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다시 하늘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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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다시 하늘이 되다
  • 김하정 기자
  • 승인 2014.05.07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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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120주년

 

 

올해는 갑오년이다. 같은 간지는 60갑자가 한 번 도는 60년마다 돌아오기 때문에 60년 전인 1954년, 120년 전인 1894년도 갑오년이 었다. 지금으로부터 60갑자를 두 번 거슬러 올라간 1894년은 다사다난한 해였다. 군국기무처의 설치로 갑오개혁이 시작되고, 청일전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1894년 갑오년은 힘을 잃어가던 조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어지러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조선 말기, 관리의 폭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농민의 삶은 빈곤과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런 암울한 현실에서 농민 운동이 싹트기 시작한다. 갑오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 그것이다.

   

동학의 출현과 움트기 시작하는 동학농민운동

조선 말기 농민들의 삶은 고난 그 자체였다. 땅과 재물은 소수의 부유층에게 집중되었고, 가난한 농민들은 소작농이 되어 남의 땅을 경작했다. 전정, 군정, 환곡의 ‘삼정’을 통한 관리의 수탈로 농민들은 더욱 궁핍해졌고, 강화도 조약 이후 외국에서 수입되는 생필품과 사치품은 수공업 산업을 무너뜨렸다. 이런 힘든 생활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은 유랑민이 되어 떠돌기도 했다.

이때 최제우가 신분제 타파를 주장하는 종교인 동학을 창시한다.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 사상과 후천개벽 사상을 바탕으로 한 동학은 가난한 농민을 중심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정부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였다는 죄목으로 최제우를 처형했지만, 동학은 2대 교주 최시형이 부임하고 교세를 더욱 확장해나가 이후 동학농민운동의 중심 세력이 된다. 동학은 근본적으로 인 본주의에 바탕한 평등사상을 주장한 종교이며, 서학(西學)에 반해 생겨났 다. 따라서 동학농민운동의 반봉건, 반외세적인 성격은 동학의 사상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동학은 농민을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했다.

  

시작된 봉기  

동학농민운동은 전라도 고부에서 시작되었다. 1892년, 풍요롭던 고부군의 군수로 온 조병갑은 부임하자마자 여러 죄목을 들어 재산을 빼앗고, 아버지의 비석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돈을 거두는 등 농민을 착취했다. 그러던 중 정읍천에 원래 있던 보를 두고 새로운 만석보를 쌓게 하자 농민의 원성은 더욱 치솟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은 조병갑에게 진정서를 올렸으나, 관아에서는 이들을 내쫓는다. 전봉준을 비롯한 사람들은 송두호의 집에 모여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조병갑의 목을 베고 서울로 진격하자는 거사를 계획한다. 전봉준을 필두로 한 사람들은 1894년 1월(이하 날짜는 음력으로 표기), 말목장터의 감나무 아래에서 조병갑의 죄를 물으며 농민군을 구성한다.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다. 농민군은 고부 관아를 습격했으나, 군수였던 조병갑은 이미 달아나고 없었다. 관아를 접수한 농민군은 관아의 무기로 무장하고, 본격적인 봉기를 준비하게 된다. 

 

다시 일어서는 농민들, 승리하다 

한 달 후 박원명이 새로운 고부군수로 임명되고, 이용태가 사건 수습의 책임자인 안핵사로 임명된다. 농민을 회유해 폐정을 시정하려 했던 박원명과는 달리 이용태는 1차 봉기를 동학도의 반란으로 규정하고, 무고한 농민을 역적죄로 처벌했다. 이에 분개한 전봉준은 재봉기를 위해 동학의 주요 세력이었던 손화중, 김개남, 김덕명과 힘을 모은다.

3월 20일 무장한 농민군은 고부로 진격한다. 고부관아를 점령한 농민군은 백산성에서 ‘호남창의대장 소’를 설치해 세력을 정비했다. 농민군을 통제하기 위한 행동강령과 군율이 정해지고, 농민군은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성을 차지하기 위해 두 차례 전투를 벌인다. 4월 6일과 4월 23일, 황토현과 장성에서 이뤄진 전투는 모두 농민군이 크게 승리했다. 사기가 크게 상승한 농민군은 전주성에 입성한다. 

