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회 카이스트 문학상] 소설부문 당선작/ 기묘한 동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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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9회 카이스트 문학상] 소설부문 당선작/ 기묘한 동거
  • 카이스트신문
  • 승인 2014.02.25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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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묘한 동거

화학과 석박사통합과정 권나영

 

Prologue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수십 번을 반복했다. 벌레가 물어뜯고 지나간 자리가 화끈거린다. 내 손바닥만 한 것들은

큰 날개를 푸석 거리며 날아갈 뿐이지만 정작 눈에 띄지도 않는 작은 벌레는 나를 물어뜯는

다. 결국 가려운 얼굴을 긁지 않기 위한 대가로 꽤 먼 곳에 있는 손가락을 고생시키기로 결

정한 것은 침낭 속에 구겨 넣은 몸이라 손가락을 쓰기 위해서 여차하면 몸을 감싸고 있는

이 칙칙한 풀색의 침낭을 열기 위한 귀찮은 수고를 피하기 위해서였다.

구차한 꼼지락거림을 계속해서 반복한다. 껴입을 수 있는 모든 옷을 휘감은 탓에 침낭의

지퍼를 올리는 것조차 힘들었다. 하필 숨구멍이라고 열어 놓은 한 뼘의 구멍 사이로 날 벌

레 한 마리가 얼굴을 물어뜯고 지나가버렸다. 괜히 숨통을 핑계 삼아 빼꼼히 열어 놓은 것

을 거듭 자책 해 보지만 무슨 이유에서든 간에 이런 밤하늘은 놓쳐서는 안 될 것이었다. 나

는 아직도 나를 자책하고 나를 몰아세운다. 아직도 멀었다는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래도 이제는 이런 나마저도 사랑스럽다. 나를 버리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더니 나는 오히

려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이 정도라도 충분한 것이다. 유치하고, 그저 그럴 뿐이라도

이만하면 합격점이다.

이곳은 매일 밤 이런 하늘이 뜬다.

놓칠 수 없는 것, 아무 것도 움켜쥐지 못하는 환경에서는 욕심을 부리기 마련이다. 저 하

늘, 저 먼 곳. 내가 닿을 수 없는 그 어딘가.

커다란 아크릴 판에 붓을 털어 흩뿌려 놓은 것 같은 물감들이 플라네타리움처럼 회전한다.

선잠이 들었다가 눈을 뜨면 별이 돌아 간 각도를 얼추 계산해서 시간을 알 수 있다. 영겁의

시간을 반복한 우주는 오늘도 그대로이다. 놀랍도록, 그 자리, 그 방식, 변하지 않는 반추의

세월을 간직하고 있건만 사소한 것들은 끊임없이 변한다. 오늘 내 별은 저 셔츠의 단추별이

다. 손이 자주 가서 떨어질 것 같은 아슬아슬한 단추 같은 작고 희미한 별. 매일 밤, 수억

년 전에 쏘아 놓은 그 신호를 나는 이제야 받아들이곤 한다.

“당신은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조용히 속삭여보지만 별이 대답을 할 리는 없다. 그보다 내가 어떤 말로 삶을 살아갔었는

지 기억나지 않는다. 스스로가 어색하고 생소한 나를 마주하는 것은 서울을 떠난 날로부터

매일 밤 반복되었지만 여전히 익숙해 지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난 환자에게 딱히 인사를 건넨 적도 없는 것 같다. 늘 그렇듯 문을 열고 들어

온 그들은 내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자신을 쏟아내고 거리낌 없이 보여준다. 마치 정신

과 의사라는 직업을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입을 가진 사람들의 대표자라도 되는 듯이, 자신

의 남편이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했다느니, 지난해에 스캔들이 났던 영화배우와는 사실 아

직도 불륜 관계라느니 그런 흔한 가십 삐라 같은 이야기를 배설하기 위한 곳. 그게 나였다.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가려움은 잊혀진다. 예전의 나였다면 분명 졸린 눈을 비

비면서도 인터넷으로 바로 옆 건물의 피부과를 예약했을 것이다. 그럼 그 의사는 의기양양

한 눈으로 내 상처라고 부르기에도 민망한 그곳을 치료해 주고는 좋은 듯 그 주 주말 저녁

이 바쁘냐고 물어봤을 것이다. 내가 거절 할 것을 알면서도, 능글맞게 한 번 던져보는 것이

병원 열쇠를 담보로 혼인신고를 했다는 그 의사의 몹쓸 버릇인 것이다.

아무리 많은 단어를 멋들어지게 나열 해 봤자, 이 떠남의 목적은 결국 그를 찾기 위함이었

다. 나를 조금 더 삶에 스며들게 자꾸만 등 떠미는 그 라는 존재를 만지기 위해서, 잔잔하

고 무미건조하기를 추구했던 나를 온전히 내어 던지게 만드는 그 원동력을 자처한 그를 찾

아내야만 했다. 나는 당신 때문에 무덤덤함과 방관을 버리고 현재의 시간에 엉망진창으로

흡수되었노라고, 나는 당신에게 빚이 있으니 그걸 갚아야 하노라고 그를 종용하기 위해 태

어나 한 번도 벗어나 본 적 없는 도시를 박차고 나왔다.

“안녕……. 거기에 있…….”

성형외과 R원장 : 나쁘지 않다.

30분 째 수술 이야기만 늘어놓는 이 남자는 보드랍게 큰 모범생답다.

‘이 사람아, 석션(Suction)은 나도 알고 있네요.’

메스만 안 들었다 뿐이지 하루에 열 번도 더 사람 뇌를 열었다 닫았다 하는 정신과 의사에

게 애들도 다 알만한 기초 수술 용어를 저렇게 신들린 듯 설명하는 사람도 처음이니 나름

신선하긴 하다. 의사라는 직업병일까. 같은 직업군 앞에서도 쉬지 않는 저 입술이 누군가를

떠오르게 한다.

아직 핏물이 베여 나오는 스테이크를 앞에 두고 떠들어대는 수다스런 남자의 말 뒤로 아쉬

운 공기 소리를 내며 밀려 올라가는 고인 핏물 소리가 들린다. 공허한 뚫림에 현실로 돌아

오는 기분이 의외로 불쾌하지 않다. 게다가 이 남자, 성실하다. 나쁘지 않다.

그사이 레스토랑의 곳곳에 숨겨진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배경음악이 째즈로 바뀌었다. 이

럴 거면 저 비싸 보이는 그랜드 피아노를 왜 들여놓았는지 모르겠다. 차라리 테이블을 하나

더 들여놓는 것이 더 이득일 것 같은데, 자꾸 생각이 여기서 달아나려하고 있다. 그랜드 피

아노가 주는 정신적인 충족과 그 효과로 인한 흑자의 가치를 비교할 수 없으니 일단 이 문

제를 접어놓기로 했다.

“째즈- 좋아하시죠?”

“네?”

“잡지에서 읽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빌리 홀리데이를 듣고 자라셨다는 말이 인상 깊

었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도…….”

친밀감을 놓이기 위한 가족을 대입시키는 방법. 확실히 의사들은 똑똑하다.

“어떤 잡지였죠? 제가 그런 말을 했던 적이 잘 기억이 안 나서요.”

“G사였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아, 어머니들이 보시는 여성잡지요? 그런 것도 보시나 봐요?”

“아……, 벼, 병원 로비에 많으니까요.”

원래 말더듬이는 아닐 텐데, 오늘 저녁의 나는 지나치게 공격적이다. 서른을 간단하게 훌

쩍 넘긴 것도 모자라 이십대가 부러워하는 독신 여성에 하이 링크(High-link)된 덕에 남자

없이 잘 살 것 같아 보이는 대표적인 여성상인 나로서는 좋은 태도가 아니다. 게다가 이 남

자 결혼상대로는 나쁘지 않은 사람이다.

“피부가 참 좋으시네요.”

“아, 네에.”

“성형학적으로 서 휜씨 얼굴은 높은 점수를 드리고 싶은게…….”

부끄러운 듯 눈을 마주치며 우물쭈물 입을 여는 모습이 어쩐지 귀엽다. 그래, 나쁘지 않

네.

「서휜, 많이 컸다? 예전 같았으면 게을러서 화장 같은 건 절대 못하느니, 몇 년 전만 해도

로션도 안 발랐다느니, 벌써 2절 3절 나와야 할 텐데. 역시 사람은 나이를 먹는 구나.」

“야.”

아뿔싸.

“네?”

정적이 흐른다. 처음 보는 상대를 앞에 두고 외마디 협박성 짙은 음절을 내 뱉어 버렸다.

지금 내가 존재하는 이 현실은 조용한 레스토랑 피아노 바로 옆 센터 자리이다. 성실한 남

자의 바른 매너가 빛을 발한 자리에서 이미 질러버린 비명을 어떻게든 대처해야 한다.

“아, 아뇨. 오늘 상담 환자가, 아, 네. 제 상담 환자가요. 갑자기 ‘야’하고 소리 지르는 그,

강박관념. 네, 약간 정신 분열 증세와 강박 관념을 가진 환자라서, 제가 3시간 동안 ‘야’만

들었더니, 너무 집중했었나, 옮았나 봐요. 제가 오늘 전체적으로 너무 날이 서 있었죠?”

“그러셨군요. 예약 환자만 받으시죠? vip 회원 같은 것도 있어요? 대기업 재벌이나 연예인

들이 따로 전화오기도 하죠?”

“네. 연예인들 중에 제가 입만 열면 스캔들 빵 터질 애들도 많은 걸요.”

엉겹걸에 오늘 내 태도마저 사과해 버리는 편이 좀 더 홀가분한 것 같기도 하고,

「빵 터지는 상대 중 하나가 본인이라서 문제지. 하움- 여기 화이트로 한 잔 더. 좋아하지,

이런 와인?」

탁-

내가 포크를 내려놓는 소리에 품위 있는 레스토랑의 이목이 다시 한 번 집중되었다.

“저, 어디 불편하시면,”

“아니요. 아까 말씀드린 그 환자. 제가 너무 스트레스를 받았나 봐요. 원래 이런 날에는

누굴 만나는 게 아닌데 당일 약속은 취소하기가 곤란해서 죄송합니다.”

나를 따라 일어서던 그가 엉거주춤 의자에 엉덩이를 걸친 채 말한다.

“저, 제 차로 가시죠.”

“아뇨. 그냥 좀 걷고 싶네요.”

“제가 모셔다 드려야 마음이 편합니다만, 차 안 갖고 오셨죠?”

「2차로 술자리까지 가고 싶었겠지. 그러니까 애마를 안 끌고 왔지. 요즘 알코올이 부족하

잖아?」

“하아-”

신경질 적인 반응에 또 한 번 주눅 든 모습이다. 이봐, 이건 당신을 향한 게 아니다.

“그럼 오늘은 아, 저, 죄, 죄송합니다.”

이 남자를 말더듬이로 만든 것은, 지금 함께 있는 여자. 즉, 나.

분명 어머니 쪽이 히스테릭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덕분에 공부도 열심히, 인생도 바르게

살아서 나와 이 순간에 마주하고 있는 것일 테다. 근원지가 아버지 쪽이면 이런 보드라운

남자는 도리어 삐뚤어지기 마련이니 어머니 쪽이 보다 정확 할 것이다.

하지만 만난 지 한 시간 안쪽이니 아직 내가 그를 모른다. 섣부른 판단은 환자 정신 상태

분석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그 전에 이 남자는 내 환자가 아니다. 눈언저리를 살핀다

는 것이 쏘아보는 꼴이 되어버렸다. 미세한 공기의 떨림을 타고 분명하지 않은 상대의 진심

이 전해진다.

세이프(Safe).

“그럼, 저, 다음에 뵙겠습…….”

“아니요. 스트레스에 피로까지 겹치면 다음 상담 다 캔슬 될지도 모르는데, 저한테 오

시는 분들을 위해서라도 부탁드릴게요.”

이럴 때는 역시 미소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비즈니스 식 미소. 바닥을 딛는 내 구

두의 날카로운 굽 소리만 유독 크게 느껴지는 이곳을 떠나고 있다.

한창 내가 어릴 때 유행했던 어떤 맥주의 광고 타이틀이 목 넘김이 부드러운 술이었던 걸

로 기억한다. 꼴에 탈선해보겠다고 편의점에서 나이를 속여 가며 캔 맥주를 사서 집에 들어

온 기억도 혼자 방에서 몰래 홀짝거렸던 김빠진 맥주의 싱거운 맛도 이십년이 다 된 지금에

와서 나를 또 부끄럽게 한다. 그 기억이 어떻게 왜곡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느 날부터 나의

차의 대한 가치 판단 기준은 맥주와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창문이 열리는 느낌이 목

넘김이 부드러운 맥주와 같아야 한다. 처음 차에 타게 되면 몇 번이고 창문을 내렸다 올렸

다 하면서 그 차를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덕분에 만났던 남자들의 차 윈도우를 종극에는

몇 번이고 고장 내 버리는 바람에 사람 머리 통 속 빼고는 뭐든 망가뜨리는 여자로 불리게

되었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몇 번 오르락내리락 해 보고 이내 그 차의 목 넘김이 마음에 들었다. 부드럽게 내려간 창

문 너머로 시원한 바람이 숨통을 튼다. 은은하게 나는 남자 스킨 냄새도 너무 겉멋 든 것도

아닌 편안한 시트의 깔끔한 내부도 모두 나쁘지 않은 조합니다. 이 차는 창문을 내버려두고

라도 전부 다 나쁘지 않다. 둔하지 않은 외관이 내 스타일이다 싶었는데 기대 이상이다. 오

히려 좋다고 말해야 하는 걸까. 좋다는 표현은 아직 아까운 것인지 나쁘지 않다는 말 밖에

는 떠오르는 것이 없다.

부정적이지 않을 뿐이지 긍정은 아니라는 답밖에 나오지 않는다. 이 남자 금요일 저녁의

블라인드 데이트 상대로는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저 뒤 자석에 팔랑 거리 듯 앉아서 날 위

한 잔잔한 음악을 대신 만끽하고 있는 저 녀석도 나쁘지 않다.

“뒤에 뭐가 있나요?”

“네, 네에?”

“하하. 서 휜씨 자꾸 백미러로 뒷좌석 보시길래요. 괜히 으스스 합니다? 하하하”

그럴 리가 없는데 담배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분명 이 사람은 비흡연자라고 했고, 이 차의

어디서도 담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적어도 이 남자는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다. 순간

담배 향과 함께 블루베리 향기가 차내에 퍼진다. 내가 설치류 마냥 후각을 세우고 있는 동

안 황금 같은 침묵이 생각보다 오래 흘렀으리라. 고등학생들의 풋풋한 첫 데이트에서나 흐

를 법한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향수 쓰세요?”

“향수는 안 씁니다만, 스킨 향이 아닐까요?”

내가 보인 첫 관심에 반가운 기색이 확연한 그가 또 우물쭈물 입을 연다. 어쩌면 저렇게

수줍은 듯 말하는 건 단순히 이 남자의 버릇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술수인가?

“어쩐지 익숙하더니. 아빠가 같은 걸 쓰셨어요.”

“이거 괜히 기쁩니다. 공통점이 생긴 건가, 하하”

“나중에 아빠 선물 살 때 한 번 같이 가실래요? 왠지 저희 아빠 취향을 잘 아실 것 같은

데.”

“그럼 저야 영광이죠.”

빛바랜 금빛 뚜껑의 에메랄드 빛 병에 담길 법한 브랜드 스킨 향인데, 정말 그럴 리 없는

데도 개피 시럽을 얹은 생소하기만 한 깊은 보라 빛 과일 향이 진동을 한다.

“다음 주에 또 뵐 수 있을까요?”

“네?”

“주중에는 바쁘실 것 같고, 주말쯤에 다시 한 번 뵐 수 있을까 해서요. 물론 제 바램이지

만”

“아…”

“스트레스 받고 나오셔서 엉뚱한 행동 하셔도 괜찮으니까 부담가지지 말고 연락 주세요.”

손끝을 살짝 스치면서 명함을 건네는 행동이 지나치게 상투적이지만 그런 깍듯한 예의에

호감이 간다. 아까 레스토랑에서 저지른 비상식적인 행동에 질려버릴 지극히 상식적인 사람

일 줄 알았더니 의외다.

이 사람의 명함답게 사각의 반듯한 종이마저 성실하게 느껴진다.

R성형외과 전문의 원장 R

나쁘지 않다. 정말 나쁘지 않다. 내 짝 쌍꺼풀 정도는 가볍게 손 봐 줄 수 있겠네. 나쁘지

않은 상대다. 오늘은 온통 나쁘지 않은 것투성이다. 나쁘지 않은 것. 하지만 좋다고 할 수

없는 것. 그 모호한 경계의 일들이 뒤죽박죽 얽혀서 현실과 꿈의 경계에서 자꾸 나를 헷갈

리게 만들고 있다.

무너지듯 엘리베이터에 기대어 가장 위의 버튼을 신경질적으로 누른다. 서울의 탁한 공기

보다는 위, 하늘보다 아래에 있는 나의 공간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올라간다. 그는 늘 그

렇게 한계를 두려워하지 않고 솟구치던 사람이었다.

‘너 지금 내 생각하지? 날 잊을 수 없다니까.’

“내 어깨에서 손 때.”

‘까칠하게 왜 이래. 아까 그 남자 별로였지? 넌 병원 얘기라면 질색하는데 처음부터 끝까

지. 아- 시시해.’

“나쁘진 않았잖아.”

‘겨우? 나쁘지 않기는? 별로였어. 아니, 최악이었다고! 그리고 네가 언제 나쁘지 않다 정

도로 만족하는 사람이었나? 사람 잘못 봤는걸.’

오늘이 최악인 진짜 이유를 이 지긋지긋한 녀석은 모르나 보다. 언제든 나를 휘두르고 있

는 이 망상은 나를 이토록 끔찍한 기분으로 황금 같은 금요일 밤에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뛰

쳐나오게 한 존재가 자신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

“그렇죠? 선배가 생각할 때도, 초기 분열증세인 것 같죠?”

“헤어진 연인을 잊지 못하고, 옆에 있는 것처럼 느끼면서 사는 여자들 많잖아? 뭘 새삼스

럽게 그래?”

“조금 다른 경우라서, 옆에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 다가 아니라, 실제로 말도 하고,

함께 생활도 하고 있어요.”

“그게 그 사람들이 착각하는 거 아냐? 옛 애인의 환영이 함께 있다고 말하는 게 그거잖아.

밥도 같이 먹고, 대화하고.”

“대화뿐만 아니라 상황에 참견하기도 하고 도가 지나쳐서 일상을 침범할 정도이면 착각이

라고만 할 수 없지 않나요?”

“그건 서 선생한테 상담 받을 일이 아니라 정신병원에 보낼 만한 증상인데? 누구야? 설마

저번 달부터 온다는 미모의 탤런트 P양? 으흐흐. 누군지 몰라도 걔가 24시간 함께 한다는

착각에 빠지는 대상이라서 좋겠다.”

L선배의 오두방정이 시작 될 것 같아 자리를 피하고 싶어진다. 수선스런 L선배는 오늘같이

수면 시간이 부족 한 날, 나에게는 무리다. 한참 영화배우 P에 대한 예찬을 펼치던 그가 내

굳은 표정을 봤는지 헛기침으로 대화를 마무리 하려 든다.

“암튼 그 정도 증상은 남자친구랑 이별한 여성들에게 흔히 있는 일인데 왜 그렇게 신경

써? 연예인들 다들 조금씩 돌았다고 하던 게 누군데? 작품 끝나고 자기가 계속 고독한 킬

러라도 되는 줄 아는 게 걔들이야. 곧 괜찮아지겠지. 신경 안정제랑 카페인 사절 표지판

아니야? 렉사프론이면 될 것을 뭘 그렇게 고민하냐. 안정 취하시라 그래..”

“안정을 취하고 싶어도 옆에서 자꾸 떠들어대서 말이죠.”

L선배의 수상쩍은 표정을 뒤로한 채 내 오피스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망상,

착각, 환영, 귀신. 또 뭐가 있더라? 수호령, 수호천사, 사신. 뭐든 좋다. 타인의 눈에는 보

이지 않고, 잡히지도 않지만 늘 옆에 있는 저 망상과 함께 지내고 있은 지 벌써 반년이 지

났다. 스트레스성으로 가볍게 생각하고 넘긴 문제가 이렇게 크게 될 줄은 처음에는 몰랐다.

복잡한 사람을 많이 상대하는 이 일을 하다보면 가끔 내 앞에서 떠드는 이 사람이 가 현실

에서 존재하는 것인지 조차 헷갈릴 때가 간혹 있었는데 그런 어지럼증의 연장이라고만 생각

했다.

녀석은 오래 전 내 대학 시절의 남자였다. 누구나 한 번쯤 하는 젊었을 때의 연애. 불꽃놀

이 같은 감정에 둘러싸여 지내던 축제의 밤과 같은 연인이었다. 풀냄새와 밤의 공기에 취해

버리는 축제의 밤 말이다. 스트릿 페스티벌에서 춤을 추는 것 같은, 화려하고 자극적이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단지 과거로만 남겨지고 마는 그런 시간. 처음에는 쭈뻣 쭈뻣 시작하지

만 곧 그 열기와 매력에 빠져버려 다리에 쥐가 나는 지도 모르고 밤을 세게 되는 그런 네온

사인 같은 밤의 남자.

증상이 이 정도면 신 내림이라도 받아야 하는지, 정신과라도 가야하는지 모르지만 애석하

게도 난 그럴 수 없다. 왜냐하면 거품이 가미되었든지 말든지 간에 지금 한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심리학책의 저자는 나이고 내가 내킬 때 앞에 앉아만 있어주는 대가로 받는 돈은 결

코 작은 금액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이 터져 밥줄이 끊기는 건 둘째 치고, 저 잘났다 외치

기 좋아하는 인간들이 피해 보상 소송이라도 진행하면 그야말로 대대적인 쪽팔림이다. 그런

일을 저런 허무맹랑한 환영 때문에 겪을 필요는 없다. 난 부모님의 바람대로 현명한 사람으

로 자라지는 못했지만 최소한 바보가 되는 것을 피할 줄은 안다. 누가 뭐래도 남들이 볼 때

는 꽤나 냉정하고 정확한 정신과 의사로 알려져 있으니 적어도 그 값을 할 책임은 있다.

