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첨성대가 정말 별을 보기 위한 천문대였는지, 혹은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논란이 일었다. 일제시대 본격적으로 연구가 시작되고부터 첨성대가 과연 무엇인지, 어떤 목적으로 지어졌으며 옛 신라인들은 도대체 첨성대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토론이 끊이지 않았다. 1970년대부터 세 번이나 거듭된 대토론회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를 매듭짓고자 지난달 24일, 네 번째 대토론회가 우리 학교 시청각실에서 열렸다

첨성대의 위치와 구조
첨성대는 경주 동남쪽에 자리한 반월성의 서북쪽 평지에 있다. 그 정확한 위치는 북위 35도 29분 53초, 동경 129도 13분 20초이다. 첨성대는 안정감 있는 병 모양의 축조물로, 전체가 화강석을 다듬어 만든 것이다. 그 구조는 이중으로 된 정사각형의 기초석 위에 원통형을 이루고 있는데, 위쪽 원와 아래쪽 원의 지름이 다르다. 맨 위는 긴 사각 장석을 엮어 정자형으로 덮고 있다. 원통부 남쪽 면의 12단째에 사방 1m의 창이 있고, 내부는 그 높이까지 흙이 차 있으며 위로는 비어 있다. 정자석 바로 아래에는 공간의 반이 넓은 판석으로 덮여 있다. 창의 판석 사이에는 19단째와 25단째 두 군데에 장석 4개씩이 마치 비녀처럼 원통부를 꿰뚫거나 걸쳐 있어 井자형 공간을 만들고 있다.
첨성대, 세상의 빛을 보다
첨성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나는 근본적인 이유는 첨성대에 관한 옛 기록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는 첨성대에 대한 기록이 없으며, 삼국유사에도 단지 ‘선덕여왕 때 돌을 다듬어 첨성대를 쌓았다’라는 사실만이 간단히 적혀 있다. 첨성대에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록은 고려시대 이후 고려사지리사, 세종실록지리지 등에서 비로소 등장한다.
첨성대에 관한 본격적인 연구는 20세기 초 일본 학자들이 시작했다. 1904년 세키노는 첨성대가 천문관측소였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와다는 첨성대의 정자석 위에 목조물을 구축하고 그 안에 혼천의를 설치해 관측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미국의 천문학자 루퍼스도 첨성대를 천문대라고 굳혀놓았고, 천문대설은 정설로서 약 70년 동안 아무런 도전을 받지 않았다. 1962년 당시 경주박물관장 홍사준의 주재로 정명호, 유문용 등이 첨성대를 실측했는데, 그의 실측 결과에서는 돌의 수가 아래에서 27단 366개였다.

첨성대 논란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1973년에 서울대학교에서 한국과학사학회 주최 제1차 첨성대 토론회가 열렸는데, 이때 몇 가지 새로운 가설이 나왔다. 격렬한 논쟁은 1974년 수학자 김용운이 제단설을 제창함으로써 시작되었다. 김 교수는 백제, 고구려나 중국, 일본에 비슷한 모양의 천문대가 없고, 삼국사기에 선덕여왕 대의 천문관측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첨성대를 천문대로 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첨성대가 그 당시 천문지식을 표현한 신라 과학의 기념비적 상징물일 뿐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한편, 동양사학자 이용범은 첨성대를 과학보다 신앙의 면에서 다루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라고 제의했다. 그는 첨성대의 형태가 불교의 우주관을 연상케 하며, 평양 첨성대와 강화 참성단이 제단이었던 것처럼 첨성대에서도 별에 지내는 제사인 성제(星祭), 혹은 그와 비슷한 행사가 행해졌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두 주장 모두 첨성대가 실제 관측에는 부적합하다고 보는 공통점이 있다.
이에 대해 물리학자 남천우는 “실제로 첨성대에 올라 첨성대 정상부에 매우 훌륭한 관측 작업장이 있었음을 확인했다”라고 강조하며, 구조적인 면에서 제단이라고 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그는 첨성대가 실제 천체관측을 목적으로 축조된 실용적인 상설 관측대라는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첨성대 담론은 어떻게 발전되었는가 
제2차 첨성대 토론회는 1979년 소백산 천체관측소에서 열렸다. 일부 학자들이 김용운의 제단설을 반대했고, 이용범이 불참한 상태에서 한국과학사학자 박성래가 그를 옹호했다. 박성래는 첨성대가 중국 천문학이 본격 도입되기 전에 건립되었으므로 실용을 위해 축조한 것이 아니라 상징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제3차 첨성대 토론회는 경주에서 첨성대를 답사하고 동국대 경주분교에서 이틀에 걸쳐 열렸다. 3차 토론회에는 일본의 천문학사학자 야부우치가 참여해 천문대설을 지지했다. 한편, 건축가 송민구는 첨성대가 천문대로서의 기능뿐 아니라 여러 가지로 복합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사학자 이기동, 이민구 등도 첨성대가 주술적, 상징적 의미로 점성술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주장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로위원 송상용 교수는 “세 차례의 토론회를 통해 첨성대 해석에 눈에 띄는 3가지 변화가 생겼다”고 말했다. 첫째, 첨성대에서 관측기구를 이용해 천체를 관측했으리라는 주장이 사그라들었다. 둘째, 첨성대가 천문대가 아니라고 주장했던 김용운과 이용범의 태도가 부드러워졌다. 셋째, 점성대, 정치적 조형물로 보는 등 새로운 시각에서 첨성대를 이해하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제4차 대토론회, 분야별로 다양한 의견 제시돼
이번 토론회는 첨성대를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각도로 재조명했다. 이문규 교수는 첨성대를 동아시아 천문학 전통의 관점에서 해석했고 김기흥 교수는 첨성대에 담긴 신라 선덕여왕의 우주관에 대해 발표했다. 위치를 고려했을 때 첨성대는 토속 신앙이 결부된 국가적 상징물이라고 주장한 조세환 교수도 주목을 받았다. 박창범 교수는 첨성대 건설 이후 천문현상 관측 기록이 급증한 점을 들어 천문대설에 힘을 실었다.

