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탄생 100주년 : 순수와 절제, 문학적 삶의 큰 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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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 탄생 100주년 : 순수와 절제, 문학적 삶의 큰 모범
  • 김종회 교수
  • 승인 2015.04.05 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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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황순원이 지난 3월 26일로 탄생 100주년을 맞았다. <소나기>를 비롯해 수많은 대표작을 남긴 그의 문학 인생을 들여다보자

오랫동안 글을 써온 작가라고 해서 반드시 훌륭한 작품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작품의 제작에 지속적 시간이 공여된 문학은 그렇지 않은 경우에 비추어 더 깊고 넓은 세계를 이룰 가능성을 갖고 있다. 우리 문단에도 명멸한 작가들이 많았지만, 평생을 문학과 함께 해왔고 그 결과 노년에 이른 원숙한 세계관을 작품으로 형상화할 시간적 간격을 획득한 작가는 그리 많지 않았다.
황순원이 우리에게 소중한 작가인 것은 시대적 난류 속에서 흔들림 없이 온전한 문학의 자리를 지키면서 순수한 문학성을 가꾸어왔고, 그러한 세월의 경과가 작품 속에서 느껴지고 있다는 점과 긴밀한 상관이 있다. 장편소설로 만조를 이룬 황순원의 문학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시에서 출발하여 단편소설의 세계를 거쳐 온 확대 변화의 과정을 볼 수 있다. 그의 소설 가운데 움직이고 있는 인물들이나 구성 기법 및 주제의식도 작품 활동의 후기로 오면서 점차 다각화, 다변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여러 주인공의 등장, 얼기설기한 이야기의 진행, 세계를 바라보는 다원적인 시각과 인식 등이 그에 대한 증빙이 될 수 있겠다. 그러나 그 다각화는 견고한 조직성을 동반하고 있으며, 작품 내부의 여러 요소들이 직조물의 정교한 이음매처럼 짜여서 한 편의 소설을 생산하는 데 이른다.
이러한 창작 방법의 변화는 한 단면으로 전체의 면모를 제시하는 제유법적 기교로부터 전면적인 작품의 의미망을 통하여 삶의 진실을 부각시키는 총체적 안목에 도달하는 과정을 드러낸다. 단편 문학에서 장편 문학을 향하여 나아가는 이러한 독특한 경향이 한 작가에게서 순차적으로 진행되고 있음은 보기 드문 경우이며, 그 시간상의 전말이 한국 현대 문학사와 함께했음을 감안할 때 우리는 황순원 소설 미학을 통해 우리 문학이 마련하고 있는 하나의 독창적 성과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황순원의 작품 세계
황순원의 첫 작품집에 해당되는 시집 <방가>와 시집 <골동품>에 나타난 시적 정서는 초기 단편에 그대로 이어져서, 신변적 소재를 중심으로 하는 주정적(主情的) 세계를 보여준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삶의 현장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은데, 이는 아마도 ‘암흑기의 현실적인 제약과 타협하지도 맞서지도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상실과 말소의 시대를 지나온 이러한 자리지킴은 그에게 후일의 문학적 성숙을 예비하는 서장으로 남아 있다.
<곡예사>와 <학> 등의 단편집을 거쳐 <카인의 후예>나 <나무들 비탈에 서다>와 같은 장편소설로 넘어오면서 황순원은 격동의 역사, 한국전쟁을 작품의 배경으로 유입한다. 삶의 첨예한 단면을 부각하는 단편과 전면적인 추구의 자리에 서는 장편의 특성을 고려할 때, 그와 같이 굵은 줄거리를 수용할 수 있는 용기(容器)의 교체는 납득할 만한 일이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간결한 문장, 서정적 이미지와 지적인 분위기를 유지하고 있는데, 장편소설에서 그것이 가능하고 작품의 중심 과제와 무리 없이 조응하는 데서 작가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산문적, 서사적 서술보다 우리의 정서 속에 익은 인물을 표출함으로써 소설의 정황을 암시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이러한 묘사적 작풍이 단편의 특징을 장편 속에 접맥시켜 놓고도 서투르지 않게 하고 오히려 단단한 문학적 각질이 되어 작품의 예술성을 보호한다.
대표적 장편이라 할 수 있는 <일월>과 <움직이는 성>에 이르러 황순원은 인간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깊이 있게 전개하며, 그 이후의 단편집 <탈>과 장편 <신들의 주사위>에 도달하면 관조적 시선으로 삶의 여러 절목들을 조망하면서 그때까지 한국 문학사에서 흔치 않은, 이른바 ‘노년의 문학’을 가능하게 한다. 천이두는 이를 ‘노년기의 작가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하고 원숙한 분위기의 문학’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황순원의 작품들은, 소설이 전지적 설명 없이도 작가에 의해 인격이 부여된 구체적 개인을 통해 말하기, 즉 인물의 형상화를 통해 깊이 있는 감동의 바닥으로 독자를 이끌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하나의 완결된 자기 세계를 풍성하고 밀도 있게 제작함으로써 깊은 감동을 남기고 있는 황순원의 작품들은, 한국 문학사에 독특하고 돌올한 의미의 봉우리를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또한 현대사의 질곡과 부침(浮沈)을 겪어오는 가운데서도 뿌리 깊은 거목처럼 남아 있는 이 작가에게 우리가 보내는 신뢰의 다른 이름이요 형상이기도 하다.

