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정치운동 ‘만민공동회’ 발생에 기여한 <독립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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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적 정치운동 ‘만민공동회’ 발생에 기여한 <독립신문>
  • 이경은 기자
  • 승인 2014.03.27 0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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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신문>에 의해 여론이 모이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시민사회가 출현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는 것이 바로 1898년 3월부터 12월까지 3차에 걸쳐 열린 만민공동회다.

 

만민공동회는 독립협회의 정치활동 중 하나로 시민, 단체회원, 정부관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한 대규모 집회다. 만민공동회는 크게 세 차례 열렸다. 제1차 만민공동회는 1898년 3월 10일 종로에서 개최되었다. 당시 서울 인구는 17만으로 추정되는데, 이날 만민공동회에 참석한 인원은 1만 명에 달한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 등 배재학당과 경성학당 학생들이 러시아의 재정간섭을 규탄하는 내용의 대중강연을 했다. 이후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반대 건이 논의되었으며, 군사교관과 재정고문의 철수, 노한은행의 철거를 요구했다.

이틀 후, 서울 남촌에서 평민 수만 명이 다시 만민공동회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절영도 조차 반대, 러시아 군사 교관과 재정 고문의 철수가 결의되었다. 대대적인 운동에 정부는 만민공동회의 주장에 따라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를 거부했다. 며칠 이내에 결의되었던 대로 러시아는 재정고문과 군사교관의 철수를 통고했고 노한은행도 철폐했다. <독립신문>은 이 과정에서 만민공동회와 관련된 모든 사실을 보도하고 만민공동회를 지지하는 논조의 기사를 실었다.

10월에 열린 두 번째 만민공동회는 12일 동안 철야로 열렸다. 고종을 독살하려 한 범인을 그의 가족을 함께 사형시키는 연좌법이 부활되려던 때다. 이날 만민공동회에서는 부당한 법률을 제정하려는 수구파 정부를 퇴진시키는 논의가 진행되었다. <독립신문>과 독립협회 역시 임금을 독살하려 한 범인이라도 법치주의에 충실해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만민공동회와 계속된 공방을 벌이던 고종은 시위군중의 압박에 의해 결국 독립협회 인사인 박정양 등을 등용해 개화파 정부를 만들었다.

제3차 만민공동회는 의회설립을 목표로 해 대표 위원을 선출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그러나 의회 설립 하루 전, 고종은 친러 수구파들에게 자신이 폐위된다는 거짓 보고를 받고 독립협회를 해산시킨다. 이로 인해 독립협회 간부 대다수가 체포되었다. 시민들은 17일 동안 철야로 지도자 석방을 위해 투쟁했지만 결국 고종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불법화하고 해체령을 내렸다. 

만민공동회는 서울 인구의 상당수가 참여한 최초의 근대적 대중운동이자, 조선이 군주국가를 벗어나 민중이 주권을 갖는 근대사회에 진입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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