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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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의 시대
  • 박효진 편집장
  • 승인 2014.09.26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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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쩍, 이름 없는 이들이 늘었다. ‘익명의 한 학우’와 ‘익명의 관계자가 기사에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총학생회나 학생 단체에서 직책을 맡은 사람이 아닌 이상, “익명 처리해드리겠습니다”라는 최후의 타협이 없으면 인터뷰가 성사되지 않는다. 최근에는 강연을 들은 소감을 물었을 때조차, 강연에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부분을 말하고 황급히 익명을 요구하는 학우를 마주하기도 했다.

혹자는 SNS와 인터넷의 발달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검색 엔진에 이름 석 자, 자주 쓰는 아이디 하나만 검색해도 자신의 흔적이 모조리 드러나기 때문에. 취업을 위해 이력서를 내면 SNS까지 모니터링 당하는 판국에, 함부로 뱉은 말이 기록되고 보존되었다 출셋길을 막으면 어쩔 거냐고 할 것이다. 혹자는 정치기피현상 때문이라고 할 것이다. 대통령을 비판하면 ‘종북 빨갱이’ 소리를 듣고, 보수적인 성향을 내보였다간 ‘일베충’ 소리를 듣는 마당에, 자신의 의견을 주장해봤자 오해밖에 더 사겠냐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불과 몇 년 사이, 각 대학교에 ‘대나무숲’과 ‘대신 전해드립니다’ 페이지가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 학교 역시 통칭‘ 밤부’라고 불리는 대나무숲이 약 1년 전에 생겼다. 물론 속으로만 끙끙 앓던 짝사랑을 꺼내놓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고도 숨죽이던 대학원생의 고충을 털어놓을 곳이 있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우리 학교처럼 서로가 촘촘히 연결된 곳에서는 누구든 눈치 보지 않고 말을 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익명 커뮤니티에서는 담론을 찾아볼 수 없다. 산발적으로 튀어나온 정제되지 않은 의견은 역시 무책임한 댓글 창을 마주해야 한다. 책임질 이름이 없기 때문에 비판이 아닌 비난이 난무한다. 그리고 2~3일이 지나면 글은 지워진다. 건의사항이 있더라도 총학생회나 학교 직원의 답변이 달리는 일은 드물다. 필자 역시 밤부에 신문에 대한 글이 올라오더라도, 무의식적으로 ‘대나무숲은 의견을 받는 채널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사회에서 의사결정권자들은 구성원의 의견을 들어야 한다. 표를 쥔 유권자들이 원하는, 이른바 공공의 의견을 정책에 반영한다. 하지만 이름 없는 사람들만이 가득한 곳에서는 누구의 목소리를 들어야 할까? 혹은 누가 이름없는 자의 비판을 귀담아들어 줄까? 전체학생대표자회의 시작 이틀 전에야 겨우 공고된 안건지는 담론이 사라져 가는 사회의 씁쓸한 부산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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