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은 언어나 사고방식, 식생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준다. 주변의 공간이 변한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세상과의 만남을 의미하고,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꾼다. 창작활동을 하는 예술가에게 공간의 변화는 다른 사람들보다 무척이나 큰 영향을 미친다. 예술가들은 대개 주위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서 영감을 받기 때문이다. 이응노 미술관의 ‘시대를 넘어 세상을 그리다’ 기획전은 이응노의 삶에서 주를 이뤘던 공간들과 그 공간의 변화를 중심으로 그의 작품세계를 소개한다.

서울, 꿈을 찾아 현실에 서다
1904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이응노는 젊은 시절 세상의 변화를 직접 겪으며 자랐다. 어릴 때부터 미술을 하고 싶었던 그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미술 공부를 위해 무작정 상경해 당시 묵죽(墨竹)과 묵란(墨蘭)으로 이름을 떨쳤던 김규진 선생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응노는 김규진 선생에게서 미술을 배우며 2년 만에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상해 화단에 등단했다. 서화와 서예에 능했던 선생의 영향을 받아 이후에 그려진 그의 작품은 붓의 필치와 여백의 미가 잘 드러난다.

도쿄, 타자의 공간에서 현실을 배우다
이응노는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도쿄의 사립학교인 가와바타 미술학교에서 일본 미술의 대가 마츠바야시 게이게츠를 만나고, 그에게서 근대미술을 배웠다. 서울에서의 작품들은 난이나 대나무를 굵은 붓의 필치로 표현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근대미술 중에서도 사실주의를 자주 접하다보니 유학시절 동안에는 ‘등나무’처럼 섬세한 작품을 많이 남겼다. 미술을 배우기 위해 서울을 떠나 도착한 도쿄는 그에게 근대 미술을 배워야 할 곳이기도 했지만, 식민지의 국민으로써 식민지의 국민으로써 정신적으로 동화되지 말아야할 곳이었다. 서울과 도쿄에서 미술을 배우며 쌓인 동양적인 정체성은 이후 그의 모든 작품의 기본을 이룬다.

▲ 이응노,등나무,일제강점기, 130x117cm,고려대학교 박물관

파리,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보다
세계가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을 무렵, 이응노는 예술의 참의미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중년의 나이에 파리에서 새로운 예술인생을 시작한다. 서양 미술의 중심지로 일컬어지는 파리는 도쿄와는 전혀 다른 곳이었다. 그는 파리에서 생활하며 당대의 서양 미술의 영향을 많이 받아 한국적이면서도 동시대의 세계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었다. 자신만의 동양적인 붓의 필치로 이응노 자신만의 추상공간을 만들어낸 대표적인 작품이 <구성>과 <군상> 연작이다. <구성>과 <군상> 연작을 보다 보면 파리에서 서양의 미술을 접하며 소재가 점점 더 다양해짐을 알 수 있다. 이전에는 주로 한지에 수묵담채로 그림을 그렸는데, 파리에서부터는 이런 그림들이 유화로 그려지기도 하고 콜라주가 되기도 했으며 평면에서 벗어나 나무와 청동을 이용해 조소한 조각품으로도 나타났다.

▲ 이응노,영차영차,1950년,24.5x44cm,개인소장
대전, 시대에 서서 나를 그리다
이응노는 1969년부터 2년간 간첩 혐의를 받아 대전형무소에 수감된다. 옥중에서 그림을 그릴 재료를 구하지 못하니 밥풀과 간장까지 이용해가며 힘겨운 상황에서도 300여 점의 작품을 만들어내 예술을 꽃피웠다. 밥풀과 간장으로 만들어낸 조소작품 <군상>과 종이에 간장을 칠해 그려낸 <구성>이 그의 투철한 예술정신을 보여준다. 혐의가 벗겨지고 투옥생활이 끝나자 이응노는 프랑스로 귀화한다. 귀화 이후에도 이응노는 항상 근본을 동양정신으로 삼고 동양의 예술을 서양에 심기 위해 죽는 날까지 노력했다.

이응노는 한국사의 수많은 사건들을 직접 겪으며 자랐다. 그 과정에서의 개인적인 아픔과 예술가로서의 창작의 고통을 작품에 표현해내며 세계적인 작가의 위치에 서게 된다. 동양 미술을 근본으로 서양의 추상미술을 접목해 장르와 소재를 넘나드는 실험을 펼치며 우리나라 현대미술의 거장이 되었다. 그의 삶을 이응노 미술관을 거닐며 만나보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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