동아시아 천문학 전통에서 본 첨성대
전북대학교 과학학과 이문규 교수는 “첨성대가 동양의 천문학적 사상을 담은 천문대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고대 중국에서 ‘천문’이란 하늘의 모습 또는 천체의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천문학 체계가 갖추어지면서 28수 및 해와 달, 오행성의 운행을 관측하는 등 하늘의 세계를 이해하고, 그것을 인간사와 관련지어 해석하는 분야를 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대 동아시아인들이 천문현상을 관찰하고 이를 앞으로 발생할 사건과 관련지어 해석함으로써 천문의 중요성은 커졌고, 천문학에 대해 전문적인 소양을 가진 천문박사가 등장했다. 따라서 일식, 혜성, 유성 등 다양한 천문 현상을 관측할 공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를 위한 공간이 바로 첨성대이다. 하지만, 첨성대에서 관측기기를 사용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정도의 천문현상은 육안으로도 충분히 관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직접 달력을 만들려고 하지 않았던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한편, 첨성대의 구조가 천문 관측에 부적합하다는 문제는 고대 동아시아 문명에서 하늘의 세계가 신성한 존재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 하늘은 해, 달, 별 등과 인간을 포함하는 자연세계 전체를 주재하는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었다. 첨성대를 세울 무렵, 천체를 관측하는 행위를 신성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천문현상을 관측하는 신성한 공간인 첨성대를 일반인들이 쉽게 출입할 수 있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천문박사의 입장에서는 하늘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동시에 지닌 왕의 곁에 있으면서도 세속과 격리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에 전용훈 교토산학대학 객원 연구원은 기초적인 사실 관계가 명확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전 연구원은 첨성대를 ‘별을 관찰하기 위한 네모난 형태의 지상보다 높은 평탄한 곳’이라고 한 이문규 교수의 풀이에 동의하지 못한다고 의견을 밝혔다. 첨성대의 ‘대(臺)’를 높고 평탄한 곳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또한, 이 교수는 현재 우리가 첨성대라고 부르는 경주의 석조건조물이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보이는 첨성대와 같은 것이라는 전제하에 첨성대의 구조와 기능을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이 명확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전 연구원은 우리가 삼국유사에 기록된 첨성대를 경주 첨성대로 믿어버리게 된 것은 고려 말과 조선시대의 문인들의 탓이 크다고 보았다. 첨성대는 삼국유사 이전의 것으로, 문인들의 주장은 실증적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삼국유사 왕력편에 ‘내물왕의 왕릉이 점성대의 서남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를 보고 첨성대(瞻星臺)가 점성대(占星臺)와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급하다고도 했다. 전 연구원의 주장에 따르면 첨성대와 점성대는 확연히 다르다. ‘첨(瞻)’은 <目+詹(들어올리다)>로, 눈을 들어 올려보는 것을 의미한다. ‘점(占)’은 <卜(점치다)+口>이다. 구(口)는 입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어떤 물건이나 장소를 나타내는 기호이다. 전 연구원은 “‘점성’은 별을 보고 점을 쳐서 앞일을 결정한다는 의미이므로 전문적인 천문박사의 일로 적합하지만, ‘첨성’은 단순히 별을 본다는 의미이므로, 순수한 의미의 관측이나 놀이로 생각된다. 따라서 둘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다”라고 밝혔다.

