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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회 카이스트 문학상] 소설 부문 가작 | 모쉬트
[415호] 2016년 02월 16일 (화) 카이스트신문 kaisttimes@gmail.com

모쉬트

전산학부 석사과정 김수지


어부의 요새에서 왕궁의 돌길을 밟고 내려오면 거대한 세체니 다리가 눈에 가득 찬다. 금방이라도 포효할 것 같은 사자상을 지나 두나강을 건너면 끝없는 평지의 페스트 지구가 나를 반긴다. 강변의 화려한 호텔들을 뒤로한 채, 바찌 거리의 따끈한 쿠르토쉬를 외면한 채 광장을 가로지르면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는 카로이 대로에 도착한다. 방금 막 야근을 끝내고 온 것 같아 보이는 남자는 주위를 둘러보다 이내 앞에 놓인 굴라쉬에 코를 박고 거침없이 들이킨다. 언제부터 놀기 시작한 건지 종잡을 수 없는 젊은이들은 벽에 기댄 채 나를 바라본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로이 대로를 가로질러 키라이 거리로 몸을 움직인다. 좁은 일차선 거리임에도 웅크리고 있는 무리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새벽까지 손님을 봐주고 있는 24시간 치과의 붉은 어금니 전광판이 선명하게 보인다. 왼쪽에 조그마한 여인숙이 나타날 때까지 키라이 거리를 따라 걷는다. 이윽고 여인숙이 보였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몸을 오른편으로 돌려 마주친 커다란 건물에 적힌 주소를 확인했다.

'király ut. 13'

조심스레 문을 열고 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면 또 다른 길이 펼쳐진다. 주소도 적혀있지 않고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지만 길이 분명하다. 1km 남짓 펼쳐진 이 길의 좌우로 수많은 술집이 밀집해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지독한 우니쿰 냄새가 코를 찔러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린다. 가까스로 숨을 참은 채 도착한 곳은 이 거리에서 가장 큰 위용을 뽐내는 술집 모쉬트다.

문 옆에는 필기체로 흘려 쓴 붉은색의 Most가 금방이라도 꺼질 듯 깜빡이고 있다. 모쉬트는 실내뿐만 아니라 실외까지도 온통 주객들로 가득하다. 모쉬트. 지금이라는 뜻에 걸맞게 지금 아니면 언제 또 들이킬 수 있겠냐는 듯 주객들 모두 술잔을 들이키는데 열심이다. 마당을 지나 문을 열고 뚜벅 뚜벅 구두 소리를 내며 바텐더에게 다가가 쇼프로니 한 잔을 주문한다. 바텐더가 말 걸 틈도 없이 금세 쇼프로니 한 잔을 비워낸다. 내가 지금부터 하고자하는 이야기는 바로 이 술집 모쉬트의 지하에 앉아있는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다.

수많은 주객들의 속을 비워내기 위해서일까. 바 뒤의 좁은 나선형 계단을 조심스레 걸어 내려가면 어두운 초록빛의 화장실이 기다리고 있다. 볼 일을 보기위해, 방금 먹은 우니쿰을 게워내기 위해 혹은 화장을 고치기 위해 모쉬트에 들리는 절반의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나선형 계단을 내려와 이 화장실로 모여든다. 장애인이 나선형 계단을 내려올리는 만무하니 이곳엔 남녀 화장실 딱 두개뿐이다. 남녀 화장실의 문은 서로를 향해 마주보고 있는데, 그 남녀 화장실이 마주보는 통로 앞에는 초등학교 교실에 있을법한 조그마한 나무 책걸상이 놓여있다. 그 작은 의자에 큰 엉덩이를 위태롭게 걸치고 앉아 있는 여인이 있다. 그녀의 표정에는 아무런 색이 없어 그 얼굴을 한 번 슥 보게 되면 화장실로 달려오던 위급함도 잠시나마 잊게 된다.