*

한사람의 발자국 소리만이 울린다. 단단한 첫 음과 함께 그의 옆 머리카락이 찰랑 거리고,

받아치는 각운에서 흩어지듯 시야에서 사라진다. 스스로에게 주문을 건다.

나뿐이다.

오직 이곳에는 나만이 존재한다.

존 내쉬도 알비노 환자 같은 죽은 환영과 평생을 함께 하면서도 노벨상까지 받지 않았는

가. 노벨상은 무리더라도 최소한 손해배상 소송은 면해야한다며 스스로 주문을 건다.

어느새 사라졌다. 그나마 다행인 건, 뭐든지 집중하다 보면 순간 사라져 있다는 것이다.

분명 아직 심각한 수준은 아닐 테지만 내 옆에서 맴도는, 아니 내가 만들어 내는 이 대상은

정상이 아니다. 나와 함께하는 옛날 애인 모습을 한 남자라니. 누가 들으면 귀신과 동침이

라도 할 정도로 욕구불만으로 보이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난다.

답답한 마음에 차가운 복도 끝에서 얼음장 같은 벽에 머리를 박아댄다. 정신이 번쩍 들도

록 거듭하는 사이 육체적 통증 사이로 정신이 조금은 맑아지는 것도 같다. 텅 빈 복도에 과

장된 둔탁한 음이 쿵- 하고 무겁게 울린다.

‘아프다- 이런 건 싫다고 그랬잖아.’

또 그다.

고개를 들어 마주보게 된 그 환영은 너무도 실감나서 내 자신 조차 믿을 수 없게 만들었

다. 그러고 보니 처음이다. 우리가 이렇게 오래 마주 한 적이 말이다.

*

운전만 하면 긴장하는 몹쓸 버릇 덕분에 다리 너머로 떨어지는 석양 감상은 분에 넘치는

사치가 되어버렸다. 정면 돌파만 하고 있는 날 비웃 듯 까닥거리는 발목과 함께 눈을 감은

채로 길게 누워있는 저 녀석을 조바심내면서 관찰하고 있다. 방금 물에서 나온 듯, 젖은 머

리카락이 앞으로 떨어져서 가느다란 눈매를 감싸고 고집스레 닫힌 입술이 가끔 허밍 음을

내는 것처럼 떨리고 있다.

“이렇게 내 인생을 방해 할 거면 운전이나 대신해주지 그래?”

잠시 눈을 뜨고 나를 응시하는 그가 익숙하다.

***

“잠시 운전 좀 하지 그래?”

“싫어- 알잖아. 나 운전하면서 말하면 사고 확률이 100%인 거.”

“아가씨! 나 지금 벌써 다섯 시간 째 핸들 앞이라고.”

“그러 길래 왜 쓸데없이 최남단을 가제, 응? 서울에서 가까운데 많잖아! 다짜고짜 차에 태

워서 출발한건 제가 아니고 당신이세요.”

막 학기가 마친 참이라 서울을 벗어나고 싶었다. 될 수만 있다면 내가 아는 이 익숙한 모

든 곳을 떠나고 싶었지만 마지막 논문과 학회 준비로 곧 정신없어 질 내 모습에 지례 겁을

먹곤 비축 잠이라도 자 둘까 하던 석양이 아깝던 저녁이었다. 내 욕심과 본능이 열심히 싸

우던 그날, 불쑥 찾아와 내미는 캔 맥주에 내심 감동하고 있었다. 떠나고 싶어 하는 내 마

음을 읽은 듯 차에 밀어 넣어 준 그가 퍽 멋지게 느껴졌던, 그런 날 저녁이었다.

꼭 크리스마스 같았다. 뒷좌석에 길게 누워 내가 기대고 있는 문은 그가 처음 차를 끌고

왔을 때부터 열리지 않던, 소위 불량 문짝이었지만 그의 오래 된 옷과 땀에 젖은 머리에서

나는 살 냄새가 위로가 되는 차 안에서 나는 그렇게 어디론가 실려 가고 있었다. 우습지만

운전대에 있는 그의 뒷모습 위로 커다란 리본이 오버랩 되어 크리스마스 퍼레이드 차량 속

에 몰래 숨어 든 꼬마가 된 것 같아 자꾸 웃음이 나왔다.

“좋아?”

“그러게. 괜히 웃음이 나네.”

“넌 웃는 게 개구 져서 좋아.”

“개구 져서?”

“따뜻하고, 장난기 있어서. 그래서 내가 널 찍는 걸 좋아하는 거지.”

“그 것 뿐이야?”

“음. 개구지기도 하고… …, 꼭 네 살짜리 꼬마 애가 진흙 속에서 웃는 것 같아서 좋다니

깐.”

“애들이 사고 쳐 놓고 엄마가 화 못 내도록 배시시 웃어버리는 그 웃음 말하는 거지?”

“알고 있네? 왜 혹시 어린 시절에 매번 그랬어?”

“어린 시절?”

마땅한 어린 시절이 떠오르지 않았다. 난 할 수 있는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었지만 그는

내가 비밀을 만든다고 섭섭해 했다.

“또, 또. 신비주의. 넌 웃을 때 눈, 코, 입이 다 웃어.”

“하하. 그게 뭔데?”

“요즘은 웃을 때 입 꼬리만 살짝 드는 게 웃음의 단 줄 안다니까. 눈도 웃고, 코도 씰룩거

리고, 입 꼬리도 말려야 그게 웃음이지, 진짜 웃음! 아, 저기 휴게소다! 우리 좀 쉬다 갈

까? 아님 맥주 한잔?”

“뒷 자석에 내가 타고 있다는 걸 염두 해 줘. 그럼 술이 넘어 가냐?”

“네, 네. 알아 모시겠습니다.”

“야! 너 똑바로 안해?”

“아니야- 이것 봐라, 나 손 놨다? 핸들 놨어!”

“야!”

***

사라졌다. 따듯하고 그리운 공기가 머물 던 오래 전 고물차의 덜컹거림과 함께, 방금 전까

지 낮은 허밍 음을 내며 세상모르고 누워있던 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당연한 일이다. 그

는 망상이니까. 살아있는 생물체도, 그렇다고 뚜렷한 이유도 없는 병적 환영, 내가 만들어

내고, 쇠약해진 내 신경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거짓에 불과하니까. 벌써 한참 세월이 흘러

버린 그와의 여행을 다시 떠올리자니 또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이 안 난다기 보다, 너무

오래 전 일이고 그 뒤로 만났던 남자들이 많아 그를 기억할 필요성을 잃은 기억 세포가 알

아서 잔해들을 폐기 처분해 버렸다..

어쩌면 난 다른 사람들보다 한 단계 더 진화 된 인간일지도 모른다. 어찌나 세포 하나하나

의 역할 수행이 능동적인지, 기억해서 귀찮을 것 같은 것들을 재주껏 골라내어 갯벌에서 조

개 뽑듯 쏙쏙 뽑아서 지워주는 지도 모르겠다. 밀물이 왔다 가면 다시 전처럼 메워질 갯벌

처럼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게 말이다. 다시 가득 찬 그 땅에선 또 다시 작은

생물들이 뽑혀져 나온다. 그렇게 갯벌은 그 자리에 천년만년 존재할 것 같다. 언제 건 과거

들이 쏙쏙 뽑혀져 나간다 해도 나는 괜찮다. 태초의 그 땅처럼 그렇게 잘 살아갈 수 있을

테니. 방금 비어 버린 그 구멍은 곧 짜디 짠 바닷물과 멀건 진흙탕이 채워 질 것이다. 머지

않아, 새 땅이 되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잘 메워 진 맨들 맨들 한 표면만이 남겨 질 테니 나

는 정말로 괜찮다.

이 타임에서 되물어 줘야 하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불안하다. 역시 사람은 간사한

존재라 변덕에 욕심을 부리나 보다.

‘어서 정말 그렇게 되어도 괜찮냐고 반문해 줘.’

뒤통수가 뚫릴 것처럼 뻐근하고 당겨온다. 말을 건네고 싶지만 소용없는 일임을 알고 있

다. 돌아보고 싶지 않다. 돌아보는 순간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것을 알기에 앞만

보고 걸어간다. 잠시도 고개 돌리지 않고 주차장을 벗어나 작은 엘리베이터에 기댄 채 꼭대

기 층의 문을 열고 주저앉는다.

그대로 일어나 똑바로 침대로 걸어가 벽을 보고 잠들면 그만이다.

그래, 그는 저기 있는 거야.

그 곳에 그가 있으니 나는 안심하고 잠들 수 있다.

청순 가련 K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공기는 개별적이고 특별해서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불투명한 경계

를 가지고 있다. 나는 늘 타인의 경계에 스며들어 보드라운 사람의 속살과 함께 호흡하고

잠시 머물다가 지쳐서 내쳐지곤 한다. 끈적끈적한 점막이 온 몸에 휘감긴 채로, 탈수 한 채

로 도망 나와 한참을 자다 깨면 언제 그랬냐는 듯 바싹 마르고 건조한 내 몸뚱아리만이 남

겨져 있었다.

어떤 이가 지나치던 곳에는 그 사람의 느낌과 흔적이 남은 공기들이 머무는 것만 같다. 아

주 느리게 기어 간 달팽이의 지문처럼 나에게는 늘 타인의 공기가 희미하게 머물곤 한다.

문을 여는 소리조차 도도하고 당당한 이 여배우는 너무 예뻐서 이웃나라와 모국마저 전쟁

에 불타 사라지게 했다는 전설 속의 막내 공주 같았다. 부점1)같은 짧은 노크 뒤로 타고난

여배우가 숨어 들어온다.

반짝 스타라고 정의하기에는 꽤나 기품 있고, 도도한 그녀는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혼수

의 3대 광고를 다 접수한 올해의 스타였다. 어떤 채널을 돌려도 그녀가 안 나오는 순간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의 인기 여배우이기도 한 그녀는 요즘 내 오피스를 밤낮 구분 없이

들락거리는 내 환자 중 한 명으로 L선배의 출근과 퇴근 시간을 쥐락펴락 하고 있었다.

“서 휜씨”

나는 내 이름을 연달아 부르는 걸 싫어했다. 왠지 야구에서 연달아 홈런 맞은 투수의 기분

이 드는 외자 이름을 부르는 금지령은, 사실상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로는 폐지되었다고 보

면 되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누가 회사에서 선배와 사장에게, 제 이름을 부를 때에는

부드럽게 2초 이상 텀을 두고 띄운 뒤에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부르세요. 라고 명령할 수

있을까?

“서 휜씨!”

계속 다른 곳으로만 달려가던 내 정신이 앙칼지게 공기를 찔러 가르는 그 목소리에 퍼뜩

제자리를 찾는다.

“계속 말씀하세요.”

“죽을 것 같아요.”

“…….”

“제발요. 죽을 것 같다고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에 하나는 내 고객들, 환자라고 부르기에는 정상적인 그들이

나를 힘들게 할 것이라는 단순한 짐작이다. 사실 내 고객들은 착하고 지극히 정상적이다.

학교 다닐 때 종 종 볼 수 있던 정 많고, 단순한 어린 친구들. 내 고객들은 하나 같이 그런

사람들이다. 순수하다기 보다는 순진한 쪽에 가까워서 조금은 바보 같기도 하고, 가지고만

살아와서 단순히 잃는 다는 사실 자체에 커다란 반감을 가지고 있는 그런 자연 그대로의 인

간형 말이다.

“분명 날 사랑한다는 눈빛이었어요. 근데 시즌이 끝나자마자 가버렸어요. 어떻게, 어떻게

그럴 수… ….”

이 도도한 여배우를 말도 못 이을 정도로 오열하게 만든 남자는 조각 같은 러브신의 상대

배우도, 잘나가는 드라마 감독도 아닌 아르바이트 마이크 맨 이었다. 고작 연예인 좀 보겠

1) 붓점. 피아노의 한 기법으로 음표나 쉼표의 오른쪽에 찍어서 원래 길이의 반만큼의 길이를 더한다는 것을 표

시하는 점

다고 지방대 방송학과를 졸업한 채로 마이크 맨 아르바이트에 뛰어들었단다. 뽑힌 이유는

단 하나. 팔 힘이 좋고, 기기가 부러졌을 때 조립을 잘한다는 이유였고, 그 보잘 것 없는

장점에 이 아름다운 여배우가 이리저리 휘둘리는 꼴을 걸 몇 시간째 듣고 있다 보면 누구라

도 여자의 나약함에 혀를 휘두르게 된다. 잊고 있었던 사랑이라는 흔해 빠진 감정에 대한

염증, 짜증이 기어 올라와 성가시게 목덜미를 간질인다.

‘현대’라는 이름을 가진 엄청난 어드벤테이지가 ‘현대’인에서 막상 선물한 것은 편리도 현

명함도 아닌 정신병이었다. 이 여배우는 한 회당 오천을 웃도는 몸값과 3개월 뒤 면 부끄러

워 질 기억을 맞바꾸려는 것이다. 누가 봐도 손해 보는 장사를 하려 뛰어 들고 있는 철없는

내 고객을 위해 나는 말 할 수밖에 없었다.

“정신 차려요.”

학교 다닐 때 그 정 많고 착한 친구들이 화가 나면 어떻게 되는 지를 깜빡해버렸다. 그렇

게 많이 당하고도 말이다.

*

“서 선생! K한테 찍혔다며?”

“네?”

“지금 G본부에 소문 쫘악 퍼졌어. K가 서 선생 섭외하는 아침방송이고 교양프로고 자기네

기획사 애들은 절대 못나가게 할거라고.”

“뭐라구요?”

“K, 걔 요즘 그 집 사장이랑 눈 맞아서 기획사를 들어다 놨다하는 거 몰라, 알아?”

“거기에 대한 죄책감과 자기 합리화를 3시간 동안 누가 들었는데, 그걸 제가 왜 몰라요?”

“아는 사람이 그래? 아무튼 K 불러서 어르든지 달래든지 알아서해! 서 선생 그거 잘하잖

아. 세 살 다두 듯 오냐오냐 눈물 쏙 빼 놓는 거. 어린 시절을 찌르던가, 꿈 해몽을 해 주

던가 어서 해결하란 말이야!”

“시끄러워요!”

“얼씨구 그렇게 소리 질렀으니까 지금 이 난리가 나지!”

“선배! 지금 불난 집에”

.부채질 하지?.

대화를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처음 이 일을 시작했

을 때 내 고객 중에 공기랑 이야기 하는 사람이 있었다. 난 그에게 공황 분노를 못 이겨 얻

은 환각을 동반한다는 소견서를 써 줌으로써 그가 상상하는 공기의 지배자로부터 자유롭게

해 주었다. 공황 분노라는 단어를 찾아 낸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말이다. 갈 곳 잃은

분노를 모아 터뜨리는 평범한 샐러리맨을 위로한 것은 금방 잊어버렸지만, 날 때부터 가지

고 온 아버지의 재력을 공기처럼 편안하게 생각하면서 결국은 벗어나고 싶어 했던 가진 집

자식의 철없는 투정은 기억한다.

1시간째 옥상의 파란하늘, 빨간 파라솔, 선명하게 대비되는 색의 배합 아래에서 이 환영과

마주하고 있지만 내 기분에 맞춰 오묘한 표정만 지을 뿐 조금도 협조해 줄 생각이 없나보

다.

“내가 무슨 말을 하겠니.”

오래 전 이후로 핀 적이 없는 담배까지 물고 있는 나를 죽일 듯 노려보고 있는 이 환영은

핏기를 쏙 뺀 후 눈가를 따라 요즘 아이돌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두꺼운 스모키 라인을 그려

주면 딱 저승사자처럼 보일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숨과 함께 체념을 날려 버리며 일어서는

순간이었다.

‘다시는 안 물기로 했잖아.’

“뭐?”

‘너, 다시는 그 거, 안 문다고 했잖아.’

“뭘 물어?”

‘그거-’

순간 컥 하는 기침과 함께 내 입에서 터져 나온 담배연기가 유난히 맑은 하늘로 흩뿌려진

다.

구름인지 담배향기인지, 그것과 함께 사라지다.

동물 보감

정신병원의 오후는 의외로 고요하다.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은 숨도 못 쉬게 바빠서 앞 환자

와 증상이 헷갈리기도 하고 가끔은 시간이 아쉽기까지 하다. 사람의 상상력과 해석 능력은

굉장히 흥미로운 것이라 가끔 그들이 처한 상황과 증상, 증언을 듣다보면 어릴 적에 진짜

같은 전설을 듣는 것처럼 몰입하기도 한다.

“서 선생.”

오후의 나른함을 단번에 방해하는 사람은 한 명뿐이다.

“서 선생. 헤드가 또 자네만 잘 봐 주는데 나는 어쩌나.”

L선배는 나무늘보다. 아니 가재 같기도 하고, 나무늘보 같기도 하다. 두 글자짜리 외자 이

름에서 굳이 성만 따서 선생까지 붙여 주는 호칭도 헤드라는 CEO에나 어울리는 단어를 의

사에게 갖다 붙이는 방식도 그만의 ‘것’이다.

“아쉬우면 선배도 비싼 고객 ‘런칭’ 좀 해 보세요.”

“왜 연예인들은 서선생만 좋아하는 걸까? 나도 입 무거운 남자인데 말이야.”

“병아리와 하이에나가 덤비는 걸 보니 그들 눈에 저는 닭인가 보죠.”

“병아리? 하이에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지나친 비약일까? 날 찾는 사람들은 어미를 찾는 짐승의 본능과 먹잇감을 찾는 만물의 본

능을 가진 두 종류뿐이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들어주고 대답해 줄 사람이 없는

연약한 이들과 분노를 풀어 낼 잡아 놓은 먹잇감 같은 대상을 찾는 자들. 병아리와 하이에

나가 함께 원하는 동물이라곤 닭밖에 더 있을까. 게다가 잘나가는 의사라면서 과거를 잃어

버리는 속도는 최고속인걸 보면 난 닭대가리라는 말과 그리 멀지 않은 사람일 지도 모른다.

“그런 게 있어요. 선배는 육지가 좋아요? 물속이 좋아요?”

“그건 또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그냥 질문. 어디가 편해요? 물 안에 있을 때랑 걸어 다닐 때랑.”

“흐음.”

의외로 질문에 진지하게 응해주는 L선배가 우습다. 그는 이런 농담이 먹혀서 좋다.

“수영할 때 가끔 그런 기분이 들더라. 내가 정말 살아있는 것 같다는 기분. 내가 물에서

나온 생명이 맞긴 하구나 그런 느낌. 엄마 뱃속이던지 태초의 바다이라고 해도 되나, 아무

튼 물속은 좋아.”

‘그럼 가재인가?’

“그렇지만 그래도 숨도 쉬어야 하고, 밥도 먹고 걸어도 다니고, 여자도 만나야 하니깐. 느

긋하게 쉬기에는 아무래도 육지가 좋은 건가.”

‘그럼 나무늘보?’

L선배는 생각보다 오래 고민한다. 도대체 왜 이런 질문에 저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는지 질

문을 한 나조차도 의문인데, 저 사람은 언제나 쓸데없는 일에 조차 진지하고 심각하다.

“두 개 다 좋은데, 그건 안 돼?”

“그럼, 거북이내요.”

나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이토록 완벽한 답을 찾아내다니, 스스로 이렇게 대견 한 적이

요 최근엔 없었던 것 같다. 도대체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한 L선배의 얼굴 위로 내 얼굴

이 겹쳐진다.

***

“너는 고양이 과일거야. 분명히.”

“알아. 자주 들어서 뻔하다. 어떤 고양이? 제일 예쁜 거로 붙여 봐봐.”

“고양이는 무슨 고양이. 그 ‘과’일 뿐이지 넌 고양이는 못 돼. 너는 단독 사냥을 하고 혼자

서 평생 고독히 죽어가는 육식 동물이지.”

그는 늘 이런 식이었다. 남은 바빠 죽겠다는 표정으로 논문이나 시험 따위에 집중하고 있

으면 혼자 다른 별에 다녀왔다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면서 말도 안 되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툭 툭 던지곤 했다. 했었던 것 같다.

“이기적이고 도도하고, 어느 순간 정감가고 그런 말 할 것 아니야? 그건 예과 때 작업 걸

던 놈들이 많이 한 대사인데. 육식동물이라니 나 채식주의자야. 왜이래?”

“호랑이치고는 좀 작지? 사자는 무리 생활을 하니까 안 되고, 치타를 하느냐, 표범을 하느

냐 그게 문제로다. 내가 저기 뛰고 있을게. 숨었다가 나 좀 덮쳐 봐. 비교 좀 해 보게.”

새벽 4시의 텅 빈 도서관 책장 사이를 뛰어다니며 한껏 들떠있던 그는, 그 날 그 해의 젊

은 사진 작가상 최종 후보에 올라있었다. 자기만을 위해서 사진을 찍는다던 그였지만 아직

젊고 얄팍한 세월의 소유자였기에 내심 들떠있었다. 그는 젊었다. 아니, 우리는 젊고 얇고

미숙하고, 미완성이었다.

다시 한참을 책에 집중했을까. 잠시 사라졌던 그가 먼지가 잔뜩 낀 동물 보감을 들고 와서

내 앞에 펼쳤다. 무겁고 두툼한 책 그 아래 깊숙한 곳에 진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넌 코알라야. 코알라는 유칼립투스가 없으면 포악하고 빨라져서 주변을 다 부숴버린데.

