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개화기에 우리나라의 독립과 민주를 주창한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서재필 박사 탄생 150주년이 되는 해다. 서재필 박사는 젊은 시절 갑신정변에 가담했으나 갑신정변이 실패로 끝나자 미국으로 망명해 한국 최초로 서양의사가 되었다. 이후 조선으로 돌아와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독립문을 건립했다. 이처럼 구한 말 우리나라에 많은 영향을 미친 서재필 박사의 대표적인 행적 중 하나는 <독립신문>을 창간했다는 것이다.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지로, 국민들에게 개화사상을 전파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혼란스러웠던 <독립신문> 창간 배경

19세기 우리나라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문호를 개방하면서 미국, 러시아, 청나라, 일본 등 여러 강대국 사이에서 혼란을 겪고 있었다. 문호 개방을 전후해 개화파 세력이 형성되었고, 1884년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를 필두로 한 갑신정변이 일어난다. 거사가 실패하자 당시 갑신정변에 가담했던 서재필은 다른 일행들과 함께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한편 온건 개화파 일부는 정변 이후에도 조선에 남아 소극적인 수준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일본의 세력이 강해지자 온건 개화파는 이들과 함께 갑오개혁을 단행했다. 갑오개혁으로 권력을 잡은 개화파 유길준은 해외로 망명 떠나 있던 개화파 동지들을 다시 조선으로 불러들였는데, 그중에는 미국에서 생활하고 있던 서재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서재필은 유길준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지 <독립신문>을 창간하게 된다. 서재필은 이미 일본과 미국에서 신문의 위력을 경험한 상태였으며, 백성을 계몽하지 못한 상태에서 소수의 지식인이 일방적으로 이끌고 나아갔다가 실패했던 갑오개혁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열강들 사이에 있는 조선이 국가적으로 독립하기 위해서는 국민을 계몽시키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이런 시대적 상황과 서재필, 유길준을 비롯한 당대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국민 계몽에 대한 의지 덕에 <독립신문>은 백성을 위한 신문으로 태어난 것이다.

 

최초로 순 한글로 쓰여진 신문

<독립신문>은 최초로 한글로만 쓰여졌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갑오개혁 이전까지 조선의 공식 문자는 한문이었다. 공식적인 서류들은 모두 한문으로 작성되었으며 한글은 보편화되지 않은 상태였다. 갑오개혁 때에서야 한글이‘ 나랏글’이 되면서 공식적인 문서도 한글로 작성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한글을 이용해 정보가 활발히 교류되지는 않고 있었다. <독립신문> 이전에도 <한성순보>라는 신문이 존재했지만 <한성순보>는 한문으로 쓰여져 백성들이 읽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서재필과 유길준을 포함한 당대 지식인들은 한글에 관심이 많았다. 한글은 한문보다 훨씬 쉽게 백성을 계몽할 수 있는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들은 대중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독립신문>을 순 한글로 발행하기로 결정했다.

 
▲ 독립신문 창간호/ 한국언론진흥재단 제공
 

띄어쓰기, 언문일치로 백성들이 읽기 쉽게 쓰여져

<독립신문>의 창간호 논설을 보면, “우리 신문이 한문은 아니 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는 것은 상하 귀천이 다 보게 함이라. 또 국문을 이렇게 구절을 띄어 쓴 즉 아무라도 이 신문 보기가 쉽고 신문 속에 있는 말을 자세히 알아보게 함이라. ……우리 신문은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이 신문을 보고 외국 물정과 내지 사정을 알게 하라는 뜻이니 남녀노소 상하 귀천 간에 우리 신문을 하루걸러 몇 달간 보면 새 지각과 새 학문이 생길 걸 미리 아노라.”라는 대목을 찾아볼 수 있다. <독립신문>은 최초로 순 한글로 쓰여진 신문일 뿐 아니라 최초로 띄어쓰기를 시행한 신문이다. 최초로 <독립신문>에 띄어쓰기를 적용한 사람이 서재필인지 그와 함께 독립신문사에서 일하던 주시경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그러나 서재필이 미국에서 영어를 사용하면서 띄어쓰기에 이미 익숙해져 있었기에 <독립신문>에 띄어쓰기를 적용한 사람 역시 서재필로 추정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독립신문>에서는 최초로 언문일치도 실시했다. 한문을 사용할 때에는 어순 등이 구어체와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독립신문>에서는 일반 백성들이 평상시 말하는 그대로 한글을 이용해 글을 썼다.