방금 막 맥주를 무지막지하게 때려 붓고 계단을 내려온 사내들이 화장실로 몰려온다. 사내들이 다가오자 여인은 손을 내밀었고 그녀의 손바닥 위엔 이내 100포린트 동전 몇 개가 반짝거리며 놓인다. 여인은 아무도 보지 못하게 허리춤에 동여맨 주머니를 열어 조용히 동전을 떨어뜨린다. 속이 뒤집혀 급한 마음에 그녀를 무시하고 화장실로 뛰어간들 평온한 마음으로 화장실을 빠져나올 때쯤 그녀는 잊지 않고 손을 내민다.

주머니 속 동전 몇 개가 몇 십 개가 되고, 몇 백 개가 모일 때쯤 모쉬트의 하루 장사가 끝난다. 새벽 5시. 늦게까지 작업에 열중한 사람들이 고단한 몸을 이끌고 침대로 들어가는 시간이다. 부지런한 사람들이 일터로 향하는 전차에 오르는 시간이기도 하다. 여인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큰 몸을 일으키자 작은 책상과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밀린다. 크게 기지개를 피자 여기저기서 케케묵은 우두둑 소리가 들린다. 여인은 새벽 내내 부산했던 화장실 칸칸을 드나들며 정리한다. 세월의 흔적이 내려앉은 변기들은 닦는다 해서 그 흔적들이 지워지지 않지만 여인은 정성을 다해 닦아낸다. 화장실의 불을 끄고 나와 좁은 나선형 계단을 한 층 한 층 오를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 소리가 지하를 울리다 이내 고요해진다.

참혹한 전후의 모습을 보는 듯 모쉬트는 술 냄새와 술병으로 아수라장이다. 전쟁터에서 홀로 살아남은 병사처럼 여인은 지친 발걸음으로 모쉬트를 빠져나와 건너편 건물로 들어간다. 고요한 복도에 둔탁한 여인의 발걸음이 울린다. 모쉬트가 내려다보이는 3층의 작은 방의 불이 켜진다. 여인은 창문으로 다가와 모쉬트의 불이 꺼지는 것을 내려다보다 이내 커튼을 내린다. 허리에 동여맨 주머니를 풀어 방 한편에 놓인 양동이에 부어 넣는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다. 깊은 밤 내내 화려하던 키라이 거리에 차가운 아침 공기가 내려앉는다.

키라이 거리의 전광판들이 하나둘 켜질 때쯤 여인은 또 다시 지하에 앉아있다. 이 날도 여느 날과 다르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화장실을 드나들었으며 여인의 표정에는 미동이 없다. 먼동이 터 올 무렵 여인은 큰 몸을 일으켰고 화장실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한 칸 한 칸 정성스레 청소하던 그녀의 눈에 작은 보석함이 눈에 띈 것은 남자 화장실 청소를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이다. 여인은 변기 위에 가지런히 놓인 보석함을 들어본다. 큰 몸을 돌릴 수가 없어 뒷걸음질로 들어왔던 그대로 칸을 빠져나온다. 큰 눈망울로 주위를 살펴보지만 여인 주위엔 자신을 둘러보는 거울 속 자신뿐이다. 몸에 비해서 애기 손처럼 보이는 큰 손으로 보석함을 열자 그 안에는 흰 종이쪽지 한 장이 놓여있다.

'너른 꽃밭에 숨어 있어도 그 어느 꽃보다 아름답다. -Laszlo Kalman'

여인은 그저 말없이 서서 물끄러미 쪽지를 바라본다.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났을까. 보석함을 닫는 소리가 화장실 안을 맴돌았다. 큰 눈을 껌뻑이며 여인은 보석함을 조심스레 원래의 자리에 올려놓는다. 수명이 다해 깜빡거리던 형광등이 결국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길을 건너자 지하의 화장실은 더욱더 암흑으로 가득 찬다. 여인은 손을 더듬거리며 지하를 빠져나와 좁은 나선형 계단을 오른 뒤에야 큰 숨을 들이마실 수 있었다. 잠시 지하를 뒤돌아봤던 것만 제외하고선 여인은 여느 날과 다름없이 모쉬트를 빠져나와 집으로 걸어간다. 양동이에 주머니 속 동전들을 쏟아내며 하루를 마감한다.

