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카이스트 문학상] 시나리오 부문 가작 / 스타카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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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카이스트 문학상] 시나리오 부문 가작 / 스타카토
  • 카이스트신문
  • 승인 2015.02.16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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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카토

김수지

#1 사무실 / 근무시간
인영이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하고 있다. 모니터 구석에 사내 메신저 알람이 뜬다. 알람 메시지에 도원이 보낸 '저녁에 술 한 잔 할래요?' 가 적혀있다. 인영은 같은 셀에서 대각선에 앉은 도원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곧바로 '네' 라는 답장을 보낸다. 인영의 마음이 쿵쾅거린다. 도원이 '퇴근 종 치면 1층 로비서 봅시다.' 라는 메시지를 남긴 채 채팅창에서 사라진다.


#2 회사 1층 로비 / 퇴근 시간
해가 질 무렵 인영이 먼저 나와 도원을 기다리고 있다. 저 멀리서 도원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것이 보인다. 도원의 뒤로 도원의 동료 지욱도 함께 걸어 나오는 것이 보인다.
도원 박차장도 함께 가도 되죠?
인영 아.. 네..
지욱 오늘 뭐 먹어? 나 족발이 땡기는데.
도원 족발 먹으러 가자. 음. 내가 조용하고 괜찮은데 알아.


#3 족발 집 / 18:30
텅빈 족발 집에 TV 소리와 아줌마의 파 다듬는 소리만이 가게를 고요히 채우고 있다.
지욱 (신발을 벗으며) 이차장 조용한 족발 집 제대로 아네. 이모님 저희 어디 앉을까요.

#4 족발 집 / 19:30
해가 완전히 지고 반쯤 사라진 족발의 흔적. 뚜껑이 사라진 채 흩어져 놓인 소주 다섯 병.
지욱 그래서 김부장이 못 올라 간거다 이거지. 김부장은 박이사만 믿고 있었는데 말야.
도원 (술잔을 비우며) 일 얘기 재미없네. (술잔을 테이블에 놓으며) 조인영씨는 주말에 뭐해요?
인영 (빈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저야 뭐.. 늦잠도 자고 영화도 보고.. 좀 쉬려구요.
도원 (인영의 술잔이 빈 것을 확인하고 술을 따르며) 조인영씨는 주말에 남자친구 안 만나요?
인영이 가득 찬 술잔을 내려놓고 도원의 병을 빼앗아 도원의 잔을 따라주려 하지만, 도원이 술병을 내어주지 않고 바로 자기 잔에 따른다.
인영 (머쓱해하며) 네 뭐.. 시간되면 만나야죠.
지욱 (족발을 한 점 입에 넣으며) 인영씨 남자친구 있었어? 몰랐네. 뭐하는 사람이야?
도원 그냥 학생이야.
지욱 아니! 자네가 어떻게 알아!
도원이 슥 미소를 지으며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는다.

#5 족발집 문 앞 / 21:00
인영과 지욱이 문 앞에서 도원을 기다린다. 도원이 계산을 마치고 나온다.
지욱 어이 잘 먹었네.
인영 잘 먹었습니다.
도원 벌써 9시네. 우리 딱 맥주 한 잔씩만 하고 헤어집시다.
지욱 살짝 딸꾹질을 하며) 나 더 못 마셔. 나 집에 가네. 내일 봅세.
도원 에헤..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표정으로 아쉬운 말투) 알았네. 잘 가시게.

지욱이 비틀거리며 집으로 걸어가며 손을 들어 인사를 한다.
도원 조인영씨 맥주 한 잔만 더 할래요?


#6 호프집 / 21:10
듬성듬성 있는 사람들. 호프집이라기엔 조용하고 아늑하다. 도원의 담배 연기로 테이블 위가 뿌옇다.
인영 이런 맥주집이 있는 줄 몰랐어요.
도원 저도 자주 오진 않고 가끔 오는데, 맥줏집 치고 조용해서 좋아해요.
인영 사투리 쓰시는 거 아세요?
도원 네?
인영 표준어 억양 아니신 건 알고 계시죠?
도원 (멋쩍은 표정으로 의식한 표준어를 쓰며) 예? 저 완벽한 표준어를 구사하는데..
인영 고향이 여수라 하셨죠?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사람이 억양은 못 버리나봐요. 하긴.. 제가
이렇게 완벽한 표준어를 쓰는 것만 봐도 훗.
도원 (미소 지으며 맥주를 들고) 이거 참.. (어이가 없다는 듯 환하게 웃다가 맥주를 마신다)
호프집이 조용하고 고요한 왁자지껄함으로 가득 찬다.

#7 호프집 앞 / 22:00
인영 이차장님 또 잘 마셨습니다.
도원 아닙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시고 내일 봅시다.
도원이 인사를 하고 뒤돌아 정갈한 발걸음으로 집으로 걸어간다. 인영이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 뒤를 돌아 반대쪽으로 걸어간다. 얼마 못 가 그 자리에 서 한참을 서성인다. 한참동안의 고민 끝에 도원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인영(E)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는데, 혹 잠깐만 다시 뵐 수 있을까요?'

#8 구멍가게 앞 벤치 / 22:30
인영이 얼굴이 발개져 멍하게 앉아있다. 도원이 아이스크림 두개를 사와 하나를 인영에게 건넨다.
도원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며) 할 말이 뭐에요?
인영 (술에 취한 듯) 아.. 할 말.. 할 말... 까먹었네요. 헤헤헤..
도원 예?
도원은 인영을 잠시 관찰하다가 인영이 맛이 갔다고 생각한다.
도원 아이스크림 다 드시고 얼른 정신 차리세요 내일 곱게 출근하시려면.
인영 그것보다도.. 이 아이스크림보다도.. 꼭.. 꼭 드리고 싶은.. 드려야할 얘기가 있는데요..
인영이 잠시 망설인다. 이내 흐리멍덩한 눈빛이 사라지고 또렷한 눈빛으로 돌아온다. 인영이 도원의 눈을 응시한다.
인영 오랫동안 좋아해왔어요. 뭐.. 어떻게 하자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할 수 없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바닥을 응시하며) 그냥.. 혼자만 마음속에 담아두기엔 너무 벅차서, 이젠 혼자선 어떻게 처리가 안
되네요 하하.. 아.. 저 너무 대책 없네요. 그래도.. (다시 도원을 바라보며) 꼭.. 이 말씀을.. 좋아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도원이 당황한 표정으로 굳어버린다.


#9 인영의 방 / 다음 날 06:00
애기가 응애응애 우는 알림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운다. 인영이 손을 더듬어 알람을 끈다. 인영이 머리가 아픈듯 머리를 부여잡는다. 그러다 불현 듯 어젯밤 일이 떠오른 듯 눈을 번쩍 뜬다.
인영(E) 꿈인가?
인영이 방을 재빠르게 둘러본다. 책상 위에 놓인 빵빠레 컵.
족발집, 집으로 걸어가는 지욱, 호프집, 도원이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을 손에 든 채 멍한 표정으로 인영을 바라보는 장면이 재빠르게 편집되어 나타난다. 인영이 모든 것이 기억이 난 듯 두 볼을 감싼다.
인영(E) 아.. 망했다.


#10 사무실 / 아침
인영이 자리에 쥐죽은 듯 가만히 앉아있다. 도원이 파티션을 돌아 출근한다.
도원 좋은 아침.
인영 네...


#11 사무실 - 아침 스탠딩 미팅 / 아침
파트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서서 스탠딩 미팅 중이다. 인영은 도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서있다.
김부장 용모 단정히. 업무시간 준수. 위에서 업무연락이 내려왔어. 저 건너 팀 김대리 시말서 왜 썼는지
알아? 편의점서 라면 먹고 들어오다가 엘리베이터에서 상무님을 만난거야. 김대리가 상무님께 인사드리려 입을 연 순간 그 좁은 엘리베이터가 라면 향기로 가득 채운거지. 그리고 뭐 바로 상무님 콜이었지 뭐. 다들 그 꼴 나기 싫으면 근무시간에 조심들 좀 하고.
모두들 네
김부장 아 그리고. PIB 건은 이차장이 좀 처리해줘. (도원을 바라보며) 아마 혼자 처리하기엔 손이 부족할테니 조인영씨랑 손과장도 같이 좀 도와줘요.
도원, 인영, 손과장 네
덤덤한 도원의 표정에 비해 인영은 손에 땀이 나고 당황해한다.
김부장 자 오늘 스탠딩 미팅은 여기까지하죠. 특별히 할 말 있나요? 없음 돌아가서 일들 합시다.
다들 제자리로 돌아가 앉는다. 인영도 자리로 돌아가려하는데 도원이 인영과 손과장을 불러 세운다.
도원 조인영씨, 손과장님 잠시 만요.
인영과 손과장이 자리로 돌아가다 멈춰서 도원을 바라본다.
도원 아까 김부장님이 말씀하셨듯이 셋이 같이 PIB 건을 처리해야겠네요. 이따 점심 먹고 잠깐 봅시다.
조인영씨가 시간하고 회의실 좀 잡아줘요.

인영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땅만 바라보며) 네..


#12 설렁탕 집 / 점심시간
파트 사람들이 다 같이 모여 앉아 점심식사를 하고 있다. 도원이 빠른 속도로 설렁탕에 밥을 말아 맛있게 먹는다.
김부장 이차장 어제 한 잔 했나봐.
도원 예. 속 풀리는 데는 역시 설렁탕이네요.
인영은 도원을 슬그머니 바라보다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설렁탕을 먹는 듯 마는 듯하다.

#13 회의실 / 점심시간 후 근무시간
도원, 손과장, 인영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다.
도원 시뮬레이터 부분은 손과장님이 확인해주시구요, 테스트는... 조인영씨가 해줬음 좋겠네요.
손과장 어휴 이거 자세히 보니 해야 할 일이 꽤 많네요. 예 알겠습니다.
도원 조인영씨는?
인영 (조용하고 쑥스러운 듯) 예..
도원 해주겠다는 거죠?
손과장 인영이 니 무슨 일 있나. 아침부터 니답지 않게 왜 이리 시무룩하노.
인영이 손과장의 말에 고개를 들어 도원의 눈치를 살짝 본다.
인영 아.. 그냥 어제 잠을 잘 못자서요.. 별 일 아니에요. 모레까지 마무리하면 되는 거죠?

#14 사무실 / 퇴근시간
6시가 되고 퇴근 종이 치자마자 인영이 가방을 챙겨 사무실을 빠져나가며 인사를 한다.
인영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15 부대찌개 집 / 퇴근 후 18:30
인영과 지수가 가운데 부대찌개 냄비를 두고 앉아 있다. 인영이 국자를 들고 부대찌개를 휘젓다가 이내 다 끓었는지 자기 접시에 옮겨 담는다. 그리고선 지수는 안중에도 없는 듯 코를 박고 먹는다.
인영 그릇 채 들고 마신 뒤) 어휴.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지수 어제 술 많이 마셨어?
인영 (그릇 채 들고 마시던 패기는 사라지고 어젯밤 일이 기억난 듯 다시 시무룩하게) 응. 그런데 또 당
기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만 주세요!

#16 부대찌개 집 / 19:30
이미 테이블 위엔 빈 소주 세 병이 놓여있다. 인영과 지수가 얼큰하게 취해있다.
인영 미치겠다. 티를 내주시면 죄송하다 말이라도 꺼내겠는데..
지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인영 내가.. 그러면 안 되는데, 안되는 건데.. (잠시 뜸을 들이다) 고백해버렸어.
지수 이차장님한테?
인영 어.지수 미쳤어.
인영 이제 차장님 얼굴 어떻게 보니. 출근은 어떻게 해.
지수 어쩌다 그랬어. 부인 있어, 애 둘이야, 나이도 마흔 넘었어. 뭐가 그리도 좋아서 그랬어. 남자친구도 있는 년이..
인영 몰라.. 마음이 가는걸, 내가 붙잡아도 자꾸 가는 걸 어떡하니. 평소엔 턱밑까지 올라와도 누르고, 눌렀었는데, 어젠 내 맘처럼 잘 안 눌러진 거 있지..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을 사람인데.. 그 사람하고 같이 하지 않은 채 평생을 살아갈 상상을 하면 숨이 턱 막혀 죽을 것만 같아.. 나 어쩜 좋니..
그 뒤에도 인영과 지수가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꽤 마신다. 어느 순간, 지수가 엎어져있다.
인영 (반만 남은 소주잔을 만지작거리며) 나.. 다시 태어나면 이차장님 엄마로 태어나고 싶어.
쓸쓸한 부대찌개 집 페이드아웃.