그들은 자신이 아닌 타인을 위해서 유칼립투스 나무에만 붙어 있는 거지.”

“그래서?”

“넌 내가 없으면 주변은 물론이고 너 스스로도 부숴버릴 것 같다. 그래서 내가 있는 거지.

하하.”

좀처럼 소리 내어 웃는 일이 없는 그가 짧고 강하게 웃었다. 그가 왜 자주 웃지 않는지 알

것 같다. 너무 큰 울림이 내 가슴에 와 닿아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아주 기

쁘고, 정말 기쁘고, 너무 기뻐서 달리 표현 할 수 없는 웃음이 나를 울린다.

“당신은 늑대 개야. 눈은 온순한데 결코 길들일 수 없는 야생의 강아지.”

“그럼 난 개새끼 ‘님’인 거야?”

“님?”

“하하”

울림이 크고, 아주 단순한 웃음을 가졌던 그 앞에 나는 늘 알 것도 같다는 표정으로 응했

던 것도 같다.

***

“참고로 헤드는 자이언트 도마뱀이에요.”

“호주에 사는 큰 이구아나?”

“뭐든지.”

“과연, 그럴지도.”

짧은 시간동안 나에게 동화 된 L선배가 우습다.

며칠 뒤 대단한 것을 알았다는 듯이 나에게 말했다.

“내가 어떤 책에서 봤는데 개는 딱 두 종류가 있데. 전생에 사람이었던 개와 그 전에도 개

였던 개. 그러니까 어쩌면 서 선생 이론이 진짜 일지도 몰라.”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내 굳은 얼굴 앞에서도 L선배는 잘도 떠든다.

“그러니까 나는 전생에 거북이. 헤드는 전생에 자인언트 빅 도마뱀, 그리고 서 선생은?”

나는 잠시 쉬고 응답했다.

“저는 코알라요.”

혼자만의 소야곡

혼자가 싫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날은 많지 않은데, 결국 그 날이 오고야 말았다.

조금은 외롭다. 새삼스럽게 작게 중얼거린다.

조용한 방도, 한가로운 시간도 평화로운 공기도 무료한 음악도 즐겁지 않은 날은 잔뜩 웅

크리고 있는 수밖에 없다.

어렸을 때는 나만의 방법이라 생각했는데 자신의 몸을 웅크린 채로 하루를 보내는 사람들

이 생각 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가락 하나 까닥하는 것조차 버거워서 물도 마시

지 않고 습한 공기의 보푸라기가 쏟아져 나오는 가습기 근처에 앉아 아직 변태가 덜 된 수

중 생물 마냥 소파 사이에 몸을 쑤셔 넣고는 흐린 주말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내 몸과 부

대끼는 가죽소파가 내는 이질적인 소리조차 몽롱하게 들리는 오후의 침묵은 나를 무섭게 한

다.

나는 이제 어리지 않다. 그렇다고 아주 많은 나이도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젊지 않다는 것

이다. 내가 조금만 허술하게 변하면 주변 사람들은 나를 약 잡아 보고 빈틈을 노리게 될 지

도 모른다. 내가 조금만 광택을 잃어 가면 사람들은 나를 손가락질 할 지도 모른다. 순간

두려움이 엄습해 온다. 나는 어쩌면 고양이를 많이 키우는 늙은 노파가 될 지도 모른다. 내

고양이들은 나와 닮아 있어 소라 마냥 몸을 말고 함께 죽음을 향해서 달려갈 것만 같다. 누

구 하나 경계를 침범하지 않은 채. 죽음과 삶, 젊음과 세월 사이의 뿌연 경계에서 줄타기를

하듯, 마치 나를 약 올리기라도 하는 듯, 갈라진 두 영역을 땅따먹기 삼아 양 발을 깡총거

리며 계속해서 나를 옥죄어 올 것 같다.

내가 조금만 더 어렸다면, 아니 말을 정정하기로 했다. 내가 지금 이 전의 나였다면 나는

어렵지 않게 사람을 찾고, 부르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며 때론 눈으로 때론 몸으로 외롭

다는 말을 외쳤을 텐데 순간 그 조차 할 수 없는 시간이 온 것만 같다. 아니 그 ‘때’가 온

것만 같아서 더 무서워졌다.

이 집에는 나 말고는 폐가 있는 존재가 없다. 산소를 갈망하는 원초적인 것을 가진 ‘존재’

가 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집의 모든 숨은 내 것인데, 나는 기쁘지 않다. 나는 내 숨을

나눠주고 싶은 것일까. 몇 일전 내버리듯 던져 놓은 담배곽이 보인다. 몸을 구부려 손을 뻗

기만 하면 닿는 거리에 아슬아슬 머물고 있다. 어차피 남아도는 숨이라면 안타까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은 채 태워버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손을 뻗는다. 만만하게 본 거리가 아니었

는지 녹은 마쉬멜로우처럼 뽑혀져 나오는 내 팔 끝, 하얗고 윤기 흐르는 내 손 위로 그의

손이 겹쳐진다.

‘이런 건 정말 싫다고 했다.’

***

“넌 정말 우스워. 세상에서 제일 삐뚤어 진 주제에 금연자라니 말이 돼? 남자주제에.”

“남자가 왜? 이유가 없잖아. 필 명분이 없단 말이다.”

“별 걸 다 찾네.”

“너는 왜 피게 됐는데?”

“뭐?”

“계기가 있을 것 아니야. 너는 날 때부터 담배 한 개비 들고 삐딱하게 제가 좀 늦었죠? 이

러면서 나왔냐?”

“그냥 피게 됐어. 계기가 어딨어?”

“그러니까 언제? 설마 너 고딩 때부터 담배 하나 쥐고 양아치 꼬락서니 하고 학교 다닌

거냐?”

“그랬으면 어쩔 건데?”

“난 일찍 늙고, 애 못 낳는 신부 필요 없다.”

“뭐?”

“기형아 낳을 수도 있고 한 열배는 빨리 늙고, 나보다 일찍 죽을 거 아냐.”

“그럼 내가 너 죽고 뒤처리 다 하고 따라가니? 정말 웃긴다? 나는 너보다 무조건 일찍 죽

을 거야. 하나님이 양 팔에 우리 심장 하나씩 얹은 저울을 들고 나한테 죽을래, 아니면 널

죽일래, 그러면 난 절대로 내가 먼저 죽을 거라니까.”

우리는 늘 쓸데없는 일로 싸웠었다.

“나보다 네가 더 웃긴다?”

“뭐가?”

“물었잖아. 내가. 왜 대답을 안 해?”

그가 나에게 붙인 퀘스쳔마크(Question Ma가)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내가 담배를 피게 된

이유? 갑작스런 프로포즈? 그는 영리한 산 짐승 같아서 절대 먼저 카드를 보여주는 법이

없다.

“언제인지는 잘 기억 안 나지만 이유는 기억나.”

“뭔데?”

“담배 피는 내 모습이 너무 섹시해서. 내 입술 사이로 비집고 나오는 연기가 시야를 가리

고 공기를 바꾸는데 정말 죽이게 섹시하더라.”

사실이었지만 왠지 쑥스러웠다. 자아도취 때문에 습관이 된 흡연만큼 부끄러운 것도 없다

는 것은 나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반대였다. 나는 나를 망가뜨리고 싶어서, 엉망으로 만들

고 싶었다.

“그 퇴폐적인 이유를 말하면서 그렇게 장난스럽게 웃다니. 넌 정말 좋은 모델이야.”

그가 나에게 모델이라는 단어를 쓸 때는 언제나 그 단어에 힘이 들어간다. 마치 그 존재와

나는 완전히 하나라는 듯이, 한 번 더 확인하듯이 힘을 주어 발음하는 그 외래어는 언제나

나를 기쁘게 한다. 나를 기고만장하게 한다. 가장 사랑받고 빛나는 존재라는 것을 증명 받

아서 세상에서 제일 기쁜 듯이 한 번 더 웃어 보인다. 조금 더 바보같이 아무 것도 모른다

는 표정으로 그에게 웃음을 준다.

내 웃음과 함께 그의 셔터 소리가 울린다. 그의 카메라에는 비밀 장치가 달렸다. 그의 셔

터 소리는 심장 고동 보다 더 생생하고 크게 주변을 울리면 살아 있음을 주장한다.

“이 정도면 만족스럽지 않아?”

암실에서 갓 꺼내 온 핏덩이 같은 사진 속의 내 모습은 늘 그렇듯 표정이 불분명하다. 울

고 있는 것도 같고, 웃고 있는 것도 같고, 역광의 조명의 사진 위로 연기가 내 시야를 가려

버려 내 표정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 첫 비행에서 느낀 내 다른 모습은 내가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건 내가 아니라 담배 연기의 아름다움이었을까. 나를 타락시켜주

는, 변하게 하는 그 무언가를 향한 갈망. 괜히 시시해졌다. 내가 아닌 것들의 아름다움은

싫다. 소용없다.

“아- 시시해졌어.”

“그렇지?”

“어- 내가 아니네. 이 섹시함의 본질은 내가 아니었구나. 때려 칠까. 재미없어.”

그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는다.

“좋아? 그래도 나 꽤 오래 된 누적 흡연자였다고. 이미 오염 된 몸인데?”

“상관없어.”

“왠지 조금도 아쉽지 않네.”

그를 한국 금연 대사? 이런 진부한 이름을 가진 공익광고 협의회에 소개시켜 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일어선다.

“대답해야지?”

벌써 조금 멀어진 나에게 그가 나직하게 다시 한 번 요구한다. 이상하게 그의 목소리는 크

지도 높지도 않은데 어디서든 나를 부른다.

“그렇게 일찍은 아니고, 스무 살 즈음이었던 것 같아.”

“그 좋고 마음 편한 시절에 왜? 의대 들어간 게 불만이었어?”

“아니. 이십년 동안 똑같이 예쁜 내 모습에 싫증나서. 거울 속에 내가 똑같이 생겼잖아.

그 느낌이 지루해서 조금 변해보고 싶었나봐. 말해 놓고 보니 정말 철없다. 대답했으니까

갈게.”

왜 그랬을까. 난 처음으로 내가 도망치고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상하게, 정말 이상하게.

이제는 들리지도 않게 멀어졌는데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 대답이 아닐 텐데.”

나는 왜 도망쳤을까. 무엇 때문에.

***

가슴께를 끌어안은 나의 팔로 내 심장 고동과 고른 숨소리가 전해온다. 오르락내리락 하는

나의 생명을 나눠주고 싶다. 적어도 나 혼자인 시간이 줄어들게 시끄러움과 혼돈 속에서 부

대끼며 내가 더 괴로워 할 수 있게, 자꾸만 나의 삶을 내던지고 싶다. 흐린 날의 어둠이 다

가오고 있다. 세상을 지배하는 오만한 태양조차도 잠시 자신의 자리를 놓고 돌아가는 시간.

인상파 화가의 그림처럼 뿌옇고 연보랏빛으로 흐트러진 무방비한 하늘 끝자락에 쌔 빨간 핏

덩이가 자꾸만 손짓하듯 사라지려 하고 있다. 눈물은 나지 않는다. 고작 이정도의 감동으로

는 지쳐버린 내 눈물샘을 열게 할 수 없다. 아주 천천히 조바심 나게 사라지던 태양이 결국

은 얄궂은 꼬리를 감추며 사라짐과 동시에 나는 어둠을 보았다. 어둠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순간. 나는 그 순간을 껴안게 되었다.

이제는 두려움 따위는 없다. 작게 나를 위로한다. 못생긴 발끝을 방금 떠나간 나의 태양에

게 인사하듯 두어 번 까닥거리고는 놀고 있는 왼손으로 나를 감싸 앉고 토닥거린다.

그래, 나는 아직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것이 있을 뿐이야.

모든 걸 다 아는 나이란 건 생각보다 천천히 오는 중이다. 아직 우리에게는 여유가 있다.

어린 왕자 B

눈을 뜨니 멀건 천장이 내려앉아 인디아나 존스의 한 장면처럼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노련하게 이건 꿈일 것이라고 세 번쯤 되뇌자 겨우 현실의 눈이 뜨인다.

-서휜! 너 오늘 바람둥이랑 약속 10신가 알아 몰라? 걔 30분 전부터 와서 선글라스 낀 채

로 발만 까닥거리고 있어. 까닥 거릴 때 마다 재수 없어서 공기가 얼어붙는 것 같다니까.

너 늦게 오면 내가 죽는다. 얼른 오라고. 나 저 자식 꼴도 보기 싫으니까.

자동 응답기가 거짓말처럼 켜지고 오지랖 넓은 L선배의 다급한 목소리가 쏟아졌다. ‘서선

생’이 아닌 ‘서 휜’으로 봐서는 에이급 비상사태로 나는 지금 비싼 환자를 바람 맞출 태세였

다. 예약 진료 시간은 15분 남았고 그래도 오피스엔 꼬박꼬박 제시간에 가는 닥터 서를 기

다리는 그 바람둥이는 몸에 베인 매너를 자랑이라도 하 듯 의사도 여자, 그러므로 30분 전

부터 와서 나를 기다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매너가 안타깝게도 태생이 고귀하고 자기중심

적인 그는 20분 전부터 슬슬 주변에 해로운 오로라를 뿜어냈을 터. L선배의 비명이 서울의

강을 건너 내 침대 머리맡까지 전해져 온다.

“네.”

“B씨? 서 휜 입니다.”

목소리를 가다듬어봤자 방금 깬 것을 광고라도 하는 듯 허스키한 보이스가 쏟아져 나온다.

“네. 지금 오피스 앞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만.”

“지금 출발하는 중이니까 전화로 말씀 시작하시죠?”

“여기서 말입니까?”

“L선생한테 제 오피스 비상키로 열어달라고 하시고 평소처럼 편하게 앉으셔서 말씀하세요.

밟을 수 있는 데로 밟고 있어요. 그리고 귀도 열려 있으니까요. 급한 데로 가야죠, 안 그

래요?"

‘난 죽기 싫은데?’

순간적으로 뒷좌석을 봤지만 그는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따위에 신경 써 줄 수 있는 상

황이 아니다. 전화기 너머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B의 목소리가 내가 달리기 시작한다.

*

“너 운전 못하잖아? 도착 못하고 죽으면 어떻게 해?”

“어서 할 말이나 시작해 봐.”

“너 자다 깬 목소리, 기대보다 더 섹시한 것 같아.”

“환자분. 입 닥치고 빨리 본론이나 말씀하세요.”

“휜이 네 말대로 참아보려고 했어. 이 방 방음 되는 거 맞지?”

*

지난달에 결혼한 탤런트 B를 소개하는 것은 언제나 모호하다. 친구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닌 그런 사이. 사실 처음부터 친구사이는 아니었고 의사와 환자 사이에서 작업남과 타겟

녀, 그리고 포기한 남자와 넘어 가지 않던 여자의 사이를 거쳐 지금은 나름대로 좋은 친구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들어주고 돈 받고, 말하기 위해 지불하는 묘한 거래였지만 그는 군

더더기 없는 나름 괜찮은 우정을 쌓고 있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그가 이미지 관리 없이 입

을 열어도 되는 다섯 손가락 안의 여자가 되었기 때문일까. 엄마, 할머니, 10년 된 코디,

그리고 정신과 상담의 서휜. 그를 만난 후 처음으로 그가 멋있어 보인 것이 하필이면 이 말

을 할 때라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손가락을 꼽아 내려가면서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는

데 그의 얼굴로 누군가가 겹쳐졌다.

그 웃음.

“아내를 처음 봤을 때 웃음을 기억 해 내려고 갖은 수를 다 썼지만 결국 실패야. 이렇게

이혼하려고 결혼한 것은 아닌데.”

B는 잘나가는 여자 연예인이라면 한 번쯤 만나 본 바람둥이였다. 지금은 아니냐고 하면

확실히 그것도 아니다. 휴면 상태? 그냥 쉬고 있는 정도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정직한 평가일

것이다. 한동안 미친 듯이 불을 내 뿜고 주변을 초토화 시킨 후에야 잠시 잠에 든 휴화산이

되었다.

바람둥이들이 갑자기 사랑에 빠지면 얼마나 어린아이가 되는지 그를 보며 깨달았다. 상대

는 조각을 하는 미술학도였고 그는 그녀가 보는 세상의 눈이 되고 싶다고 했다. 그녀처럼

보고 느껴서 그녀의 조각품의 일부가 되어도 좋다고 말하던 그의 눈을 보던 날 나는 결혼을

승낙했다. 그 자신조차도 자신의 과거의 패턴 때문에 못미더워하던 결혼을 허락받으려고 찾

아온 사람은 그의 부모님도 형제도 아닌 나였다. 내 말이 그토록 신뢰받는 다는 것이 한편

으로는 기뻤지만 그래도 한 때, 십일하고도 일곱 시간 동안 사모하던 여자에게 예의는 지키

라는 핀잔을 줬었던 기억이 난다.

“똥! 온통 집을 똥으로 더럽히고 있어!”

“조용히 말해. 아무리 여기 들락거리는 게 자랑스럽다고 해도 그렇지 그렇게 막 뱉을 자리

아니야.”

“그녀가 만드는 점토가 온통 똥처럼 보여.”

연애하던 4개월 동안은 이미 장님 상태였고 결혼하고 3주 동안도 별 일 없더니 결국 한

달이 되기 전에 이 방 문을 두드린 것이다.

“내가 말했지. 난 이혼 전문 변호사가 아니야.”

“내 정신 상태를 고쳐 줄 수는 있잖아.”

“고쳐주는 게 아니라 들어 주는 거야. 내가 그런 능력 있었음 아직까지 여기에 있게, 담

배?”

“너 담배 폈었어?”

“그럴 일이 있어. 창문가에 가서 펴. 여기 NO SMOKING 구역이야. 청정기도 틀고.”

“아침마다 눈뜨면 괴로워. 내 옆에 누워 있잖아. 밤에 돌아갈 때도 괴로워. 날 기다리고

있으니까. 밤 세도록 촬영만 있었으면 좋겠어.”

결국 바람둥이들의 문제는 애정결핍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엄마에게 투정부

리는 막내아들 같은 말투로 대책 없는 고민을 털어놓을까.

“결국 누구를 만나도 결국 똑같을 거야. 어차피 까짓것이라면 지금 조금 참아본다고 생각

해.”

“또 이 꼴이 또 나더라도 다른 사람이랑 또 그러는 게 백 번 나을 것 같아.”

“그 때도 또 이혼해.”

쌍디귿의 ‘또’에 자꾸만 악센트를 주던 그가 내 단호한 대답에 오히려 도리어 놀란 듯 입

을 다문다.

“같이 있기 싫다며? 그럼 헤어져. 별거라도 해. 그게 네 방식 아니야?”

“틀려.”

“지금 너는 아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네 과거를 바꾸고 싶을 뿐이잖아. 너한테 도전하는데

왜 애꿎은 네 아내를 잡고 있어야 되니? 우리 좀 객관적으로 문제를 열어보고 살자. 뭐가

마음에 안 들었는데? 요리? 잠버릇? 생리현상? 아니면 속궁합?”

이렇게 배짱 좋은 상담의도 몇 없을 것 같다. 돈 받고 이야기 들어 주는 주제에 한껏 짜증

이 들어 찬 목소리로 B를 몰아붙인다.

“나는 다만, 나는, 그녀를 닮은 아들이 생기는 게 싫어.”

상처 받은 꼬마가 입을 연다. 선생님에게 다그침을 당한 꼬마는 울상을 띄다가, 띄엄띄엄

아직까지도 말할 용기가 없다는 듯이 그렇게 진실을 밝힌다.

“나는 아직 나를 닮은 아이를 보고 싶지 않아. 나 자신도 벅차서 누군가의 부모가 될 준비

가 되지 않았어. 그건 내가 알아. 그런데 그녀는 자꾸 아이를 원해. 난 들어 줄 수가 없어.

그런데 자꾸 날 보고 애원해. 나한테 매달려. 그게 너무 괴롭다.”

B의 아내는 사실 고아였다. 언론을 의식한 그는 비밀 결혼식에 가짜 부모를 섭외 한 다음

식을 마쳤다. 가족이 없는 아내는 자신만의 가족을 원하는데 위로 형만 다섯에 사이사이 누

나가 둘 있는 B는 가족이라면 끔찍하고 이제는 자신의 공간을 원하고 있었다.

“우리 집에 가서 형 누나와 함께 지내라고 하면 그것도 싫데. 자신의 것이 아니래. 나만

보면 눈을 똑바로 들고 똥 주무르는 손으로 자기 것을 내놓으라고 소리치고 있어. 미쳐버

릴 것 같아. 자기가 원하는 것을 나한테 자꾸 강요하고 있어. 난 아직 아니야. 미쳐가는

것 같아. 무언의 공기로 아무 것도 말하지 않고 손도 대지 않으면서 온 몸으로 쿠데타라도

일으키는 것 같다니까.”

다 외운 영화 대분만 해도 서른 편이 넘는 B는 그럴싸한 표현으로 자신의 아내에 대한 이

야기를 뱉어낸다.

“무서워서 집에 갈 수가 없어. 문을 여는 순간 공기가 나를 죄여오고, 그녀가 먹이는 음

식, 빨아서 입으라고 내어 놓는 옷. 모든 것이 다 나를 옥죄고 있어서 정말 나 네 병원에

입원하면 안 될까? 날 묶어 놓고 관계라도 가질 기세야. 사실 어제는 묶이다가 깼어. 이건

정말 괴로워, 휜아 나 진심이야.”

“가정 법원에 가봐.”

“그건 죽어도 싫다. 그럼 아내의 개인사부터 내 전적까지 다시 다 공중에 뜨게 되잖아.”

“그렇긴 하겠네. 아내, 지켜주고 싶어?”

“그럴까. 내가 그렇게 착한 놈이었던가.”

“그럴지도?”

한동안 가볍기만 한 침묵이 맴돈다. 주변의 모든 기운을 깃털처럼 걸러내는 능력을 가진

B의 시간의 역습이었다.