어느덧 거리에 어둠이 내려앉았고 여인은 주머니를 다시 허리춤에 동여맸다. 모쉬트의 일 층엔 하루를 일찍 끝낸 네댓 명이 술잔을 기울이며 인생을 논하고 있지만 지하에선 아직 하루를 개시하지 못한 여인이 앉아있다. 큰 눈을 껌뻑이는 여인은 계단을 타고 윗 층으로부터 들려오는 인기척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 당분간 아무도 내려오지 않을 거란 확신이 생겼을 때 쯤 여인은 책상을 박차고 일어서 남자 화장실로 들어간다. 여인의 손길이 마지막이었는지 보석함은 같은 자리에 같은 모습으로 놓여있다. 위층의 피터에게 보석함을 맡긴다면 보석함이 더 쉽게 주인을 만날 수 있을까? 아니다. 분명 욕심 많은 피터는 보석함을 주인에게 돌려줬다 하겠지만, 보석함은 한 블럭 떨어진 술집 작부 조피의 손에 들어갈 것이 뻔하다. 잠시 고민하던 여인은 보석함을 들고 나와 책상 서랍에 넣고서는 누군가가 보석함을 찾는다면 직접 돌려주리라 생각한다.

여인의 주머니에 꽤 많은 동전이 모였음에도 보석함은 여전히 책상 서랍에 놓여있다. 여인은 그 어느 날보다 동전을 건네는 사람들의 얼굴을 면면히 살펴보았지만 모두 낯선 얼굴들이었다. 여인은 서랍에서 보석함을 꺼내 조심스레 열어본다. 한 여인을 향한 고백의 편지일까. 내가 알지 못하는 유명한 시 구절은 아닐까. 여러 생각이 여인의 머릿속을 헤매고 있을 때 누군가가 여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생각에 집중한 탓인지 여인은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채 깜짝 놀라 큰 눈이 더 커졌다.

"뭘 생각하는데 내 말을 들은 체도 아니하나?"

"미안해요. 뭐라고 했죠?"

"상자가 예쁘군. 보석이라도 넣어 놓은 건가? 여기랑은 영 어울리지 않는걸."

술 냄새를 풍기며 팔짱을 끼고선 여인을 바라보던 남자는 여인의 손으로부터 보석함을 낚아챈다. 이리저리 보석함을 둘러보던 남자는 뚜껑을 열고 안에 놓인 쪽지를 읽기 시작한다.

"너른 꽃밭에 숨어있는 게 꽃보다 아름답다. 라슬로 칼만이 이런 말을 했다고? 그 샌님 라슬로 칼만이?"

"라슬로 칼만씨를 아나요?"

"알다마다. 한 달에 두어 번은 만나는 체스 모임에서 나한테 여러 번 깨진 인물이지. 그러고 보니 여기도 몇 번 함께 왔던 것 같은데."

"혹 어제도 왔었나요?"

"글쎄... 그건 모르겠네. 마지막 체스 모임은 지난 주였지만... 지나는 길에 들러 한 잔 들이켰을 지도."

"라슬로씨 주소를 알고 있나요?"

 이튿날 해가 하늘 한 가운데 머물러 있는 시각에 여인은 키라이 거리를 빠져나오고 있었다. 모쉬트가 문을 열기 전에 라슬로씨가 살고 있다는 나기메조 거리에 다녀오려면 부지런히 걸어야 했다. 낮에 바깥으로 나온 게 얼마만 인걸까. 거기다 키라이 거리를 벗어나 걷는 것은 더 오랜만인 듯하다. 태양은 눈이 부셨고 이내 여인의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카페테라스에서 식사중인 높으신 분들을 뒤로한 채, 거리에서 공 하나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뒤로한 채 나기메조 거리에 당도했다. Nagymező ut. 42. 지난 밤 남자가 적어준 쪽지엔 나기메조 거리 42번지가 선명히 적혀있다.

 42가 선명히 새겨진 초록 문 앞에 여인이 서있다. 언제 마지막으로 청소한 건지 알 수 없는 회색 벽의 4층짜리 주택이다. 몇 세대 살고 있지 않은 탓인지 문 옆의 호출기에 새겨진 이름을 차례대로 훑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여인의 시선이 멈춰 섰다. Laszlo Kalman. 여인은 큰 눈을 천천히 한 번 껌뻑이고, 숨을 한 번 크게 들이 마신 뒤 이내 라슬로씨의 호출 벨을 누른다.

