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재호 동문(전산학과 00학번)

우리나라에서 자유/공개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ftp.kaist.ac.kr에서 파일을 하나 둘쯤은 모두 받아보았을 것이다. 리눅스나 오픈오피스를 새로 설치하기 위해서, 이클립스에 새 플러그인을 추가하느라, 또는 파이어폭스 웹브라우저가 업데이트 될 때 등등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도 우리는 KAIST FTP 서비스를 사용했을 지 모른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하루 평균 3,500명 넘는 사람들이 매일 100만 번 가까운 요청을 보내고 있으며 KAIST FTP를 통해서 1TB(테라바이트) 가량의 크고 작은 파일들을 끊임없이 받아가고 있다. KAIST FTP의 정식 명칭은 “KAIST 파일 복사본 서비스”로, 60 종 이상 총 13TB 크기의 자유/공개 소프트웨어와 인터넷 표준문서, 그리고 공개 과학 자료들의 복사본을 KAIST 교양분관 서버실에 모아두어, KAIST 식구들은 물론 우리나라와 주변 나라 사람들이 필요한 파일들을 빠르게 받아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어 정보기술을 중심으로 과학기술 연구개발을 가속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KAIST FTP는 ftp.kaist.ac.kr 외에도 kr.archive.ubuntu.com나ftp.kr.debian.org, ftp2.kr.freebsd.org, rsync1.kr.gentoo.org 등의 주소로도 알려져있으며, 각종 오픈소스 소프트웨어의 공식 복사본으로도 등록이 되어 있어서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특별한 수고 없이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의존하고 있는 중요한 KAIST FTP 서비스가 밤낮으로 잘 돌아가게끔 돌보는 역할은 컴퓨터 동아리 스팍스(SPARCS)의 회원들이 10년 넘게 묵묵히 담당해오고 있다.

KAIST FTP가 현재의 모습을 갖추기까지는 제법 오랜 세월이 걸렸다. 1990년대에 원래 cair-archive.kaist.ac.kr로도 알려져 있던 KAIST FTP는, 한글 지원이 미흡했던 당시 공개 소프트웨어와 인터넷 기술들을 우리 선배들이 자발적으로 한글화 하여 보급하던 “한글 아카이브(hangul archive)”가 있는 곳으로 유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화/지역화(i18n/l10n) 노력이 개별 소프트웨어 프로젝트들로 흡수되면서 한글 아카이브의 중요성은 점차 줄어들었고, 급기야 9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서 KAIST FTP는 그 명맥을 잇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로 수 년 간 우리나라에는, 미러(mirror)라고도 부르는, 복사본 서비스가 제대로 운영되는 곳이 없어서 필요한 자유/공개 소프트웨어 파일들을 모두 개개인이 바다 건너 미국이나 일본에서 아주 느린 속도를 참고 받아와야만 하던 척박한 시절이 있었다. 다행히 한글 아카이브의 복사본을 유지해오던 (지금은 사라진) ftp.kreonet.re.kr이 그나마 있었지만, 복사본들이 늘 오래되어서 결국 필요한 것들은 다른 곳에서 직접 구해와야만 해서 여전히 시간 낭비가 심했다. 2002년 이런 상황을 더 이상 그대로 지켜볼 수 없었던 저자는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여분의 컴퓨터 하드웨어를 모아서 정보통신팀의 지원으로 지금의 KAIST FTP 서비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스팍스에서 다양한 활동을 통해 쌓은 경험과 동아리가 가진 넉넉한 자원을 바탕으로, 처음이라 이용객도 뜸한 복사본 서비스를 구성하는 것은 기술적으로 별로 어렵지 않았다.