#17 분만실 / 1970년
타일에 카메라가 클로즈업 된 채, "악" 비명 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인영 나 여기... 악~~~~! 누구세... 악~~~!
인영이 분만대에 누워있다. 의사와 간호사 몇 명이 인영을 에워싸고 있다.
간호사 산모님. 말씀하지 마시고 힘주는 데 집중하세요. 애기 머리가 보이네요.
인영 네? 누구 머리요. 악~~~~!
인영의 커다란 비명이 분만실에 잠들고, 대신 갓 태어난 아이의 응애 소리가 분만실을 가득 채운다.

#18 회복실 / 1970년
카메라가 인영의 시선이 된다. 인영이 눈을 뜨고 병실을 천천히 둘러본다. 시야에 도원의 흐릿하게 얼굴이 보인다.
만식 (감격스럽고 다정한 말투로) 여보 수고했어. 아들이야.
인영(E) 여보라니. 아들이라니 뭔 소리야.. (정신을 차린 듯 시야가 뚜렷해지며)뭐? 내 아들?
인영의 시야에 어떤 늙은 여자가 안고 있는 갓난아기가 들어온다.
인영(E) 나 아직.. 아직 해보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아들이 생겼다는 거지?
만식 모 새아가 수고했다. 우리 도원이 좀 봐라. 아참 만식이 아범이 도원이라고 이름 지었다. (갓난아이를 인영에게 내밀어 보여주며) 우리 아범 똑 닮지 않았니?
인영(E) (의아한 듯) 도원이...?

#19 회복실
인영과 어린 도원만 남아있다. 인영이 쌔근쌔근 자고 있는 어린 도원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그 때 회복실의 문이 열리고 간호사 한 명이 들어와 무심하게 이것저것 체크를 한다. 그리고선 인영의 체온을 체크한다.
간호사 어디보자.. 체온은 정상이시네요. 어떠세요. 아직 안 믿겨지시죠.
인영 (어린 도원을 바라보다 간호사의 말에 놀라서) 네? 아... (잠시 고민하다) 정신이 없네요..
간호사 먼 시간을 떠나오셨는데 정신이 온전히 박혀있으면 그게 더 놀라운 거죠.

인영이 간호사의 뜻밖의 말에 놀란다. 간호사가 태연하게 의자를 갖고 와 인영의 침대 옆에 놓고 앉는다.
간호사 조인영씨가 어제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던 이도원씨 엄마가 된 거에요. 사실 저희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당황했죠. 보통은 부자가 되게 해 달라, 성공하게 해 달라, 사랑하는 사람과 이뤄지게 해달라, 뭐 그저 그런 소원들이 대다수거든요. 조인영씨의 소원을 접수하고 면밀히 검토를 해봤습니다만, 아무래도 부끄러움 쇼크로 인한 급성 소원일 가능성이 다분하다는 결론입니다. 그래서. 조금은 예외적인 경우입니다만, 저희가 조인영씨께 유예기간을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인영 (당황스러운 듯 넋을 놓고 있다가) 잠시 만요… 그러니까 지금 이게… 제 소원을 들어주신 거였다 이거죠?
간호사 예. (어린 도원이를 가리키며) 얘가 걔인 거죠. 자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요. 조인영씨는 2010년
의 원래 조인영씨의 삶과 1970년의 이도원의 엄마의 삶을 하루씩 번갈아가며 살게 될 거예요. 앞서 말했다시피 이건 유예기간이라 가능한 임시 조치일 뿐이에요. 조인영씨는 조인영씨의 남은 인생을 누구로 살아갈지 결정을 해주셔야만 해요. 저희가 특별히 기회를 드리는 만큼 기간은 길게 드릴수가 없어요. 결정이 유예되는 기간은 조인영씨의 수명에서 공제 될 거에요. 늦게 결정하면 결정할수록 조인영씨의 수명이 줄어드는 거죠.
간호사가 주머니에서 두 개의 작은 물약 병을 꺼내 인영의 앞에 내어 놓는다. 두 약병에는 각각 “1970” 과 “2010” 이라는 년도가 조그맣게 적혀있다.
간호사 조인영씨가 결정을 내리게 되면 영원히 남고 싶은 시간의 약을 마시면 되요. 아주 간단하죠. 지금
당장 골라도 상관없어요. 너무 늦게만 마시지 말아요. 우린 조인영씨가 선택도 못하고 요절하는 거 보고 싶지 않아.
인영이 두 개의 약병을 빤히 바라보다 집어 든다. 간호사가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자리에서 일어난다.
간호사 질문있나요?
인영이 간호사의 말을 듣지 못한 건지 멍하지만 굳센 표정으로 손에든 약병을 바라보고 있다. 간호사가 인영의 답변을 듣지 못하고 회복실의 문을 열고 나가려 한다.
간호사 (문을 열려다가 문고리를 잡은 채 잠시 뒤 돌아서) 행복하면서도 아주 고통스러운 순간들 일거에
요. 어느 순간을 선택하더라도 후회가 남겠죠. 후회를 미리 사서 하지도 말고, 후회를 후회하지도 말아요. 행운을 빌어요.
간호사가 문 밖으로 나간다. 회복실에 다시 덩그러니 남은 인영과 잠들어 있는 어린 도원.

#20 회복실
여전히 인영과 쌔근쌔근 잠든 어린 도원이 침대에 누워있다. 정적이 흐른다. 인영이 오른손으로도 머리를 받치고 누워 도원을 바라보고 있다. 인영이 왼손 새끼손가락으로 어린 도원을 만져본다. 무기력해보이지만 굳센 표정의 인영의 얼굴 페이드아웃.

#21 인영의 방 / 아침
갓난아기의 응애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운다. 인영이 엎어져서 자고 있다.
인영 (잠에서 덜 깬 채 누워서) 응.. 그래 도원아. 엄마가 간다.

인영이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1970년의 방이 아닌 2010년의 방이다. 인영의 핸드폰 알람소리인 갓난아기소리가 여전히 울리고 있다. 인영이 알람을 끈다. 인영이 깜짝 놀란 듯 허무하게 방을 돌아본다.
인영 (어린 도원이 없어서 서운한 표정으로) 휴..

#22 회사 엘리베이터 / 출근 시간
인영이 회사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 이내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인영. 줄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모두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엘리베이터가 발 디딜 틈 없이 거의 가득 찬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 비집고 힘들지만 재빠르게 들어오는 도원이 인영의 바로 앞에 선다. 엘리베이터에 타고 있는 사람들이 도원을 쳐다보며 눈치를 준다.
도원 (완전히 뒤돌지는 않고 살짝 고개만 돌린 채 나지막이) 조인영씨 좋은 아침.
인영 (주위 눈치를 살짝 보며) 예.. 좋은 아침입니다..
도원이 버튼을 눌러 문을 닫는다. 인영이 도원의 뒷모습을 생각에 잠긴 듯 지긋이 바라보고 있다.

#23 만식의 집 - 안방 / 아침
또 다시 해가 떴다. 응애응애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다시 한 번 방안을 가득 채운다.
인영 아.. 출근해야지.
출근해야지 말만하고 침대에 엎어져 뒤척이는 인영이 클로즈업된 채 만식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만식 여보, 잘 잤어?
인영이 벌떡 일어난다. 인영의 옆에 만식이 침대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다.
인영(NAR) 이제 적응이 될 법도 한데. 이 어색함은 머리털 나고 느껴보지 못한 극한의 감정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잘 알지도 못하는 남정네의 인사를 받고, 그의 밥상을 차려줘야 하고.
인영 (어색한 듯 부른다) 여보.. 좋은 아침이네요.
만식 (빙긋이 웃으며) 싱겁기는. 씻고 나오는 동안 아침 좀 차려주소. 아따 이제 우리 도원이도 태어났
겄다 우리 여보 아침 좀 얻어 먹어봅시다.

#24 만식의 집 - 부엌
만식이 식탁에 앉아 밑반찬을 주섬주섬 집어 먹고 있다. 찌개가 완성되자 인영이 가스레인지에서 식탁으로 조심스레 옮겨놓는다. 그리고선 만식의 맞은편에 앉는다.
만식 (찌개를 내려놓자마자 숟가락을 들고) 역시 아침에는 된장찌개를 먹어줘야혀. (한 숟가락 떠먹고서
는) 오매 이 밥도둑.
만식이 밥을 야무지게 맛있게 먹는다. 인영이 조용히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본다.
만식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아차차. 오늘 점심쯤에 엄니가 오실 거여. 당신 몸조리 해야 되닝께 힘든
일은 엄니한테 다 맡겨 부러. 이 때 아니믄 또 언제 우리 호랭이 어무니를 부려먹어 보겄어. (배시
시 웃으며 다시 숟가락을 든다.)

#25 만식의 집 - 거실

인영이 설거지를 마치고 거실에 앉아 책을 읽고 있다. 만식이 출근 준비를 한 채 방에서 나온다.
만식 여보 나 다녀올게요.
인영이 책을 내려놓고 현관으로 나와 만식을 배웅한다.
인영 잘 다녀와요.
만식이 인영의 인사에 행복한 듯 방긋 웃고 나간다. 만식의 순박한 웃음에 인영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는다. 그리고 시작된 육아 생각에 자신감 넘치면서도 어색해하는 오묘한 표정이 스쳐지나간다.

#26 만식의 집 - 거실 / 점심
누워있는 갓난 도원에게 인영이 말을 건다.
인영 도원아. 큭큭. 도원씨. 이도원씨. 이차장님. 도원이 너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넌 커서... 내 아들인
데도... 네가 이렇게 어린데도 엄마는 쿵쾅거리는 게 첫 데이트하는 느낌이구나.
인영이 찬찬히 도원을 바라보다 들어서 꼭 안아준다. 초인종이 울린다.

#27 만식의 집 - 거실
만식 모가 이것저것 한보따리를 거실에 내려놓은 채 신발을 벗고 들어온다. 신발을 벗으면서도 인영의 품에 안긴 도원이를 보느라 정신이 없다.
만식 모 (도원을 넘겨받으며) 어이구 우리 장군님. 잘 계셨능가. 한 번 할미가 안아봅시다.
인영 (도원이를 만식 모에게 넘겨주고, 만식 모가 가져온 보따리들을 챙기며) 어머님 뭐 이렇게 많이 가
져오셨어요.
만식 모 산모는 자고로 잘 먹어야 하는 뱁이여. 그래야 우리 도원이가 밥을 맛있게 먹고 쑥쑥 자랄 것이 아니냐.
인영 (당황한 듯) 도원이.. 밥이요?
만식 모 아니 그럼 우리 도원이 젖도 안 물리려고 했으?
인영 (여전히 당황하고 쑥스러운 듯) 그.. 그런 게 아니라요.. 그게…
만식 모 그럼 뭐혀. 도원이 배고파 보이는디 얼른 밥 멕여. (인영에게 도원을 넘긴다)
만식 모가 인영에게 도원을 넘겨준다.
인영(E) 생각해보니 도원이가 태어난 뒤로 내가 넋이 나가 있었구나. 만식씨가 내게 말 한마디 못하고 분유를 먹였구나...
인영이 도원을 잠시 바라본다. 한쪽 옷을 들어 가슴을 열다가 쑥스러운 듯 잠시 멈춰 선다.
인영(E) 어린 애기인데.. 왜 이렇게 쑥스럽지. 그냥 내 애 인건데...
인영이 여전히 홍조를 띄고 있다. 순간 입술을 앙 다물고 결심한 듯 어린 도원에게 젖을 먹인다.

#28 만식의 집
갓난 도원이 울고 있다. 인영이 도원이를 달래느라 도원을 안고 이리저리 칭얼거리고 있다.

만식 모 도원이 어멈아. 도원이가 똥 쌌나보다. 기저귀 좀 갈아주려무나.
인영 네? 기저귀요?
만식 모 아니 그럼 기저귀를 갈아줘야지, 도원이보고 화장실 가서 싸고 오라 할 순 없잖니?
인영 아.. 그게 아니라.. 그..
인영이 붉게 상기된 얼굴로 어린 도원의 기저귀를 벗긴다. 인영이 어린 도원의 다리를 모아 한 손으로 들어올린다. 어린 도원의 다리 사이로 인영의 얼굴이 보인다.
인영 E 어째 기분이 이상하다. 애기인데. 내 아들인데, 이거.. 강간하는 느낌이야.
만식 모 새아가. 어느 세월에 갈아주려 그러니. 우리 도원이 고추 다 짓무르겠다. 이리 나와 봐라.
만식 모가 인영의 자리를 뺏어 앉아 어린 도원의 기저귀를 능숙하게 갈아준다. 인영이 옆으로 비켜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본다.
만식 모 으이구 우리 도원이 고추 잘 있나 보자. 어이구어이구. 튼실하니 장군감이네 그래 하하.
인영이 대놓고 보진 못하고 슬쩍슬쩍 눈을 돌려 도원이를 바라본다. 만식 모가 이상한 듯 인영을 바라본다.
그러다 멋쩍은 듯 인영이 만식 모를 향해 어색하다 못해 굳은 미소를 짓는다.