“결국 그렇게 된다, 그 정도였다, 라는 말 들어 본 적 있어? 그 말을 견딜 수 없을 것 같

다. 신나서 떠들 거야. 다들 결국 나는 이혼하는 놈이라고.”

“너 언제 그런 거 겁내는 사람이었어?”

내뱉고 있지만 쉽지 않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그는 묘하게 냉정한 대가 있어서 자신의

미래를 누구보다 잘 예측한다.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 말대로 연예계의 생리는 굴러 갈

것이다. 말없이 담배 한 개비를 더 권하고 창문을 더 크게 열어 놓는다.

하늘은 이렇게 맑기만 한데.

떠나면서 그는 웃었다. 어떻게든 참아보겠다는 말을 풀 죽은 강아지처럼 꼬리를 내리고 중

얼거렸다.

“너 K한테 찍혔다며?”

“무슨 말이야?”

“K가 방송국에서 인기 의사선생님 몰아내기 한다고 소문났던데? 걔 독한데 어떻게 하냐?”

“뭘 어떻게 해. 나한테 너 있잖아.”

내 자신만만한 대답에 그가 조금 더 웃어 보인다..

“다음 예약 전에 바빠?”

“왜?”

“밥 먹자. 담배 값 플러스 벌금 값. 건물 내에서 담배 피는 거 걸리면 벌금이 얼마더라?”

유부남이 되던, 아이가 생기든 그의 이런 류의 매력은 영원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

다. 이 사람은 이혼을 해도 크게 어렵지 않게 잘 살 것 같아서 내심 안심도 되었다. 밉지

않은 매력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타고 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나랑 밥 먹다가는 위자료 물 때 후회 할 사진 찍힐 수도 있으니까. 사양할게. 상담 의사

라기 보다는 친구로.”

역시 그럴 줄 알았다 라는 웃음과 함께 뉘적 뉘적 손을 흔들며 매니저를 대동하고 돌아서

는 그의 뒷모습이 낯설지 않다.

뉘적뉘적 한 손 인사. 그리고 체념 하는 듯 한 웃음.

나의 단편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엘리베이터 앞. B가 잊을 뻔 했다는 듯 말한다.

“너 성형외과 의사랑 연애한다더라? 그럼 패키지로 상담이랑 쌍꺼풀이랑 같이 해 주냐고

우리 사장이 묻던데? 의사랑 스캔들은 '처음'일 텐데 잘해봐.”

처음.

의미 없이 B가 던진 그 단어에 묘한 기지감이 서린다.

“처음, 처음, 처어음.”

한 단어만 반복해서 중얼거리다가 홀린 듯 메모지에 짧은 단어를 휘갈긴다.

E.Y.E.G.R.E.N

뜻이 없는 알파벳의 나열. 하지만 익숙한 단어인 듯 손가락 끝에 감기는 펜의 느낌이 좋

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전을 꺼내어 뒤적거려 봐도 얇은 종이 사이로 돌아오는 것은 번

지를 잘 못 찾았다는 비웃음 같은 팔랑거림 뿐 이었다. 영어가 아닐 수도 있다는 노파심에

구글링을 해 댄들 답은 없다. 키보드 하나로 별 걸 다 알아내던 실력이 무색하다. 왜 '처음'

이라는 단어와 함께 저런 알파벳 따위가 떠올랐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결론이 내려지

지 않는다.

“예이그렌-에이그렌. 아이-그렌?”

쭈욱 늘여지는 그 발음이 어쩌면 누군가의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우연이라

고 넘기기에는 익숙하게 떠오르는 그 단어가, 지금까지 내가 ‘처음’이라는 말과 별개로 쓸

수 있었다는 것조차 놀랍게 만든다.

“서 선생. 3시에 예약 환자 있는데.”

“아무튼 선배 생각 맥 끊는 거는 알아줘야 된다니까.”

“응? 왜? 뭐 하고 있었어? B가 뭐랬어? 그 새끼가 뭐래!!”

L선배가 필요 이상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Useless over reaction.

과대 행동 장애를 가진 환자들이 오면 이 건물의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은 알아보기도 힘

든 필기체로 길게 갈긴다. 의사들 사이에서도 묘한 유행이라는 것이 있어서 몇 층의 누가

어느 회사의 만연필을 쓰고 난 후로 예약이 꽉 차기 시작했다고 하면 유치하게도 몇 주 동

안은 너도 나도 그 펜으로 필기체를 써 대는 것이었다.

“정말 고백이라도 받은 거야! 서 휜! 정신 차려!”

병을 선고하는 자들이 스스로 가장 천대하는 행동을 하루에도 백 번은 취하는 L선배 덕분

에 나는 참…웃기다. 내뱉어 지려던 다음 말들이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만다. 더 이상을 기대

하게도 이끌어내게도 하지 않는 그는 어쩌면 가장 담백한 인간일지도 모른다. L선배는 단편

적인 문장의 사람이다. 웃기다. 우습다. 재밌다. 가끔은

“… …멋진가?”

“네?”

“그러니까 B가 네 눈에도 멋있냐고.”

“글쎄요.”

왠지 생각을 읽힌 듯이 적절한 타이밍에 넋이 나가 있는 나에게 L선배가 진지하게 말을

잇는다.

“결혼했다고 해도 어쨌거나 장난 아닌 스캔들 폭주자잖아. 혹시나 하고 말이야.”

역시나 웃기다.

“그래도 너 지금 만나는 사람도 있고”

“…너?”

“그러니까 서 선생 말이야. 졸업 전엔 너, 야 했으면서 어색하게 왜이래?”

졸업 전에 내가 L 선배를 내가 알았던가?

묘하게 얼굴을 쳐다보는 내가 이상했는데 L선배는 조금 부끄러워도 하는 것도 같다. 보통

때라면 어울리지 않는 저런 순진한 표정이 우스웠겠지만 지금은 단지, 단지 무섭다.

“아무튼 연예인, 성형외과, 우리. 상관없어 보여도 이 바닥 좁아. 서 선생은 사람 머리 통

속은 잘 알면서 제일 뻔한 걸 모른다니까 그럼 이따 저녁에 보자고.”

저녁, 저녁은 또 무슨 말이야?

“서 선생 지금 상담 들어가니까 저녁 타임에 보자는 거야. 아까 슬쩍 보니까 부잣집 딸내

미 같던데 3시간은 자기 귀걸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울걸?”

찡긋 하는 그의 표정조차 일그러진다.

만나는 사람? 또 그건 누구였던가.

예전에도 그랬지만 사람들은 내가 모르는 나의 일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다. 내가 모르는

내가 만나는 사람. 이번엔 누굴까.

EYEGREN.

셜록 홈즈가 된 척 의미 없는 알파벳 나열을 가지고 백날 고민해 봤자 답이 나올 리 없다

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단순함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어지러운 날에는 생각이 많아질수록 모

든 일이 꼬이기 마련이다. 단숨에 머리를 비워버린다. 아직 준비가 덜 된 내 앞으로 화려한

옷차림에 혼혈 인형 같은 여자아이가 성큼 성큼 들어와 털썩 앉는다. 어린 티를 벗지 못한

그녀의 눈동자가 위험경보를 울린다. 아이의 눈동자가 초록으로 보인다. 뒤통수를 갉아먹는

듯 한 통증이 스치고 지나간다.

“선생님! 이런 식이시면 저 상담비 안 내요! 선생님이 강남 바닥에서 제일 유명하다고해서

아빠 졸라서 온 거란 말이에요.”

여유가 없는 날에는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다는 것 자체가 버거운 일이 되었다.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내 컨디션은 늘 최고였는데 언제부터인가 단순히 귀를 기울인다는 행위 자체가

필요로 하는 에너지가 엄청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확실히 오늘은 넋이 나가있긴 했나

보다. 그보다 이 꼬마 꽤 날카롭다. 내가 멍하게 있는 표정과 심각한 표정을 구별해 내는

사람은 실로 오랜만이다.

“B도 여기오고 K도 여기 온다고 해서 혹시나 하고 왔는데 허탕만 쳤잖아요.”

“B는 오전 타임에 왔다갔어요.”

“정말? 아, 아깝다.”

.제일 까다로운 것 같지만 은근히 쉬운 여자라니까 서휜.

“정말 B가 후광이 있어요? 그 사람 10미터 앞부터 후광이 완전 장난 아니라던데.”

.넌 표정이 아니라 오로라로 말하지. 지금은 완전 어둡구나, 잘못 건드리면 폭발하겠다.

.

“아무튼 그래서 그 기집애들이 내가 지들하고 놀아준다고 같은 줄 안다니까요. 진짜 누군

레벨 낮출 일 있나.”

콧소리가 몸에 벤 듯한, 영락없이 요즘 아이 같은 아가씨가 떠들어 대는 목소리 사이로 얼

핏 얼핏 그가 스쳐 지나간다.

“아버지한테 말은 해 봤니?”

“네? 뭐요?”

“그보다, 말 놔도 되지? 원래는 고객한테 반말 쓰면 안 되긴 한데.”

“네. 저야 편하고 뭐 좋죠. 근데 선생님 되게 냉정한 사람이라더니 은근히 사람 냄새 나내

요. 맘에 들어요.”

“남 일 같지 않아서.”

“네?”

“그냥. 필사적으로 무언가 버티려고 하는 게 보여서. 방법이 다를 뿐이지, 울고 싶을 때

대처 하는 방법이 비슷하다고 해야 하나. 울지 않기 위해서 버티고 있는 거잖아, 지금.”

오늘도 한 명, 울려버렸다.

“서 선생은 참 신기하다니까.”

“뭐가요?”

“기본적으로 참 냉정하고 차가운 사람인데 어떻게 고객들을 그렇게 잘 울려?”

“저도 참 신기하내요.”

“이것 봐.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게 생겨 먹어가지고는 그 아가씨 아버지 몰라도 되게

유명한 사람인 것 같은데 좋겠네?”

L선배는 이럴 때 능글맞다. 능글맞고 부산스럽다.

“먼저 퇴근한다. 서 선생은 데이트 있을 지도 모르니까.”

“데이트는 무슨. 아까부터 마음대로 남 스캔들 만들지 말아요.”

“그래? 그럼 좋은 거고. 참, 초밥 포장 해 뒀으니까 들고 가.”

“왠 초밥?”

“아침 지각. 점심 상담. 오후 오피스에서 멍 때리기. 방금 퇴근. 먹은 게 있겠어? 어차피

살찐다고 잘 안 먹잖아. 초밥 위에 회만 골라먹어도 되니까 가져가. 휴게실 냉장고 젤 밑

에 칸에 있어. 오이시이데스네- 좋아하지?"

밉살스럽게 일본어를 삐죽삐죽 내 뱉는 L선배가 사라진다.

일그러지던 화사하고 철없던 인형 같은 아이의 얼굴이 기억나서 참기 힘든 기분이 되었다.

울렁거리면서 머리가 지끈거린다. 참기 힘들다. 이런 기분은 나를 자꾸만 나락으로 떨어뜨

린다. 가끔은 겨우 고작 눈물을 터뜨려 준 대가로 돈을 받기가 미안하다. 하지만 곧 담배

연기와 함께 복잡 미묘한 감정이 날아오른다. 바스락거리면서 사그라지는 와사비의 싱그러

운 초록이 안타깝다. 나는 지금 굉장한 것을 놓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으면서도 위

험을 피하려고 하는 본능이 앞선다. 급하게 사무실 전화로 L선배에게 전화를 건다. 너무도

익숙하게 눌러지는 그의 번호가 낯설다.

“선배. 저 서 선생인데요. 운전, 못하겠어요.”

어쩌면 나는 정말로 운전 공포증이 있는 지도 모르겠다. 급히 먹던 초밥을 쓰레기통으로

대충 던져버리곤 건물 앞으로 달려 나간다. 가장 화려 한 도시 속, 빛나고 있는 건물의 그

화려함 속으로 나를 빨아들여 소멸시켜 버릴 것 같은 공포가 나를 엄습하다. 차라리 어둠

속으로 도망가고 싶은 심정이다. 차 문을 열어주는 L선배의 악의 없는 얼굴마저 야릇한 미

소로 무장한 얼어붙은 돌무더기의 석상처럼 느껴진다. 꽁꽁 얼어붙고 굳어버린 수 천 년이

된 누군가의 무덤의 입 꼬리가 올라간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마주한 L선배는 내가 쓰

러졌다고 했다. 내가 다음 날이라고 생각했던 날 아침은 이틀 후였다.

“분명 서 선생 과로야. 스트레스성 피로 누적 과로 상태. 내가 헤드한테 잘 말할 테니까

제발 휴가 좀 내자, 응?”

“선배. 전 멀쩡해요. 그 전 밤 세고 술 마셔서 그렇다니까요.”

“서 선생, 진료 전 날은 하늘이 두 쪽 나도 술 안마시잖아.”

“그럴 일이 있었어요.”

“걱정할까봐 핑계 만드는 거 다 보인다.”

꿰뚫어 보는 척을 하는 L선배가 얄미워서 괜히 신경질을 낸다. 치사하고 날이 선 일그러진

말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렇게 잘 보이는데, 왜 맨날 실적은 나보다 별로에요? 이럴 시간에 상담이나 더 해요.”

기가 질린다는 표정을 지을 줄 알았던 L선배는 조금 나를 동정하고 있는 것도 같다.

“넌 일단 말을 하는 법을 배워야 돼. 그리고 기본 적으로 가드가 너무 세다. 무슨 사람이

싸우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도 아니고.”

“넘겨짚지 말아요.”

“엉뚱한 데서 나사가 풀려버리지. 그거 피곤 한 일이야.”

“……늘 제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해하고 있어요.”

어쩌면 조금 풀이 죽은 목소리처럼 들렸을 내 대답에 L선배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타인이 아니라, 너 자신에게 미안해야지. 말 못해 죽은 귀신? 있어. 한 맺혀 죽은 여자?

있어. 그렇게 하고 싶었던 말을 야금야금 배 속에 담아 두며 살다 보면 너도 모르게 터져

버릴 때가 온다.”

“농담 그만 하세요. 병원 점심시간이 언제부터 이렇게 길었어요?”

“너만 잘나가는 정신과 의사 아니야. 이건 동료로서가 아니라 의사로서 하는 말이다. 넌

지금 뭔가 뱉어 내야 돼.”

너무나 자신 있는 L선배에게 화가 난다. 왠지 모를 분함. 타인에게 허락하지 않은 내 영역

을 읽혀졌다는 수치, 그리고 어떤 반박도 하지 못한 내 자신에 대한 자존심.

“그럼, 그런 선배는 어째서 나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아는데요? 선배도 할 말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요?”

병실 문을 나서는 L선배에 뒤통수에 대고 시퍼렇게 독이 선 목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그가

돌아본다. 데자뷰, 난 늘 누군가의 뒤돌아봄과 그 이상의 것을 받았던 것 같다.

“너 지금도 말을 아끼고 있잖냐. 그냥 널 좋아하느냐고 묻는 게 진짜 아닌가?”

*

“환자분 너무 마르셨어요. 이래서는 헌혈도 못해요. 피 뽑기도 미안해 죽겠네.”

피를 뽑아 주는 간호사가 안쓰럽다는 듯이 말한다. 어느새 살이 빠졌는지 보통보다 팔목

뼈가 조금 더 도드라져 보이기도 하는 것 같다. B가 어제 보낸 꽃바구니를 보고 젊은 간호

사가 꺅꺅 거리는 게 귀여워서 줘버렸더니 그 때부터 간호사들의 호의 짙은 보살핌이 이어

지기 시작했다.

아무리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해도 L선배는 끄덕도 하지 않고 점심 때 마다 와서는 먹을

것을 잔뜩 안겨 늘어놓고 갔다. 하나같이 내가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식당의 음식을 포장

배달하는 선배는 그 날 이후로 말이 부쩍 줄었다. 괜히 할 말이 없어서 퇴원하겠다고 변죽

을 울려보지만 사실상 밤만 되면 열이 오르고 머리가 아파서 혼자 사는 집에 들어가기는 힘

들 것 같았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오랫동안 누워만 지낸 건 정말 오랜만인 것 같았다.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이렇게 누워서 빈둥거리는 시간을 보냈던가. 과거를 생각하려고 하면 어김

없이 열이 오르고 뒤통수가 아프다. 바스락거리는 건조한 병원 시트의 촉감이 자꾸만 나를

나른하게 끌어당긴다.

차라리 여럿이 쓰는 공동 병실에 있을 걸 그랬다. 고요하기만 한 병원의 밤이 자꾸 죄어오

기만 해서 더 지쳐가는 것만 같다. 어느 순간 뺨에 닿은 마른 시트의 촉감이 보드랍게 변해

간다.

***

그가 없는 작업실에 들어가 본다. 천장이 높은 곳이라 울림이 큰 공간이었던 것 같다. 몇

시간이고 가만히 앉아 있어 본다. 언제 잠들었을까 안정적으로 내 머리를 받혀주는 그의 어

깨가 느껴진다.

“언제 왔어?”

“너 똑똑해서 그런가, 머리 엄청 무겁다. 아야, 내 어깨.”

밉지 않은 장난을 치고 있는 그가 이상하다. 똑같은 눈, 똑같은 말투, 변하지 않은 표정이

었지만 그는 지금 솔직하지 않다.

“무슨 일 있지?”

“무슨 일 있어, 도 아니고 너무 자신감 넘치잖아. 휜아.”

내 이름을 부드럽게, 휠 것처럼 부르는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 특별했다. 그날따라 그 특별

한 목소리의 울림이 공기를 가늘게 흔들어 놓는다. 우리의 공간의 물결이 잔잔히 퍼져 그

곳을 채운다.

“무슨 일 인데?”

“떨어졌어.”

“그래? 안됐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한다고 했지만 내 목소리의 떨림도, 당황해 하는 순간도 그는

모두 알아챘을 것이다. 나는 처음부터 그에게 무엇을 숨긴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

“휜아, 내가 왜 널 좋아할까?”

“나, 좋아했었어? 그건 또 새로운 사실이네.”

내 장난스런 대답에도 사랑스럽다는 눈빛의 그는 곧 비장한 표정으로 페이스오프

(Face-off)를 한다.

“넌 거짓말을 하지 않아서.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솔직하다고 해야 하나.”

솔직함. 내가 솔직하다니 그건 거짓말이다. 내가 그를 보고 뱉고 싶은 말 중 반이라도 토

한 적이 있었던가. 늘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차마 입을 떼지 못하고 삼켜 버린 말들이 얼마

나 많은지 그는 모른다.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늘 해 줄 수 있는 말로 타인을 대하는 것

에 익숙해져서 그마저 쉽게 들여놓지 못하고 있다. 그 사실이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슬프

게 했었는지, 젊은 날의 그는 알지 못했다.

“내 작품이…….”

“당신 사진 안 산만해. 엉망도 아니고 규칙이 없는 것도 아니야. 다만 너무 살아있는 것

같아서 차마 사진으로만 분류하기 아까울 뿐이지.”

숨도 안 쉬고 말을 내 뱉는다. 그가 자괴감을 느끼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처음으로 무언

가를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더 이상 젖어가는, 깊은 물 아래로 잠겨가는

그를 보고 싶지 않다. 그가 어두운 감정의 우물 속으로 잠기는 것을 막고 싶을 뿐이었다.

나는 솔직한 것이 아니다. 그의 기대처럼 거짓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 순간에 필사

적이 되어서 능숙한 거짓말쟁이가 되었을 뿐이다. 별 일 아니라고 주문을 걸 듯 몇 번이고

속삭이며 그를 꾀어낸다. 그가 내 말만을 믿도록, 내 거짓에 온전히 속아 넘어가도록 반복

해서 중얼거린다.

그는 나에게 말한다. 숨 쉬는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서 힘들다고, 자신은 사진도 사랑하지

만 사진 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어떻게 살아 있는 생기를 사진에 고스란히 옮길 수

있을까. 가능한 많은 생기를 담고 싶다고, 끌어안아서 가두고 싶다고 말했다. 결국 그는 나

마저 그의 사진 속으로 가두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 사진 속

의 나와 사진 밖의 나 중 누가 그에게는 진짜였던 걸까. 그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

말로 진실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지 그 자체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진실이 있다면 내가 무

엇을 붙잡아야 하며, 어디를 보고 웃어야 하는지 말해주길 바랬다. 빈속이 울렁거린다. 그

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소리 내어 우는 법조차, 슬픔을 받아들이는 방법조차 배운 적 없

는 나의 남자가 온 몸을 뒤틀리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길고 어두웠던 밤. 더디게 흘러가

는 초침의 소리를 세는 것 마저 힘들어 졌을 무렵 놀랍도록 덤덤한 목소리의 그가 입을 열

었다 .

“너를 언제 처음 봤을까?”

“뜬금없긴.”

“모르지?”

“중요 한 거야?”

“몰래 들어갔었다. 의대 수업에.”

“우리 학교 학생도 아닌 주제에.”

어둠 속에서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작은 짐승 같은 그가 꼼지락 꼼지락 움직이며

내 쪽을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냥 공부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궁금했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나름 열심히 들었다. 아직

그 교수가 했던 말도 기억나는 걸. 그 빨간 행커칩을 한 보기 좋던 노신사 분 말이야.”

“닥터 노블레임(Dr. No Blame) 말하는 거네.”

“한국인인 줄 알았는데.”

“맞아. 한국인. 여러분이 사람을 죽였죠? 아무도 탓하지 마세요. 운도, 신도, 동료도. 그냥

수술방에서 여러분이 사람을 하나 죽인 겁니다. 무섭죠? 그렇지만 그게 우리 일의 사실이

니 그려려니 하고, Never blame anybody."

늙은 교수를 흉내 내는 내가 뭐 그리 웃겼는지 부드러운 모포 위를 데굴데굴 구르며 그가

다시 웃는다.