 "누구시오?"

 "혹시 라슬로 칼만씨 계신가요?"

 "내가 라슬로 칼만이오. 누구시냐 묻지 않았소?"

 "아, 아틸라 가보씨의 소개로 왔습니다. 저는 모쉬트에서 일하는 카탈린 젤러라고 합니다."

 라슬로씨는 대답이 없었다. 호출기가 아직 꺼지지 않았는지 미세한 소음과 함께 멀리서 들려오는 알 수 없는 라슬로씨의 중얼거림이 섞여 들려온다. 이내 소음이 멈췄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들어오시오."

굳게 닫혀 있던 파란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열렸다. 문 안으로 들어서자 소박한 정원이 보인다. 이국적인 꽃도 더러 보이며 정갈한 나무 잎들을 보니 주인이 꽤나 정성을 들여 가꾸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계단을 올라 3층에 있는 라슬로씨의 집에 도착하자 여인의 이마엔 땀이 송글송글 맺혀 있다. 라슬로씨가 차를 준비해 오는 동안 여인은 까만 가죽 소파에 앉아 작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연신 땀을 훔친다. 아틸라가 설명한 것과는 달리 라슬로씨는 건장한 노신사의 모습이다. 신문을 보고 있었는지 테이블엔 오늘자 신문이 펼쳐져 있다. 삶에 흥미를 잃었거나 두려움을 느낀 젊은이가 두나 강에 또 몸을 던진 모양이다.

"그래, 나를 찾는 이유나 들어봅시다."

라슬로씨가 찻잔을 홀짝거린다. 왕가에서 쓸법한 예쁜 꽃이 그려진 찻잔이다. 라슬로씨가 버릇인양 왼 손으로 안경다리를 들어 올리자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이 은색 안경테에 반사되어 집안 이곳저곳으로 흩어진다. 여인은 가방에서 보석함을 꺼내 라슬로씨에게 건넨다. 그리고서는 보석함을 얻게 된 자초지종을 털어 놓는다. 이 아름다운 보석함을 주인에게 돌려주고 싶은데 단서라고는 쪽지에 적혀있는 라슬로씨의 말밖에 없다는 말도 덧붙인다. 라슬로씨는 보석함을 열어 조심스레 쪽지를 꺼낸다.

"음... 모쉬트서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가 많았소만, 난 이 문장을 모르오. 이 라슬로 칼만은 내가 아닌 듯하오. 미안합니다."

여인의 얼굴에 당혹스러움과 실망의 그림자가 깊게 퍼진다.

"이보시오. 이 나라에 거리를 걷다보면 만나는 셋 중 하나는 라슬로요. 라슬로 칼만이 설마하니 나뿐 만은 아니겠지..."

짧은 침묵이 이어진다. 서로 다른 이유에서 시작된 침묵이지만 고요한 공기 속에 그 본질은 같다. 집안을 내리누르던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이리저리 보석함을 어루만지던 라슬로씨였다.

"보면 볼수록 아름답군. 이 보석함 말이오. 주인을 찾는 건 포기하고 그냥 갖는 건 어떠하오? 주인 잃은 물건, 먼저 집은 사람이 임자 아니겠소? 하하하."

여인이 그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화장실에서 물건을 잃어버리는 술에 취한 사람들은 수두룩하다. 물론 대부분은 기억을 잃은 탓인지 취기가 깬 뒤에도 찾으러 오지 않는다. 이 보석함을 놓고 간 이도 그 중 하나였을 것이며, 그가 지금 이 보석함을 기억하고 있을는지도 미지수다. 하지만 여인은 정의롭게 보석함을 돌려주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게 아니다. 자신의 마음을 흔든 문장을 만나게 해준 이를 찾아 고마움을 표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아무 단서도 없는 척박한 사막위에 서있는 라슬로 칼만을 꼭 찾아야만 한다. 여인은 보석함을 집어 가방에 다시 넣는다.