#29 회사 복도 엘리베이터 앞 / 2010년
인영, 도원을 비롯한 몇 명의 사람들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 도원은 동료들과 빨대 꽂은 바나나 우유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인영이 도원의 입을 바라본다. 도원이 우유를 쪽쪽 빨아 마시고 있다.
인영(E) (도원의 입 클로즈업) 어쩜 저렇게 힘이 좋을까.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인영이 계속 도원의 입만을 응시한다. 도원이 시선을 눈치 채고 헛기침을 하다 멋쩍은 듯 고개를 들어 엘리베이터 층수를 바라본다. 인영이 자연스레 시선을 내려 도원의 그 곳을 조심스럽게 응시한다.
인영(E) 얼마나 커졌을까. 애기 땐 그게 그건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작던데. 설마! 여전히...? (인영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아냐... 그래도 어른인데 좀 컸겠지... 그래도 모양은 그대로겠지?
도원이 인영의 시선을 눈치 챈다. 쑥스러운 듯 괜히 복도를 어슬렁거리다 계단 문을 열고 계단으로 내려간다.
인영이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30 2010년대와 1970년대의 교차 편집
인영이 1970년대에 1살부터 4살까지의 어린 도원이를 기르는 장면과, 2010년부터 2013년까지 열심히 회사에서 일하는 인영의 모습이 교차 편집된다.
인영(NAR) 살면서 길러본 것이라곤 컵 속에 박아둔 양파가 전부였다. 아이를 기른다는 건 양파 따위와는 비교 할 수 없었다. 보고 있어도 걱정이 되었고 보지 않아도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도원이와 함께한 수없이 많은 처음들.
인영(NAR) (도원의 첫 걸음마 장면 플래시백) 도원이의 걸음마.
인영(NAR) (도원의 첫 이발 장면 플래시백) 도원이의 첫 이발.
도원이의 돌잔치 플래시백. 도원이가 돌상 앞에 앉아있다. 인영과 만식도 도원이 옆에 앉아 도원이의 돌잡이를 구경하고 있다. 하객들 모두 도원이의 돌잡이를 기다리고 있다. 앞에는 여러 가지 돌잡이들이 놓여있다. 심각한 표정의 도원이 한참을 망설인다. 손가락도 깨물고 어찌해야하나 이리저리 눈치도 본다. 그러다가 결국 몸을 돌려 인영을 잡는다. 하객들이 폭소한다.
인영(NAR) 도원이의 돌잡이.
70년대에서 주부로서, 엄마로서의 역할에 매진해 있는 동안, 2010년의 난 격동의 20대를 떠나보내야 했다.
도원이는 쑥쑥 커나가는데, 2010년대의 내가 한 거라곤
인영(NAR) (인영의 회의 장면 플래시백. 인영이 졸고 있다.) 끝없는 회의.
인영이 사무실 책상에서 열심히 보고서를 만들고 있다. 오랫동안 매진한 건지 잘 안 된다는 듯 몰골이 해괴하다. 지나가는 동료들이 인영을 보며 조그맣게 수근 거린다. 인영은 잠시 동료들을 째려보다 다시 모니터를 보며 보고서 작성에 열을 올린다.
인영(NAR) 끝없는 보고서.
회식자리. 인영이 황금비율로 소맥을 말고 있다. 인영 앞에 놓인 열개의 맥주잔에 소주잔에 반잔정도 채워진 소주를 부어넣는다. 맥주잔의 로고 바닥에 찰랑거릴 정도로 맥주를 따른다. 그리고선 기다렸다는 듯 기합과 함께 숟가락으로 회오리를 만들며 맥주잔에 팡팡 꽂아 넣는다. 완벽한 소맥이 완성되자 잔을 돌린다.
인영 자. 다들 원샷!
인영(NAR) 그리고 끝없는 회식.
인영이 침대에 널브러져 자고 있다. 죽은 듯 단 하나의 미동도 없다.
인영(NAR) 두 배로 힘든 생활을 이겨내기 위핸 두 배로 집중한 휴식이 필요했다. 주말이면 꼬박 잠만 자기가 일수였다. 2010년대의 내가 얻은 거라곤
후배 사원들 선배님 진급 축하드려요.
인영이 회의실에 들어선다. 이미 회의실에 있던 동료들이 회의실에 케이크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후배 사원들 벌써 입에 조대리님, 조대리님이 입에 붙었어요. 이제 대리도 되셨겠다 결혼만 하시면 세상
다 가진 여자네.
인영(NAR) 나의 꽃다운 청춘이 결혼을 한 것도, 하지 않은 것도 안은 채 대리라는 직함만을 남기고 떠나갔다.

#31 사무실 / 2013년
인영이 다시 사무실 자리로 돌아와 앉는다. 남자친구 민혁이로부터 회의 끝나면 전화 달라는 문자가 와있다.
인영이 문자를 확인하고 다시 복도로 나가 민혁에게 전화를 건다.
민혁 어 인영아. 얘기 들었어! 너 진급했다며. (본인이 더 기쁜 듯) 야 역시 조인영 이럴 줄 알았다니까. 축하해!
인영 (덤덤하게) 어.. 그렇게 됐어. 소식도 빠르네.
민혁 니가 얼마나 나한테 말을 안 해주면 내가 남의 회사에 정보원들을 심었겠냐.
인영이 민혁의 능청스러운 말에 피식한다.

민혁 오늘 뭐 회식 있어?
인영 아니.. 뭐 별다른 건 없어..
민혁 잘됐다. 그럼 우리 오늘 저녁 같이할까?
인영 (인영이 아주 잠시 뜸을 들이다) 그래. 그러자.

#32 회사 앞 / 퇴근 시간
인영의 회사 앞에 민혁이 차를 대고 인영을 기다리고 있다.
인영이 문에서 걸어 나오며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본다.
민혁이 인영을 발견하고 커다랗게 손을 휘저으며 인영의 이목을 끌려 한다.
인영 뭐 하러 여기까지 왔어. 그냥 식당에서 보면 되는데..
민혁이 잘못했다는 익살스런 표정과 함께 두 손을 번쩍 들어 벌서는 듯한 포즈를 취한다.
민혁 잘못했어. 엉엉. (손을 내리며) 너가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인영 (민혁을 잠시 바라보다) 타자.
인영이 민혁의 차에 올라탄다. 민혁이 그런 인영을 흐뭇하게 째려보다 얼른 차에 올라탄다.

#33 레스토랑 / 저녁시간
인영과 민혁이 저녁을 먹고 있다. 민혁이가 고기를 썰어 넘겨주며 다정스레 이것저것 챙겨준다. 별 반응 없는 인영. 민혁이 잠시 인영의 눈치를 보다 말을 건넨다.
민혁 야 이집 고기 진짜 맛있다. 그치?
인영 (무심하게) 응.. 뭐 맛있네..
민혁 인영아 우리 주말에 놀이공원이나 놀러갈까? 바람도 쐬고 드라이브도 하고.
인영 아니.. 그냥 집에서 쉴래. 좀 피곤하네..
민혁 우리 같이 놀러간 지 되게 오래된 것 같은데… 같이 가면 안 돼?
인영 (난처한 듯) 음… 미안해 민혁아. 나도 너랑 놀러가고 싶은데 정말 너무 피곤하고 몸이 찌푸둥하네. 미안해 정말.
민혁이 입을 쭉 내밀고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애교를 부린다.
민혁 힝. 할 수 없지. (쿨한 말투로) 알았어.
인영(E) 미안해 민혁아. 애 보랴 집안일 하랴, 회사에서 일하랴 나 정말 너무 피곤한데 이걸 너한테 털어놓을 수도 없고. 미안해 민혁아.
인영이 측은하고도 미안한 눈빛으로 민혁을 바라본다.

#34 사무실 - 스탠딩 미팅 / 아침
김부장 다들 실적 마무리하느라 정신이 없겠지만, 부서 경사는 챙겨야지. 이도원차장이 낸 계획서가 최우수 과제로 선정되서 내년 우리 아이템으로 선정됐어요. 이차장 축하해.
모두들 (박수를 치며) 축하드려요 이차장님!
김부장 이차장도 앞으로 더 책임감 갖고 일하시고. 이거 보니까 보너스가 어마어마하겠네. 회식에 대한 책임감도 잊지 마시고.

#35 만식의 집 - 부엌 / 저녁 전
가스레인지 위에는 불고기가 올려져있고, 인영은 잡채를 버무리고 있다.
어린 도원 (인영의 앞치마를 잡아당기며) 엄마 나 간볼래.
인영이 잡채를 조금 집어 어린 도원의 입에 넣어준다. 어린 도원이 오물오물 맛을 본다.
어린 도원 그런데 엄마 오늘 누구 생일이야? 웬 안하던 요리를 다하고 그래.
인영 (잠시 생각에 젖어) 아니.. 누구 생일은 아닌데... 아빠도 오늘 늦는다 하구 그냥 오늘은 우리 도원
이랑 둘이 특별하게 보내고 싶어서.


#36 만식의 집 - 식탁 / 저녁
식탁에 요리가 한가득 있다. 케이크에 꽂힌 촛불이 분위기를 내고 있다.
인영 도원이가 케이크에 불 꺼.
어린 도원이 입김으로 케이크의 촛불을 모두 끈다. 인영이 식탁의 불을 키고 다시 자리에 앉는다.
인영 우리 도원이 무럭무럭 자라서 훌륭한 사람 돼야해. 우리 도원이 엄마 말 잘 들어서 훌륭한 사람 될
거야. 가끔은 안 듣지만 그건 하늘도 못 봤을 거야. 엄마는... 도원이 엄마로 살 수 있어서 참 행복하다.
어린 도원 (케이크가 얼른 먹고 싶은 지 케이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건성으로) 응 알았어.
인영 (어린 도원이 케이크에 정신이 팔린 걸 알아채고 흐뭇하게 웃으며) 으이구. 그래 자 먹자.

#37 만식의 집 - 거실 / 밤
인영이 어린 도원이를 방에 재우고 나와 거실에 앉는다. 이윽고 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만식 (문 밖에서 들리는 만식의 소리) 여보.. 나야.
인영이 문을 열자 만취한 만식의 모습이 보인다. 만식이 취한 듯 살짝 비틀거리며 집으로 들어와 신발을 벗는다. 이내 만식이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와 두 팔을 벌려 인영을 안는다.
인영 (코를 잡으며) 에구 술 냄새. 오늘 술 많이 마셨어요?
만식 (인영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응. 오늘 조금 마셨네?
인영 (취한 만식을 살짝 떼놓으려 하며) 자 씻고 자요.
만식 (다정한 목소리로) 여보. 우리 사랑하는 여보. (집안을 둘러보며) 우리 사랑하는 도원이는?
인영 지금이 몇 시인데. 우리 사랑하는 도원이는 벌써 꿈나라 간지 오래에요.
만식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인영을 보며) 그래? 그럼 우리 오늘 도원이 동생이나 만들어볼까?
인영이 피식하며 만식을 부축해 화장실로 데려가려한다.
인영 (다정하게 어린 도원이를 달래듯이) 당신 오늘 너무 취했어. 도원이 동생은 우리, 쌍방이 건강하고
맨 정신일 때 만듭시다.
만식 왜 그래~ 나 건강해요. (알통을 보여주며) 이거 봐.
순간 인영의 눈에 이차장과 만식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만식이 순식간에 인영을 들어 올린다.

만식 여보. 이리와.
인영이 만식에게 들린 채 발버둥치지만 이내 포기한다. 만식이 인영을 들고 안방으로 들어간다.

