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회 카이스트 문학상] 수필평론 부문 가작 / 고독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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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카이스트 문학상] 수필평론 부문 가작 / 고독 예찬
  • 카이스트신문
  • 승인 2015.02.16 1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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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 예찬


도준엽


생명체의 무리라는 것은 으레 공통점이 있다. 생명을 아우르는 모든 무리들, 예컨대는 뭇 강, 뭇 바다라도 그러할 것이지만, 그 으뜸이나 버금을 따지지 않고서라도 숲은 응당 생명의 집합이라는 속성에 무결하매 가장 자연스럽게도 떠오르는 무리인지라, 숲을 보노라면 대강 그 공통의 특질을 가늠할 수 있을 성싶다. 대개 숲이라면 제일로는 ‘울창鬱蒼’하다는 말을 떠올리게 된다. 鬱 자는 답답하다는 의미를 지니는데, 딱 모양새도 그런지라 눈알의 먹먹함이 곱다시 심중까지 답답게 한다. 요 울창하다는 말이 흔히는 빽빽하게 우거진 모습을 묘사할 때에나 쓰이겠으나, 그 정도뿐이면 다행일 것을, 사실 이 鬱 자에는 빽빽하다는 것 이상의 뜻이 담겨 있어 오히려 인간 사회에나 걸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숲을 생각할 적에는 곧잘 낭만적인 모습을 그릴새 간혹은 이상적이기까지 할 때가 있다. 대체로는 그려 보는 결결이 어울림의 극치라 나우 생각해 볼 필요도 없는 태평세계이다. 그러나 언제부터랄지 숲의 본새를 은닉하는 이상화理想化와 그에 말미암는 괴리에 적이나 회의감이 일매, 요즈막에 와서는 숲이란 건 애초부터 차라리 가만가만 그렇게 관념 속에서나 그려 보아야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다만 풍성하고 조화로이 흘러가는 융융한 극락으로서, 머릿속에나 남겨 두어야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곰곰 생각건대, 꿈속을 이지러뜨리는 까닭들은 숲의 기저에서부터 천장에까지 꿈틀대는 아우성에 말미암는다. 숫제 수풀은 그 근저에서부터 이미 얽히고설킨 투쟁과 이해관계의 범벅이거니와 삶의 발버둥이 고스란히 묻혀 있다. 뿌리는 그 어두운 속에서도 살아나갈 길을 찾으려 한사코 뻗어나가매 뒤엉키기조차 마다칠 않는다. 뿌리를 숲의 핏줄로 보면, 혈관에 흐르는 것이 생존 본위의 욕망이나 다름없을진대 숲이란 영락없는 냉혈한이다.
숲이 풍성해지기 위해서는 별다른 거름보다도 단지 경쟁을 거름 삼으면 된다. 나무가 높이 자라려면 경계심이 필요하다. 빽빽이 들어서 있을수록 햇빛만을 쫓아가게 되므로 종당에는 서로 키를 키우기에 급급해진다. 따라가지 못하는 무리들은 음지에서 살아가거나, 스러져 또 다른 거름이 될 뿐이다. 경쟁의 도화선은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서로서로 겨루는 그들 자체이다. 이 조용한 각축전에 불을 댕기는 것이 아무인들 어려우랴. 주변의 다른 나무들과 서로 키가 비슷할 즈음에 그들보다 다만 얼마나마 더 커지면 된다. 그때부터 그 조금 더 큰 나무는 술래가 되고, 따라잡아야 하는 존재를 향해 나머지들이 솟구칠 것이다.
숲이 융성해지기 위해서는 씨앗이 필요하다. 그래도 모성애는 있을 테라, 씨는 기어코 멀리 퍼뜨리려 한다. 제 자식에 흐뭇하고 넉넉진 못할망정 겨루고 싶진 않은 겐지. 사실, 남들에 배타적일지언정 제 피붙이에마저 그러고 싶은 부모가 있으랴. 한편으로는, 제 자식에 헌신적일지언정 남들에마저 우호적이고 싶지는 않은 부모도 있더라마는, 무던한 모성애가 생명의 흐름을 유지하는 원동력임을 부정할 수는 없을 터이다.
반면에, 생명의 흐름을 끊는 것 또한 공존하는 곳이 숲이다. 숲에는 겅성드뭇한 먹이사슬이 도사리고 있다. 붙잡기 위해, 붙잡히지 않기 위해 더넘스러운 몸들을 사리고 숨고 한다. 먹이사슬이란 것이 꽤나 이름값을 할라치면, 정말로 마냥 사슬인 양 생태 전반을 옥죈다. 비록 천적을 차치한다 해도, 숲에는 독과 벌레가 하 드글드글하다.
그러므로 나는 예컨대 한 그루의 나무, 혹은 보잘것없는 풀, 그도 아니고 다만 한갓 이끼나마라도 되는 존재로서, 당최 부러라도 숲속에 들고 싶진 않다. 에멜무지론들 뿌리 내리고 싶진 않다. 내가 바라는 숲이란 단지 상상 속의 그뿐이련만. 애당초 국으로 상상 속에서나 꿈꿀진저. 거기에 공생이 들어찬다든지 화육이 발한다든지 하는 따위는 자못 바라기 힘들 줄을 안다. 무릇 넓게 드리운 나무들은 그 주위에 다른 나무가 많질 않다. 삼삼森森히 모일수록 넓게 드리울 줄 모르게 되는 모습이 꼭 옹졸한 양이지만, 부대끼고 부딪혀 그렇게밖에는 될 성부른 그 처지도 모를 바는 아니다. 제가 원해서 그리 된 게 얼마큼이겠냐마는, 간혹 그 중에 그렇게 배게 심겨야말로 잘 자라날 몇은 짜장 그 모습대로 살아도 좋을레라.

오늘은 비가 온다. 비 오는 날의 숲은 더욱이나 진풍경일세라, 바라만 보기에도 후련하다. 초록들은 생판 모르는 녀석이 와서 몸을 갈겨도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잿빛에서 흘러온 게 그대로 초록에 튕겨서는 소리로나 빛으로나 또는 내음으로나 다시 흐름이 된다. 저 속에는 아마 웅크리거나 체온을 잃거나 하는 부류들, 더러는 드문드문 곤죽에 나자빠져 뒹구는 애먼 족속들이 있겠지만, 갈맷빛은 얼마나 짙은지. 그 내부를 감추어 버리는 건 아마도 이념에서나 현실에서나 마냥 같을러라. 이렇게 멀리서 보면, 살풍경도 더러는 진풍경이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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