"말씀은 고맙지만, 꼭 찾아 돌려주도록 하겠습니다."

라슬로 씨의 집을 나와 계단을 내려오는 여인의 발소리가 아까 계단을 오를 때보다는 힘이 빠졌단 걸 알리 듯 조용했다. 계단을 내려와 정원을 지나 건물 밖으로 나가려는 여인을 3층 테라스에 서있는 라슬로씨가 큰 소리로 멈춰 세웠다.

"켈레티 카로이 거리 52번가에 사는 타마쉬 사보를 찾아가보시오. 아마 그는 그 라슬로씨를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소. 조심해서 가시오."

작별의 인사를 고하는 라슬로씨에게 여인은 공손한 목인사를 건네고 파란 철문을 빠져나왔다. 여인이 키라이 거리에 도착했을 땐 어느덧 거리에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여느 날과 같이 여인은 캄캄하고 냄새나는 모쉬트의 지하에 앉아있고 그녀의 책상 서랍엔 주인을 기다리는 보석함이 놓여있다.

날이 밝자 여인은 또 다시 키라이 거리를 벗어난다. 켈레티 카로이 거리는 두나 강 건너편 부다 지구에 있기 때문에 뒤뚱거리는 발걸음이지만 어제보다 더 서두르는 모습이다. 두나 강에 놓인 수많은 다리 중 여인은 마르기트 다리를 건너고 있다. 물빛이 반짝거린다. 어제 라슬로씨의 집에서 본 신문 기사가 여인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간다. 켈레티 카로이 거리는 마르기트 다리에서 쭉 이어져 나온 구불구불한 마르기트 대로로부터 가지처럼 사선으로 작게 뻗어있었다. 여인이 살고 있는 페쉬트의 회색 빛 카로이 대로와는 다르게, 지중해의 어느 도시에 온 마냥 오색 빛의 아름다운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타마쉬씨가 살고 있다는 켈레티 카로이 52번지는 켈레티 카로이의 가장 끝에 놓인 모퉁이 집이다.

'Keleti Károly ut. 52'

여인은 주소를 적어온 쪽지를 한 번 더 확인한 뒤 타마쉬씨를 찾는 벨을 누른다. 이윽고 빨간 문이 열리자 여인은 조심스런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들어섰다. 화려한 겉모습과 달리 집 안은 소박하지만 알차게 꾸며져 있다. 박물관처럼 집 곳곳에 세계 각국의 기념품들이 놓여 있다. 타마쉬씨는 어제 만난 라슬로씨와 비슷한 연배처럼 보이지만, 어금니가 보일랑 말랑한 밝은 미소 덕분인지 더 젊고 사교적으로 보인다. 타마쉬씨가 차를 내오며 환한 미소를 짓는다.

"오느라 수고하셨소. 라슬로 칼만으로부터 손님이 찾아 올 거라고 들었소. 타마쉬 사보라고 합니다."

"카탈린 젤러라고 합니다. 이 쪽지 속 라슬로 칼만을 찾고 싶어 선생님을 찾아왔습니다."

쪽지를 건네받은 타마쉬씨는 쪽지 속 문장을 소리 내어 읽는다. 쪽지를 든 타마쉬씨의 왼 손에서 가느다란 떨림이 느껴진다. 쪽지를 내려놓으며 다시 어금니를 드러내 보인다.

"하하하. 라슬로가 왜 한낱 시인 나부랭이인 나에게 보냈는지 알겠구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소?"

자리에서 일어난 라슬로가 거실 한 면을 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나무 책장에서 몇 가지 두꺼운 책들을 집어 가져온다.

"아마도 이 책들이 라슬로 칼만씨를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타마쉬씨는 알 수 없는 소리로 작게 중얼거리며 빠르게 책을 훑어 나갔다. 타마쉬씨의 호언장담과는 다르게 많은 책은 라슬로 칼만을 모르고 있었는지 테이블 한 켠으로 쫓겨났다. 타마쉬 씨는 당황한 기색 없이 마지막 책을 들었다. 오랜 세월을 겪은 것인지 표지 곳곳이 뜯겨져나가고 있었지만, 책을 열어보니 잘 보관된 순백의 페이지들이 펼쳐졌다. 타마쉬씨는 책을 천천히 한 장 한 장 훑어나간다.