#38 사무실 / 2014년, 낮.
인영이 턱을 괸 채 넋이 나가 있다.
인영(NAR) 만식씨와 이차장님이 겹쳐 보인 것은 처음이었다. 하긴 생각해보면 둘을 이어 생각해보지 않은 내가 더 이상하다. 당연히 이차장님 아버지의 젊은 시절인데 닮은 것이 당연하겠지. 그렇게 생각해보
니 만식씨와의 결혼 생활이 묘하다. 난 어린 도원이와 행복하게 사는 상상만 해왔지, 만식씨랑 산다는 생각을 안 해봤던 것이다. 내가 진짜 사랑한 것이 무엇인지 혼란스럽다. 그게 어리든 나이 들었든 이도원이라는 사람 자체인건지, 이도원이라는 사람의 연배의 이도원같은 사람인건지. 내가 좋아한.. 그 본질이 무엇인걸까.
인영의 넋이 나간 표정을 보고 도원이 말을 건다.
도원 조인영씨 무슨 문제 있어요? 왜 이렇게 정신이 나가있어?
인영(E) 도원아. 어제 네 아빠랑 내가 말이다....
인영 아.. 아니요. 아무것도. (눈 읏음)


#39 사무실 / 근무 시간
사무실이 사무하는 소리만 들리고 조용하다. 모두 업무에 집중하고 있다.
인영 역시 열심히 업무를 보는 중이다. 그 때 정적을 깨는 진동소리가 들려온다. 인영에게 걸려온 전화다. 핸드폰에 뜨는 발신인은 민혁.


#40 회사 복도
사무실 문이 열리고 인영이 나온다. 문이 닫히자 인영이 조용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인영 (나지막이) 여보세요?
민혁 회의 중이야? 미안해.
인영 (복도에 다른 사람이 있나 눈치를 보다가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목소리를 좀 키운다.) 아냐, 회
의 중. 웬 일이야 이 시간에?
민혁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인영 아니 별다른 건 없어.
민혁 오늘 저녁이나 먹을까?
인영이 전화를 끊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려한다. 그 때 화장실에서 나오는 도원이 재빠르게 인영의 옆을 스쳐지나 먼저 사무실로 들어간다. 먼저 문에 들어서고 인영을 보며 살짝 미소를 짓는다. 인영이 깜짝 놀라 제자리에 서있다. 괜스레 도원이 들었을까 쑥스러운 인영. 인영이 다시 발걸음을 옮겨 사무실로 들어간다. 발걸음이 경쾌하지 않은 채 느릿하고 무겁다.


#41 회사 앞 / 저녁
역시나 민혁이 회사 앞에서 인영을 기다리고 있다. 인영이 한 소리를 하고 싶지만 민혁의 방긋 웃는 얼굴을 보고선 잔소리조차 피곤하다는 표정으로 차에 올라탄다.

#42 레스토랑 입구 / 저녁
굉장히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이다. 민혁이 인영을 에스코트한다. 인영이 놀란 눈으로 민혁을 바라본다. 민혁이 한 팔을 뻗고 한 팔을 돌리며 고급스럽고도 능청스럽게 인영을 레스토랑 안으로 안내한다. 인영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가면 한 웨이터가 민혁에게로 다가온다. 민혁이 인영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양복 안주머니에서 반지 케이스를 꺼내 웨이터에게 전달한다. 민혁이 웨이터에게 잘 부탁한다는 눈빛을 보내면, 웨이터가 걱정 말라는 눈빛을 민혁에게 보낸다.

#43 레스토랑
와인부터 애피타이저, 메인까지 흠잡을 곳 없다. 인영이 말없이 고개를 까딱하며 민혁에게 묻는다.
인영(E) 나 몰래 이번 달에 복권이라도 된거야? 아님 뭐 프러포즈라도 하려는 건가?
오늘따라 말 많은 민혁이 말이 없다. 어깨를 으쓱하며 인영의 말없는 질문을 모른 척 회피한다.

#44 주방
파티쉐가 같은 모양의 두 접시의 디저트의 마지막 데코레이션에 집중하고 있다.
웨이터 (디저트 접시를 바라보며) 어느 게 들어간 거야?
파티쉐 (오른쪽 접시를 가리키며) 여기에 넣었어요.
웨이터 (혼자서 중얼거리며) 오른쪽 것이 들어간 거, 왼쪽 것이 안 들어간 거. (외웠다는 듯) 어휴, 이것도 한두 번이지 오래 하려니까 기억력이 가물가물해. 경력과 기술이 느는 속도보다 기억력이 줄어드는 속도가 빠른가봐. 내가 팁 몇 푼만 아니었어도 정말.
파티쉐 (데코를 마친다.) 자 다 됐습니다.
웨이터 (옷 매무새를 가다듬으며) 오케이. 자 가볼까.

#45 레스토랑 복도
웨이터가 두 손에 디저트를 들고 인영과 민혁의 테이블로 걸어가고 있다. 레스토랑 한 쪽에서 쨍그랑 소리와 함께 약간의 언성이 들려온다. 젊은 웨이터가 달려온다.
젊은 웨이터 매니저님, 저기 싸움 났어요. (안절부절 못하며) 어쩌죠.
웨이터 (차분하게) 이런 일 한두 번도 아니잖아. 그리고 나 지금. (양 손의 접시를 가리킨다)
젊은 웨이터 (웨이터를 막아서며) 안 돼요. 더 늦으면 식당의 그릇 반은 다 깨질 것 같다니까요.
젊은 웨이터가 접시를 뺏어 든다. 마주보고 접시를 뺏어 들어 반지가 든 접시가 왼손에 들리게 된다.
젊은 웨이터 7번 테이블이죠? 제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등 옆으로 웨이터를 살짝 밀면서) 얼
른요 매니저님.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웨이터 알았어. 오른 접시가 여성분, 왼 접시가 남성분 꺼야.
젊은 웨이터 예.
젊은 웨이터가 말쑥한 걸음으로 디저트를 서빙 한다. 민혁과 인영이 아무 말 없이 디저트를 기다리고 있다. 반지가 들어간 접시가 민혁의 앞에, 들어가지 않은 접시가 인영 앞에 놓였다. 젊은 웨이터가 예의를 차려 인사하고 떠난다.


#46 레스토랑
민혁이 잔뜩 기대한 눈빛으로 인영의 디저트 먹는 모습을 바라본다. 물론 자신도 남자답게 큰 입으로 디저트를 맛있게 먹는다. 인영이 디저트를 한 수저 떠갈 때마다 민혁의 초조함도 더해간다. 인영이 마지막 스푼으로 디저트를 말끔히 해치웠을 때 민혁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인영을 바라본다. 그리고선 목을 부여잡고 의자에서 쓰러진다. 인영이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쓰러진 민혁에게로 뛰어간다. 민혁이 얼굴에 핏줄이 서고 붉어진채 숨을 못 쉬고 있다. 레스토랑의 웨이터들이 달려와 민혁의 등을 두드리고 심폐소생술을 한다. 순간 민혁이 큰 기침을 하며 디저트 덩어리와 함께 뭉쳐져 있는 반지를 뱉어낸다. 인영이 반지를 발견하고 반지를 들어 기절 직전의 민혁의 눈앞에 보인다.
민혁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결혼해줘…
민혁이 마지막 말을 남기고 완전히 기절한다.

#47 응급실
민혁이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있다. 인영이 침대 옆에 말없이 앉아있다 민혁이 정신을 차리고 깨어난다. 잠시 여기가 어딘가를 확인하고 모든 것을 기억해낸다. 그리고선 옆에 앉은 인영을 바라본다.
민혁 답변은?
인영 의사 선생님이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더라. (민혁의 이불을 덮어주며) 지금은 어떤 답변 들어도, 너
안정 못하잖아. 그러니까 쉬어.
민혁 그래도 나 지금 들어야겠어. 못 들어도 안정 못 하는 건 알지?
인영 (잠시 고민하다…) 못해. 결혼.
민혁이 생각치도 못했다는 표정으로 인영을 바라본다.

#48 병원 앞 – 새벽 어스름
인영과 민혁이 퇴원해 병원을 나오고 있다. 어색한 정적이 흐른다.
민혁 이유가 뭐야?
인영 그냥 지금은.. 결혼 생각이 없어. 지금으로도 벅차.
민혁 일이 많으면, 집에서 나 내조해주면서 너 하고 싶은 거 하며 살아도 돼. 그래도 안돼?
인영 내가 벅차다는 건… (말을 잇지 못한다.) 아냐. 여튼 피곤하겠다. 들어가서 쉬어.
인영이 병원 앞에 대기 중인 택시의 문을 열어준다. 민혁이 말을 잇지 못한 채 택시에 올라탄다. 인영이 택시가 빠져나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자신도 택시를 잡아 병원을 빠져나간다.

#49 만식의 집
인영이 창밖을 보며 사색에 잠겨있다. 거실에서 혼자 놀고 있던 도원이가 슬금슬금 엄마의 눈치를 본다. 엄마의 표정이 밝지 않은 것 같다. 장난감을 놓고 인영에게로 다가가 품에 안긴다. 인영이 그런 도원이를 말리지 않고 안아준다.
어린 도원 (인영에게로 파고들며) 아잉 엄마.. 내가 뭐 잘못했어?
인영 (시선을 도원에게로 잠시 옮겼다 다시 창밖으로 향한다.) 아니. 도원이 잘못한 거 없어.
어린 도원 (고사리 같은 손으로 두 눈을 가리며) 아이쿠 다행이다. 그럼 엄마 왜 기분이 안 좋아?
인영 그냥.. 엄마가 생각할 게 많네.
어린 도원 (눈을 가린 손 틈 사이로 인영을 바라보며) 엄마. 도원이가 이쁜 짓 하면 기분 좋아져?
도원이가 엄마에게 여러 가지 귀여운 애교를 부린다. 인영이가 그런 도원이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못 말린다는 듯이 도원이를 꽉 껴안으며 괴롭힌다.
인영 으이구 우리 도원씨 때문에 엄마가 힘이 나네요. 그래. 엄마가 고민할 것도 많고 걱정할 것도 많지
만, 우리 도원이만 있으면 되지. 도원이가 엄마 삶에 유일한 즐거움이야.인영이 도원의 볼에 뽀뽀를 계속 쪽쪽 한다. 한두 번은 도원이 가만히 있었지만 계속되는 뽀뽀에 도원이 귀엽게 발버둥 친다. 도원도 그 뽀뽀가 싫진 않은 모양이다.

#50 인영의 방 / 저녁
인영이 퇴근 후 사색에 잠겨있다. 이내 마음을 결심했다는 듯 핸드폰을 켜 민혁에게 전화를 건다.

#51 인영의 집 근처 공원 / 밤
인영과 민혁이 그네에 앉아있다.
인영 미안해. 우리 그만 만나자.
민혁 (덤덤하게 시선하나 움직이지 않고) 결국…
민혁이 그네에서 일어나 철봉으로 다가간다. 점프를 해 철봉에 매달린 뒤 여러 번 위아래로 움직인다. 그러다가 이내 더 이상 못 버티겠다는 듯 철봉에서 내려온다.
민혁 (담담하게) 고마워. 그리고 행복해라.
가만히 정적이 흐르는 두 사람을 멀리서 바라보며 페이드아웃.

#52 인영 부모님의 집
인영의 엄마는 거실에 앉아 빨래를 개키고 있다. 인영은 그 옆에 누워 사색에 잠겨있다.
인영 엄마.
인영 모 왜.
인영 엄마는 나 낳고 기르는 거 어땠어.
인영 모 너? 대단했지. 어찌나 말 안 듣고 말썽꾸러기에 새침때기였는지. 엄마가 너 때문에 원형탈모가 왔다니까.
인영 치. 그 탈모는 할머니의 할머니로부터 내려오는 유전이고.
인영 그럼 나 말고 인석이 기르는 건 어땠어?
인영 모 인석이는 누나랑 다르게 얼마나 순둥이였는지. 또 거기다가 애교는 얼마나 예쁘게 부리는지. 인석이 안 낳고 너만 낳아 길렀으면 엄마는 세상 모든 애가 다 너 같은 줄 알 뻔 했다니까.
인영 치. 인석이가 특이한 케이스지, 난 평범한 경우고.
잠시 정적이 흐른다.
인영 그럼 엄마. 엄마는 다시 태어나면 아빠랑 결혼하고 싶어 아님 인석이랑 결혼하고 싶어?
인영 모 엄마는…
인영이 누워있다 자세를 고쳐 앉는다. 그리고선 엄마의 말에 집중한다.
인영 모 (잠시 빨래 개키는 것을 멈춰 선 채) 엄마는… 결혼 안 하고 독신으로 살거야. 얘 결혼이 대수니? 엄마는 결혼 안하고 여자 카사노바처럼 이리~ 저리~ 박해일이나, 이완 맥그리거같은 애들도 만나보고 뭐 그러면서 여러 남자들 마음을 훔치며 살아갈 거야.
인영이 엄마의 말을 듣고 다시 자리에 눕는다.

인영 에효. 다음 생애에 나는 태어나기 글렀네 그려. 꼭 그렇게 태어나세요? 응?
모녀가 한바탕 즐겁게 웃는다.


