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5개월동안 난 운 좋게도 워싱턴 DC에 있는 AAAS 본사에서 인턴으로 일할 수 있었다. AAAS는 사이언스지 발행 외로도 미국 내 과학문화 및 과학 애드보커시 활동의 본산이며, 과학기술정책을 연구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이 글은 거기서 일하면서 느낀 점을 우리 학교 학우들뿐만 아니라 교수님들, 또 전 학교 구성원들과 공유하기 위해 쓰여졌다.


내가 일하던 부서는 OISA(Office of International and Security Affairs)로, 잘못 해석하면 국제안보 업무를 보는 곳으로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첫째로 국제과학외교 업무를 보고, 둘째로 과학과 안보의 교점을 연구를 하는 곳이다. 우리 부서 말고도 AAAS의 다른 부서들은 R&D 예산과 정책을 분석하고, 대중의 과학 참여방법을 물색하며, 정부와 의회에 과학계 이슈 및 의견을 전달하는 일 등을 맡고 있다. 물론 사이언스지 발행부서도 있다. AAAS는 “공익을 위해서 과학과 공학, 혁신을 전세계적으로 발전(진흥)”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고, 이를 이루기 위한 실천이 바로 위에 언급한 AAAS 내 여러 부서들이 하는 일인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우면서도 당연한 점을 하나 짚고 싶다. 바로 AAAS가 과학발전을 목표로 삼는데, 과학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과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있긴 하지만, 흔히 우리가 쓰는 표현 내에서 AAAS가 하는 활동들을 과학이라고 할 순 없을 것 같다. 그럼에도 AAAS에서 일하는 직원들은-대부분 이학공학 학위를 갖고 있긴 하다-앞서 언급한AAAS의 목표를 위해 일하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과학을 하지 않아도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간단한 사실을 우리는 가끔, 아니 자주 잊고 사는 것 같다.


미국 과학기술정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바네바 부시는 미 국립과학재단(NSF)를 설립하는 데에 있어 지대한 공을 세웠다. 지금까지도 많은 과학자들이 그가 70년 전 작성한 <과학, 그 끝없는 프런티어> 보고서를 인용해서 연구개발투자의 필요성을 역설하곤 한다. 미 국립과학재단(NSF) 설립 후 미국의 과학기술은 크게 발전하여 기초과학, 응용과학을 막론하고 미국을 언급하지 않고는 현대과학이 어떻게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는지 설명할 수 없는 데에 이르렀다. 그의 업적 역시 과학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과학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점을 쉽게 부인할 수는 없다.


지난 10월 23일, 대한민국 과학기술인 일동은 대전에서 열린 세계과학정상회의의 부대행사였던 대한민국 과학발전 대토론회에서 <과학기술 혁신과 미래창조를 위한 우리의 다짐>이라는 선언문을 통해 “과학기술인들은 창의와 성실을 바탕으로 연구개발에 정진하여 국민행복에 이바지 할 것을 다짐”하고, “국가번영의 원동력은 강력한 리더십에 있음을 주목하고, 과학적합리적 국정운영을 펼치도록 적극 협조하고 노력할 것을 다짐”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보았다. 그 자리에 있던 많은 과학기술인들이 사전 동의는커녕 듣도 보도 못한 선언문에 한 쪽 손을 들고 같이 다짐하는 모습을. 거부의 의미로 선언문 낭독이 끝날 때까지 앉아있으면서, 한때 녹색성장 인재의 요람이었던, 그리고 지금은 창조경제의 전진기지인 우리 학교를 생각했다. 한번 되돌아보자. 우리는 우리 자신을 과학기술인으로 규정하고, 우리의 역할을 과학기술로 규정된 범위 내에서 공부와 연구를 하는 것이 다라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정체와 역할을 너무나 비좁게 인식하고 있다. 그건 우리에게도, 과학발전에도, 심지어 우리나라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나는 그 날 대한민국 과학기술인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아닐 듯 하다. 그리고 감히 우리 학교 구성원들 역시 대한민국 과학기술인이 아니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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