“아이-와이-아이-쥐-알-이-엔-(EYEGREN). 그 할아버지가 갑자기 칠판에 모르는 단어를

적는거야. 난 또 무슨 의학 용어인 줄 알았는데 늬들도 아무도 모르더라고.”

“이, 와이, 이, 쥐, 알, 이, 엔?”

“한 놈이 외쳤지. 아마 그 놈은 앞에서 세 번 째 줄에 앉고 분홍색 모자를 썼었을 거다.”

“그 떠들기 좋아하는 선배. 기억하고 있어. 뭐라고 말했어?”

“무슨 꼬부랑 영어였는데, 아미노산이었던가.”

“아, 기억난다. 그해 노벨 생화학 상 받은 사람이 밝혀 낸 단백질의 기능성 루프 서열. 새

삼스럽네, 이런 걸 기억하니까.”

“그 전에 네가 중얼거린 말은 기억나?”

“내가?”

“아니. 네가 그랬어. 교수님 오타 났어요. 라고”

“기억이 안나.”

“교수님 거기 E가 들어가야 단어가 완성 되요. 초록색 눈동자요. 그리고 혼자 말하고 혼자

작게 웃었다.”

“설마.”

“내가 없는 말 지어내게? 그 때 느꼈어.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될 것 같다고.”

내가 무어라 답하기도 그의 칠흑 같은 머리카락이 내 뺨에 닿는다. 너무 안타까운 그의 마

음과 아직도 몸부림치는 그의 상처가 고스란히 느껴져서 눈물이 날 것 같은 온기.

***

내가 정말 그에게 사랑이라는 말을 들었던가? 아니면 쇠약해진 내 몸과 마음이 만들어 낸

자위적인 기억에 불과한 것일까. 어느 쪽도 중요하지 않다. 다시 열이 오르고 아프기 시작

한다. 바람마저 습하고 달아오르기 시작하는 여름을 알리는 늦봄, 너무 일찍 찾아와 버린

그 더운 날의 시작을, 나는 침대에서 첫사랑에 실패한 어린 소녀처럼 앓고 깨어나기를 반복

했다.

끝없는 술래잡기

나는 늘 머리에 피딱지를 들고 사는 아이였다. 손톱을 물어뜯는다거나 머리카락을 손가락

으로 베베 꼬는 눈에 보이는 버릇 대신에 초초할 때 마다 긴 머리를 쓸어내리는 척 교묘히

머릿속으로 손가락을 넣어 세운 손톱으로 아직 딱지도 앉지 못한 상처를 긁고 또 긁어 내렸

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남들에게 보이기 싫은 치부를 검은 머리 속에 감추고는 늘 성에 안

찬 듯 나를 밀어붙였다.

지금은 몇 십만 원씩 주고 끊은 관리실에서 생채기 하나 없는 말간 두피를 선사받아 지저

분한 세레모니를 할 일도 없이 살아남았지만 늘 앞머리를 쓸어 올린 채 고정하고 있던 나의

왼손은 아무도 모르게 내 머리 속에 상처를 내는 중이었다.

부모님도 모르던 그 습관을 가장 먼저 알아 챈 사람이 그였다.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그를 피해 다녔다. 결점을 들키는 것에 익숙하지 않던 나는 그가 나

를 보고 반가이 걸어 올 때 마다 시선을 피하고 돌아서곤 했었다. 옹졸하고, 유치한 인간이

었던 나를 웃게 만든 것은 그가 보낸 작은 선물이었다. 알록달록한 만화 주인공들이 그려져

있던 대일밴드와 면봉이 들어있는 작은 봉투가 내 앞으로 배달되어왔다.

손끝에는 대일 밴드를 붙치고 머리에 상처는 손톱 대신 면봉으로 내는 것이 어떻겠냐는 그

의 편지에 나는 웃어버렸다. 그는 자꾸만 나를 수면 위로 끌어내려 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그 참견이 불쾌하지 않았을 뿐이다. 삶을 제 3자로만 바라보던 나

를 그들과 함께 뒹굴게 할 셈이었다. 그 뻔한 계획이 귀여워 보이면서도 한편으론 겁이 났

다. 내가 정말 변해 버릴까봐서, 오랫동안 익숙해져 온 나라는 존재가 그와 함께 동화되어

사라질까 내심 걱정이 되었던 걸까.

병원에 입원 한 뒤로 몸이 약해졌는지 머리 아래도 작은 열꽃들이 다닥다닥 돋아나기 시작

했다. 언제 고친 적이 있었냐는 듯 습관적으로 늘 머리 밑을 헤집어 놓는 손가락 덕에 이미

머리 밑은 피바다였다. 일부러 손톱을 바싹 깎아 뭉툭한 손끝으로 뒤통수를 꾹 꾹 누르며

잠들고 있었다. 뒤통수에 생소한 흉터가 만져진다. 눈을 뜨고 확인 해 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분명 꿰맨 흉터였다. 길이를 어림잡아 보이 내 손가락 마디 하나는 될 법했고, 응급 상황

이었는지 급하게 드레싱 한 것 같다. 초기 처치가 미흡했는지 꽤나 흉한 상처가 촉감으로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것이, 실밥을 제대로 뽑아 내지 못 한 것도 같다. 아직 내 머리에서

뽑혀 나오지 않은 것이 있다.

.아파?.

순간 어둠속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눈이 번쩍 뜨인다. 어둠 속에서 형태만이 존재하는

성긴 공기가 내 주위에 머무르고 있다. 오컬트의 공포가 아닌 온기가 어려 있는 축축한 공

기의 어루만짐. 촉각과 시각이 더뎌진 어둠 속에서 코를 벌름거려 본다. 깊게 숨을 들이마

시자 지겹도록 늘 이 망상과 함께 찾아오는 매캐한 담배냄새의 끝자락으로 입에 침이 고일

만큼 달콤한 과자 냄새가 빨려 들어온다.

그렇게 몇 번이고 그를 느끼며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내 쉬는 숨이 느껴지지

않는다. 조금씩 고갈되는 산소가 나를 죽음이라는 것에 한층 더 가까이 밀어 놓아 갑자기

어둠보다 더 무거운 것이 나를 짓누른다. 분명 들이쉬는 다음은 내쉬는 것을 반복하던 반복

적인 본능이 멈춰버렸다. 폐로 들어온 한 움큼의 공기가 다시 나가지 못하고 기도에서 아우

성을 피고 있었다.

부모님은 다음 주 쯤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를 타시겠다고 했다. 원장은 그간 3년 동안 쓰

지 않은 휴가를 다 밀어 주겠노라고, 진심 어린 걱정과 함께 월급쟁이 의사에겐 과분한 휴

가를 주었다. 아직 B의 아내 문제는 해결되지도 않았고, K의 상담 패키지는 고작 3번을 썼

을 뿐이었다. 내가 여기서 죽은 다음 생길 공적인 문제들을 나열해 보지만 역시 가장 무서

운 것은 숨이 내 뱉어 지지 않는다. 꺽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꾹 닫힌 채 아무리 힘

을 써도 열리지 않았다.

몇 번이고 덜컹거리고 멈추기를 반복하던 가슴이 둔탁한 것에 얻어맞은 듯 터져버린다. 양

막을 찢고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도마뱀이 된 기분으로 눈알을 굴려 주변을 보자 깜깜했던

밤이 아니라 제법 밝은 아침이다. 정말 내가 도마뱀으로 변해 버렸는지 놀란 눈초리들이 하

나같이 심각한 얼굴이다. 혹시 푸르딩딩한 비늘로 변한 것은 없는 지 급히 손가락을 확인

해 본다. 아가미가 생긴 것도 같아 귀 뒤를 더듬어 보지만 만져지는 것은 미열이 있는 내

몸 뿐이었다. 내가 내 몸을 더듬거리는 동안 열 댓 개의 눈알들은 여전히 불안 한 듯 나를

살핀다. 아는 사람들의 얼굴이 이토록 반가운 것도 오랜만이었다. 안도하는 사이, 순간 살

짝 열린 문 틈 사이로 누군가 빠져나간다.

오랜만에 디딘 바닥은 중력도, 무게도 느껴지지 않는 생소한 것이었다. 누군가 나를 부르

고 있지만 술래잡기를 하며 병동 복도를 달려가는 그를 붙잡아야 한다. 복도를 따라 들어오

는 햇빛이 시야를 가린다. 끝없이 이어 진 복도 끝에 놓여 진 낡은 판도라의 상자 속엔 답

이 있을까? 분홍의 꽃잎들이 흩날린다. 필사적이 된 내 앞에 갑자기 그가 멈춰서는 바람에

그와 충돌하고 말았다.

소름끼치도록 차가운 돌무더기 같을 줄 알았던 그의 육체는 따스하고, 단단하고 안정적이

었다. 그 충격에 다시 한 번 큰 숨이 터진다.

“원, 투, 쓰리. Pulse!”

가슴에 와 닿는 전기 충격기의 짜릿함에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황급히 팔을 들어 손

가락을 확인한다. 아가미도 없고, 비늘도 없다.

“휜아, 죽지마.”

몽롱한 정신 상태로 L선배의 우스꽝스러운 흐느낌에 웃음이 비집고 나온다. 미쳐 뚫고 나

오지 못한 웃음이 터질 때 마다 가슴이 압박되어 통증을 수반한다.

내가 내 발로 병원을 걸어 나오는 것은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스트레스

와 과로를 반으로 줄이겠다는 약속을 혈서로 쓸 만큼 굳게 하고 난 뒤에야 그 긴 여름과 이

별 할 수 있었다.

차도가 없는 앓아누움. 현대과학은 편리하다. 누가 봐도 제대로가 아닌 나는 오점 하나 없

는 차트 덕분에 의기양양하게 퇴원할 수 있었다.

자학하는 작가 C선생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다른 사랑의 행보를 걷는 K와 B가 함께 출연 한 드라마가 있었다. K

는 사랑을 믿지 않는 팜므파탈로, B는 더벅머리를 하곤 K의 집 앞에서 밤을 세는 순정남으

로 열연했던 드라마는 둘의 속사정을 잘 아는 나에게는 코미디와 같아서 짜고 치는 신파라

고 비하하며 드라마를 무시하는 내가 유일하게 본 작품이 되었다.

당시 K는 유명한 감독의 영화를 연달아 세 편이나 말아먹고 연기력 논란에 빠져있었고, B

는 국회의원 딸을 잘못 건드려 대서양에 가라앉는 타이타닉이었다. 하지만 원작자는 극의

완성도를 위한 마지막 도구로 그 둘을 점찍었고, 세간에서 저물어 가는 별이라고 했던 둘은

완벽히 재기에 성공했었다. 나는 작가 C선생을 처음 알게 되었다.

작가 C선생은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랑의 관점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나와 전부터 일하고

싶어 했다. 그는 스타 작가, 베스트셀러 메이커, 이 시대의 마지막 로맨스를 논하는 작가.

이런 수식어로 유명한 중년의 작가였다. 그의 최근 작품 다섯 편 중 3개는 영화화가 추진되

고 하나는 드라마가 되었다. 그의 글에 대중은 열광하고 평론은 후하다. 작품성과 대중성의

경계를 적당히 지키는 C선생이 불현듯 사무실로 컨텍을 해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분야도 활동 범위도 다른 C선생이 무슨 근거로 나에게 사랑에 대한 관점

을 논하는지 모르겠다. 심리학 활용서를 저술할 때도 사랑에 대해서 딱히 깊게 다룬 적이

없는 데다 ‘관점’이라고 명명할 만한 의견을 제시 한 적도 없다.

‘있잖아. 네 부끄러운 처녀작.’

순간 주위를 둘러보지만 아무도 없다. 망상의 내뱉음과 같은 공기의 메아리는 내 사라지는

기억들을 재생 시켜 주는 재주를 가졌다. 그러고 보니 딱 한 번 사랑에 대해서 논 한 적이

있는데 겉 멋 든 시절의 처녀작인 단편 연애 소설이었다. 연애 소설이라기보다 그냥 남자,

여자. 사랑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을 가진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원고가 들어가서

초판 인쇄를 하던 도중 스스로 계약을 번복하고 출간을 취소할 만큼 나에게는 부끄러운 기

억이었다. 유명해진 후에도 출판사에 몇 번이고 말해 뒀었다. 그 소설이 이슈화 되는 날에

나는 다시는 이 출판사에 글을 맡기지 않을 것이라고. 몇 번이고 오래 전부터 알아오던 인

상 좋은 할아버지 뻘의 사장님을 다그쳤었다.

아까부터 나를 응시하는 이 중년의 독신 남자는 자신은 사랑 밖에 모른 여자가 되어, 나는

언제나 냉소적인 남자가 되어 사랑이야기를 함께 쓰자고 한다. 내가 내키지 않는다면 서로

성별을 바꾸어도 되며, 거부감만 없으면 동성도 괜찮다는 마지막 카드 쯤 되어 보이는 말을

의미심장하게 던지고는 내 눈치만 살핀다.

“딱히 동성 사랑에 대한 반감이 있는 건 아니지만 같은 성, 다른 모습보다는 아직은 확실

히 차별화 된 두 개체가 낫지 않을까요, 여러모로 말이에요.”

내 진지한 대답에 농담이었다며 손사래까지 치는 그가 아무튼 꼭 이번에 함께 일하자는 말

과 함께 말랑한 명함 한 장을 두고 갔다.

샛노란 색의 빳빳한 종이 위 진한 주황색의 글씨는 손끝을 대면 녹아 버릴 것 같은 명함이

었다.

같은 상황을 맞이하는 두 남녀의 이야기인 만큼 종 종 서로의 글을 읽어 보게 되었다. 다

끝나고 봐도 되지 않느냐는 내 귀찮은 얼굴에 그는 서로의 시간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한동안 그의 ‘그녀’와 나의 ‘그’의 시간은 함께 흘러가게 되었다. 서로의 글을 받아 보는 횟

수가 늘어날수록 나는 공감할 수 없는 그의 사랑에 점 점 지쳐가고 있었다.

“공감할 수 없어요. 선생님 글은”

너무 많은 사랑을 버무린 듯한 C선생의 글은 내 세계관 밖의 이야기였다. 나의 사랑과 부

모의 사랑, 세대가 바뀌기 전의 잔해, 둘을 혼란스럽게만 하는 주변과, 예고 없는 타인의

소중한 사람의 부재. 약하게 이어 진 연결고리를 미끼로 모든 것이 다 주인공 위주의 사건

으로 돌아간다는 것조차 인정할 수 없다. 일은 그냥 흘러갈 뿐이고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

는 사람의 심리 따위는 이미 내게 진부한 이야기일 뿐, 아름답지도 애절하지도 않다. 트렌

드에 맞아 많은 이가 그것을 찾을 지라도 난 그 장단에 맞춰 춤 춰 줄 수 없다.

“사랑이라는 감정, 그 하나에 왜 이렇게 많은 상황과 이유가 필요한 거죠? 나아가지 못하

고 있는 사람. 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쓸 수 없어요.”

예상 외로 C선생은 웃기만 했다. 다만 내가 부러울 뿐이라고 말하면서 독신 남자답지 않

게 깔끔한 손을, 마르고 앙상하여 잡아줘야 만 할 것 같은 손을 휘휘 저으면서 돌아섰다.

다만 내게 부러울 뿐이라고 말하는 그는 진심이 아닌 것 같다. 그는 그 스스로 자신을 괴롭

히고 있었다. 일부러, 아주 천천히 정성들인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네가 개입 할 수 없는 사랑은 없을지 모르지만, 네가 이해 할 수 없는 사랑은 엄연히 있

다.’

엄숙한 표정의 그가 조용히 속삭인다.

***

“왜 작가들은 하나같이 사랑을 끊어질 듯 아픈 기억으로 묘사하는 걸까?”

“뜬금없이 무슨 말이야?”

“지금 함께 울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이 쓴다. 무덤덤하게 그려내는 것 같아도 결국 그 아픔

속에 고스란히 머물고 있다는 느낌이 지배적이라서, 지겹다고 할까.”

“그냥 그 아픔에 결국 삼켜져서 그런 건가 보지. 그 속에 온전히 몸을 담아서 아픔마저 받

아들여 버린 것 아닌가? 예술가는 원래 그런 것이잖아.”

내 다리 위에 상처투성이의 다리를 얹은 채로 잿빛과 갈색 털이 보기 좋게 섞인 소파 위에

길게 기댄 그가 있었다. 아마 크리스마스 즈음, 이었던 것 같다. 내가 막 해부학 수업을 마

치고 머리에 벤 듯한 포르말린 냄새를 날리기 위해 하루에 세 번씩 샤워를 하던 그 때 쯤이

라 온 몸이 건조했던 그런 때였다.

“사랑 이야기는 진부하기 짝이 없다. 처음도 끝도 불분명해서 한판 해보자라는 느낌이 없

잖아.”

“나보곤 계속 사랑 이야기를 쓰라며? 나도 최소한 ‘사랑’에 대해서 논하고 있어.”

발끈하며 반문하는 나에게 그는 몸을 조금 일으킨 채로 말한다.

“네 글은 좋다. 자신 있으면 덤벼 보라는 선전 포고나 같다고 할까. 네 눈도, 네 입도, 네

글마저도 똑바로 외치고 있어서 숨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좋아.”

조금 더 몸을 일으킨 그가 길게 입 맞춰 온다. 그의 입에서 싸구려 와인 향이 나지만 상관

없다. 입을 맞춘 채, 실눈을 뜨니 그의 어깨 너머로 그가 오전에 현상 해 놓은 사절지 크기

의 사진을 보인다.

멀리서 실루엣만 찍혀 있는 나의 흑백 사진. 눈, 코, 입의 형태조차 보이지 않지만 나조차

도 내가 웃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당신 사진은 늘 언제나 보이는 것 이상의 것을 이야기 하고 있어.”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그래?”

“난 언제나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너를 바라보고 있어.”

***

“넌 너에게 내 모든 것을 다해 사랑을 한 거야. 당신은? 악에 받친 그녀를 응시하며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변명을 쥐어짜듯 뱉어냈다. 나도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 했어. 미안하다

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녀는 몰라주지만, 아니 알아도 인정하지 않았

겠지만. 그래도 늘 타고 있었던 내 진심이 거짓이 될까봐 입을 다물었다. 우리는 서로 최

선을 다했을 뿐이야. 그 크기가 달랐을 뿐이지.”

마지막 줄을 읽어 내려 간 C선생이 입을 다물었다. 그가 돌아간 이후로 진료도 미룬 채,

계속해서 글을 썼다. 자꾸만 나타나는 그의 환상 때문이기도 했지만 사실 책망받기 두려웠

다. C 선생이 보내주는 글 속의 여자가 자꾸만 나는 비난하면서 따라와서 쫓기듯 대꾸해야

하는 것이 싫었기에 눈을 뜨고 있는 동안의 대부분을 노트 북 앞에서 C선생의 시간보다 한

발짝 먼저 살아가려고 애썼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서 휜씨가 참 부럽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별나게 느껴지던 굵은 눈매의 C선생이 오늘따라 온화해 보인다.

“서 휜씨도, 나도 말 하지 못하는 사랑이 있겠지요.”

“글쎄요. 전 물어본다면 말씀드리지 못할 사랑을 없는 것 같네요.”

이 사람은 나와 뼛속까지 다른 사람이다.

“선생님은 왜 스스로를 끊임없이 괴롭히시나요? 단순히 예술가의 객기? 오기와 같은 것인

가요?”

내 질문이 꽤나 당돌했는지 그는 오만한 여학생을 쳐다보는 늙은 선생 같은 눈을 나를 바

라보았다.

“내가 노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꽤 오랜 세월을 살아왔지요. 이 나이가 되면 오기나 객기

같은 극의 감정을 가지기 버거워 진답니다. 그냥 오랜 습관이지요. 못된 버릇 같은 거라고

나 할까.”

“역치가 높아지셨나 보군요.”

“그럴까요?”

“처음에는 조금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쓰라렸는데 이제는 되새기고 상처에 소금을 뿌리지

않으면 못 느끼시는 거 아닌가요?”

“확실히 서 휜씨는 유능한 의사이군요. 똑바로 봤어요.”

“그렇게 까지 하면서 기억하고 싶으신 분이라면. 돌아가셨나요?”

‘너는 너무 매정한 데가 있어서 유능한 정신과 의사가 될 거야. 남들이 못하는 말을 해 줄

수 있잖아.’

나무라는 듯한 슬픈 눈의 그와 나, 그리고 c작가의 시간이 조용히 흘러가고 있었다. 죽은

자든 산 자든 그의 기억 바닥에, 이제는 너무 오랫동안 겹겹이 묻어 두어서 현실로 꺼내 들

기조차 어색한 그 사람을 불러오기에는 짧은 시간이었다. 시간의 먼지가 주변을 둘러싸는

것이 느껴진다.

“글쎄요. 나는 내 글 속의 사람들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나도 그럴 듯한 이별의 명분과 사

연과 지나간 시간이 있었으면 하는데 어느 날 뚜껑을 열어보니 그게 아니지 말입디다.”

“그럼 왜…….”

“이른 시간이군요. 술친구도 없는 이런 시간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지 말입니다.”

“이건 제가 아닌 책 속의 ‘그’가 물어보는 겁니다.”

내 질문에 그는 잠시 당황한 듯 했다. 그가 만들어 낸 ‘그녀’가 사랑한 ‘그’의 질문. 그는

내 말의 의미를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어떤 애착이 그를 자꾸만 그녀의 입장으로 바꾸어 놓

는 것일까. 오랜 시간을 욕구도 변화도 없이 무던하기만 한 사랑을 그리면서 살아가게 만든

원동력은 무엇일까. 신중한 대답을 하기 전에 보이는 그의 버릇은 이미 알고 있다. 입술이

얇은 남자인 걸 보니 고집이 센 남자인가보다. 굳게 입을 다물고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눈을

깜빡인다.

“그게, 저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기억이 날 때 까지 되 세기다 보니 이미 오랜 시간이

흘러버렸군요.”