"내 생각이 맞았구만. 이걸 좀 보시오."

타마쉬씨가 내민 책에서 큼지막하게 쓰인 Laszlo Kalman이 보인다. 큼지막한 이름 옆에는 흑백의 증명사진이 함께 있는데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장난기를 숨기기 위한 근엄함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페이지를 넘기자 라슬로 칼만이 지은 것처럼 보이는 시들이 적혀있다.

"라슬로 칼만은 우리 대학에서 꽤나 유명한 인물이었소. 과제에서 F를 준 교수와 그 독한 우니쿰 마시기 대결을 했다든가, 두나 강을 걸어서 건너겠다며 발에 추를 매달고 깊은 바닥을 걷지 않나... 아무튼 기이한 행동을 많이 했다오. 그러던 그가 시를 쓰기 시작한 건 그 사건 이후였지..."

타마쉬씨는 잠시 숨을 고르고 이내 담담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라슬로 칼만은 아프리카 출신 아버지와 헝가리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다.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만들어내는데 소질이 있던 그는 대학에 들어가 건축을 전공하게 되었다. 까만 얼굴을 하고 기이한 행동을 하는 그의 주위에 친구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는 당당했다. 쓸쓸하지만 혼자서도 당당히 학업을 이어갔다. 3학년을 마치고 4학년이 되기 전 겨울방학에, 그는 바질리카 대성당 보수공사에 참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 탓에 학비를 벌어야했고, 거기다 졸업 후에도 관련된 일을 소개받아 이어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부다페스트에서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는 바질리카 대성당은 건축학도인 그가 가장 흠모하는 건축물이기도 했다. 방학이 시작되었다. 부푼 마음으로 설계 사무소로 출근해 도면을 보고 있던 그에게 이른 아침부터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아직 공부를 끝마치지 못한 학생인데다가 혼혈인 그가 바질리카 대성당 보수 설계에는 참여할 수 없다며 대신 공사 현장에서 돌을 날라야 한다는 것이었다. 꿈에 부풀어 있던 심장이 그대로 산산조각 나버렸지만 그는 차마 자리를 박차고 나올 수 없었다. 주정뱅이 아버지는 집을 나간 뒤 영영 돌아오지 않았으며, 어머니의 벌이로는 집에 있는 동생들을 먹여 살리기에도 모자랐다. 학비를 마련하지 못하면 3년간의 학업이 물거품이 되어버릴 것이 뻔했다.

현장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열악했다. 해가 뜨는 일곱 시부터 늦저녁까지 두나 강변에 놓인 돌을 바질리카 꼭대기로 부지런히 돌을 옮겨야 했다. 온 몸에 추위가 파고 들었지만 따뜻한 모닥불을 쬘 수 있는 시간은 삼십분 가량의 점심시간이 전부였다. 라슬로는 요령을 피우지 않고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했다. 돌을 나르는 척 빈 바구니를 옮기는 이부터, 감독관 옆에 찰싹 달라붙어 꾀를 부리는 이까지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고도 일당을 받아갔다.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지 않을수록 라슬로가 날라야 할 돌은 늘어만 갔다. 그럼에도 라슬로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했다. 하늘은 모든 걸 알고 있기에 언젠가 일한 사람은 일한만큼 공정하게 그 대가를 돌려받을 거라 생각했다. 라슬로가 돌바구니를 짊어지고 쯔리니 거리를 지나 바질리카로 향할 때마다 모닥불 주위에 모여 빈둥대는 사람들은 모두 라슬로를 향해 한 마디씩 던졌다.

"멍청하긴... 소장한테 좀 비벼놓고 빈 바구니 나르는 게 더 여러운 일이람?"

"어쩌겠어, 머리가 모자라면 몸이라도 고생해야지."

"어이, 그거 내려놓고 이리 와서 내 어깨 좀 주무르라고. 이래봬도 내 처남이 소장하고 인맥이 좀 닿아 있다구."