첨성대에 담긴 신라 선덕여왕의 우주관
김기흥 교수는 첨성대가 선덕여왕 당시의 우주관과 종교관을 복합적으로 반영한 일종의 ‘우주목’이라고 주장한다.
첨성대는 기초석 2단, 몸통부 27단, 정상부 정자석 2단으로 되어 있는데, 기초석을 제외한 몸통부 27단과 정자석을 1단으로 계산해 일반적으로 28단으로 받아들여진다. 첨성대의 28단이 동양 전통사회의 별자리 28수를 나타낸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김 교수는 “첨성대라는 이름을 생각해 28수에 맞게 해석할 수 있지만, 기초석의 단수를 제외하고, 정자석을 1단으로 치는 것은 억지스럽다”라며 “기초석, 몸통부, 정자석의 단수를 모두 고려한 31단이 옳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첨성대의 31단에 하늘과 땅을 더하면 33이라는 숫자가 나오는데, 이는 불교의 ‘도리천(33천)’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도리천은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 수미산의 정상에 형성된 하늘 세계를 말한다. 도리천의 사방에는 4개의 산봉우리가 있고 봉우리마다 8천(天)이 있어 모두 32천신(天神)이 살고 있다. 그 한가운데 천둥, 번개와 생산, 풍요를 관장하는 제석천이 있어 33천이다.
제석(환인)신앙은 전통적인 하늘 숭배와 불교의 복합적 사상이다. 선덕여왕의 아버지인 진평왕은 진흥왕의 태자인 동륜의 장자로 진지왕이 폐위되고 즉위했다. 그는 부자간의 순수한 왕위계승이 아니였으므로, 왕권이 갖는 정통성을 고양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제석을 섬겼다. 한편, 진평왕은 자신의 후계를 석종의식을 통해 정당화하려고 했다.
석종의식은 진평왕의 이름이 백정이고 그 왕비의 이름이 마야라는 데서 유래한다. 이 두 이름은 각각 석가모니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인데, 이를 근거로 진평왕 자신의 후계가 석가모니라고 주장할 셈이었던 것이다. 이는 여자인 덕만이 태어나는 바람에 실패했다. 따라서, 선덕여왕은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할 수단이 필요했고, 이를 제석신앙의 강화를 통해 이루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선덕여왕은 자신이 몇 날 몇 시에 죽을지를 미리 예언하고는 자신이 죽으면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당부했다. 그녀는 신라 땅을 도리천의 일부로 보면서 그 곳에서 정당한 권위를 가진 남성 왕으로서 다시 태어나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김 교수는 첨성대가 바로 그 환생의 장소라고 주장했다. 

첨성대는 국가적 상징성을 가진 조형물이다
한양대학교 도시대학원 조세환 교수는 첨성대의 의미를 경주라는 공간의 상징성 안에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 교수는 “경주에 보이는 김씨 왕가의 고분군은 경주 주변의 산들을 흉내 낸 것이다. 신라 토속 신앙에서 왕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었고 그 통로가 산이었다. 왕릉이 산을 모방한 것은 왕이 다시 하늘로 돌아감을 뜻한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신라에는 고유의 국가적 토속 신앙이 있었으며, 경주와 첨성대의 특징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조 교수의 주장을 따르면, 왕실을 상징하는 고분군과 신라의 시작을 뜻하는 계림 사이에 있는 첨성대는 선덕여왕이 국가 상징을 위해 만든 조형물이다.
또한, 조 교수는 첨성대의 구조 역시 토속 신앙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첨성대의 구조는 우물과 같고, 이를 높이 쌓아서 기원하는 의미를 부여했으며 당시 신라의 여성 의복과 비슷하게 생겨 여성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우물 역시 여성을 상징하는데, 이는 물이 여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조 교수는 우물에 남근 조각을 던져 넣어 풍요를 기원하는 의식이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또한, 첨성대에도 가운데 창문을 통해 남근 조각을 던져 넣는 등의 기원의식이 있었을 것으로 예측했다. 즉, 첨성대는 농사의 풍요를 기원하는 제단의 기능을 하며, 위치를 보았을 때 김씨 왕조의 왕위 세습을 강화하고 선덕여왕이 여성이라는 점에서 형성된 정치적 불안정성을 안정화하는 역할도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토론자인 강원대학교 김창석 교수는 “물의 신 하백이나 용은 물을 상징하지만 남성이다. 이 같은 예를 보았을 때 물을 꼭 여성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의구심이 든다. 또한, 첨성대가 정말 우물을 끌어올려 높이 쌓은 구조물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필요하다. 조 교수의 주장은 참신하나, 사학적 증거가 약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라고 평했다.