그는 나와 같은 병을 앓고 있다.

“그동안 즐거웠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나야말로 젊은 사람과 일하게 되어 즐거웠습니다. 그럼 무사히 출판되면 그 때나 만나는

건가요?”

처음으로 잡아 본 C선생의 오른 손은 야들야들하고 닳은 가죽이 덥고 있는 앙상한 손이었

다. 하지만 그가 작가라는 것을 증명해 주듯 세 번째 손가락의 한쪽 마디는 굵고 단단한 살

가죽으로 덥혀서 유일하게 그의 생존 신호를 외치고 있었다. 그는 처음처럼 말랑한 명함을

내밀고 다시 사랑이 그리워지는 날이 오면 꼭 연락하라고 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그는 왜

나를 선택하고 나에게 이 제안을 했을까.

“서 휜씨의 글을 봤습니다. 아마 서 휜씨가 대학 때나 썼던 글인 것 같은데. 아주 오래 된

책인데다 무명작가의 처녀작이라 구하기가 어려웠죠. 초판 인쇄조차 번복되었다고 들었는

데, 출판사에서 절대 안 된다기에 협박을 좀 했답니다. 다시는 내 글을 여기로 보내지 않

겠다고.”

어쩌면 나는 그와 비슷하다. 인정하기도 알아차리기도 쉽지 않지만 많은 면에서 닮아 있었

다. 그 사실을 이제야 알아챘다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나는 그의 ‘어떤 면’을 가지고 있었

다.

“어떻던가요?”

이미 부끄러움을 감수한 내 질문에 그는 야릇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으로 나에게 연륜의

작가로써의 프라이드가 묻어나오는 표정으로 짧게 빈정거린다.

“사실 썩 좋은 글이 아니라 다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문장이 매혹적이었죠.”

“마지막 문장이요?”

“책의 마지막 글귀가 이상하게 저를 끓어 당깁디다.”

생각이 나지 않는다. 마지막 글귀라. 분명 굉장히 멋들어지게 쓴답시고 사랑에 관한 몇 마

디를 나열했을 것이다. 기억나는 건 느낌뿐이다. 늘 그렇듯 뱉어 내고 나니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어서 굉장히 서글펐던 기분. 울렁거리고 억울했던 그 느낌만이 떠오른다.

아무리 곱씹어도 떠오르지 않는 글귀를 뒤로하고 C선생을 배웅한다. 이로써 나의 두 번째

문학부문 글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니 이상한 감흥이 밀려온다. 이런 기분을 공유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어서 누구에게도 기쁘다는 말을 하지 못한 채로 오피스로 돌아와서 밀리 수면

시간을 계산해 본다.

가벼운 수신음과 함께 R원장이 보낸 메시지가 뜬다.

-병원 확장 이전이 결정되었습니다. 축하하고 싶네요.

이미 기쁜 감정의 사람이라면 굳이 내 기분을 공유하라고 강요하지 않아도 될 테니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적어도 내 감정을 다른 이에게 밀어 넣는 수고는 덜게 될 것이다.

여전히 그는 나쁘지 않다.

-고객 중 한명이 새로 바를 오픈했어요.

오늘따라 타이핑을 하는 내 손가락이 들뜬다.

*

몇 번이고 책의 마지막 글귀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는데 쉽게 되지 않았다. 그 사이 나도

R원장도 너무 많은 양의 술을 마셔버렸고 결국 나는 그의 부축과 매의 눈을 하며 우리를

주시하는 망상의 매서운 눈빛을 감수하며 겨우 우리 집 현관에 도달 할 수 있었다.

“서 휜씨 제가 기분이 좋아서 정신없이 마셨네요.”

“별 말씀을요. 늦었는데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내가 내민 손을 잡은 R원장이 순식간에 나를 당겨 그의 품에 안겼다. 훅하고 빨려드는 공

기와 함께 그가 쓴다던 에메랄드 색의 스킨 향이 엄습해 온다. 순간 머리를 치듯 빨려 들어

오는 담배 향과 방금 구운 따뜻하고 눅눅한 블루베리 파이향이 인위적인 화장품 향을 덮어

버린다. 우습다. 이런 상황에서 기억도 나지 않는 추억의 향기 따위가 베여 나온다니. 난

정신과 의사로 낙제 감일지도 모르겠다. R원장의 잘 다려진 수트 뒤로 그가 얄궂은 고양이

처럼 가는 눈매를 하고 나를 바라보며 웃어 보인다. 처음으로 섬뜩함과 함께 왠지 모를 흥

분이 느껴진다. 그는 나를 기만하고 있는 것일까.

문득 어느 날의 봄날에 온 것만 같았다. 따듯하고 차가운 공기의 불안한 조합이 뱃속을 울

렁거리게 만드는 봄날이 시작되던 날이었던가. 내 안의 불협화음이 조금씩 삐거덕 대기 시

작하던 과거의 어느 봄의 한 가운데에 나는 떨어지고 말았다. 겨울에 무딘 나는 추운 겨울

의 밤들을 쉽게 넘기곤 했다. 조금씩 추위가 걷히고 해가 길어지는 동안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다가 옅은 분홍빛의 꽃잎이 날리면 그 때가 되어서야 봄이 온다는 것을 알아채고는 늘

한 발짝 늦게 고개를 들어 흩날리는 꽃가루에 재채기를 하곤 했다. 바에서 마신 두 층으로

나뉜 칵테일의 옅은 빛이 자꾸만 아른 거린다. 가볍게 올려 진 아담한 과일을 가지고 그와

장난을 친 것도 같다. 뜨거운 열기가 훅 하고 올라와 얼굴을 뒤덮는다.

***

“달을 본 적이 있어?”

하루 일과를 마쳐야만 볼 수 있는 바쁜 연인이었기에 늘 땅거미가 내린 후에나 지나치듯

인사를 나눴다. 비슷한 시간, 익숙한 거리의 우연. 아직은 어둠이 내리지 않은 거리. 뜬금없

는 그의 말에 하늘을 보려 눈길을 돌린다. 아직 어르스름한 밤하늘을 향해 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그거 알아?”

“뭐?”

“아니, 나도 분홍색이 좋다. 그러니까 여리 여리하고 창백한 느낌의 분홍이 좋더라. 안 어

울리지?”

머리는 뒤늦게 알아버린 봄의 시작을 내 몸은 느끼고 있었다. 진부한 봄의 기운이 나를 변

화시키는 것이 어색하고 달갑지 않았다. 손을 잡고 몸을 기댔던 것 같다. 그 자리에 앉아서

짧은 봄을 제쳐 버렸다. 늘 어둠이 내리면 손을 잡고 시커먼 하늘을 배경으로 다닥다닥 돋

아나는 창백한 벚꽃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누워있었다.

“난 내가 손톱달 같다. 곧 사라질 것만 같은 하늘의 달 말이지. 하늘에 있지만 기껏해야

잠깐이고, 곧 사라질 그런 운명. 역시 봄은 너무 감상적이야.”

“그러게. 당신 너무 감상적이다.”

어쩌면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는 팔자 좋은 한량처럼 보이는 것을 즐기고 있는 지도

몰랐다. 즐길 수밖에 없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굶주림보다, 추위보다 더 두려운 것은 인정

받지 못함이었고 그에게 무엇보다 간절한 것은 누군가에게 존재를 알리는 것이었기에, 차라

리 무신경한 척 게임을 즐기듯 웃는 얼굴이 그려진 부채로 교묘하게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는 날개 짓을 하루에도 몇 천 번씩 휘젓고 있었지만 늘 자신의 무게 때문에 떠오르지 못

한다고 온 몸으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

지금 바라보는 천장도 창백한 분홍색인 것만 같다. 묵직한 사람의 무게와 좁은 공간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호흡에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숨이 턱 막혀오면서 정신없이 옷을

주워 입기 시작했다. 반쯤 정신을 잃은 듯한 그 남자를 변명할 시간도, 추려 입을 여유도

주지 않고 문 밖으로 내 몰고는 가장 경멸하는 눈빛으로 문을 때려 밀었다. 짐승의 눈빛으

로 변한 것 같았다. 나도, 내 자신도.

내가 언제 천장을 저 색으로 바른지 모르겠다. 차가운 아스팔트 도로 위로 굴러 짓이겨지

던 여리디 여린 벚꽃 잎들이 떠올랐다. 이 계절의 마지막, 늘 세상을 뒤덮던 벚꽃의 눈을

보며 하염없이 걷던 젊은 날이 있었다.

그는 정말로 손톱달과 같았다. 어느 날은 가득 찼지만 언젠가는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

하여 사라지고, 하지만 곧 또 나타나게 되는, 언제나 하늘에 있을 수밖에 없는 달과 같은

존재였다. 해가 떠 있는 낮에도 가끔 실루엣을 드러내는, 옅은 물빛의 하늘에 반투명하게

떠다니는 그런 달. 밤의 전부인 달과 같은 남자였다. 정작 그가 꽃으로 만들어 준 나는 이

계절의 마지막에 결국은 가볍게 사라지고 마는 벚꽃 눈이었다. 화려하고 만발하지만 결국은

차가운 길바닥에서 찢겨서 사라지고 마는 사소한 한 계절의 기억에 불과한 그런 사람. 나는

늘 그렇게 생각했을까? 젊은 날은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채, 언제까지나 ‘겨우 고작’인 채로

이렇게 남겨 질 것만 같다. 미처 늙지도 여물지도 못한 나에게 기억 되는 젊음이 너무 가혹

하고 가벼워서 왠지 서글퍼졌다. 숨바꼭질을 하는 나의 시간이 ‘아직-’이라고 길고 크게 외

치며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다. 익숙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자꾸만 ‘아직’을 외친다.

아직 그는 문 밖에 있을까?

대책 없이 내쫓아버린 남자가 떠올랐다. 잊으면 그만이다. 좁은 바닥이라 언젠간 돌아서

나를 쳐버릴 소문이 돌지도 모르지만 가볍게 무시하면 그만이다. 다만 두려운 것은 정말로

상처 받은 사람의 눈동자였다. 나는 나를 숨기고 결국은 사람을 치유하는 일을 하고 있었

다. 그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 상처를 준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아 진 것이 분명했다. 가장

모순 덩어리로 남은채로 서서히 잠들고 있었다. 창백한 분홍 꽃이 어디선가 떨어지며 차가

운 뺨에 닿고 있었다.

조그마한 벚꽃 눈이 사람들의 걸음에, 차의 질주에 찢기고 묻혀 사라지던 그날, 나는 우연

히 조각난 달을 보았다. 구름에 겹겹이 쌓인 애잔한 붉은 달이 서글프게 떠 있는 것을 처음

으로 보게 되었다.

여름의 끝자락

오늘이라면 말 할 수 있을 것 같다. 메일함을 열고 애써 외면했던 R원장의 주소를 클릭했

다.

-저번 일은 죄송했어요.

몇 번이나 죄송하다는 단어를 쓰고 지웠다. 그 단어를 보내는 순간 그는 내가 자신을 기만

했다는 사실을 단번에 받아드리게 되고, 보이지 않는 손가락들이 쉬지 않고 나를 질책하며

비아냥거릴 것만 같았다. 겨우 고작, 기억도 나지 않는 시간의 남자 때문에 정신을 잃고 다

른 사람의 감정을 어지럽히고 집으로 데려오고, 충동적으로 사랑을 나눌 뻔 하고 벌거벗은

듯 자신 앞에 모든 것을 내 보인 남자를 차가운 현관 밖으로 내 몰았다. 시트콤에서나 볼

법한 우스꽝스러운 광경을 만들어 낸 자신에 대한 혐오가 자라나 자꾸만 바닥에서 의자로,

등받이로 자신의 몸을 타고 기어 올라와 목을 조인다.

띵동-

메일함에 새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림 음이 울린다. 마치 구원이라도 받은 듯이 알림 창을

클릭한다.

-그날 밤 일은 죄송했습니다.

이럴 때 사람들이 천생연분이라는 단어를 쓰기도 했던 것 같다. R원장의 메일이다.

-제가 술기운에 오해하고 도를 넘어서는 행동을 한 것 같아 몇 일간 고민하다 이렇게 글

로나마 사과드립니다. 다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조급하고 주제넘긴 했지만 서휜 씨에 대

한 제 마음이 가벼운 장난은 아님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만약 저에게 기회를…

기회를, 이라. 기회라는 것이 이 상황에 어울리는 단어일까? 몇 번이나 되 물어본다. 기회

라는 것은 지금 나에게나 어울리는 단어인데 어째서 이 사람은 서른다섯도 넘은, 아니 전이

었던가? 젊은 개업의라고만 알았지 나이를 종잡을 수 없다. 그러고 보니 나이도 모르는 사

이였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나의 무관심과 단절을 말해 주는 듯 했다. 어쨌든 적지 않은

나이에 이토록 순진을 가장한 예의를 지키는 것일까. 마치 학창시절 처음으로 주먹다짐을

해 본 우등생의 반성문을 보는 것 같은 착각에 웃음마저 나온다. 최소한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합리화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은 분명하다. 바로 창을 열어서 짧게 타

이핑을 하고 숨도 안 쉬고 <보내기>를 눌러버린다. 마치 숨을 내쉬면 내 얄팍한 다짐이 산

산이 깨져서 돌이킬 수 없을까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버튼을 누르고는 그제 서야 깊은 숨

을 내쉰다.

-감사합니다. 이번엔 과하지 않게 차를 마시는 편이 좋겠네요.

아무리 순진하고 바보 같아도 이 말은 알아듣겠지. 곧 다시 새 메시지를 알리는 알림창이

뜬다.

-내일 저녁, 바쁘지 않으시면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짧지만 기뻐하고 있다. 분명 이 사람은 기뻐하고 있었다.

왠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한다.’와는 또 다른 사랑스럽다는 감정이 조금 들었던

것도 같다. 어쩌면 나에게 과분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앞서가는 생각도 들었다. 어쩐지 바

람피우는 것 같은 기분이라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를 지켜보는 그는 없다. 바

람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 아직 아무 것도 이뤄진 것 없는 사이인데

바람이라고 말할 것은 없다. 아니, 그 전에 누구를 상대로 죄책감을 느끼고 있단 말인가.

간단한 전화 한 통화로 새로 오픈한 청담동의 에스테틱을 예약한다. 내일 뻔뻔하게 보이기

위해서는 갑옷을 정비해야 하니까. 그 전에 어쩌면 조금은 아름답게 보이고 싶은 여자로써

의 본능이 앞서고 있는지도 모른다. 난 지금 누군가에게 여자로 보이겠다는 큰 다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넌 빨간 립스틱이 입은 것처럼 어울려’

순간 비가 오는 오피스 창문 밖으로 그가 보인다.

***

“어떻게 필기구 하나 없이 올 생각을 한거야?”

“적반하장인데? 여긴 네 학교고 난 손님이다.”

“난 오늘 여기 다시 돌아 올 생각이 없었어.”

“그럼 그냥 둬. 언젠가 다시 생각날 글일 수도 있잖아.”

“장난하니? 넌 네 일 아니면 다 그런 식이지?”

11월의 늦은 밤이었던 것 같다. 나는 혼자 넋이 나간 듯 캠퍼스를 헤매고 있었고 그는 체

육관에 농구하는 학생을 찍다 잠들었다고 했던 것 같다. 비오는 밤을 가질 수 없는 맑은 오

후의 날이었기에 나는 흠뻑 젖었고 나를 보고 뛰어나온 그도 젖었다. 급하게 돌아온 것은

내가 겨우 도망 나온 학교의 어떤 교실이었고 나는 비속에서 공허한 그의 눈을 보고 내 첫

책의 마지막 구절을 생각해냈다.

그 때는 그랬었다.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혼자 제풀에 시작한 내 책을 완성시키기

못한다는 것이 큰 두려움이었고 또 압박이었다. 그 쓸데없는 압박감에 쫓기어 날뛰던 나를

늘 안쓰럽고 애처롭게 바라보던 그가 있던 시절이었다.

핸드폰마저 비에 젖은 채로 꺼져 버린 모든 것이 차단되었던 그날 밤, 그는 내 가방 속을

뒤져 철지난 빨간 립스틱을 꺼내 들었다.

“이걸로 어쩌자는 거야?”

“유리창에.”

“거기다 쓰라고?”

“잘 써질 걸 이렇게.”

악에 바쳐 소리를 지르고 있던 나에게 실낱웃음을 짓는 그가, 비에 젖어 부드러워진 내 입

술에 빨간 립스틱을 발라준다. 이빨이 딱딱 부딪히게 추워서 몇 번이고 삐뚤어졌지만 미간

에 주름까지 만들어가며 몇 번이고 닦아주고 발라주고를 반복하는 모습이 너무도 진지하고

골똘해 보여 웃음이 난다.

“웃지 마. 안 그래도 어려운데”

작게 끄덕거리고는 그가 만족할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넌 빨간 립스틱이 참 잘 어울려.”

“당당한 색깔이라서?”

“빨강이?”

“흔히들 그러잖아. 자신감의 색깔. 강렬한 색.”

“그런 거 몰라. 그냥 참 잘 어울려.”

“고맙다고 해야 하나?”

“넌 빨간 립스틱이 입은 것처럼 어울려. 원래 네 색깔이었던 것처럼.”

“내 색깔?”

“사람이 날 때부터 색을 가지고 있다면 넌 그런 색깔일거야.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

으면 넌 빨간 구름 같은 형태였을 것 같아.”

“당신은?”

“… …나? 나는 검정색. 모든 색이 뒤섞여서 탁해져 버린 색깔. 아무 것도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기 위한 흰색 보다는 모든 걸 가져서 탁해져버린 검정이 되고 싶다.”

그의 손에서 립스틱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아마 비가 내려 빗방울로 얼룩진 창문에 새빨간 립스틱으로 글귀를 써내러 갔던 것

같다. 뭐라고 썼더라. 분명히 내가 썼고 그 글은 내 책의 마지막.

급히 병원 창고를 뒤져서 가장 아랫단 구석에서 숨죽이고 오랜 시간을 버티고 있던 ‘나의’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긴다. 페이퍼 컷에 희생당한 내 손가락에서 새빨간 피가 책장에 묻어난

다.

-당신이 사랑하고 있다면 몸을 내 던져라. 다 타고 사라지면 그 때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당신도, 나도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결코 사랑 따위로 죽지 않는다.

‘기억하고 있어. 우린 죽지 않을 거야.’

물속에서 울려 퍼지는 것 같은 축축하게 젖은 것 목소리가 자꾸 울린다. 차라리 울었으면

하는 서글픈 표정의 그가 까페 구석에서 멍하게 나를 바라본다. 쟈스민 차에서 올라오는 따

듯한 아지랑이 사이로 사라졌다 나타났다 반복하는 그의 말간 얼굴 때문에 아무 말도 아무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내가 그를 마주 한 마지막 여름의 저녁이었다.

재회

K와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한 지 벌써 몇 달이 흘렀다. 그가 나타나지 않은지 3주, 그리

고 내가 한 주에 한 번 상담을 하러 출연하는 방송마다 B급 게스트만 나타난 지 2주 쯤 된

것 같았다. 정말로 내가 출연하는 아침 방송 날의 게스트들이 씨가 말라간다는 느낌이 온

다. 그 고상하고 늘 웃어주던 푸근한 인상의 아나운서가 카메라가 없을 때마다 들으라는 듯

이 혀를 차고 스튜디오 분위기는 구슬을 굴려도 또르르 굴려갈 얼음장이다. 스튜디오에 감

모양의 나무를 붙이고, 가을 재철 곡식들의 이미테이션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한 시점부터

시청률이 자꾸만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한다. 내가 잘리던 방송국을 뒤집든 수를 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방송 따위는 나가도 안 나가도 그만이지만 끝장을 보고 싶다. 적어도 돌아보

지 않을 사랑으로 망가져가는 그녀의 얼굴에 물이라도 뿌려서 정신 차리게 만들어야겠다는

직업병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K씨”

내 가차 없는 부름에 그녀가 응대한다. 누가 배우 아니랄까봐 잔뜩 차갑고 냉정한 표정으

로. 하지만 소용없다. 이미 무너지고 있는 그녀는 누가 봐도 위태로운 꽃이었다.

“차라리 말해요.”

“네?”

“차라리 외치세요. 내가 보잘 것 없는 당신에게 열광하고 있다고”

“무슨 말씀이시죠? 나가주세요. 전 오후 촬영이 있어서요.”

“가서 이야기 하세요. 내가 당신에게 빠져서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고. 오직 당신뿐이라고

그 말 하지 그래요?”

싸우자고 덤비는 내 말투에 달려들어 얼굴이라도 긁어버릴 줄 알았던 그녀가 오히려 울듯

이 웃어 보인다.

“아내가 있어요.”

“… ….”

“아내가 있고, 아이도 있어요. 아르바이트 이런 건 다 거짓말이었대요. 오히려 여배우는

그런 쪽으론 커뮤니케이션이 잘 안되니까, 속고 있었어요, 나.”

나는 잘 한 것일까? 아픔이 곪기 전에 터뜨려 주는 것이 내 역할이지만 아직 딱지도 앉지

않은 상처를 긁어내려가는 내가 잔인하다.

“알아요. 어쩌면 내가 괜히 선생님에게 화풀이 하고 있는 것이라는 거. 적어도 당신은 진

실을 말해 준 유일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너무 화가 나요. 그 사람에게.”

보고 싶지 않다. 내가 아는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가 이렇게 일그러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막고 싶고, 되돌리고 싶다면 그러고 싶지만 이건 장사도 게임도 아니다. 나는 들

어주고 치료해 주고자 시도하는 사람일 뿐 신이 아니니까.

“왜, 왜 그랬을까요. 난, 난 그 여자보다 아름답고, 가진 것도 많고, 더 부자인데. 왜 돌아

서서 뛰어오지 않는지 화가 나요. 사랑보다, 그리움 보다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어요.”