라슬로는 흔들리지 않고 걸어갔다. 언젠가 돌려받을 거란 생각 하나만으로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라슬로가 공사에 참여한 지 넉 달이 채 되지 않았을 때 공사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석 달이 조금 넘는 기간밖에 되지 않았지만 허리며 팔다리, 몸 구석구석 성한 곳이 없었다. 마지막 공사 날이 다가왔고 라슬로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평소에는 몇 번이고 다시 두나강으로 던져버리고 싶던 돌들이 그날따라 가볍게 느껴졌다. 마지막 날인만큼 보수 공사 총 책임자인 피터 차르노가 현장에 방문해.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의 이름을 성당 한켠에 새겨 넣어준다 했기 때문이다. 평소엔 놀고먹던 인부들도 오늘만큼은 반쯤 채워진 돌바구니를 매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저치들과 함께 이름이 올라간다는 게 속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제 이름을 어머니가 다니는 성당 한 켠에 새겨 넣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공사가 모두 끝난 뒤 총 책임자 피터가 단상 위에 서서 그 동안의 노고를 치하하는 연설을 시작했다. 겉으로 듣기엔 인부들의 노고를 치하한다 하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인부들로 포장한 본인의 업적을 늘어놓는 연설에 불과했다. 긴 연설이 끝나고 인부들을 한 명 한 명 호명하며 단상으로 불러 격려를 해주며 그날의 일당을 직접 나눠주었다. 라슬로의 이름이 마지막으로 불렸다. 단상으로 올라가려는 라슬로를 피터가 멈춰 세웠다.

"거기 어딜 올라오려는 거야? 이봐 감독관, 이번 공사에 이 친구도 참여한 건가?"

"예... 라슬로 칼만은 이번 공사에서 석자재 운반을 담당했습니다."

"어이 이봐, 내 다시 묻겠네. 이번 공사에 이 까만 친구도 참여했다는 거야? 이 신성한 바질리카를 올리는 사업에 정말 이 검둥이가 참여했다는 거야?"

피터가 큰 목소리로 감독관을 윽박질렀다. 라슬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단상에 서 있는 피터를 올려다봤다.

"아... 아닙니다. 모르는 친구입니다."

"그렇지 모르는 사람이지? 아니 근데 왜 이 경사스런 날에 여기에 와 있는 거야? 에잇 재수 옴 붙게, 퉤."

"어이 라슬로, 관계자가 아닌 사람은 여기 있음 안 돼. 얼른 여길 떠나주게."

"감독관님... 저는 분명 여기서 석 달이 넘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자네가 언제 여기서 일을 했다고? 어서 썩 꺼지지 못해?"

모닥불에 모여 있던 다른 인부들이 라슬로를 들어올렸다.

"저 까만 친구 좀 내 눈앞에서 치워버려. 아 그리고 그 뭐냐... 그 인부 명단 새겨 넣은 대리석에서 저 친구 이름은 빼버리라구. 오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피터의 말이 칼이 되어 라슬로의 심장을 찔렀다. 인부들은 라슬로를 들쳐 매고 공사장 뒤편 외진 길에 던져 놓고선 돌아갔다. 거리에 널브러져 쓰러진 라슬로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그저 소리 없이 흐느껴 울 뿐이었다.

바질리카 대성당의 재개관 날. 어두운 하늘에선 부슬비가 내렸지만 부다페스트 시민들은 대성당에 모여 흥겹게 대성당의 시대를 축하했다. 공사 책임자인 피터는 단상 한 켠에 앉아 공사를 맡겼던 국가 관리와 이야기를 나누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 날 성당 안에 있는 모두가 기쁜 마음으로 앉아있던 것은 아니었다. 라슬로 역시 대성당 구석에 조용히 앉아 공사 책임자인 피터를 주시하고 있었다. 신부님이 피터에게 다가가 무엇을 속삭이자 피터는 벌떡 일어서 어디론가 향했다. 라슬로는 재빠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행여나 들키는 것은 아닐까 조심스런 발걸음을 옮기며 피터의 뒤를 쫓았다. 피터가 도착한 곳은 성당의 돔이 보이는 관측 탑이었다. 무엇인가 불안하게 관측 탑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피터가 돔 아래 무언가를 발견한 듯 난간으로 다가갔다. 그 무엇인가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비명을 지르며 성당 아래로 떨어진 건 라슬로가 관측 탑에 막 발을 들여놓았을 때였다. 피터가 밟고 있던 돌이 반으로 쩍 갈라지며 손 쓸 틈도 없이 추락해 버린 것이었다. 라슬로는 난간으로 다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피터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고 라슬로는 마구 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조용히 관측 탑을 빠져나왔다.