#53 만식의 집 / 낮
인영(NAR) 우리 도원이가, 남자가 되는 순간이 찾아오고야 말았다.
어린 도원 엄마. 나 어떻게 태어났어?
인영이 당황한 듯 어린 도원이를 바라본다.
인영 응? 도원이? 음... 엄마가 눈을 떴는데 배가 아팠어. 그래서 힘을 "악" 주니까 우리 도원이가 응애하고 쑥 나왔어.
어린 도원 엄마 아팠어?
인영 그럼. 아팠지. 눈물 콧물 쏙 빼도록 아팠어.
어린 도원 (시무룩하게) 도원이 나쁜 애야.. 태어날 때부터 엄마 아프게 했어..
인영 아니야 도원아. 엄마는 우리 도원이가 태어나줘서 너무너무 기쁜걸?
어린 도원 거짓말. 엄마 아프게 하는 애인데.. (살짝 훌쩍이며) 나는 왜 태어난 거야?
인영 그건 말이지.. 이건 비밀인데.. (조용히 속삭인다) 엄마가 하늘에 소원을 빌었어. 우리 도원이 엄마가 되게 해달라구. 정말루. 그랬더니 짠! 도원이 엄마가 된 거 있지.
어린 도원 진짜? 그럼... 난 어떻게 해서 생긴 거야?
인영 (당황한 듯) 그.. 그건 말이지.. 엄마가 기억이 안나.
어린 도원 거짓말! 하늘에 소원 빌었다는 것도 거짓말이지!
인영 아니야 도원아. 엄마도 참 서러운데.. 엄마도 그 순간을 즐겼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엄마는 진짜 모르는 일이란다. 엄마도 억울해.
어린 도원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인영을 바라본다.

#54 사무실 - 커피테이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 인영도 파트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사원 조대리님은 결혼 안하세요?
정대리 (조대리에게 잘 보이려는 듯) 야. 뭐 그런 걸 묻고 그래. 우리 조대리님은 못 하시는 것도 아니고 안 하시는 것도 아니야. 최고의 남자로 고르고 계신 거 아니야~ 그렇지 않습니까 조대리님.
인영 아니야. 나 안 하는 거 맞아. 결혼.. 그거 못해먹겠더라. 밥하랴, 빨래하랴, 애 보랴 어휴..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해. 질린다 질려..
모두들 인영을 의아하게 쳐다본다. 인영이 순간 깨닫는다.
인영 아.. 그런 것 같다구~ 결혼한 친구들 보니까 하하..
지나가던 도원이 말을 건다.
도원 뭔 얘기가 이렇게 길어? 다들 일들 안 해?
인영(E) (작은 목소리로 지나가는 도원을 바라보며) 에휴.. 니가 내 속을 알려나 모르겠다. 너 키우느라 조인영의 청춘이 다 가는구나!
김사원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아! 다들 오늘 회식 오시죠? 오늘 회식 막바지에 이사님도 들리신다 하니까 다들 눈도장도 찍을 겸 저녁식사나 하고 가세요.
정대리 어휴.. 또 술이구만.

#55 회사 근처 식당 / 저녁
정대리가 술잔을 들고 테이블을 돌며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이미 취기가 오른 정대리가 인영이 홀로 앉아있는 테이블로 옮겨온다.
정대리 (인영에게 잔을 건네며) 어이 조대리. 어이구 우리 일 잘하고, 열심히 하고, 사람 참 좋은 조대리!
내 술 한잔 줄게.
인영이 잔을 받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 받아든다. 정대리가 잔을 가득 따라준다. 인영이 잔을 받자마자 바로 원 샷을 한다. 잔을 툭툭 털고 바로 정대리에게 건넨다.
정대리 (인영의 잔을 받아들며) 어우 역시 우리 조대리야.
도원이 인영과 정대리를 말없이 슬쩍슬쩍 보고 있다. 정대리가 잔을 받자 인영이 잔을 가득 채운다. 정대리가 인영이 따라준 잔을 모두 털어 넣는다. 잔을 소매에 쓱쓱 닦고는 다시 인영에게 건넨다.
정대리 한 잔 받고 한 잔 더.
잔을 넘기고 가득 채우는 레이스가 계속된다. 주위 동료들은 다들 각자의 취기를 올리는데 열중이다. 도원이 다른 테이블에서 말없이 술을 홀짝이다 잔을 들고 인영과 정대리의 테이블로 옮겨온다.
도원 이거 재밌어 보이네. 나도 같이 합시다.
정대리와 인영이 상상치도 못한 도원의 등장에 도원을 당황스럽게 바라본다. 도원은 그 시선을 개의치 않고 자신의 잔을 인영에게 건넨다. 인영이 잔을 받아든다.
도원 (인영에게 소주를 따라주며) 자, 조대리부터 시계방향으로 가지.
인영이 잔을 받고 잠시 멈춰있다, 한 치의 고민 없이 바로 털어 넣는다. 순간 도원이 상에 있던 오이 조각 하나를 장에 찍어 인영에게 건넨다.
도원 (오이를 건네며) 쓰잖아요. 천천히.
인영이 오이를 받아 베어 문다. 잔을 정대리에게 넘긴다. 정대리가 원 샷 한다.
정대리 (잔을 내려놓고 실망하며) 뭐야. 난 오이 안줘?
정대리가 뾰루퉁한 표정으로 잔을 도원에게 넘긴다. 그리고선 잔을 가득 채워준다. 도원도 단숨에 털어넣는다. 인영이 당근을 장에 찍어 건넨다.
도원 (당근을 받아 들며 바로 한 입 베문다.) 땡큐.
정대리 뭐야. 나만 빼놓고. 이거 서러워서. 차장님 빨리 잔 돌리세요.
수차례 잔이 돌고 돈다. 인영은 취한 듯 이미 벽에 기대 잠들어 있다. 레이스가 계속되다 정대리가 뻗고, 그모습을 확인한 도원 역시 테이블에 엎어진다.

#56 회사 근처 식당
벽에 기대 잠들어있던 인영이 정신을 차린 듯 일어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식당을 떠나고 몇 명만이 남아있다. 인영이 시선을 돌려 자신의 테이블을 바라본다. 정대리와 도원이 엎어져있다. 인영이 혀를 끌끌 차며 도원 앞에 있는 잔을 가져와 술을 반쯤 따른 뒤 원 샷 한다. 그리고선 다른 테이블에 남아 신나게 떠들고 있는 남자 사원에게로 다가간다.
인영 동규씨, 합정 살지?
김사원 예
인영 (정대리를 가리키며) 저기 정대리 좀 처리해줘. 어휴 저 덩치 정말.
김사원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며) 네 걱정 마세요. 저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남은 사람들 에이 뭐야~ 동규씨 가면 우리도 재미없지. 우리도 이제 일어납시다.
남자 사원이 정대리를 부축해 식당을 떠나려한다. 남은 사람들도 삼삼오오 다들 자리를 떠났다.
김사원 댁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인영 그래, 좀 부탁할게. 고마워.
김사원 조대리님, 이차장님은 어떻게…?
인영 내가 대충 처리해볼게. 조심해서 들어가.
식당에 인영과 도원만이 남아있다. 인영이 테이블에 엎어져 남아있는 도원을 바라본다. 그리고선 살짝 흔들어 깨워본다. 도원이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인영이 작정하고 흔들어 깨운다.
인영 이차장님. 일어나셔야죠.
갑자기 도원이 벌떡 일어난다. 그리고선 식당을 두리번거린다.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다.
도원 (아직 잠에서 덜 깬 듯) 뭐야. 다들 갔어요?
인영 네. 일어나셨으니 저도 이만 가보겠습니다.
인영이 가방을 챙겨 일어나 나가려하는데 인영의 팔목을 잡는다.
도원 (팔목을 잡으며) 저기.
둘이 서로 깜짝 놀라고, 도원이 얼른 서둘러 잡은 팔목을 놓는다.
도원 (멋쩍게) 우리 아이스크림이나 하나씩 할까요?

#57 구멍가게 앞 벤치
두 사람이 벤치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인영이 말을 하려는 찰나 도원이 먼저 말을 한다.
도원 (인영을 보지 않고 앞만 보며) 술 깨는 데는 아이스크림이 최고인데, 이 나이에 여기 혼자 앉아서
혼자 아이스크림 먹고 있으면 사람들이 수근 대요.
인영은 자신이 묻고 싶었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님을 알지만, 도원을 바라보던 시선을 거두고 앞을 보며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문다. 도원이 아이스크림을 먹다 말고 고개를 젖혀 하늘을 바라본다. 별이 뜨문뜨문 하게 펼쳐져 있다.

도원 아! 별이 참, 바다 속의 물고기들 같다.
인영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도원 바닷물에 낚싯대를 담그고 의자에 기대 바다를 바라보면 만 가지 생각이 들어요. 파랗다 못해 검은
바다에 빛이라곤 달빛밖에 없죠. 고요한 바닷물을 적막만이 가르면, 세상으로부터, 온 우주로부터
나 혼자 떨어져있는 것만 같은 고독과 외로움을 느낄 수 있어요. 그 때 낚싯대를 꺼내 다시 세상으
로 돌아오죠. 결국은 낚시라는 거, 바다 속에서 나를 낚으려 가는 거거든요.
인영과 도원 사이에 적막만이 가득하다.
도원 하늘에 저렇게 물고기가 많아도 다 부질 없어요. 아직 나조차 건져내지 못했는걸요.
인영과 도원이 서로를 바라보지 않은 채 말없이 하늘과 지평선만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다.

#58 인영의 방 / 밤
인영이 방에 돌아와 불을 키며 들어온다. 옷도 갈아입지 않고 가방만 내려놓은 채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다.
한참을 멍하니 무언가를 생각하다, 정신을 차리고 겉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간다. 씻을 준비를 하다가 잠시나마 멍하니 거울 속 자신을 바라본다. 다시 정신을 차리고 샤워를 한다.

#59 인영의 방 - 베란다 / 밤
씻고 나온 인영이 방 안 냉장고에서 맥주 한 캔을 꺼낸다. 그리고선 베란다로 나온다. 맥주 캔을 따고 난간에 기대 하늘을 바라본다. 아까 도원과 함께 있을 때와 같은 하늘이 보인다.
인영 (여전히 하늘을 응시한 채) 물고기 하나, 물고기 둘, 물고기 셋. 넷. 다섯.
고개를 숙이고 맥주를 한 모금 삼킨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본다.
인영 우리 엄마 하나. 아버지 하나. 5학년 때 담임선생님 하나. 담임선생님 큰딸 하나. 작은아들 하나. 민혁이 하나. 이 차장님 하나. (잠시 망설인다) 도원이 하나.
인영이 다시 맥주를 들이킨다. 고요한 밤이 지나가고 있다.

#60 사무실 / 아침
인영이 사무실 책상에 앉아 업무 시작 준비를 하고 있다. 도원이 막 출근을 한다. 인영이 내색은 안하지만 온 감각이 도원에 집중하고 있다. 도원이 가방을 자리에 내려놓는 소리가 들린다. 겉옷을 벗어 곱게 접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선 양치도구를 챙겨 책상을 벗어나는 소리가 들린다. 인영이 한 시름을 놓는다. 그 때 바로 도원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린다.
도원 (한 손으로 치약이 묻은 칫솔과 컵을 동시에 들고 있다.) 조인영씨.
인영 (감짝 놀라 뒤를 돌아보며) 엄마 깜짝이야...
도원 뭘 그렇게 놀라요.
인영 아 이차장님..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간 떨어지면 술도 못 마실 텐데...
도원 젊은 아가씨가 술 줄이면 좋은 거지. 앞으로 자주 놀래켜야겠네요. 다름이 아니라, 혹 커피믹스 하나 있어요?
인영 커피믹스요?