“K씨가 화내는 건 그 남자가 아니에요.”

“그럼 누구죠? 나한테 진실을 말해주지 않은 내 매니저? 얼굴도 모르는 그의 아내? 아이

들?”

“아니요. K씨 스스로에게. 뻔히 보일 것 같은 진실을 외면한 당신 자신에게. 어리석은 기

억으로만 남을 걸 알면서도 불장난에 뛰어든 자신에게 화가 나는 거예요.”

“… ….”

“용서해요. 세상을 사는데 그 누구도 당신에게 해 줄 수 없는 일을, 이번에 자신에게 선물

인 셈 기회를 주세요. 별일도 아니에요. 뻔한 말이지만 당신은 또 사랑을 할 거고 보란

듯이 특 에이급 스캔들을 내 주세요. 그 망나니 같은 놈이 떠보려고 했던 당신이, 거품처

럼 사라질 수도 있는 인기라지만.”

잠시 웃은 뒤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얼마나 잘나가는 여배우인지 보여주는 수 밖에요. 사람은 가질 수 없는 것을

동경하기도 하지만 간사하게 망가뜨리고 싶어 하기도 하니까, 거기에 잠시 넘어간 것 뿐

이에요. 젊잖아요.”

마스카라가 번지는 지도 모르고 울어대는 그녀에게 처음으로 언니 같은 충고를 했다. 담당

의가 아닌, 내가 그녀와 안 시간을 인간관계로 가정했을 때의 관계. 적어도 10개월이라는

시간을 환자가 아닌 사람으로 만났을 때의 인간관계라면 이 정도의 오지랖은 괜찮겠지.

“고마워요. 다음 달 진료비에 추가할게요.”

“이건 상담이 아니에요. 그냥 하는 말이에요. 지금 뛰어나가서 큰 소리로 고백하고 신문에

나오고 뉴스거리가 되어도 괜찮아요. 당신 마음만 괜찮다면, 그 정도 사치는 용서해요. 하

지만 알잖아요. 그래서 행복해지지 않는 걸. 난 K씨가 잃는 것이 적었으면 좋겠어요. 적어

도 내 가장 비싼 고객이니까.”

내 사무적인 농담에 그녀가 웃음을 보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미소이다. 몇 백 만원

을 하는 주방기기에, 원가 30원짜리 화장품에 주름 없는 얼굴을 꿈꾸며 모든 여자의 지갑

을 열게 만드는 그 웃음 말이다.

“정말 고마워요.”

잘 손질 된 손톱을 달고 있는 그녀의 하얀 손이 내 어깨를 감쌌다. 나보다 조금 더 큰 키

라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작고, 마른 어깨를 가진 여자가 고개 숙여 울고 있었다.

서휜. 아주 잘났구나. 있지도 않은 망상을 기다리느라 3주 동안 혼자만 속편하게 지낸 주

제에 막판에 아주 드라마틱한 대사는 골라서 다 치는구나.

손을 들어 내 앞의 한 여자의 어깨를 감싸준다. 온기가 전해져왔다. 사람의 온기.

‘예쁜 여자인데, 내가 대신 안아줘도 될까?’

그가 다시 찾아왔다.

*

계절이 바뀌고 마주한 그는 조금은 초췌해 진 얼굴이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그 망상은, 아

니 그는 얌전하게 날 따라 오고 있었다. 그녀를 안전하게 매니저에게 보내고 병원에 몸이

안 좋다는 전화를 하고 운전을 하고 다리를 건너는 동안 가만히 나를 바라보면 바람을 맞고

있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대면해야했다. 이 상황의 진실을. 내가 미쳐버렸거나 아니면 현대 과학으

로 증명이 불가능한 상황 속에 살고 있는 내 자신을 받아들이거나 선택해야했다. 갓길로 차

를 세워 말없이 내린다. 분명 발자국이 하나 더 있다. 그는 지금 나와 발을 맞춰 함께 바람

을 맞고 있다. 그의 얇은 흑발을 때리는 가을바람에 흑옥같은 까만 머리가 쉴 새 없이 흩날

린다. 믿기지 않지만 순간이라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그래야만 나는 그와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마음속으로 되새긴다.

“어디…갔었어?”

위태로운 바람만이 맴돌고 있다.

“우스운 질문인 거 잘 알고 있지만, 그 동안 어디 갔었지?”

‘여행’

“그러니까 여행 어디”

‘땅 끝, 바다, 그냥 갈 수 있는 곳 모두 다.’

“그래.”

아랫입술을 깨문다. 눈물이 날 것도 같지만 절대 울지 않을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가슴이

먹먹하다.

‘웃었으면 좋겠다.’

“누가?”

‘그냥 네가 가능하면 계속 웃었으면 좋겠다고’

살날이 얼마 안 남은 불치병 환자 같은 말을 하는 그를 보고 있자니 아련한 기분이 든다.

옛 애인의 환영 따위를 보면서 느끼는 당연한 감정일까. 하지만 정말로 아지랑이처럼 피어

오르는 무언가가 꿈틀꿈틀 내 명치 끝을 자극해서 자꾸만 묻게 되었다. 내가 잊고 있는 진

실을 무엇일까.

“어디로 가면 되는 거지?”

‘하늘이 예쁘다.’

“어디로 가면 당신과 나에 대한 진실을 알 수 있을까? 우리가 왜 이런 모습으로 대면하고

있는지. 나는 왜 이렇게 된 것인지.”

‘우리 이런 날 사진 찍은 적이 있지 않았나?’

“누가 대답해 줄 수 있는 건데? 언제까지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도대체 내가 어떤 상태인

지 나는 미쳐 버린 것일까?”

‘그 날도 넌 게구지게 웃고 있었어. 진흙탕에서 나온 세 살짜리 꼬마 애처럼 말이야.’

“피하지마. 내가 인정하는 만큼 너도 인정하고 나를 똑바로 봐!”

나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잡아 쥐었다. 아무도 없는 허공을 가르고 무릎 꿇게 되었다. 스

타킹이 찢어지고 피가 난다. 눈물이 난다.

아파서 우는 거야. 일곱 살, 무릎에 긴 흉터가 났을 때처럼 난 아파서 우는 것이다.

‘미안. 다시는 이러지 않을게.’

사과. 그는 상황을 판단하고 있는 개체. 그는 정말 내가 만든 환영 따위에 불가한 것일까?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나는 너무 현실에 있고, 그는 그래도 내 곁에 있다. 그와 내가 살고

있는 곳이 같은 공간인데 나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나를 흥분시키면서도 화나게

만든다. 그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개구리 왕자마냥 짠하고 살과 뼈를 가지고 다시 태어날 것

만 같다. 어쩌면 내 안의 어디선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일까.

‘욕심 부려서 미안하다.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게.’

“그러지마!”

‘… ….’

“돌아서서 가지 말고 똑바로 봐. 네가 사라져도 난 행복하지 않아. 날 행복하게 만들고 싶

으면 나를 똑바로 보고 이야기해. 설명하지 못해도 적어도 이유, 왜 나에게 오는지 그 이

유라도 말해. 아니 알게 될 시간이라도 줘.”

이미 그는 없다.

또 그 냄새가 난다. 희미하고 울렁거리는 담배 향 사이로 방금 꺼내 들은 눅눅한 블루베이

파이의 냄새에 도로 위로 헛구역질을 한다. 그 위로 놓쳐 버린 시간의 유리 병 속에서 흩날

리는 계피향이 코끝에 머물고 만다.

빌어먹을 이 단편의 기억들은 하나같이 아리송하고 우스운 것뿐이다. 갈피를 잡을 수 없다.

*

“선생님. 부탁하신 분 연락처 알았어요. 사진 협회에 전화하니까 쉽게 알려 주던걸요.”

저녁 무렵 상담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얇은 포스트 잇 한 장을 건네받았다. 너무 오래 전

에 헤어지고, 그 뒤로는 연락도 되지 않는 공통분모 하나 없는 야박한 그와 나 사이는 거리

는 멀었지만 그 길은 가까웠다. 비서에게 부탁해서 이틀하고 반나절 만에 알게 된 이메일

주소를 멍하게 보고 있었다.

-cassiabark@picture.kr

달콤한 단어에서 쓰디쓴 계피향이 난다. 문득 계피 향과 시나몬 향은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왜 그런 것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계피는 천연 그대로이고 시

나몬은 합성 향료라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계피는 시럽으로 고급 요리에 사용되었지만, 시

나몬은 사탕으로나 먹어줘야 제 역할에 맞는 것이었다.

‘너 때문에 자꾸 내 몸에서 담배 냄새가 난다.’

‘그럼 나는 너 때문에 자꾸 블루베리 향이나.’

나는 팝콘 향수를 가지고 싶다고 했고 그는 겨울 코트 향수를 가지고 싶다고 했다.

‘혹시 집에서 빵 구워? 어떻게 그런 신기한 냄새가 날 수 있어?’

‘체향인가보지.’

‘네가 무슨 거대한 쿠키맨이야? 몸에서 블루베리 파이 냄새가 나게.’

계단에서 담배를 피우고 들어오던 날이면 매캐한 담배 향 사이로 달콤한 어지럼증의 블루

베리 향을 느낄 수 있었다. 늘 고개를 돌려보면 그가 웃고 있었다.

‘담배 피지 않으면 알려줄게.’

좀처럼 나를 구슬리지 않는 그가 내 손에 시나몬 캔디를 쥐어주며 조금은 애원하는 듯한

눈빛으로 말해서 결국 그 뒤로는 담배를 피우지 않게 되었다. 적어도 그가 다시 나타난 이

시간 전까지는.

하지만 결국 남겨진 것은 호불호가 갈리는 시나몬 향의 나 뿐이었다. 같은 사탕을 먹어도

그는 깊은 계피 향, 나는 결국 짝퉁 이미테이션 같은 시나몬 향이 될 뿐이었다. 딱 집어서

말할 수는 없지만 그는 어린 시절 좋아하던 달달한 수정과 같았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깊이

와 포용력이 있는 향이라면 나는 구멍가게에서 파는 오십 원짜리 합성착향료 사탕 같았다.

매료되어 다가왔다가도 전부 돌아 설 것 같은 거짓. 같은 맛, 같은 향을 낼지라도 그는 진

짜, 나는 가짜. 그는 스스로 형성 된 것, 나는 만들어진 것.

결국 이렇게까지 해서 옛날 남자에게 연락하게 되는구나. 포스트잇의 끈적한 부분에 손가

락을 붙였다 떼었다 하다 보니 왜 이제야 찾게 되었는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쉽

게 마주할 수 있었다면 좀 더 일찍 시도 해 볼 만한 일 이었을 텐데 조금은 억울한 심정이

었다.

한참을 마주한 빈 커서 다음으로 나는 겨우 한 줄을 쓸 수 있었다. 늘 그렇듯 지나간, 오

래 된 연인들의 진부한 한 마디. 현재의 일 년이란 시간 가까이 동거인에게 쓰는 지나치게

딱딱하고 의례 적인 한 줄.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간단히 안부 인사를 하고 싶다는 말만 기계적으로 나열한 뒤 긴장 된 마음으로 <보내기>

를 누른다. 무엇을 보낸다는 말인가. 내 마음, 내 궁금증, 아니면 진실.

알아야 되는 것이 있다면 이제는 알아야겠다. 하다못해 현실의 ‘그’와 만질 수 없는 ‘그’가

나란히 앉아서 이야기하게 된다면 그 둘이라도 서로 만나게 해 줄 수 있지 않은가.

내 메일에는 일주일동안 답이 없었다.

오후의 전화

“선생님, 전화 왔었어요.”

요즘 들어 내 오피스를 찾는 사람은 두 사람 뿐인 것 같다. K와 B가 격일로 찾아와서 한

동안 떠들다가 돌아간다. 출근하듯 꼬박꼬박 오는 걸 보면 둘 다 잘나가는 연예인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뿐이다.

그 날은 새로 찍은 화장품 CF에서 받았다며 고가의 브랜드를 한 아름 안겨준 K가 돌아가

고 난 후였다. 보통 예약 전화를 제외한 개인 적인 통화는 내 오피스 전화나 핸드폰으로 오

기 마련인데 희한하게 병원으로 온 전화가 있었다.

“메모 해 두긴 했는데, 미국이었어요. 시간은 상관없으니 꼭 다시 걸어달라고 부탁했는

데.”

건네받은 포스트잇의 끈적함이 손등에 전해진다.

“서 선생! 회사 전화로 국제 전화 하면 헤드에게 다 이른다? 남자야, 여자야?”

“뭐가 궁금한 거예요?”

언제 나타나서 재빨리 참견에 동참하고 있는지, L선배의 거북이 메이커는 조금 더 고려해

봐야겠다.

“여자였어요. 굉장히 떨고 있었는데, 전화해 보세요. 선생님.”

미국에서 온 여자의 전화라면 전혀 짐작 가는 것이 없다.

“Hello?"

거리만큼 더디게 울리는 전화 벨 뒤로 잘 다듬어진 영어가 들린다. 하지만 한국인이다. 모

국어를 희한하게 점치게 해 주는, 왠지 특별한 목소리의 여자의 물음에 대답한다.

“I정신과 서 휜입니다. 메모 남기 신 분, 계신가요?"

순간 정적이 돈다. 길어질 것 같은 예감에 벌써부터 지루함을 달랠 무언 가가 필요할 것만

같다.

“무슨 일이 신지 모르지만 급한 일이 아니시라면 다음에 전화 드릴까요?”

“드디어 만나는군요.”

도를 넘는 예의가 베인 말투와는 상반 되는 감정으로 응답한 것은 날이 선 공격적인 칼날

같은 여자의 대답이었다. 그만큼 날카로운 아픔에 상처받은 누군가의 아내였던 여자의 체념

어린 원망이었다.

“제 남편한테 연락하셨죠? 미국, 오시겠어요? 제가 지금 임신 중이라 비행이 위험해서요.”

갑자기 짜증이 난다. 고작 안부 인사에 베이비 샤워에 초대라도 하겠다는 건지 가깝지도

않은 미국으로의 일방적인 초대. 역시 내가 바보 같은 짓을 했다는 자조적인 기분에 빠진

나는 이 상황에서 무엇이 문제인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오해가 있었나 보군요. 저는 단지 안부 인사를 한 것 뿐 이었는데 결혼하지 몰랐어요. 죄

송한 일입니다만 미국이라니, 조금 당황스럽네요.”

“그이의 행방. 궁금하지 않으세요? 아니면 제가 알려주시겠어요?”

알 수 없는 말과 함께 오열과 같은 슬픔이 전해져 온다. 굴곡이 없는 지나치게 담담한 목

소리였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멀리 떨어진 여자의 슬픔과 원망이 전해진다. 그녀와 그녀의

아기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그의 아내가 나를 찾을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현실에서 마주한 그가 결혼했다는 사실이 전혀 낯설지 않다. 마치 누군가가 그 사실을 이미

나에게 각인 시켜주었던 것처럼, 다만 내가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것 뿐이었던 사실같았다.

“자세한 위치는 메일로 알려주세요. 공항과 간단한 교통편을 첨부해 주시면 다음 주중으로

뵙도록 하겠습니다.”

Welcome to reality

20세기, 이민 붐이 일어났을 때에 이민을 갔던 한국인들은 미국 땅을 밟는 것 만 으로도

그들과 함께 숨 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같은 날, 같은 시간의 십년 전, 이십년 전 조금

더 나은 삶, 다른 인생을 꿈꾸며 이 항공을 날던 그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10시간의 가까

운 비행시간 동안 한 숨도 잘 수 없어 이런 저런 감상적인 생각들이 앞 다투어 떠오른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에는 분명 피곤도 한 몫 했을 것이다. 스튜어디스가 계속 경직 된 채로

깨어있는 내가 안쓰러웠는지 기내용 와인을 권한다.

분명 오늘 이 비행기로 도착한다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외진 마을의 공항에는 까만

머리를 한 마중 객이 보이지 않는다. 알려준 데로 버스를 타고 ‘그들’이 산다던 마을에 내린

다. 내리자마자 보이는 두 갈림길이 섬뜩하게 나를 맞이했다. 잘 정리 된 잔디들과 정겨운

하얀 울타리들이 전부인 무방비 상태의 집들은 색색의 장난감 집의 마을처럼 귀엽고 흥미롭

지만 이질적이다.

어귀에서 만난 인상 좋은 마을 남자는 오른쪽 길로 조금만 걸어오면 초록색 지붕의 큰 집

이 있다고 했다. 다른 집과 비교했을 때 단연 크다는 느낌이 드는 집을 찾으면 된다는 말

끝 환영 인사가 기억에 남는다. 하지만 자꾸만 왼쪽으로 가고 싶다. 청개구리 병이 도지려

나 보다.

적당한 세월을 살았을 법한 나무들 사이로 걷다보니 유독 하얀 그네가 예쁜 확연히 큰 초

록 지붕의 이층집이 보인다. 현관에 누군가 서성이고 있다. 배가 조금 나온 작은 체구의 여

인. 나에게 전화를 한 그 여자이리라. 나보다 조금 늦게 나를 발견한 그녀가 다가온다. 작

고 빨간 입술을 앙다물고 땅만 바라보던 그녀가 곧 적의감이 가득한 눈으로 손을 내민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네요.”

그녀의 영어 목소리는 특별했는데 한국어를 하는 목소리는 너무도 평범해서 무슨 말을 들

었는지조차 금방 잊어버릴 것 같았다.

잘 꾸며진 거실에 들어서자 커다란 가족사진이 있었다. 이상했다.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그녀의 첫째 딸은 초록색 눈을 가졌다.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고 아이를 안고 있는 그녀의

남편은 한국인이 아니다. 적어도 내가 아는 그는, 나를 찾아오는 그는 쌔까맣고 반들거리는

머리카락을 가진 한국인이었다. 당황스러워 하는 내 앞에 차가운 티를 내어 온 그녀가 앉아

서 나를 바라본다.

“꼭 한 번 만나고 싶었어요. 서 휜씨. 이렇게 불러도 되나요?”

“네?”

“이름을 연달아 부르는 걸 싫어하신다고 들었어요.”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지만 분명 빈정거림과 경계가 가득하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한국말

을 다시는 쓰고 싶지 않았다는 듯이 온몸으로 거부하는 그녀가 말을 아낀다.

“말해 주세요. 그는 어디에 있죠? 아니 당신의 ‘남편’은 어디에 있나요? 제게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건가요?”

이젠 나도 참을 수가 없다.

***

“헤어지자. 헤어지려고 해. 당신과.”

“그래, 그러자.”

“사진들. 돌려줄게.”

그는 아무 말 없이 사진들을 받아 들었다. 포스터 사이즈의 크기부터 작은 스티커사진 사

이즈의 사진까지 그가 찍어 준 내 사진들은 나와 너무도 달랐지만 지나치게 나였다.

“이유, 물어봐도 되겠니?”

“그냥 그래야 될 것 같았어.”

2주가 넘는 시간 동안 그와 연락이 되질 않았다. 서로 규칙적으로 연락하는 연인이 아니었

기에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3일이 넘어가고는 조금씩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일주

일이 넘어서니 분노보다도 걱정이 앞서서 작업실에 불이 켜진 것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어서

학교에서 세 시간이나 가야하는 외진 그의 작업실이 보이는 거리를 수도 없이 배외했었다.

“촬영 갔다가 사고가 났어. 다리가 부러져서, 핸드폰도 망가지고. 미안해.”

2주 가까이 흘렀을까. 막 퇴원한 그는 목발을 집고 새집 같은 머리를 하고 내 오피스로 찾

아왔다. 아무 걱정도 없었다는 듯, 나는 너무 바빠서 너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는 듯이 답했

지만 세상에 그가 없다는 것이 생각보다 너무 생소해서 스스로 놀라고 있던 중이었다.

“튼튼하다고 생각했던 나무가 알고 보니 사기꾼이더라고. 덕분에 제대로 굴렀지 뭐. 핸드

폰도 새로 사야하고 이것저것 할 게 너무 많은데, 도와줄래?”

얼굴에 큰 상처가 두 개. 팔꿈치에 커다란 피딱지, 그리고 무릎까지 감싸 올린 깁스. 웬만

해서 나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던 그가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덕분에 도심을 거닐면서 좀처럼 우리가 내켜하지 않았던 젊음이 가득한 느낌의 데이트를

즐기며 새로 나왔다는 신형 핸드폰을 집어 올리는 순간에 진실이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

다. 우리는 핸드폰 따위가 아니면 서로 죽음조차 확인 할 수 없는 사이라는 사실. 세상 반

대편에서 그가 죽어가도 나는 결국 그걸 모를 것이라는 분명한 사실이 비수가 되어 자꾸 꽂

혀서 거리에서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곧 그가 자꾸 나를 지배하고 있어서, 결국은 혼

자 힘으로 설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 너무도 크게 다가와서 숨조차 쉴 수 없게 되었다.

나는 결국 이기적이라 그가 없더라도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만이 솟구쳤다. 살고 싶

다. '그'라는 바다에서 기어 나와 다시 육지 동물이 되어 날뛰고 싶다.

“헤어지자, 헤어지려고 해. 당신과.”

“이유 물어봐도 되겠니?”

“그래도 우리 아직 좋은 친구인거지?”

파노라마처럼, 빨리 감기 되어버린 비디오테이프처럼 거꾸로 치고 올라가는 기억들이 되감

기며 띄엄띄엄 과거의 파편을 던져 놓는다. 물기어린 그의 목소리에 넘칠 것 같은 눈으로

겨우 답을 했다. '우리'는 웃고 있었지만 결국은 울고 있었다. 내민 손을 맞잡아 헤어짐의

인사를 했지만 자꾸만 서로를 당기고 있었다.

문득 꼭 쥐고 있던 손을 펴 보니 그에게 돌려주지 못한 작은 사진 한 장이 구겨져있었다.