 

전주성 함락에 당황한 정부는 청에게 군사 파병을 요청하는데, 청을 견제하려는 일본군까지 우리나라에 상륙하게 된다. 외국 군대의 개입이 시작되자 농민군과 정부는 전주화약을 맺는다. 농민군의 신변을 보장하고, 폐정개혁안을 조정에 올리는 대신 농민군이 전주성을 비우는 것이 전주화약의 내용이었다. 전주화약 이후 농민군의 세력권에서 농민의 자치기구인 집강소가 설치되어 농민의 요구가 생활에 실제로 반영되기 시작한다. 집강소에서는 서로를 ‘접장’ 이라 호칭해 높였으며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기 위한 폐정개혁운동을 벌였고, 기존의 처벌을 심사해 민원을 해결하는 일도 맡았다.

 

무너져내린 농민의 꿈 

전주화약이 이뤄진 후 정부에서는 청군과 일본군에게 철군을 요청한다. 하지만 일본군은 한양을 점거하고, 청일전쟁을 일으킨다. 전주화약 이후 잠잠하던 농민군은 일본이 전쟁을 일으키고, 내정간섭을 강화하려 하자 반외세 운동을 위해 다시 뭉치게 된다. 강경파였던 김개남은 대규모 집회를 열고 재봉기를 주장했으나, 전 봉준은 사태를 신중하게 지켜보자며 김개남을 만류한다. 지도부의 의견이 엇갈리던 때, 농민군을 재정비해 일본을 몰아내자는 흥선대원군의 밀지가 도착한다. 이후 전봉준과 김개남은 각각 봉기를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일본군의 신식 무기가 가세한 탓에 농민군의 피해가 막심했다. 우금치에서 40여 차례의 공방전이 이어졌는데, 농민군은 패배를 거듭했다. 결국, 농민군은 퇴각하게 되고, 남하하며 계속 저항했으나 남은 전투에서도 모두 패배한다. 대둔산에서 벌어진 항쟁을 끝으로 동학농민운동은 마무리된다. 이듬해 지도자들이 사형당하면서 1년 동안의 농민군의 꿈은 끝을 맺는다. 

 

농민군이 이루고자 했던 세상 

농민군이 목숨 걸고 싸웠던 동학 농민운동의 성격은 반봉건과 반외세라고 할 수 있다. 농민군은 봉건제의 폐해인 부정부패와 신분제를 없애기 위해 들고 일어섰다. 우선 농민들은 부정부패의 원인인 삼정의 개혁을 봉기의 1차 목표로 삼았다. 둘째로, 농민들은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원했다. 백정임을 표시하는 모자인 ‘평량립’이 없고, 과부가 다시 결혼할 수 있는 세상을 바랐다. 접장이라고 부르며 서로를 존중했던 것처럼 집강소 설치동안 일상화된 평등사상은 갑오개혁에서 신분제도가 법적으로 폐지되는 데 영향을 주었다. 농민군의 적은 농민을 핍박하고,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세력이었다. 외세에 의존적인 정권을 축출하고, 조선 침략을 노골화하던 일본을 몰아내면 나라가 평안해질 것이라고 믿었다.

 

동학농민운동은 사회개혁에서 시작해 반외세, 반봉건의 항쟁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모두가 평등하다는 동학의 사상을 바탕으로 평등사회를 구현하려 했던 점에서 이후의 항일운동과 민주화 운동의 정신적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 밭에 앉지 마라 녹두 꽃이 떨어지면 청포 장수 울고 간다”라는 참요는 아직도 많은 사람에게 불린다. 하지만 우리는 민요가 불리게 된 계기를 평소에는 잊고 지낸다. 모두가 평등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것을 꿈꿨던 120년 전의 선조를 기억하며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알아보는 기회를 가져 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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