인영이 책상 서랍을 열어 확인해본다. 텅 비었다.
인영 어떡하죠? 저도 다 떨어졌네요.. 사놓는 걸 깜빡했어요.
도원이 등 뒤에 감쳐두었던 손을 꺼내며 흐뭇하게 웃는다.
도원 (한 손에 들고 있던 커피믹스 각을 건네며) 왠지 조인영씨 커피도 지금쯤 떨어져갈 것 같아서 내거
살 때 하나 더 샀어요. 그럼 수고.
도원이 뒤돌아 양치를 하러 나간다. 인영은 커피믹스를 사온 도원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

#61 사무실 / 아침 스탠딩 미팅
사람들이 둥그렇게 모여 서서 김부장의 말을 듣고 있다. 도원 역시 팔짱을 끼고 두 발을 적당히 벌린 채 단단하게 서있다.
김부장 그래서 지난번에 우리가 맡은 TIS 프로젝트는 생산부서로 이관될 것 같아요. 생산부서 사람들 질
문이 많을 거 같으니까, 질문 오면 다들 귀찮아하지 말고 성의 있게 대답들 좀 해줘요.
김부장이 더 할 말을 찾아 수첩을 뒤적인다. 분명 할 말이 없어 보이는데. 일찍 끝날 수 있는 회의가 끝나지않으면서 사람들의 자세가 점점 풀어지지만 도원만이 꼿꼿이 서있다. 수첩을 뒤적이던 김부장이 할 말을 찾은 듯 다시 말을 이어나간다.
김부장 아. 이거 이거. 조대리. 지난번에 업체 만나서 정리한 회의록 얼른 보내줘요. 회의록이 있어야 공식 회의로 인정이 되죠. 아님 그날 먹은 회식비 조대리가 대신 메꿀거야?
인영 회의록이요? 그 주 회의록 담당자 저 아니었는데요.. (사람들을 쭉 둘러보며) 손과장님 하시고, 그 다음에 강대리, 그리고 저였으니까.. (강대리를 바라보며) 강대리. 그 날 강대리가 회의록 담당자였잖아.
강대리 무슨 소리야. 나 그 주 연차였어. 그럼 당연히 나 건너뛰고 조대리가 해야되는거 아니야?
인영 뭐? 그날 강대리 없었어? 분명 봤던 거 같은데..
강대리 (허무하다는 웃음을 지으며) 날 어떻게 봐. (달력을 집어 확인하며) 16일부터 21일까지 나 가족들
이랑 제주도 있었는데. 보니까 회의는 18일이었네. 캬 그날 고등어회 죽였는데.
인영 설령 강대리가 연차였다 하더라도, 회의록 담당자인거 알았으면 다음 사람한테 말해주고 조정했어
야 되는거 아냐?
강대리 아 그래요? 그래 다 내 잘못이다. 앞으론 오줌 누러 때도 나 화장실 간다 말하고 업무인수인계 미리 다 하고 가야겠네. (애꿎은 손과장에게) 과장님, 제가 지금 용변이 무지하게 마려운데요, 혹여라도 누가 절 찾거나, 전화가 오거나, 그리고 특히 회의라도 있음 꼭 저 대신 회의록 좀 작성해주세요.
손과장이 인영과 강대리 사이에 낀 듯 불편하고도 멋쩍은 표정을 짓는다. 인영이 당황한다. 누구도 중재하지 못하고 있다. 한참을 꿋꿋한 자세로 서 있던 도원이 별안간 고개를 돌려 말을 던진다.
도원 다음 주 담당자였던 조대리도 꼼꼼히 확인안한 책임이 30% 정도 있지만, 미리 회의록담당자한테 언지 안 해주고 간 강대리가 70% 잘못했네.
모두가 예상치 못한 도원의 발언에 도원을 바라본다. 인영 역시 깜짝 놀란 얼굴로 도원을 바라본다. 강대리 역시 생각지 못 한 도원의 선방에 잠시 넋을 잃었지만 이내 도원에게 따진다.

강대리 제가 회의록 담당자한테만 따로 말 안했지, 전체 메일로 저 휴가 간다 돌렸는데요.
도원 그 메일 나도 읽었어. 휴가 간다고만 쓰여 있었지, 내가 이번 주 회의록담당자다는 안 쓰여 있던
데?
강대리 (당황한 듯) 그건...
인영과 강대리의 설전에 도원까지 끼어든 상황에 모두들 말을 잇지 못한다.
김부장 (모두를 쉬쉬하며) 다들 그만해. 이렇게 아침부터 싸워봤자 없는 회의록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강대리가 업체한테 연락해서 발표자료 좀 얻어 대충 써 봐요. 뭐 그날 회의 별거 없었어. 그 업체 사람들도 발표자료 써 있는거 줄줄 읽더만. (수첩을 덮으며) 자자. 회의가 길어졌네. 다들 그만 가서 일봐요.

#62 회사 - 화장실
인영이 화장실 칸에서 나와 손을 씻는다. 손을 씻다가 세면대 앞의 거울을 본다.
인영(E) 갑자기 왜 나한테 잘해주지. 내편 드는 건 또 뭐야. 평소에도 이랬는데 내가 몰랐던건가?
인영이 두근거리는 마음을 감출 수 없다. 괜히 외모를 한 번 더 점검하고 화장실을 나선다.

#63 회사 - 복도
화장실을 나와 사무실로 돌아가는 인영이 반대편으로 걸어가던 지욱과 마주친다.
지욱 어이 조대리. 오늘 아침부터 한 판 했다며.
인영 (시계를 보며) 지금 얼마나 지났다고 벌써 박차장님한테까지 흘러들어간 거에요?
지욱 스파이가 아침부터 소근소근 해주더라고. 여튼 오늘 저녁에 약속 있어? 이렇게 기분 상한 건 바로 바로 팍팍 풀어줘야지 안 그럼 쌓여서 결혼도 못하고 골로 가는 수가 있어.
인영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장난을 친다) 결혼 못하는 것도 서러운데 골로 가면 더욱더 안 되죠. 콜입니다. 설마 우리 둘만 먹는 건 아니죠? 멤버 챙겨서 장소 쏴주세요.
지욱 오케이!


#64 회사 근처 식당 - 저녁
아직 탕이 오지 않아 빈 버너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인영 박차장님 멤버는 참 한결같네요. 뭐 발전이 없어.
지욱 엑기스만 쏙쏙 뽑아 고른 소수 정예 멤버인데 뭐가 어때서. 아군의 주역은 다 모였다구.

#65 회사 근처 식당 - 밤
다들 취기가 오른 모습이다.
지욱 (약간 취한 듯) 어이구,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혹여 라도 여기 핸드폰 두고 갈테니까 나 찾는 전화가 오면 대신 받아주고, 내가 시켜놓은 계란찜 리필이 도착하거들랑 나대신 계란찜 좀 맛있게 먹어줘. 이번 계란찜 담당자는 조인영씨야.
강대리를 따라하는 지욱의 모습에 인영이 멋쩍은 듯 웃는다. 지욱이 아주 약간 비틀거리며 화장실로 사라진다. 도원이 소주병을 들어 인영에게 권한다. 인영이 고개를 돌려 잔을 마저 털어내고 도원의 술을 받는다. 그리고 소주병을 뺏어 도원의 빈 잔에도 따른다.

도원 이젠 제 잔도 신경 써주네요. 조대리 대리 진급 전까지만 해도 제 잔이 비어있건 말건 눈길 한 번
안주던데.
인영 제가 그랬었어요? 죄송해요. 사회생활 시작한지 얼마 안 되서 잘 몰랐나봐요.
도원 에이. 입사한지 3년차 됐을 때 회식 때도 안 주던데 뭐.
인영이 멋쩍지만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소주잔을 비운다. 도원이 자신의 사소한 습관까지 기억해주는 것만 같아 기분이 좋다.
도원 다이어트해요? (안주를 밀며) 안주 좀 먹어요. 조인영씨 취해도 아무도 못 데려다줘요.
인영 네..
인영이 안주를 조금 집어 먹는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지욱이 자리에 앉는다.
지욱 이차장. 조대리 너무 챙겨주는데? 뭐야 이차장 조대리 좋아하기라도 하는 거야? 하하.
도원 에헤. 무슨 소리야. 조인영씨 깡소주만 마시다 취해서 쓰러지면 자네가 데려다 줄 건가?
지욱 (안주 전부를 밀어주며) 조대리 다 먹어. 다.
아침의 일은 다들 잊은 듯 술자리가 무르익는다.

#66 길거리 / 밤
인영, 도원, 지욱이 호프집에서 나온다. 아까 밥집에서의 1차가 끝나고, 호프집에서 2차를 더한 것이다. 맨 손의 지욱에 비해 도원은 가족들에게 가져다줄 생각으로 치킨을 한 마리 포장해 들고 있다. 인영은 도원의 치킨을 눈치 채지 못한 기색이다.
지욱 조대리는 저쪽 방향이고 이차장하고 난 이쪽 방향이네. 조대리 잘 들어갈 수 있지? 혼자 들어가는게 몇 년차인데, 우리가 아직도 사서 걱정을 하네.
도원 (시계를 보며) 시간이 늦었네. 어차피 다들 택시탈 거 우리가 조대리 집 들렸다가 가자.
인영 (고맙긴 하지만 당황한 듯) 아니에요 괜찮아요. 혼자 들어갈 수 있어요.
인영이 서둘러 택시를 잡아타려 하지만 쉽사리 잡히지 않는다. 그 때 도원이 택시를 하나 잡았다.
도원 (택시 문을 연 채 인영을 향해) 뭐해요 어서 안타고.
인영이 어떻게 해야할 지 난감해 하다가 택시에 올라탄다.
도원 박차장. 얼른 앞에 타.
지욱이 투덜투덜 거리며 앞자리에 탄다. 도원 역시 문을 닫고 인영 옆 뒷자리에 올라탄다.

#67 택시 안 / 밤
인영이 조금의 미동도 없이 굳어있다. 차가 커브를 돌때마다 도원과 살짝살짝 닿는다. 도원은 두 손을 얌전히 두고 앉아있지만, 인영은 안간힘을 쓰며 도원에게 닿지 않으려 노력한다. 인영의 두근거리는 소리가 택시 안을 가득 메운다.

#68 인영의 집 앞 / 밤
택시가 인영의 집 앞에 도착했다. 택시 안쪽에 탔던 인영이 내리기 위해 도원 역시 내렸다.

인영 (택시 문을 잡고 서있는 도원에게) 감사합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인영이 앞자리를 보며) 박차
장님도 안녕히 가세요.
지욱 그래 조대리. 잘 자고 내일봐.
도원 (차에 오르며) 자 그럼.
여전히 인영의 마음은 쿵쾅거리고 있다. 도원이 다시 택시 안에 타고 문을 닫으면, 택시가 지체 없이 출발한다. 시야에서 택시가 사라질 때까지 인영은 그 자리에 서서 마음을 가다듬는다. 택시가 보이지 않자 발걸음을 돌려 집으로 들어간다. 인영은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표정이다.

#69 사무실 / 다음날 아침
인영이 출근하자마자 사내 메신저에 접속한다. 친구 지수가 접속해 있는 것이 보인다.
인영(E) 지수야. 대박 대박. 오늘 저녁에 시간 되? 저녁이나 같이 먹자.
인영이 초조한지 키보드 위에 놓인 손가락을 까딱까딱 거리고 있다. 잠시 뒤 지수의 답장이 온다.
지수(E) 무슨 일이야? 궁금타! 지금 부장님이 뒤에 와계셔서 길게 말 못한다. 저녁 오케이!
인영이 여전히 두근거리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 채 지수와의 채팅창을 끈다.

#70 회사 근처 치킨 집 / 저녁
맥주가 나오자 지수와 인영이 가볍게 건배를 한다.
지수 무슨 일인데? 궁금해서 하루 종일 혼났네.
인영 요즘 이상해.
지수가 손가락으로 인영의 눈 밑도 확인해보고 열도 재본다. 가볍게 손목을 잡아 맥박도 재본다.
지수 안구 정상. 체온 정상. 맥박도 조금 빠르긴 해도 죽을 정돈 아닌데. 뭐가 이상한데?
인영 아니 나 말구. 이차장님 말이야. (뜸을 들여 맥주를 한 모금 마신 뒤) 요즘 들어 자꾸 나한테 잘해준다. 어제 아침엔 나 커피 떨어진 거 알고 커피를 사다주시지 않나, 회의 때 강대리랑 싸움 나니까 내 편들어주질 않나, 거기다가 어젠 나 집까지 데려다줬어.
지수 딱 보니까 너한테 약점 잡힌 거구만. 멀쩡한 분이 너한테 그럴 리가 없는데.
인영 아니 이게! (지수를 장난처럼 째려보다가) 아니야. 그런 일 전혀 없었어.
지수 뭐야 그럼. 너 말대로면 이차장님이 너한테 푹 빠지기라도 한거야?
인영 나도 고민 많이 하고 있어. 요 며칠사이 이차장님 보면서 많은 생각했어. 기억도 안 나던 과거의 호의들도 생각나고. 아 그래서 그랬구나하면서. 내가 왜 그 마음들을 몰라준 걸까?
지수 이야. 짝사랑으로만 끝날 줄 알았더니만, 결국 둘이 사랑에 빠지게 되나?
그 때 치킨 집에 도원과 도원의 와이프, 아이들이 들어와 자리에 앉는다. 도원이 다정하고 살뜰하게 와이프와 아이들을 챙긴다.
지수 어머어머. 인영아. 저거 이차장님 아냐?
인영이 뒤를 돌아 지수가 가리킨 곳을 슬쩍 본다. 인영의 눈에 이차장과 가족들이 보인다.