하늘을 향해 꺾인 고개가 위태롭게 보이는 실루엣의 흑백사진이었다. 돌려주려 그를 부를까

도 했지만, 그랬지만 이것 한 장만은 나를 위해 가지기로 했다. 늘 그렇듯 아무 것도 보이

지 않는 실루엣만의 피사체였지만 나는 알아 볼 수 있었다. 고개를 돌려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나를. 그리고 그를 바라보던 나의 그 눈빛을.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도시의 밤하늘은 조용하고 고요

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섬뜩했다.

청량한 밤공기가 다시 한 번 마음을 스치고 지나갔다. 얇은 셔츠를 경계로 밤공기와 맞닿

은 살결 위로 전기가 흐른다. 소름이 끼친다. 울렁거린다.

내가 방금 내뱉은 말과 행동이 무언가를 매듭지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어 물이 흐

르고 있었다. 눈물 때문에 다이아몬드를 통해 하늘을 보는 것만 같다.

그와 헤어지고 나서야 나는 스스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법을 알게 되었다.

***

“당신과 그이는 사고를 당했어요. 외진 동네 불량배, 오토바이족의 표적이 되었던 거죠.

쇠파이프에 머리를 한 대씩 얻어맞아 둘 다 한참 일어나지 못했어요. 당신이 깨어나게 된

날은 그이가 눈을 뜨고 한참 뒤였어요. 그리곤 알아보지 못했어요. 아니, 알아봤죠. 과거의

연인으로. 그냥 옛 남자로 그렇게 잠시 만났던 남자가 있었다는 정도로 그렇게 덤덤하게

내뱉는 당신의 모습에 그는 떠났어요. 당신이 자기를 과거로 남기고 싶어 한다면 그래야

한다구요.”

순간 뒤통수를 매만져본다. 샤워 할 때마다 어렴풋이 느껴지던 바늘 자국은 이 것 때문이

었으리라. 마치 이가 빠져 있듯 비어 있었던, 가렵던 기억의 조각이 조금씩 살아난다.

“후유증일 수도 있잖아요. 게다가 이미 헤어진 사이에, 그렇게 별 일 아닌 일에 왜 그가

도망가야 한 거죠?”

“그렇죠. 별 일 아니었어요. 우리에겐 별 일 아닌 일이 그에게는 아니었나 봐요. 당신은

그이 없이도 잘 살아갔어요. 언제 병원에 누워있던 사람이었냐는 듯이 금세 학교를 졸업하

고, 유명해 지고, 사랑을 하며 살아갔죠.”

헤어진 주제에 아무 짓도 하지 않고 자신의 남편을 빼앗아갔다는 생각 때문일까. 유독 선

한 눈매를 가진 그의 아내의 눈동자는 기약 없는 어둠을 가진 검정색이었다. 그의 검정색.

“지금 그는, 그는 어디에 있죠?”

“몰라요.”

“모른다니요?”

“차라리 당신이 알았으면 좋겠네요. 당신 뺨을 때리고 그를 불러올 수 있다면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요. 하지만 몰라요. 내가 가지고 있는 건 이것 하나 뿐 이에요.”

그녀가 내미는 엽서에는 빗물에 번져 버려 알아 볼 수 없게 된 소인이 찍혀있었다. 그리고

번져서 알아보기 힘들지만 이제는 똑똑히 기억할 수 있는 수채화 같은 그의 글씨체.

-당신이 사랑하고 있다면 몸을 내 던져라. 다 타고 사라지면 그 때 자유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당신도, 나도 알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결코 사랑 따위로 죽지 않는다.

“남편이 돌아오기 전에 돌아가 주세요. 지금 남편은 자상하고 따듯한 남자라 한국에서 친

구가 왔다면 오랫동안 묵게 해 줄 사람이에요.”

호텔에 돌아온 뒤 한 동안 멍하게 있던 나는 내가 출발하기 전 한국에서의 저녁조차 먹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린다. 시간을 거슬러 날아온 나는 또 다른 과거를 밟고 있었다. 내가 한

국을 떠난 날은 분명히 어제였지만, 난 또 다른 어제의 땅을 밟고 있었다.

우리는 보통 연인들이 하는 이별을 했고, 결국 서로의 길을 걷게 되었다. 삼류 드라마처럼

갑자기 진행 된 그의 결혼 이야기가 나올 무렵 마지막으로 떠난 출사길, 부산에서 함께 사

고를 당했던 것 같다. 아마 그 여행 뒤에 그는 도망갈 것이라고 했다. 사랑은 바라지도 않

지만 그렇다고 집에서 결정한 결혼 따위를 하는 구석기시대 인간은 되기 싫다고 늘 입버릇

처럼 말하던 그가 무슨 집착에서였는지 자신을 까맣게 덮어버린 내 모습에 순순히 결혼과

유학을 받아들여 버린 순간 나는 기억을, 그는 미래를 버렸을 지도 모른다. 한국을 떠나 미

국에 정착하고 1년 만에 카메라를 들고 사라졌다고 그의 아내였던 여자는 말했다. 아마존인

지, 페루인지, 그곳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이미 문들러져 버린 그가 보낸 단 한 장의 엽서

의 소인뿐이었다. 확실한 건 전염병과 위험이 기다리고 있는 ‘행복하지 못 할’ 곳이었고, 그

가 주장하는 떠남의 정당한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것이 있을 수 없는 곳에서 행복을 찾기

위해서.

“허무함을 채워 줄 무언가는 아직 개봉되지 않은 그 곳에 숨어있을 거야.”

그녀의 악에 받친 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애매한 미소와 속이 빤히 들여다보이는 미

안하다는 말과 함께 홀연히 사라졌겠지. 꼬리조차 남기지 않고 공기처럼 증발해 버렸겠지.

화를 낼 수도 없게 자기가 더 울 것 같은 눈을 하고는 말이다.

손에 쥐어진 엽서를 쥐어 망가뜨렸다. 혹시나 돌아 올까봐, 홀로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고

새로운 집에서 살아가면서도 신혼집이 있던 동네를 떠나지도 못한 그의 아내가, 닳을까봐

제대로 쥐어 보지도 못한 누런 엽서를 뭉그러뜨렸다.

‘이제 더 이상 너를 괴롭히지 마.’

내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낯익다.

“걱정하지 마. 만나러 갈게.”

‘쓸데없는 짓이야.’

“만나서 네 눈을 보면서 들어야겠어. 똑바로 네 눈을 쳐다보고 진실을 알아야겠다고.”

‘쓸데없는 짓이라고 했다.’

“파리지옥 풀의 잎사귀 속에 거꾸로 처박힌 네 시체를 만나게 될지라도, 오래 된 사원의

돌계단에 머리를 부딪친 채 죽어 뼈만 남아있는 백골의 너를 만나게 될지라도. 난 떠나야

해! 떠나야 한다고!”

울부짖는 내 소리에 녀석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마치 이러려고 내 곁을 맴돈 건

아니라는 표정으로 미안해하고 있다. 입도 뻥끗하지 않은 채로. 마치 묻혀 버린 진실을 영

원히 함구하겠다는 표정으로 초점 없는 눈으로 울고 있었다.

분명 내 등 뒤에는 그가 서 있는데, 야경을 그대로 쫓고 있는 호텔 창에는 어두운 밤의 향

연만이 가득할 뿐이다. 그는 없다.

“그런 표정 짓지 마. 봐도, 직접 봐야겠어. 넌 날 보는 걸로 만족하지 못해. 결국 날 부르

고 싶어서 온 거잖아.”

“서휜! 꼭 이래야겠어?”

“선배. 뭘 그렇게 섭섭해 하세요?”

“섭섭한 게 아니라, 기가 차서 그런다. 너 지금 3년 치 예약 대기자가 밀려있는 사람이야.

그 말이 무슨 말이냐면 너만 떠나지 않으면 앞으로 최소한 3년은 보장 된 인생이라는 거

라고.”

“글쎄, 그게 무슨 소용일까요?”

“아니, 휴식이 필요하면 유럽도 있고, 미국도 있고, 얼마든지 공부하면서 쉴 수도 있는 곳

많잖아.”

L선배는 나보다 더 서운한 표정이었다. 내가 떠나는 것이 슬픈 건지, 내 3년의 ‘보장 된’

미래가 날아가는 게 슬픈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어쨌거나 유독 인간관계에서는 진지하

게 살아오지도 않은 내 인생에 이렇게 공항까지 나와서 막아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고마

운 일이었다.

“편지 할게요.”

“그 나라 우체통은 있어?”

“선배.”

“야. 여자 혼자 세계를 떠도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것도 그렇게 후진국들만. 배낭 여

행이라는 게 티비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로맨틱 한 게 아니야. 너 멀쩡한 애가 갑자기 왜이

래? 위험하잖아. 생각하는 거랑 달라.”

“그러게요. 그런데도 난 지금 가고 있네요.”

내 고집스런 미소에 질려 선배는 할 말을 잃은 듯 했다. 저 사람은 모른다. 아니 알고 있

을 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은 절대 특별한 것이 아니니까. 아마 이 공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현재는 아닐 지라도 인생에서 꼭 한 번 느끼고, 앞으로도 수도 없이 맞

닥뜨리게 될 그런 흔해 빠진 감정일지도 모른다. 정말 선배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그 감정 때문에 움직이는 내 모습이리라.

“선배를 추천해 뒀어요.”

“무슨 소리야?”

“제 환자들이요. 특히 선배가 좋아하는 여배우들에게요.”

당연히 돌아오는 것은 어이없다는 웃음이다. 어쩌면 그도 늘 저렇게 웃었던 것 같다. 아직

확실한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그를 찾으면 다 해결되겠지. 그가 내 앞에서 웃게 되면 모든

게 되돌아 올 것 같다. 몰핀 중독처럼 그가 내 몸에 퍼져가서 잠시도 기다릴 수가 없다.

“저 이제 들어가요.”

L선배는 대답이 없다.

‘저 남자 너한테 고백이라도 할 모양인데?’

“선배 저 좋아하는 거 다 알아요.”

질린다는 표정의 L선배가 대꾸한다.

“서 선생 바보는 아니었구나?”

‘정말 나쁜 여자네. 희망고문이냐?’

그도 대꾸한다.

“제가 돌아올 때요. 그 때도 마음이 그대로라면 어쩌면 선배한테 갈지도 몰라요. 선배는

최고의 거북이니까.”

그와 L선배 표정이 똑같이 오버랩 되는 것이 우습다.

게이트로 향하는 내 옆에 그인지 선배인지, 아니면 또 다른 남자인지 모를 남자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당신, 내 전공이 사람 마음 꽤 뚫어 보기라는 거 알고 있잖아?”

내 마음이 하이파이브를 외치고 있다. 이제 조금은 웃어 보이는 것 같다.

Epilogue

처음의 여행 목적 따위는 결국 기억나지 않는다. 고산병으로 며칠씩 기절하는 것도, 정신

을 차리기 위해서, 삼일 동안 잊을 수 없는 지독한 향의 마늘을 까먹는 것도 지쳐가고 있

다. 참새만한 날벌레와 함께하는 끊어지는 물줄기의 샤워도 진저리난다. 후회한다기보다 이

제 충분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일 무렵 한국인이 운영하는 민박에서 겨우 확인할 수 있었던

메일함 속의 L선배의 제안은 최고로 달콤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와인을 맛봤던 학창시절

의 일탈처럼 말이다.

과연 수완 좋은 사람이었다. 내가 없는 동안 나의 부재를 포장해 주었고, 내가 돌아와서

뻔뻔하게 둘러 댈 자리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말했다. 혹시 한국의 공기가 싫증난 거라면

유럽 쪽에서 몇 가지 협력 사업을 할 만한 연구 자리도 있다고 했다. 들어오는 비행기는 적

어도 나가는 비행기는 자주 뜨는 이곳에서 나의 몸과 마음은 얼마나 더 버텨낼 수 있을까.

신성한 신이 산다고 해서 인간의 모습을 한 생명체는 발을 디딜 수 없는 산이 있다. 몰래

들어가려다가 발각되어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필사의 핑계를 몸으로 몇 번이고 둘러 대곤

했었다. 마지막으로 그 산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어쩌면 실패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부는 까칠해 지고 눈 밑엔 주름이 생겼지만 억울하지 않았다. 그 산 꼭대기에 올

라가면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가 희멀건 얼굴에 웃음을 띤 채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자다가도 스물 스물 웃음이 기어 나오곤 했다.

하지만 인정할 수 있을까? 이제야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결국 나는 나

를 위해서 도망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마주했을 때의 부끄러움. 내가 무시하고 외롭게 만들

었던 나를 둘러싸고 있던 많은 것들이 느끼는 서운함에 대한 대가. 전등 불빛 하나 없는 침

낭 속에서 수만 가지 생각들이 봄 눈 마냥 올라오기 시작한다. 어떨 때는 그 끝에 반투명한

백합의 모습을 한 꽃이 피기도 했는데 요즘 들어 자꾸 고사리 같은 생각의 고리들만 얽혀

들고 있었다. 혹사당하는 몸은 해가 지면 불빛 하나 없는 이곳의 밤 속에 안식을 취하기 바

쁘기에 이런 복합적인 감정도 오래간만이었다.

결국 내 손에는 OUT이 찍힌 독일 행 비행기 표가 있었고 나는 7개월 만에 숨 쉬는 것만

으로도 기도가 퍽퍽 막히는 열대야만이 가득한, 너무도 날카로운 밤을 가진 그 곳에서 나올

수 있었다.

*

“알았어요, 선배. 이틀 뒤, 그러니까 여기 시간으로 일요일 2시 도착 비행기. 기억하고 있

어요. 알았다니까요. 한 시간 전에 나가서 기다릴 테니 늦지나 마세요.”

독일로 들어온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문명에 익숙해져 가고, 인류의 철학과 역사를 간직

한 이곳의 모습에 누구보다도 흡족해 하고 있다. 맨발로 뛰어다니다가 운이 없으면 이름 모

를 독을 품은 것들 때문에 눈앞에서 한쪽 다리를 잃게 되어도 곧 시커멓게 빈 이를 드러내

며 웃어보이던 그 곳 사람들과는 사뭇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생각을 하고 고뇌를 하고 삶을

논하며 또다시 그것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빵 곱하기 두 배. 맥주 곱하기 세배. 치즈 곱하기 두 배.”

한국에 계속 머물렀다고 해도 얻기 힘들었을 괜찮은 프로젝트 자리를 덥석 내가 안겨준 L

선배는 이 곳 시간으로 이틀 뒤 오후 비행기로 베를린 공항에 도착하게 된다. 제대로 생색

내겠다는 핑계로 내가 살고 있는 시들지 않은 화분을 가진 테라스의 바닷가 집에 일주일간

머물겠다고 했다. 서툰 외국어로 진행 되는 학회 때문에 정신없던 베를린에서의 3개월을 뒤

로하고 한산한 항구 마을로 휴가를 온 내 은신처로 반나절이 넘는 비행을 하면서 까지 오겠

다는 하늘을 나는 나무늘보를 막을 정당한 이유 따윈 나에게 없다. 전화를 받고 이틀 뒤 생

전 나에게 연락을 하지 않던 사무실 동료에게서 한 줄짜리 메시지가 도착했다.

-L 선배 지난 달 P 잡지에 실린 반지 샀다더라. 요즘 유행하는 웨딩 컷인데, B씨가 추천

해 줬어.

생전 얼굴도 마주하기 싫어하던 B에게 진지하게 카탈로그를 보여주고 귀 기우려 이야기를

듣는 나무늘보와 가재를 닮은 거북이를 생각하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낫다. 내가 짐작처럼

그대로 내가 사라 진 시간 동안에도 사람들은 잘 살아가고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그 속에서

나는 미약하지만 독보적으로 내 영역을 지키고 있었다. 그 짧지 않은 공백 동안에도.

K양은 결혼을 한다고 했다. 남자는 같은 영화배우로 3대째 영화배우를 하는 W라고 했다.

연기파 배우로 K양처럼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것 같은 황금비율의 얼굴은 아니지만 몇 번

지나 칠 때마다 느낀 점은 인간적인 의리가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최소한 K양이 먼저

버림받아서 그녀가 또다시 분노에 치밀어 나를 찾게 되는 일은 없으리라. 가능하면 그 때

한국에 들어와 소수만 참석할 수 있는 비밀 결혼식에 와서 부케를 받아 달라고 했다. 누군

가에게 가까운 사람으로 대접받고 있다는 ‘현실’에 나는 놀라고 있었다.

R의사는 확장 개업을 하는 중이다. 강남에 새로 생기는 빌딩, 3층과 4층에 새끼 의사를

둘이나 달고 새로 문을 연다고 하니 조금 배가 아프다. 강남에 이층짜리 성형외과를 가진

남편을 둘 수도 있었을 텐데. 게다가 아직 내 눈의 짝 쌍꺼풀은 그대로이니 말이다.

B군은 결국 별거를 시작했다. 인터넷 뉴스 말이니 믿을 건 못되지만 저번 달에 이혼설이

떠돌았던 여배우도 한 달이 못 돼서 갈라진 걸 보면 이 소식도 제법 믿을 만한 것 같다. 탓

할 생각 따윈 없다. 오히려 그가 어떤 이유에서든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 시간을

알고 있으니까 행복을 빌어주고 싶은 마음이 크다. 그 누군가를 새로 만나게 되더라도, 그

기간이 짧더라도 이제는 그것을 탓할 생각 따윈 없다. 사람이 헤어지고 만나는 게 사람 뜻

은 아니니까.

‘그건 나의 신이 하는 일이라서 별로 상관하고 싶지 않다.’

‘무슨 신?’

‘나의 신. 그러니까 나를 있게 한 존재 말이다.’

‘당신의 신도 있어?’

‘모든 사람은 자신과 자신의 신을 위해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뭔가가 떠오르려다가 사라진다. 이제는 중요하지 않다. 더 이상 내일에 안달하지 않듯이

과거 또한 더 이상 의미 없는 것이 되어버렸다.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집착하지 않듯이 발

자국을 내딛은 과거 또한 편안히 버려두기로 했다.

“오늘은 세 배로 많이 주세요. 세 배요.”

아직도 서툰 강한 발음의 독일어로 치즈 가게 주인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인다. 곧 넉

살 좋은 미소와 함께 열 두 명의 대가족이 먹을 만큼의 치즈를 잘라주면서 그는 ‘단골’이라

는 단어를 웃음으로 표현해 보인다.

“'Darke goot. (감사합니다.)”

짧고 낮게 말했지만 그도 내 웃음 속에서 많은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 곳 겨울은 해가 짧으니 오늘은 일찍 자 둬야 한다. 내일은 하루 종일 차를 달려 베를린

으로 향해야 하고 오랜만에 귀 따가운 L선배의 한국어를 들어야 하니 체력 보충이 필요한

날이다. 저녁 바람이 살갑지만 발을 돌려 집으로 향한다. 평소보다 많은 양의 치즈에서 풍

기는 고소한 냄새와 노천 까페에서 나는 향긋한 커피 냄새가 흡사 L선배와도 비슷하다. 맛

있고, 달콤하고 좋은 냄새로 언제나 싫지 않게 맡을 수 없는 향기. 살아 있는 동안 나쁘지

않게 즐길 수 있는 그런 향의 사람. L 선배는 그런 사람이다.

찰리의 초콜렛 공장의 불빛 같은 거리를 뒤로한 채 항구의 비릿함 사이로 걸어 나가는 길,

갑자기 탁 트인 시야에 어지럼증을 느낀다. 언제 봐도 두려운 바다는 오늘도 나를 겸허하게

만든다. 진작 이렇게 작아짐을 배웠다면 내 삶의 방향은 달라졌을까? 어울리지 않게 경건하

고 종교적으로 변한 것 같은 내 모습에 실소가 나온다. 이제는 누구였는지 그 흔적조차 희

미한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또 떠오를 것 같다. 나와 나의 신. 그리고 미래.

적도와 땅 끝, 하늘에 가까운 곳과 얼어붙은 아무도 없는 사막. 그를 찾아 헤매는 시간 동

안, 결국 그 곳들을 떠돌면서 내게 남은 것은 겸손과 겸허라는 이름조차 진부한 인류의 오

래 된 진리 하나뿐이었다.

날씨가 다시 따뜻해지면 바다에 띄울 배들을 줄 세워 놓은 항구의 자갈밭은 오늘도 신성한

아름다움을 빛내고 있다. 투박하고 녹슬고, 오래 된 것들뿐이지만 그들은 정직하고 강인한

모습으로 언제나 그 곳에 머무른다. 언제나 있어 줄 것처럼, 쉼이 필요한 자가 찾기만 하면

묵묵히 나를 받아 줄 것 같은 엄숙한 모습으로 자신들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닷가 조약돌 사이로 반짝이는 흑발의 남자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남아있는 소금기에

녹슨 배를 손보는 것 같기도 하고, 남의 배를 훔치려는 수상한 몸짓 같기도 하다. 여기서

보기 힘든 아주 쌔까만 머리가, 지는 해를 등지고 한 올씩 흩날리는 길지 않은 흑발이 자꾸

눈에 밟혀서 다가가게 된다. 휴가철도 아닌 이 시즌에 이런 외진 항구 마을에 동양인은 흔

하지 않은데, 다시 띄우기 위해 늘어져 있는 오래 된 고기 배 사이를 바쁘게 뛰어다니는 것

이 흡사 위험한 곡예를 펼치는 것 같다. 위태롭게 뛰어다니며 그가 놓친 밧줄이 생동감이

있게 흔들리고 튕긴다.

바람을 가르는 듯한 살아있는 셔터 소리 사이로 달짝지근한 계피 향과 방금 구운 블루베리

파이향이 스며 나오길 기대했지만 아무 향도 맡아지지 않는다. 내 눈을 의심해 보지만 대신

두 귀가 확인해 준다. 심장 소리처럼 생동감 있게 울리는 카메라의 셔터 소리. 내 심장도

마주 뛴다.

그다.

그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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