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나리오 당선> 오지연 학우(무학과 학사과정) 시간을 팝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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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당선> 오지연 학우(무학과 학사과정) 시간을 팝니다
  • 선주호 기자
  • 승인 2013.02.17 0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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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팝니다

오지연


S#01. 한강 다리-밤

F.I

다리 위, 차도 옆에 컨테이너 박스를 개조한 건물이 서 있다. 요란한 전등으로 장식된 간판에는 ‘시간 매매’라고 적혀 있다. 건물의 창문 close up. 창밖으로 미약한 빛이 새어 나오고, 창문 안쪽에는 종이가 한 장 붙어 있다. ‘새로운 인생을 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시간을 사세요! 1초부터 100년까지, 백지의 인생을 팝니다.’ 실루엣만 보이는 세일즈맨이 커튼을 치고, 잠시 뒤 건물의 불이 전부 꺼진다. 다리 너머로 보이는 화려한 야경.

F.O

 


S#02. K씨의 집 거실-밤

신발 자국이 가득한 마룻바닥, 가구마다 붙어 있는 차압 딱지. 거실너머로부터 흐느끼는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망연자실하게 주저앉아 있는 K씨. 창밖을 본다. 한강을 중심으로 한 도심의 야경. 불빛으로 인해 선명히 보이는 한강 다리를 괴로운 듯이 보다가 눈을 질끈 감는다.

F.O

 


S#03. 한강 다리-낮

다리 위 차도에 가득한 차량. 인도에서 난간 너머를 바라보며 느리게 걸어가는 K씨. 이따금 멈춰 선 채 지나가는 자동차를 바라본다. 안절부절못하는 모습. 컨테이너 건물 코앞까지 걸어간다. 시간 매매라고 쓰인 간판에 잠깐 시선을 주지만 이내 외면하고 발을 옮긴다.

 


S#04. 시간 매매 가게-낮

어두운 실내. 구석에 놓인 소파 위에 누워 있는 세일즈맨. 얼굴 위에는 책이 펼쳐진 채 놓여 있다. 하얀 와이셔츠에 파란 넥타이, 검은 정장 바지 차림. 소파 팔걸이에는 정장 재킷이 걸려 있다.

세일즈맨: (귀찮다는 듯이) 이런 일에만 한결같기는.

책을 아무데나 던져두고 몸을 일으키는 세일즈맨. 재킷에 한쪽 팔을 끼워 넣는다.

 


S#05. 한강 다리-낮

다리 난간에 바짝 붙어 아래를 내려다보는 K씨. 표정이 복잡하다. 소리 없이 K씨의 뒤로 다가간 세일즈맨이 그의 어깨를 양손으로 힘껏 민다. 난간 너머로 기울어지는 K씨의 상체.

K씨: 으악!
세일즈맨: (K씨의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은 채 몸을 숙여 귓속말로) 뭘 그렇게 놀라세요? 어차피 떨어질 생각 아니셨어요? (몸을 바로 하며 K씨도 일으켜준다)
K씨: (뒤돌아보며 놀란 얼굴로) 당신 누구야?
세일즈맨: (미소 지으며) 기억 안 나세요? 이거 좀 섭섭한데요.
K씨: (경계하며) 난 당신 같은 사람 모르는데.
세일즈맨: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잖아요? 중요한 건 지금 아저씨가 강에 가라앉기 일보직전이라는 거죠. 제가 말 안 걸었으면 지금쯤 강바닥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지 않았을까요, 아저씨 몸. (익살스럽게 어깨를 으쓱거리며) 내일쯤 신문 한쪽 귀퉁이에 작은 기사가 실렸을지도 모르겠네요. 40대 가장, 삶을 비관하여 자살. 아니, 너무 흔해서 기삿거리조차 안 될 수도. 슬프네요. (과장스럽게 한숨을 쉰다)
K씨: (인상을 찡그린 채) 함부로 말하지 마! 그 따위 말이나 지껄일 거면 썩 꺼져버려! 가뜩이나 힘든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냐?
세일즈맨: (양 팔을 들어 항복 자세를 취해 보이며) 기분 나쁘시라고 한 말은 아니에요. 화내지 마세요. 사실 볼일이 있어서 말 건 거예요. 아저씨 눈에는 제가 고작 20대 초반의 실없는 애송이로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저 그런 사람 아니거든요. 바쁘게 일하는 현대인의 표본 같은 사람이라고요. 보세요, 그럴듯한 정장 차림이잖아요. 화 푸시고 잠깐만 저랑 얘기해요.
K씨:……. (망설이는)

 


S#06. 시간 매매 가게-낮

작은 탁자를 가운데에 둔 채 푹신한 의자가 마주 보고 있다. 세일즈맨은 쭈뼛거리는 K씨를 의자에 앉히고 저도 앉는다. 탁자 밑에서 종이를 한 장 꺼내는 세일즈맨.