 

현대 언론의 모태가 되는 <독립신문>

<독립신문>은 백성들을 개화시키는 데에 앞장섰다. 당시 조선이 처한 국제 정치적 상황을 낱낱이 밝혔으며 이런 상황 속에서 국가가 부강해질 수 있는 새로운 개혁 방안을 제시했다. 민주주의와 같은 개념을 확산시키고 외국 풍습에 대해 알려주는 기능도 했다. 아울러 무능한 정부나 부정부패한 관리를 비판했으며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주권의식을 깨우쳐주었다. 창간호 논설에는 “우리는, 첫째 편벽되지 아니한 고로 무슨 당에도 상관이 없고, 상하 귀천을 달리 대접 아니하고, 모두 조선 사람으로만 알고, 조선만을 위하며, 공평히 인민에게 말할 터인데, 우리가 서울 백성만 위할 것이 아니라 조선 전국 인민을 위하여 무슨 일이든지 예언하여 주려 함. ……우리는 바른 대로만 신문을 할 터인 고로, 정부 관원이라도 잘못하는 이 있으면 우리가 말할 터이오. 탐관오리들을 알면 세상에 그 사람의 행적을 펼 터이오, 사사 백성이라도 무법한 일을 하는 사람은 우리가 찾아 신문을 설명할 터이옴.”라는 대목이 있다. 비판 기능을 하기보다는 관영신문의 성격을 띠었던 <한성순보>와 달리, <독립신문>은 확실히 언론의 비판 기능을 수행하려한 것이다. <독립신문>이 이 같은 기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책임자인 서재필이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한쪽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시국에 대해 논평하고 정부와 권력자를 비판한 자세는 이후 우리나라 언론의 중심 가치로 자리 잡았다.

 

근대적인 시민사회의 형성에도 기여해

<독립신문>은 많은 백성이 쉽게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당시 근대적 공론장을 형성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당시 시민들이 <독립신문>에 보낸 편지에 의하면 <독립신문>이 배달되면 한 명이 시장에 나와 큰 소리로 신문을 읽고 많은 사람이 둘러서서 그 이야기를 들었으며, 서로 신문 내용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나와 있다. 이는 민중과 민중, 민중과 관원 사이에 소통의 장이 형성되었다는 뜻이다. 또한 <독립신문>은 일반 백성들이 직접 참여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곳이었다. <독립신문>이 간행된 기간은 약 3년으로 그리 길지 않으나, 그동안 독자들이 실명 혹은 익명으로 <독립신문>에 투고해 실린 글은 400건이 넘는다.

 

<독립신문>의 논조가 서구 열강 세력에 우호적이었던 점을 비판하는 견해도 있으며, 정부의 지원을 받아 설립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최초의 민간 신문’인지에 대한 논란도 있다. 서재필도 학계에서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를 모두 받는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재필과 <독립신문>은 우리나라 언론사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고 있다. <독립신문>이 간행된 후 순 한글로 된 다른 민간 신문들이 생겨났으며 현재까지도 <독립신문> 창간일이 우리나라 ‘신문의 날’로 지정되어있을 정도다. 따라서 <독립신문>은 서재필, 유길준, 주시경 등 당시 지식인들, 백성들의 사상과 조선의 시대 상황이 담겨있는 보고이며 오늘날 한국 사회과학의 출발점이 될 수 있는 현장과 역사의 제공처로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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