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재일 KAIST 산업및시스템공학과 06학번

입학한 지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KAIST 합격 통보를 받은 그날의 기쁨을 잊을 수 없다. ‘대학에 가면...'으로 시작하던 가정적 망상들을 현실로 만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 중 가장 컸던 것은 드디어 그토록 원했던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였다. 나는 많은 고등학생이 그랬던 ‘하고 싶은 공부'와 ‘해야 하는 공부'사이에서 많은 심적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장밋빛 희망을 품은 나에게 기다리고 있던 것은 숨 막히는 학사일정이었다. 숨 돌릴 틈 없는 일정들이 달력 곳곳에 다랑논처럼 들어차 있었다. 맹렬한 자기 성찰 없이 당장 닥친 시험에 치이기에만 급급하다 보니 시야가 어두워지고 “눈앞 인간”이 되어갔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오는 갈증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나 졸업을 앞둔 현재 내가 뒤늦게 깨달은 문제는 과연 ‘무엇을 위해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가?'라는 기초적이며 거시적인 ‘인생 목적'에 대한 질문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의 인생 목적은 해야 할 절차를 성실하게 수행하여 세속적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심산에 지니지 않았다. 그러나 사회 진입을 눈앞에 두자 더욱 중요하고 의미 있는 일은 다른 곳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부귀영화를 위한 공부라면 나의 마음이 시키는 ‘하고 싶은 공부'와 갈등을 일으키겠지만 ‘삶'을 위한 공부는 마음이 시키는 공부와 배타적이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하고싶으냐, 해야 하는 것이 아닌 ‘무엇을 위함'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KAIST의 커리큘럼이 과연 설립 취지와 맞느냐는 의문이 생기는 것도 이 무렵이었다. 해야 하는 공부는 누가 무엇을 위해서 결정하는 것인가? ‘창의적 과학기술인 육성'이라는 취지와 무색하게 교육 및 평가과정은 ‘엘리트 선발소'에서의 생존을 강요하는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드는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 학교 졸업생 중 의학, 법학 대학원 진학생 비율은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학교에서 주어진 교육과정보다 간접적으로 강요되는 교육과정은 어쩌면 더욱 가혹하며 적자생존의 이데올로기에 편향되어있을지 모른다. 이를테면 우리말을 사용해도 듣기 난해한 ‘영어 전공수업'이 그렇다. 학업 성취도를 계량화함에 따라서 본의를 왜곡할 수 있는 ‘시험'과 시험을 망쳐도 재수강을 할 수 없는 ‘재수강 제한제'가 그러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장학금 몰수 및 징벌적 등록금 부담'이었다. 학생의 10% 정도가 뛰어난 성적으로 장학금을 받으면 이는 ‘경쟁심' 정도를 느끼겠지만, 이것이 하위 몇%를 기준으로 학자금을 부담하는 방식일 때에는 피할 수 없는 ‘압력', ‘자괴적 열등감'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많은 학생들이 꿈을 찾기보다는 내일 있을 과제나 시험에 어딘가 숨어있을 장래 희망을 기약 없이 유예하고 있을 지 모른다. 새로 오신 강성모 총장님께서는 칠전팔기의 도전정신을 강조하며 실패에 기죽지 말라고 한다. 강 총장님의 청사진이 학생들의 삶에 어떤 화학 반응을 일으킬지는 지켜봐야 겠으나 앞에서 언급한 ‘무엇을 위한 공부' 인가라는 물음은 결코 결여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대학의 목적은 학생의 지적 향상을 위한 교육적 복지와 내재적 동기를 지향하는 수준에 위치해야한다. 그래야 학생이 스스로 삶을 위하여 선택한 ‘하고싶은 공부' 가 국가의 과학기술 발전을 위한 ‘해야 하는 공부'와 일치 해 갈 수 있다. 이들의 격차를 줄이는 것은 개개인이 배타적으로 선택하고, 책임지는 것이 아닌 사회가 요구하는 수준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는 점이 받아들여졌으면 좋겠다. 사회에 나가도 비슷한 고민을 반복할 것이다. 결국 하고 싶은 일을 해야하는 일에 맞춰나가는 사회화과정을 거치면서 어른이 되겠지만, 교육에서만큼은 마음이 시키는 일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과학 영재들이 ‘출세를 위한 공부'에서 벗어나 하고싶고, 해야하는 공부를 할 수 있는 우리들의 학교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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