라슬로는 그 날 이후 며칠을 끙끙 앓았다. 신문엔 피터의 죽음이 대문짝하게 실렸다. 피터의 죽음이 분명 라슬로의 잘못은 아니었으나 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피터가 그 돌을 밟지 않았어도, 자신이 피터를 밀어 떨어트렸을 것이다. 결국 피터를 죽인 것은 자신이란 생각에 죄책감이 몰려왔다. 그는 그 뒤로 입을 닫았다. 대신 오른 손에 연필을 쥐고 시를 토해내기 시작했다. 더 이상 학교엔 그의 얼굴이 없었다. 라슬로는 조그만 방에 틀어박혀 미친 듯이 써내려갔다. 훗날 그의 노트를 발견해보니 대부분의 시는 분노와 죄책감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한다.

"당신이 가져온 쪽지 속 그 문장은 그가 남긴 마지막 시에요."

"네? 그렇담 라슬로씨는 지금...?"

"그는 죽었소. 제 손으로 제 발에 추를 달고 두나 강에 걸어 들어가 죽었소."

타마쉬는 그가 라슬로의 어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미친 듯 광기 어린 시를 토하던 그가 어느 날부턴 시를 쓰지 않았다 한다. 흐릿했던 눈빛도 푸르렀던 대학생의 그것으로 돌아갔지만 여전히 입은 굳게 닫혀있었다. 한결 편해진 모습으로 쪽지에 무언가를 끄적이던 그가 집을 나설 채비를 하자, 그의 모친은 너무 놀라 까무러쳤다 한다. 그의 방문 앞에 식사를 두고가고, 식사를 마친 그가 방문 앞에 내놓은 빈 그릇을 치우는 게 몇 년 동안 그의 어머니가 그와 하는 유일한 대화였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모습은 볼 품 없었지만 그의 손을 어루만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의 모친은 하늘에 감사했다. 한 동안 어머니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던 그는 친구에게 전해줄 것이 있다며 집을 나섰다. 그의 어머니는 어떤 친구냐 묻지도 못한 채,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끼며 떠나는 그의 뒷모습만 그저 바라보았다. 그는 돌짐을 매던 그 두나 강변에 집에서부터 소중히 챙겨온 쪽지를 남긴 채 두나 강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결국 무엇을 깨닫고 편안함을 느꼈을 지는 잘 모르겠소. 그 쪽지에 적혀있던 그의 마지막 시가 바로 당신이 가져온 물음에 대한 대답이오."

캘러티 카로이를 빠져나온 여인은 모쉬트로 향한다. 거리에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여인은 올 때와는 다르게 세체니 다리를 건너기로 한다. 세체니 다리를 건너면 바로 보이는 바질리카 대성당이 환하게 부다페스트를 밝히고 있다. 세체니 다리 한 가운데 멈춰선 여인은 가방에서 보석함을 꺼낸다. 그리고는 보석함을 열어 라슬로 칼만의 시를 웅얼거렸다. 잠시 바질리카 대성당을 멍하니 바라보던 여인은 보석함의 뚜껑을 닫고 두나 강으로 떨어트린다. 보석함은 떠 있을 새도 없이 두나 강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는다. 보석함의 주인이 누군지 알 수 없지만 고마워 할 대상을 찾은 이상 이 보석함은 그의 것이라 생각했다. 비로소 보석함이 주인을 찾아갔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였다.

여인은 모쉬트 지하 화장실 입구에 앉아있다. 그녀의 서랍은 텅 비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선 라슬로가 남겨놓은 알 수 없는 비밀의 씨앗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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