당시 중국의 천문대와 비교한다면
다음 발표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일권 교수가 진행했다. 김 교수는 첨성대에 대한 문헌 기록이 많이 부족하고 남아 있는 기록도 불확실한 점이 많다고 말했다. 따라서 당시 중국, 즉 한나라의 천문대를 통해 첨성대의 역할을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 김 교수의 주장이다.
한나라에는 ‘영대’라는 천문대가 있었는데, 황제가 영대에 올라가 별을 보고 점을 치는 장소였다고 한다. 영대는 명당, 벽옹과 함께 지어지는데 명당은 황제가 제사를 지내는 장소였고 벽옹은 신하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교화하는 곳이었다. 이렇게 세 건물을 함께 짓는 것을 삼옹 제도라고 한다.
김 교수는 삼옹 제도를 첨성대의 해석에도 적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라 왕조의 시조에게 제사를 지내는 신궁을 명당이라고 할 수 있고, 물로 둘러싸인 곳에서 왕이 신하들과 연회를 벌이던 안압지는 벽옹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이욱 박사는 첨성대를 영대로 해석하는 관점은 이미 조선 유학자들에게서 보이는데, 고려 시대 유학자인 김부식이 삼국사기에서 왜 첨성대를 빠뜨렸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또한, 본래 영대는 영유라는 동산과 영소라는 연못이 함께 있는 구조이며, 안압지는 비록 첨성대와 멀리 떨어져 있지만 영소로 보는 것이 좀 더 옳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이에 대해 김 교수는 영대에 영유와 영소가 추가된 것은 더 나중의 일이라고 설명했다.

첨성대 건립 후에 천문관측이 급격히 늘어나
고등과학원 박창범 교수는 첨성대 건립과 천문현상 관측의 관계에 주목했다. 첨성대를 건립한 선덕여왕 재위 기간 이후에 천문현상 관측 기록 수가 현저하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첨성대의 돌 수나 단수와 같은 상징성은 고대 천문대에 흔히 보이는 특징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첨성대가 동서남북에 정확히 들어맞지 않고 방향이 비틀어져 있는 것은 모서리가 동짓날 태양이 뜨는 곳을 가리키도록 한 것으로, 관측의 편의성을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서울교육대학교 과학교육과 이용복 교수는 정작 첨성대를 만든 선덕여왕 재위  당시에는 첨성대를 이용한 천문관측 기록이 없다는 점을 들어 박 교수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또한, 당시에도 방위를 측정하는 것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으므로 굳이 첨성대의 방향이 기울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제4차 대토론회의 결실은 앞으로의 작은 한 걸음
김기흥 교수는 토론 후반부에 “이제 서로의 독단만을 고집하는 단계는 지났다고 생각한다. 제4차 대토론회에서 이전보다 의견이 수렴되어 가는 듯해 좋은 토론이 되었다고 본다”라고 이번 대토론회를 평했다.
사회를 맡았던 우리 학교 인문사회과학부 신동원 교수는 “첨성대의 건설 동기와 이용 목적, 주요 기능이 잘 구분되어 토론된 점을 높게 평가한다. 이번 대토론회에서 첨성대의 기능이 그 위에 올라 별을 보는 데 있다는 것은 대체로 합의되었다고 본다. 이전 토론에서 제기되었던 다양한 의견들이 점차 모여가는 느낌이다”라고 총평을 내렸다. 또한, 신 교수는 “최소한 2가지의 합의점은 도출되었다고 본다. 첫째는 별을 점치는 곳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보는 점, 둘째는 첨성대 구조가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도 의견이 합치했다. 이런 견해도출은 우리나라 첨성대 논쟁사에서 매우 중요하다. 이제는 첨성대를 두고 천문대인가 제단인가 단순하게 묻는 것은 별 의미가 없게 되었다. ‘상징물로서 별을 점치는 기능'을 하는 곳으로서 두 주장이 절충되었기 때문이다. 천문대설 주장자나 상징설 주장자 양쪽에서 상대방의 견해를 수용하면서 일어난 절대 작지 않은 변화다. 이제 이후 논의는 별을 점치는 행위에 대한 역사적 확인과 그 수준 등 과학적인 것을 묻는 부분과 왜 이런 시설물이 선덕여왕 때 지어졌는지 건축 동기에 대한 부분에 대한 다양한 해석을 어떻게 수렴하는가 하는 문제가 남았다고 생각한다”라고 의견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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