더 큰 어려움은 오히려 되살린 KAIST FTP를 다시 사람들이 믿고 쓸 수 있게끔 만드는 일에 있었다. 그 당시에는 쓸만한 복사본 서비스가 나타나도 운영자의 사정이나 관심 부족으로 몇 년 유지되지 못하고 방치되거나 사라지기 일쑤였기 때문에, 우리 서비스는 다르다는 신뢰를 줄 방법이 필요했다. 그래서 복사본들이 언제 어떻게 동기화되는지 투명하게 공개를 하기로 했다. 원본에서 복사해오는 동기화에 문제가 생기면 모든 기록을 낱낱이 공개 하기로 했다. 또 어떤 복사본이 얼마나 사용되는지를 비롯해 각 복사본들의 크기가 어떻게 변화하는지 등의 통계 자료도 누구나 쉽게 확인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 뿐 아니라 이용자들이 쉽게 신고나 건의를 할 수 있도록 소통의 창구도 열어두었다. 전세계를 통틀어 가장 투명하고 신뢰할 수 있는 복사본 서비스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KAIST FTP가 과거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일이 다시 없도록, 지속 가능한 서비스로 만들기 위해서 거의 모든 운영 작업을 자동화하고 사람의 개입 필요성을 최소화하는 일이 중요했다. 이렇게 차근차근 운영에 내실을 다져나가는 동안에, 지구촌 곳곳에 퍼져있는 원본 관리자들에게 성실하게 연락하여 공식 복사본으로도 꼼꼼하게 등록을 하였다. 그 결과, 다양한 경로를 통해 KAIST FTP 서비스에 의존하는 이용객들이 자연스럽게 늘어났고, 자유/공개 소프트웨어나 공개 자료들을 지금처럼 손쉽게 믿을 수 있는 곳에서 받아서 사용하는 것이 당연한 시대를 여는 데에 큰 몫을 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도중에 KAIST FTP의 명맥이 끊길만큼 큰 위기들도 여러 번 있었다. 2009년에는 이용량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더 많은 양의 요청을 감당해야하는 기술적인 난관이 찾아왔다. 오직 몇 년에 한 번씩 스팍스와 정보통신팀에서 어렵게 나오는 금전적 지원으로만 운영이 되어왔기 때문에 더 좋은 하드웨어로 바꾸는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웠고, 어떻게든 소프트웨어를 잘 고쳐서 더 효율적으로 돌아가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마저도 오래 못 버티고 2010년부터는 노후한 하드웨어가 계속 말썽을 부리면서 서비스가 한 달씩 멈추거나 불완전한 상태로 돌아가기도 하였다. 다행히 2011년 여름부터는 정보통신팀과 스팍스의 지원으로 마련한 새로운 하드웨어로 비교적 안정적인 서비스를 3년 정도 이어나가고 있다. KAIST FTP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늘 저자와 함께 난관을 헤쳐나갔던 우리 “거울 모임”과 스팍스의 임원 및 휠(기계관리자 모임) 회원들의 숨은 노고 없이는 불가능한 일들이었다. 특히 대부분 졸업 후 또는 휴학 중이어서 각자 학업과 생업으로 바쁨에도 불구하고 아낌없이 힘을 써준 정헌, 김동주, 홍성진, 그리고 학교에서 궂은 일들을 마다않고 적극적으로 맡아준 박신조, 김규광, 박지민에게 이 자리를 빌어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12년 넘게 KAIST FTP의 개발과 운영을 이끌어오면서 느낀점과 바램을 몇 자 덧붙인다. 사실 복사본 서비스는 처음부터 기술적으로도 결과물로도 그리 매력적이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자랑할만큼 흥미롭거나 놀라운 것도 아니었고, 요즘 반짝반짝 빛나는 앱이나 게임들처럼 인기를 끌어서 큰 돈을 벌어다 줄 성격의 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 스스로가 불편해서 뿌렸던 씨앗이 어느덧 큰 나무로 자라났고, 이제 많은 사람들이 그 나무 밑 시원한 그늘이 당연히 누려야 하는 권리인 것처럼 여기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소중한 공공재를 내 손으로 세우고 일군 것 같아 매우 보람차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공들여 쌓은 탑이 우리가 허술하고 소홀한 틈을 타 한 순간에 또 무너지지 않을까 걱정이 된다. 깨끗한 물이나 공기, 건강, 자유처럼 잃기 전에는 소중함을 알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KAIST FTP도 이와 비슷하리라. 최근에 서비스에 할당된 네트워크 대역폭에 큰 제한이 생겨 서비스 품질에 큰 지장이 있었다. 정보통신팀의 착오로 KAIST 학내망과 인터넷의 접점에서 FTP가 마치 보통 개인 노트북이나 스마트폰과 같은 것처럼 취급되면서 학교 밖으로 파일을 전송하는 속도가 현저히 줄었던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인터넷 회선 계약 갱신을 하면서 KAIST FTP의 사용량을 예외로 두지 못했던 것이다. (마치 전기를 생산하면 오히려 전기회사에서 돈을 받고 팔듯이, 사실 인터넷 회선 제공업체로부터 우리가 KAIST FTP가 보내는 트래픽만큼 할인을 받아도 시원찮다.) 하드웨어도 마련한 지 벌써 3년이 지나 고장이 우려되지만 아직 뾰족한 대책은 없다. 또 사고가 발생하면 다시 정보통신팀이나 스팍스에 기대야만 한다. 잠시라도 서비스가 멈추면 우리나라 많은 이들에게 피해와 불편이 초래되는데도, 이미 시간과 노력으로 충분히 봉사를 하고 있는 운영자들에게 재정적 부담까지 지워져 있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그래서 저자가 그리는 KAIST FTP의 이상적인 미래는 다음과 같은 모습이다: 단기적으로는, KAIST FTP의 중요성을 구성원 모두가 잘 인지하여 직간접적으로 관련 있는 의사 결정에서 늘 고려가 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낡아가는 하드웨어를 유지보수하고 교체하는 데에 필요한 재정은 많은 이용자들의 크고 작은 자발적 기부로 충당할 수 있었으면 한다. KAIST FTP가 홀로 우뚝 서 있기 보다는, 각 ISP(인터넷 서비스 제공자)마다 KAIST FTP와 비슷한 수준의 복사본 서비스들이 많이 생겨나서 세계에서 가장 빠른 인터넷 망을 가진 나라다운 굉장한 속도로 자유/공개 소프트웨어 개발과 같은 창의적인 일도 가능해지길 바란다. 사실 오래 전부터KAIST FTP 운영에 쓰이는 소프트웨어 “거울”과 환경설정은 공개를 해두고 있어서 기관들의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미래다. (최근에 GitHub로 이동) 마지막으로, 저자와 함께 거울 모임이 KAIST FTP를 자발적으로 운영해온 것과 같이, 비록 대단한 것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에 장기적으로 꼭 필요한 일들을 묵묵히 해내고 보람을 찾는 청년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글 / 신재호 동문(netj@sparc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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