인간에의 신뢰, 그 존엄성을 증거한 문학
황순원의 시와 초기 단편들, 그리고 순서가 앞선 장편들조차도 기실 삶의 현장에 과감히 뛰어든 문학이 아니다. 그러나 소재적 측면에서 초기 이후의 단편, 그리고 장편으로 넘어오면서 황순원의 작품에는 한국현대사의 가장 큰 격동의 사건인 한국전쟁이 배경으로 등장한다. 인생의 여러 면모를 전면적으로 추구하는 데 적합한 장편소설의 양식을 통하여 전란의 와중과 전후에 펼쳐진 좌절 및 질곡을 표현하고자 했을 것임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다.
1930년 열여섯에 시를 쓰기 시작하여 1992년 일흔여덟까지 작품을 쓴 황순원은 시 104편, 단편 104편, 중편 1편, 장편 7편의 거대한 문학적 노적가리를 남겼다. 이 작품들은 그로 하여금 한국 현대문학에 있어서 온갖 시대사의 격랑을 헤치고 순수문학을 지켜온 거목으로, 그리고 작가의 인품이 작품에 투영되어 문학적 수준을 제고하는 데까지 이른 작가 정신의 사표로 불리게 하였다. 혹자는 역사적 사실주의의 시각에 근거해 황순원이 서정성과 순수문학 속으로 초월해버렸다고 비판하기도 하지만, 황순원의 문학과 시대 현실의 관계는 흥미로운 굴곡을 이루고 있다.
초기 단편에서는 작가 자신의 신변적 소재가 주류를 이르면서 강렬하고 단선적인 이미지가 부각되고 있다. <목넘이 마을의 개>를 전후한 단편에서부터 <나무들 비탈에 서다>까지의 장편에서는 수난과 격변의 근대사가 작품의 배경으로 유입되어 현실의 구체적인 무게가 가장 크다. 장편 <일월>과 <움직이는 성>그리고 단편집 <탈>에서는 인간의 운명에 관한 철학적 종교적 문제가 천착되면서 시대 현실이 한 걸음 후퇴한다. 그러나 <신들의 주사위>에 이르면 인간 존재에 대한 철학적 탐구는 그대로 지속되되, 한 지역 사회가 변모해가는 내면적 모습이 함께 그려진다.
황순원의 문학은 인간의 정신적 아름다움과 순수성, 인간의 고귀함과 존엄성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출발했고 이를 흔들림 없이 끝까지 지켰다. 그가 일제하에서 ‘읽혀지지도 출간되지도 않는 작품을 은밀하게 쓰면서 모국어를 지킨’ 일도,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대부분 그의 작품이 배경으로 되어 있는 상황의 가열함 속에서도 진실된 인간성의 회복을 위한 암중모색을 잊지 않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며, 문학사에서 그를 낭만적 휴머니스트로 기록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글 / 김종대 경희대 교수

정리 / 김하정 기자

hajung0206@kaist.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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