지수 야. 저렇게 가족들 극진히 아끼는 유부남 10년차 봤냐? 꿈 깨라 깨.
인영이 진실을 깨달은 듯 얼굴이 발그레져 맥주를 들이킨다. 도원은 인영과 지수를 발견하지 못하고, 와이프와 환하게 대화를 나눈다.
지수 아직도... 이차장님 많이 좋아하는 거야?
인영이 실망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수줍게 미소 지으며 맥주를 들이킨다.
지수 에효 친구야. 이차장님 좋아하는 것도 좋아하지만, 그래도 우리 청춘사업은 청춘사업대로 진행해야되지 않겠어?
인영 우리.. 아직 청춘이니?
지수 청춘 끝물이지! 청춘 달아나기 전에, 그래도 하나 붙잡아 둬야지. 우리 동기 중에 결혼 안한 사람 너랑 나밖에 없더라.
인영 괜히 엄한 사람 청춘 망치고 싶지 않다. 그래도 고맙다 친구야.
지수와 인영이 조용히 잔을 부딪치며 페이드아웃.

#71 인영의 집 앞 / 밤
인영이 기운이 빠진 채 주머니에 손을 넣고 비틀거리며 걷고 있다. 취하지 않았지만 힘이 빠졌지 비틀거린다.
인영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잠시 멈춰 선다. 한숨을 푹 쉰 뒤 하늘을 바라본다.
인영 (목이 메인 채) 이 멍청이. 고백했다 된통 당하고서. 그걸 고새 또 까먹고. 착각 후에 이렇게 아플
거 알면서 왜 또.
고개 숙인 인영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바닥으로 떨어진다. 쓸쓸한 인영의 뒷모습이 사라진다.

#72 만식의 집 - 거실 / 밤
거실에 인영, 만식, 그리고 도원이 모여 있다. 만식은 TV를 보고 있는 반면, 도원과 인영은 테이블에 마주보고 앉아있다. 도원은 일기를 쓰고 있으며, 인영은 책을 뒤적거리고 있다.
인영 도원아 너는 이상형이 누구야?
어린 도원 이상형이 뭐야?
인영 (잠시 주춤하다) 음.. 도원이가 커서 결혼하고 싶을 만큼 좋은 사람이 누구야?
어린 도원 (잠시 고민하다) 비밀이야.
인영 도원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긴 있나보구나!
어린 도원 (당황한 듯) 아이 참.. 비밀이야! 엄마는 날 참 쑥스럽게 만들어.
인영이 자리를 도원 옆으로 옮겨 도원이를 간지럽히며 묻는다.
인영 누군데 누군데, 좀 가르쳐주라.
어린 도원 (마지못해 대충 말해주듯이) 아 그냥... 민지라고.. 친구 있어.
인영 (약간 실망한 듯) 치 우리 도원이 엄마를 제일 좋아하고 커서도 엄마랑 결혼하고 싶을 줄 알았더니
만 아니었구나!
어린 도원 엄마야 맨날 보는데, 결혼까지 해야돼?
만식 (인영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도원이는 엄마랑 결혼하면 안 되지. 엄마는 아빠껀데.

만식이 인영을 뒤에서 껴안은 채 볼에 뽀뽀를 쪽한다.
어린 도원 에고.. 내가 서러워서 얼른 커서 장가를 가든지 해야지..
도원의 말에 만식은 박장대소를 하며 인영은 미소를 짓는다.

#73 사무실 / 아침
인영이 사무실 입구부터 눈치를 보며 출근한다. 도원이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다.
인영 (책상에 가방을 놓으며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좋은 아침입니다.
도원 조대리 오늘은 평소보다 늦었네. 좋은 아침!
인영이 자리에 앉는다. 한 시름 놓은 것 같지만 여전히 불편한 표정이다.

#74 사무실 - 아침 스탠드 미팅
다들 스탠딩 미팅 자세로 둥그렇게 모여서 있다.
김부장 다들 이번 주 주말 야유회인거 알고 있지? 이번엔 찬조금도 받아서 아주 넉넉한 야유회가 될 거 같아요.
강대리 부장님. 우리 야유회 전에 미리 단합대회라도 한번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김부장 나야 뭐 집에 들어가면 할 것도 없고... 단합대회 좋지. 오늘 저녁에 다들 시간되나?

#75 회사 근처 고기 집 / 밤
삼삼오오 테이블에 모여 앉아 고기를 먹고 있다.
김부장 (약간 취기가 오른 채로) 내가 대리 때는 스탠딩 미팅 때 말이야, 찍소리도 못하고 하라면 해! 까
라면 까!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말이야. 요즘 친구들은 하라면 해! 왜요? 까라면 까! 왜요? 뭐 하
나 예스해주는 게 없어. 상사가 생활이 고달파서 술 좀 같이 마셔달라는데 말이야.
묵묵히 앉아 있던 인영이 말을 건넨다.
인영 (고기가 타지 않게 살짝 끄적거리며) 부장님 나이 참 서러울 때네요. 안팎으로.
김부장 역시.. 조대리. 임원 예비자다운 발언이네. 야 너희들 말야, 조대리가 사내에서 예비 여성 임원 후
보자로 손꼽히는 거 알아 몰라? 조대리 말이야, 학벌 좋지, 일 똑부러지게 잘하지, 부지런하지, 선후배한테 잘하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결혼도 안 해서 키워야할 애도 없지. 아주 딱이야 딱.
모두가 김부장의 발언에 당황한 듯 인영의 눈치를 본다. 인영은 개의치 않는다. 사람들 사이에 정적이 흐른다.
그 정적을 깨며 식당 아줌마가 나타난다.
식당 아줌마 다들 왜 이렇게 조용하게 드시고 계세요. (그릇을 내려놓으며) 이것좀 드셔보셔.
도원 어. 명이 나물이다.
식당 아줌마 어머, 명이 나물 아세요? 요즘엔 귀해서 먹어본 사람이 많이 없는데. 상추대신 고기를 이 명이 나물에 싸 먹으면 아주 기가맥혀요.
강대리 이차장님은 명이 나물 어떻게 아세요?
도원 (명이 나물을 하나 들어 접시에 갖다 놓으며) 나도 커서는 거의 못 먹었지만, 어렸을 때 어머니가 자주 해주셨어.

여태까지 계속 묵묵히 앉아있던 인영이 깜짝 놀란 얼굴로 도원을 바라본다.
인영(E) 내가 언제 명이 나물을 해줬다고 그래. 나도 명이나물 오늘 생전 처음 보는구만..
도원 어머니가 해주더시던 그 양념이 잊혀 지지가 않아... 그 때 그 명이나물이 먹고 싶네.

#76 인영의 방 / 밤
씻고나온 인영이 컴퓨터 앞에 앉아 명이 나물을 검색하고 있다. 찾으면 찾을수록 아리송해지는 느낌이지만, 결심을 한 듯 인영이 마우스 휠을 내리며 집중하고 있다.

#77 만식의 집 - 부엌 / 낮
부엌에 도마를 꺼내놓고 인영이 그 앞에 서있다. 비장한 다짐을 한 듯한 표정이다. 도마 옆에 놓여있던 봉투를 풀고 내용물을 꺼내 도마에 올려놓는다. 명이나물이다. 인영이 심호흡을 한 번 크게 한 뒤 요리를 시작한다. 장인의 모습으로 정성을 다해 요리하는 인영.

#78 만식의 집 - 식탁 / 낮
인영과 도원이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식탁엔 밥과 명이나물 뿐이다.
어린 도원 이건 풀밭도 아냐.. 화단도 안 되고.. 그냥 화분이네. 엄마 나 계란후라이 해죠.
인영 안 돼. 오늘은 이 반찬에 집중해서 먹어야 돼.
입을 삐죽거리는 도원이 숟가락을 들어 밥을 크게 한 입 먹은 뒤 나물을 조금 집어 입에 넣는다.
어린 도원 (입 안에서 밥을 오물거리며) 웩 이거 뭐야. 맛없어. 안 먹을래. 계란후라이 해죠 해죠.
인영 야 이도원. 니가 먹고 싶대서 해줬더니만! 니가 엄마 손맛의 명이 나물 먹고 싶다매!
어린 도원 (깜짝 놀라 풀이 죽어) 엄마.. 내가 언제 해 달랬어.. 나 이거 오늘 생전 처음 먹어봐...
도원의 말에 아차 싶은 인영이 벌떡 일어나 프라이팬과 계란을 들고 부엌으로 간다.
인영 (가스레인지의 불을 키며) 에잇.


#79 만식의 집 - 거실 / 낮
도원이 거실 바닥에 앉아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다. 소파에 앉은 인영이 놀고 있는 도원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 잠시 여러 가지 생각에 빠졌던 인영이 일어나 방으로 들어간다. 잠시 뒤 인영이 옷을 한가득 들고 나오며 도원을 부른다.
인영 도원아. 잠시만 이리 와봐.

#80 만식의 집 - 거실
인영 흠. 뭔가 빠졌는데.
카메라가 도원의 모습을 비춘다. 영락없는 이차장의 옷매무새다. 인영이 여러 가지 옷가지들을 도원에게 입히는 장면이 빠르게 편집되어 지나간다. 인영이 결국 만식의 와이셔츠를 든다. 도원이 만식의 와이셔츠를 입은 모습은 영락없는 아빠 옷을 입은 애기의 모습이다.
인영(E) (깨달은 듯) 도원이는 (잠시 쉬었다가) 도원이구나.

#81 회사 정문 / 토요일 아침

김부장을 제외한 파트원이 삼삼오오 캐주얼한 사복에 배낭을 메고 정문에 모여 있다. 늦게온 김부장이 오자 모두 봉고차에 탑승하고 출발한다.

#82 펜션 뜰 안의 BBQ 장 / 밤
드럼통 안에 불꽃은 이미 생명을 다 한 듯 사그라져 가고 있다. 다들 이미 거나하게 취해 보인다. 테이블 위도 처음의 깔끔함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다. 다들 삼삼오오 끼리끼리 모여 수다를 떨고 있다. 강대리도 취했지만 여전히 김부장 옆에 앉아 김부장이 사원들에게 해주는 인생 상담의 말을 거들고 있다. 손과장은 테이블에 앉아는 있으나 정신을 놓고 졸고 있다. 정대리는 인영 옆에 앉아 취한 채 주저리주저리 말하고 있다. 정대리의 얼굴 상태를 보면 시뻘건 것이 이미 맛이 간 사람처럼 보인다. 인영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테이블만 응시하며 혼잣말에 가까운 말들을 하고 있다.
정대리 내가 퇴근하다가 봤어 내가 (딸꾹) 아 진짜.. 조대리… 진짜 더러워...
인영 뭐를?
정대리 그래. 내가 보고 싶어서 본 건 아닌데 (딸꾹) 그냥 술 한 잔 하고 집에 걸어가는데...
인영 (답답한 듯) 뭐를 봤는데?
정대리 아 진짜.. 그 슈퍼 앞 벤치 내가 봤어
인영 (당황한 채) 정대리. 슈퍼 앞 벤치에서… 뭘 봤는데?
정대리 벤치(딸꾹)에 이차장님이 (딸꾹)
정대리가 말을 하다 말고 헛구역질을 하다가 테이블에 그대로 쓰러진다. 인영도 취기가 올라 두 볼이 상기된채 정신이 없다. 쓰러진 정대리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들어 도원을 찾는다. 인영이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를 살펴보다 펜션 안으로 들어간다.

#83 펜션 안
도원이 소파에 편하게 앉아 한 손엔 리모컨을 든 채 TV를 보고 있다. TV 에선 광고가 한창이다. 도원이 앉
은 소파 앞 테이블엔 맥주 캔들이 놓여있다. 도원으로부터 가까운 테이블 가엔 도원이 마시다가 내려놓은 맥주 캔이 덩그러니 놓여있다. 인영이 신발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간다.
인영 (도원이 앉은 자리로부터 약간 떨어져 앉으며) 차장님, 뭐하세요?
도원 오늘.. 토요일이잖아요. 토요일 밤엔...
도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광고가 끝나고 추적 60분이 시작된다. TV 속에서 사회자 오늘의 내용을 설명한다. 불륜을 저지르다 상대의 아내를 죽인 의문의 여성에 대한 스토리이다.

