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기행 연재] 조선 500년의 역사가 담긴 서울의 한양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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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기행 연재] 조선 500년의 역사가 담긴 서울의 한양도성
  • 선주호 기자
  • 승인 2013.05.09 21: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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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덧 대한민국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10개나 보유한 문화강국이 되었다. 우리나라는 멈추지 않고 11번째 유산의 등재를 서두르는 중이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되기 위해서는 최소 1년 전부터 ‘세계유산잠정목록’에 포함되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현재 11개의 문화유산을 잠정목록으로 등록해 놓았다. 이 목록 중 하나는 곧 11번째 세계유산이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도 알지 못하는 문화재를 세계인의 유산으로 등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잠정목록에 포함된 문화재를 직접 찾아가 유산을 소개하고 그 가치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북악산 속 한양도성의 현주소
한양도성은 조선의 수도를 지키던 성곽답게 상당한 길이를 자랑한다. 조선은 외세의 침략이 잦았던 고구려와 고려의 영향을 받아 도시 전체를 성곽으로 둘러쌌다. 그래서 하루종일 돌아다녀도 전체 도성을 살피기 힘들다. 보존이 가장 잘 되어있는 북악산 지역을 찾는 것이 한양도성을 이해하기에 가장 용이하다.
광화문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아스팔트 산길을 30분간 오르면 창의문이 나온다. 창의문은 돈의문과 숙정문 사이의 사소문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라는 뜻을 지지고 있다. 사소문은 한양의 북동, 남동, 남서, 북서 방향의 문을 이르는 말로, 창의문만이 유일하게 옛 모습이다.
북악산은 1968년 무장공비의 청와대 습격 시도 이후 군사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때문에 창의문 앞에서 신분증을 보여주고 확인증을 받아야 비로소 입장이 가능하다. 이곳이 민간인에게 공개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2006년 일부 구간이 공개되었고, 2007년 비로소 전구간이 개방되었다. 아직까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사진촬영이 철저하게 금지되어 있다.

한양도성의 개성만점 구조
산길을 따라 걸으면 눈 앞에 끝없는 계단이 펼쳐진다. 창의문과 북악산 정상 사이 구간은 한양도성 전 구간에서 가장 다니기 힘들다. 40도에 이르는 가파른 경사 때문에 숨은 어느새 턱 끝까지 차오른다. 또한 오른쪽에 펼쳐진 아름다운 서울의 경치 덕분에 힘을 내산을 오른다.
왼쪽에는 한양도성이 쭉 이어져 있다. 한양도성은 네모난 성벽이 큼직한 기와를 쓰고 있는 모양새다. 이 기와를 여장이라 부른다. 아군의 몸을 가리면서 적을 총이나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적군의 침략에 대비해 1개 여장에는 3개의 총 쏘는 구멍이 있다. 역시 전쟁이 많았던 고구려와 고려 시대의 영향을 받은 부분이다. 경사가 가팔라서 이 구간의 여장은 수시로 무너져 내렸다. 그래서 대부분 새로 지은 애기 여장이다.
성벽을 자세히 살펴보면 몇몇 돌에 글자가 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대개 성벽 축조 당시 공사구역 표시와 공사일자, 책임자이름 등을 표시한 것이다. 성벽 축조 시에는 조선 팔도에서 인원을 동원했기 때문에 도 또는 현의 담당 지역을 표시했다. 이러한 공사 실명제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보수 공사에 도움이 되었다.

살아있는 조선 역사의 교과서
북악산의 정상을 찍고 숙정문 쪽으로 내려오는 도중에 한양도성의 바깥 부분을 걸을 수 있는 구간이 있다. 도성의 외벽에 조선왕조의 500년 역사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한양도성은 크게 태조 4년(1395년), 세종 4년(1422년), 숙종 30년(1704년)에 건축, 정비되었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경복궁, 종묘, 사직단이 건립되자 풍수지리에 따라 도성을 착공했다. 이때의 한양도성은 4개의 내산인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이은 성곽으로 총 길이가 18.2km에 이르렀다. 또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이었다. 27년 후 세종은 모든 도성을 석조로 수축했다. 18세기에 숙종은 서울성곽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했다. 세 공사는 모두 농한기에 진행했다. 이것은 농사철에 농민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세심한 배려였다.
북악산 지역은 보존이 가장 잘 되어있는 구역답게 세 왕의 공사 흔적이 모두 남아있다. 태조대 도성이 7%, 세종대가 31%, 나머지는 숙종대가 차지한다. 태조대 성벽은 메주만한 크기의 자연석을 다듬어 쌓았다. 세종대는 장방형 돌을 기본으로 하며 사이사이에 작은 돌을 넣어 쌓았다. 마지막으로 숙종대는 정방형에 가깝게 규격화한 벽돌을 치밀하게 쌓았다. 후기로 갈수록 발전하는 석조 기술이 성벽에 고스란히 나타나는 점이 흥미롭다.

▲ 북악산 한양도성의 성벽 일부분(위부터 태조대, 세종대, 숙종대 성벽).돌의 모양에서 시대가 지날수록 석조 기술이 발달해 정교하고 튼튼한 성벽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일제 강점기와 한양도성의 수난
한양도성은 500년의 세월을 곳곳이 버텼지만 근대에 심하게 파손되었다. 급격한 근대화와 일본의 문화재 탄압에 한양도성은 맥을 못 췄다.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 전차를 부설하면서 흥인지문과 돈의문 부근의 성곽이 헐려 나갔고, 이듬해 같은 이유로 숭례문 주변도 철거되었다. 숭례문은 광활한 바다 속 무인도 신세가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서며 돈의문과 혜화문이 헐렸다. 숭례문도 헐릴 위기에 처했지만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빠져나간 문이라 철거를 피할 수 있었다. 한양의 평지성곽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결국 성곽의 7.7km가 유실되어 현재는 10.5km의 도성만 남게 되었다.

한양도성의 길이와 특이한 구조는 세계 어디서도 유례를 찾을 수 없다. 더욱이 500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세상의 몇 안되는 유산이다. 우리는 지난 100년간의 무지로 도성을 파괴했다. 물려받은 유산을 지키는 데서 현재가 풍성해지고, 유산을 가꾸는 데에서 미래가 열린다. 지금부터라도 한양도성을 소중하게 보존해 우리나라만의 유산이 아닌 세계인의 유산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사진/ 문화재청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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