의 정체다 . 결국 슬픔을 말로 만들어내는 ‘남겨진 사람 ’들의 몫이다 . 다시 말해 한 인간에게 매우 크나큰 슬픔이나 비극이 닥쳐왔다고 하더라도 결국 그걸 말로서 이야기하는 것은 당사자 혼자뿐 아니다 . 슬픔의 주체와 그 곁에 있는 모두가 함께 이를 이야기로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문학의 공간을 만들어내야 할 우리는 이제 없다 . 인간 앞에 닥쳐온 문제를 언어로서 공론화해야할 주체는 이제 없어진 것이다.


주체성의 사유화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리게 되는 공적 능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공적으로 행동하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이다. 아렌트가 말했듯이 그것은 나와 동등하지만 또한 나와는 다른, 즉 평등을 드러내면서 행동하고 발언할 수 있는 능력이다.29)

말하는 인간으로서, 그러니까 사회적 동물로서 정치를 행해야하는 인간은 사라졌다. 동시에 들으려는 주체도 사라진다30). 이를 주체성의 사유화라 부른다. 세월호 이후 우리들의 말이 빈말이 떠돌아다니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신자유주의가 만들어낸 정치의 경제화는 주체마저 사유물로 바꾸어 버렸다. 지금 우리에겐 말이 살아갈 공론장이 없다 . 때문에 문학의 역할은 어찌보면 더욱 커질 수 있다. 근대 문학의 종언이라 불리는 상황에서 오히려 주체성의 사유화는 근대 문학 (미디어와 공론장의 영역으로서의 )을 소환한다 . 이청준과 김연수가 그토록 만들고자했던 문학의 공간은 바로 이런 것이다. 세월호라는 너무나 거대한 슬픔 앞에서 문학은 말할 수 있다. 아니 말해야 한다. 유령처럼 빈말이 아니라 타자의 슬픔을 공감하고 재현하려는 노력으로 말이다.
27)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한길사, 1996, 235 쪽
28) 위의 책, 245 쪽
29) 홍철기 , 「세월호 참사로부터 무엇을 보고 들을 것인가 ?」, 『눈먼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209쪽
30) 사실 언어의 본질은 말하기가 아니라 듣기에 있다. 하지만 주체의 사유화로 인해 우리는 이제 내 것이 아닌 주체(타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5. 마치며
지금까지 이청준의 『언어사회학 서설』 을 분석하고 이를 중심으로 김연수의 두 작품을 견주어 봄으로써 문학과 언어의 관계를 고찰해보았다 . 문학은 결국 언어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 문학 (文學)은 그 단어 자체로 언어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 리터러시의 번역어로서 혹은 문예로서 문학은 근대 이후 언어를 빼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두 작가는 문학과 언어와의 관계 , 그러니까 떼어 놓을 수 없지만 언제나 불완전한 줄타기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언어는 그 자체로 불완전하나 인간은 결국 언어로 사고하기에 언어의 결과물인 문학은 대상을 완전히 재현해내지 못한다.
때문에 나는 세월호 사건31) 이후의 말들의 풍경을 보고 문학함 혹은 말함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 유령처럼 SNS에 떠도는 말들은 윤지욱이 처한 상황처럼 나를 괴롭혔다 . 그럼에도 이 두 작가는 재현의 대상인 타자에게 언제나 다가가려고 노력한다. 비록 그들이 쓴 작품이 완성 직전에 항상 무너지는 공든 탑이 될지라도 말이다. 내가 시대와 상황이 다른 두 작가를 같은 연장선상에서 비교한 시도는 다소 무리한 주제였을지도 모른다 . 하지만 이런 어려운 시도를 끝까지 밀고나가 글로 마무리할 수 있었던 것은 ‘나는 쓸 수밖에 없는 인간이다 ’라고 말하는 의지의 필경사 이청준, 김연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31) 소설가 박민규는 세월호 사고가 아니라 ‘사건 ’이라고 부르길 주장한다 . 교통사고처럼 불가항력의 사
고가 아니라, 국가가 아이들을 구해내지 못한 ‘사건’인 것이다.

6. 참고문헌
대상 작품(텍스트)
김연수 , 『 나는 유령 작가입니다』, 창비, 2005
김연수 , 『 세계의 끝 여자친구』, 문학동네, 2009
이청준 , 『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문학과 지성사, 1981
단행본 및 논문
김애란 외, 「침묵의 미래」 , 『2013 이상문학상 작품집』, 문학사상, 2013
박민규 외 11명 공저, 『눈먼 자들의 국가』 , 문학동네, 2014
권오룡 엮음, 『이청준 깊이 읽기』 , 문학과 지성사, 1999
이청준 , 「 존재적 언어와 관계적 언어 사이에서」 , 『 말없는표의 속말들』 , 나남, 1986
한순미 , 『 가의 언어 이청준 문학연구』 , 푸른사상, 2009
김영민 , 이왕주 공저, 「떠도는 말들의 복수」 , 『소설속의 철학』 , 문학과 지성사, 1997
신형철 , 「 세계의 끝 여자친구 해설」 , 『 세계의 끝 여자친구』, 문학동네, 2009
자크 데리다, 김성도 역, 『 그라마톨로지』, 민음사, 1996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 , 한길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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