#84 펜션 안
도원과 인영이 TV를 보고 있다. 살해당한 부인의 남편이 모자이크 된 채 인터뷰를 하고 있다.
인터뷰어 이제 와서 왜 사실을 밝히시려는 거죠?
TV 속 남편 (음성변조 된 상태로) 자꾸.. 꿈에 나와요. 죽은 와이프가 자꾸 제 목을 조르는데, 그 눈이 슬
퍼보여서 목을 잡은 손을 밀쳐낼 수가 없어요. 내가 벌 받는 거죠.. 내 죄책감 씻으려면, 나라도 살려면, 내가 그 여자 내 손으로 밀쳐내야죠.
인영이 TV 에서 시선을 거두어 잠시 다른 생각에 빠진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테이블에 놓여있는 맥주를 하나 집어 딴다. 딴 맥주를 마시려다가 멈추어 도원에게 조심스레 묻는다.
인영 차장님.. 왜.. 저한테 잘해주셨어요?
도원 네?

인영 저한테.. 커피믹스도 사다 주시고, 집에도 데려다주시고..
도원이 당황한 듯 인영에게서 시선을 회피한다.
도원 (머뭇거리며) 난… 조대리가 비밀로 해줬으면 했어요..
인영 뭐를...요?
도원 (인영을 바라보며) 알면서 모르는 척 묻지 마세요..
인영 (당황하며) 정말 몰라요. 제가 알아야 비밀로 할지 말지를 판단할 수 있지.. 않을까요?
도원 그 날 벤치에서.. 조대리가 다시 슈퍼로 들어갔을 때... 내가 잠깐... 그랬어요
인영 (동그란 눈으로) 네? 잠깐 뭐를…?
도원 내가 잠깐.. 급했어요...
인영 네? 뭐가 급?
도원 (인영의 말을 자르며) 그날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 벤치 옆에서 내가 잠깐.. 실례를 하는데 조인
영씨가 슈퍼에서 헛기침하면서 나왔잖아요. 쑥스러우니까 그만 모른 척 해요..
인영 (황당하다는 듯 웃으며) 헉. 뭐에요. 차장님, 그러니까, 그 날 벤치에서 노상방뇨 하신 거에요? (다
행이라는 기색과 실망인 기색이 동시에 지나간다. 아무래도 실망스러운 기색이 더욱 더 커 보인다)
도원 (당황하며) 뭐야 조인영씨 몰랐어요? 아 그럼 왜 진작 말 안 했어요 몰랐다고!
인영이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다. 정적이 흐른다. 나란히 소파에 앉아 각자 멍하니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 도원이 정적을 깨며 조용히 말을 시작한다.
도원 (창밖을 응시하며) 5년쯤 지났나요? 참 오래된 것 같은데 5년밖에 안 지났네요. 시간이라는 게 참
웃겨요. 느리다고 생각하면 빠르고, 빠르다 생각하면 느리고 말이야. 나 참 고민 많이 했었어요. 나 그 때 조인영씨 때문에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
도원이 나이에 걸맞지 않게 쑥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인영 (도원을 돌아보며) 네?
도원 아직도 생생해요. 조인영씨가 나한테 좋아하니 어쩌니 꼬장 부리던 그 날. 나도 조인영씨.. 부하직
원 이상으로 참 좋아했어요. 그런데 나 그럼 안 되니까, 티 안 나게 조심조심하고 있었는데 조인영씨가 날 불러 낸거야. 하하하.
도원이 멋쩍은 듯 자세를 고쳐 앉는다.
인영이 마시려다 멈췄던 맥주를 이제 서야 한 모금 훌쩍 마신다.
도원 조인영씨가 나를 불러내고, 좋아 한다 그래주고, 그런데 내가 어이쿠 좋아해주셔 감사합니다. 할 수는 없는 거 이미 알고 있었잖아요. 그냥... 그냥 나는 조인영씨같은 사람하고 평생 직장에서라도 볼 수 있다.. 공휴일, 휴가 같은 거 다 빼고, 최소한 일주일에 5번은, 그럼 일 년에 250일은 볼 수 있으니까... 그거만으로도 얼마나 행복한 건가... 내 스스로를 설득하고 회유하는데 참 오래 걸렸어요. 내가 마음이 아픈 건...
도원이 말을 하다 말고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자신의 맥주를 마저 다 마셔버린다.
도원 조인영씨가 아직 나를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 나는 모르지만, 나는 참... 아직도 조인영씨가 좋아요.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구요. 지금 이 거리에서 조인영씨를 바라보는 게 참 좋아요. 내가 마음이 쓰이는 건... 조인영씨도 행복했으면 좋겠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행복하게 잘 사는 모습 보고싶어요. 내가 조인영씨 이렇게 만든 것만 같아... 나 참 마음이 아프네요.

인영 흔들리는 눈빛으로 도원을 바라본다. 인영의 머릿속에 자상하고 정겨운 만식의 모습도, 말썽쟁이에 도도한 어린 도원의 모습도 지나간다. 그래도 인영의 눈앞에 있는 것은 진짜 인영이 좋아한 도원이다. 말없이 서로 다른 곳을 응시하는 인영과 도원의 모습을 비추며 페이드아웃.

#85 펜션 주차장 / 낮
다들 아직도 술에 쩔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이 보인다. 각자 짐을 챙겨 봉고차에 오른다. 인영과 도원 역시 말없이 차에 오른다.

#86 봉고차 안
야유회를 올 때의 봉고차 안의 시끌벅적했던 분위기와는 다르게 고요하다. 대부분 술에 쩔어 졸고 있거나, 멍하니 정신을 놓고 창밖을 보고 있다. 인영과 도원은 잠들지 못한 채 서로 다른 창문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다.


#87 인영의 집
인영이 가방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는다. 집 안에 냉장고소리와 시계바늘 움직이는 소리만이 가득할 뿐 생명체의 소리는 없다. 아무 말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던 인영이 몸을 쪼그리고 이내 서럽고 슬픈 울음을 터트리며 흐느낀다. 카메라가 한참을 흐느끼는 인영의 뒷모습을 배회하다 줌아웃.

#88 만식의 집 / 낮
도원이 방에서 가방에 이것저것 옷, 장난감, 그리고 일기장을 챙기고 있다. 인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은 채 멀리서 목소리만이 들려온다.
인영 도원아, 가방 다 챙겼으면 나와. 이제 가자.
어린 도원 네.
도원이 가방 문을 닫고선 예쁘게 매고 방 밖으로 나간다.

#89 바닷가 - 해변 / 낮
인영과 도원이 손을 잡고 나란히 해변 가를 걷고 있다. 가을바람이 꽤나 시려 보인다. 인영의 잔 머리카락이 휘날린다. 날이 쌀쌀한데도 도원은 신이 난 듯 요리조리 점프도 하고, 발장난을 치며 걷는다. 저 멀리 갯바위엔 낚시하는 사람들이 꽤 보인다.
어린 도원 (갯바위를 가리키며) 엄마. 저 사람들 저기 서서 뭐하는 거야?
인영 (잠시 망설이다) 다들 자기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네.
도원이 잠시 이해하지 못한 듯 했지만 이내 알겠다는 듯 다시 신나게 해변을 걷는다.

#90 바닷가 - 벤치
인영과 도원이 나란히 벤치에 앉아있다. 인영이 말이 없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다. 도원은 인영의 눈치를 보며 바다와 인영을 번갈아 본다. 바닷바람이 거세진다. 도원이 인영의 등에 붙어 바람으로부터 피한다. 인영이 도원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인영 우리 도원이 춥구나. 옷 어디에 있어? 가방에 넣어왔어?
어린 도원 (인영의 등에 고개를 파묻은 채) 응 가방에 있어.
인영이 도원이 매고 있는 가방을 연다. 장난감과 일기장이 보인다. 인영이 가방에서 도원의 겉옷을 꺼내 도원의 등을 덮어주며 도원을 감싸 안아 바람을 막아준다.
도원 (배시시 웃으며) 히.. 바다도 좋고, 바람도 좋다. 엄마 우리 봄 오면 또 오자.
인영 그러자. 봄에도 오고, 여름에도 오고, 계절이 바뀔 때마다, 우리.. 놀러오자.
도원이 인영의 품을 파고들어 더 세게 안긴다.

#91 만식의 집 - 문 앞/ 밤
도원이 인영의 등에 업혀 곤히 잠들어있다. 인영이 가방에서 집 열쇠를 찾으려하지만 한 손은 업힌 도원을 잡고 있다 보니 열쇠를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 때 현관문이 열린다. 만식이다.
인영이 걱정을 한 시름 덜은 표정으로 현관으로 들어선다.

#92 만식의 집 - 현관
만식이 업힌 도원을 넘겨받아 안으며 인영에게 말을 건넨다.
만식 (걱정스런 얼굴로) 어디 다녀온 거야? 걱정 했잖여. 도원이랑 놀러갔다 온단 쪽지만 덩그러니 식탁
에 놓여있고 말여.
인영 바닷가 좀 다녀왔어요. 생각해보니까 도원이랑 바다를 가본 적이 없더라구요.
만식 (서운하다는 듯) 주말에 나랑 같이 가지 그랬어.
인영 그냥, 오늘 생각난 김에 다녀오면 좋을 것 같아서요. 다음에 다 같이 다시 가요.
만식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려, 그렇게 하자구. 에고.. 힘들었겠네, 씻어.
인영이 만식에게 미소를 지어보이고 방으로 들어간다. 만식 역시 들고 있던 도원이를 내려놓으러 도원의 방으로 들어간다.

#93 만식의 집 - 도원의 방
씻고 나온 인영이 도원의 방에서 쌔근쌔근 자고 있는 도원을 바라보다 이불을 목까지 덮어준다. 그리고선 조용히 침대 옆에 놓인 도원의 가방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장난감을 꺼내 제자리에 정리한다. 그리고선 책을 꺼내 책꽂이에 넣으려다가 잠시 멈춰 그 책을 열어본다. 도원의 일기장이다. 인영이 벽에 기대 앉아 도원의 일기를 읽기 시작한다. 친구와 싸운 일, 아빠와 놀았던 일, 나물 무쳐먹었던 것, 매운 거 못 먹는데 엄마가 먹였던 것 등 도원의 일기를 읽을수록 인영은 추억들로 빠져든다. 그러다 한 페이지에 멈춰 선다. 카메라가 일기장의 내용을 비추면 도원의 방백이 들린다.
어린 도원(E) 오늘은 머리가 아팠다. 엄마가 자꾸 이상형이 누구냐 묻는다. 뭘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
쑥스럽게. 내 이상형은 엄마인데. 엄마는 내가 그걸 꼭 내 입으로 말해야 아시는 걸까.
인영이 도원의 일기장을 가슴에 품은 채 마음 아프게 소리죽여 터져 나올 것만 같은 울음을 꾹꾹 참는다.

#94 만식의 집 - 부엌 / 밤
모두가 잠든 밤 인영이 슬그머니 방에서 나와 부엌으로 향한다. 인영이 물을 따라 식탁에 앉는다. 그리고선물이 담긴 잔에 이전에 간호사가 주었던 시간을 결정하는 물약을 따른다. 카메라는 잔에 클로즈업된 채, 인영이 따른 물약이 어떤 물약인지 보여주지 않는다. 단지 물약이 물에 퍼져나가는 잔상만이 보일 뿐이다. 인영이 심호흡을 한 뒤, 잔을 들어 마신다. 그리고선 입을 막은 채 조용히, 마음이 미어지도록 소리죽인 울음을 터트린다.

#95 주방 / 아침
요리를 하고 있는 인영의 뒷모습이 보인다.

인영 (계속 요리를 하며 돌아보지 않고 외친다) 여보, 도원아 아침 먹어요.
식탁에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편이 앉아 있고 곧이어 얼굴이 보이지 않는 한 꼬마가 와서 앉는다. 인영이 보글보글 끓는 찌개를 들고 식탁으로 가면서 꼬마의 얼굴이 보인다. 예쁘장한 여자애다.
인영 (반찬을 집어 꼬마의 수저에 올려놓아주며) 우리 도원이 꼭꼭 씹어먹어.

#96 유치원 앞 / 아침
인영이 딸 도원을 유치원에 데려다 준 후 발걸음을 돌려 출근을 한다.

#97 회사 엘레베이터 앞 / 아침
인영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올라탄다. 문이 닫히려는 찰나 도원이 문을 열고 만원 일보 직전 엘리베이터안으로 들어온다.
도원 조인영씨 좋은 아침.
인영이 말없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끄덕인다. 가득 찬 엘리베이터에 인영과 도원이 살짝 떨어진 채 말없이 서있다.
인영(NAR) 파생되어 변형된 본질 역시 또 하나의 새로운 본질이다. 세 발자국 멀리 서 있어야 한다 해도, 내가 좋아하고 따랐던 단 하나의 본질의 곁이고 싶다. 닿을 수 없이 끝없는 평행선일지라도, 내가 이렇게 꼿꼿이 서서 당신의 꼿꼿함을 끝없이 바라볼 수 있다면.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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