세일즈맨: 제 소개가 늦었군요. 저는 시간 판매사, 미스터 세일즈맨입니다. 미스터가 성이고, 세일즈맨이 이름이에요.

K씨의 반응을 기다리는 듯 말을 멈추는 세일즈맨. K씨는 그를 묵묵히 바라보기만 한다.

세일즈맨: (실망했다는 듯이) 농담이었는데 말이죠. 아무튼. (종이를 K씨에게 밀며) 한 번 보세요. 분명 마음에 드는 상품이 있을 거예요.

K씨는 뚱한 표정으로 세일즈맨만 바라본다. 종이에는 시선조차 주지 않는다. 세일즈맨 머리에 손을 짚으며 한숨을 쉰다.

세일즈맨: (혼잣말처럼) 영 비협조적인 손님이시네. (K씨를 향해) 못 고르시면 제가 제일 잘 나가는 걸로 추천해드릴게요. (손가락으로 종이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백지 인생 80년. 다들 덕담으로 100세까지 사세요! 하면서 정작 자기는 오래 살기 싫은가 봐요? 아 참, 여기서 말하는 백지 인생은 말 그대로 아무 것도 안 적힌 인생, 새로운 인생을 말하는 거예요. 구입한 시간을 현재 인생에 덧붙일 수도 있고, 아예 새로운 인생을 살 수도 있는데, 이건 후자의 경우죠. 전자는 대개 시한부 인생의 중환자들이 선택하는 상품이에요.
K씨: (황당하단 표정을 지은 채) 사람을 놀려도 정도껏 해야지, 내가 이걸 믿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세일즈맨: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안 믿겠죠? 하지만 물에 빠진 사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법이거든요. (태연한 목소리로) 어차피 조금 뒤면 입수하실 거잖아요? 손해 볼 것도 없으니 제 말 한 번 믿어보세요. 이건 제법 튼튼한 지푸라기에요. 안심하고 잡으셔도 돼요.
K씨: 미쳤군. (불쾌해하면서도 종이에 시선을 주는) 시간을 판다고?
세일즈맨: 게임오버 되면 리셋 하잖아요? 그거랑 비슷해요. 다시 한 번 삶을 사실 수 있다니까요. 하지만 새로운 사람이 되는 건 아니에요. 아저씨의 본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거든요.
K씨:(코웃음 치며) 웃기지도 않는 헛소리야! (관심 없는 척 하려고 애쓰며 종이를 자세히 들여다본다) 어디 보자, 이게 0이 몇 개야? (손가락을 짚어가며 센다) 1초에 10만 원이라고? 이런 날강도 같으니! (세일즈맨을 노려본다)
세일즈맨: 10만 원이라뇨? 천만에요. (고개를 좌우로 크게 젓는다) 요즘은 글로벌 시대잖아요. 그거 돈 단위 달러에요, 달러. 그러니까, 환율 무시하고 대충 계산하면 1초에 1억 원. 설마 시간이 고작 몇 십만 원으로 살 수 있을 정도의 싸구려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K씨: (말문이 막혀 입을 벌린 채 멍한 표정으로)…….
세일즈맨: (광고에서 나올 법한 과장스러운 어조로) 'New Life' 단돈 19,900원! 세일즈맨 홈쇼핑에서만 만나볼 수 있는 파격 특가! 지금 당장 전화주세요! (목소리를 낮추며) 이런 걸 기대하셨어요? 착각하지 마세요. 시간은 원래 돈 따위로는 살 수 없는 거예요. 제가 지금 얼마나 손해 보는 장사를 하고 있는지 아시겠어요? 그런데 말이죠, 아저씨는 이 비싼 시간을 아무런 고민 없이 버리려 했던 거예요. 보석 상자를 바다에 던지는 거랑 다를 바가 없네요. (가벼운 어조로) 뭐, 그건 그거고, 아저씨는 단골이니까 특별히 세일해 드릴게요. 50년 이상 사시면 10년을 덤으로 드리는 조건으로요. 어때요, 얼마나 사실래요?
K씨: (인상을 찌푸리며) 나랑 장난하는 건가? 내가 그 말도 안 되는 돈을 지불할 능력이 있어 보여? 그 정도로 돈이 많은 사람이 당신 말마따나 강에 다이빙할 생각 따위 하고 앉아 있겠냐고!

싱글거리고 있던 세일즈맨의 표정이 굳는다. 한 동안 서로를 쳐다보기만 하는 두 사람. 이윽고 세일즈맨이 입을 연다.

세일즈맨: (K씨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단호히) 사세요.
K씨: (복잡한 표정)…….
세일즈맨: (몰아붙이듯이) 사시라고요. 사시면 되는 거잖아요. 몇 초가 됐든, 몇 년이 됐든, 사시란 말이에요. 그 까짓 돈이나 들먹이며 변명 늘어놓지 마시고, 빚을 지든 어찌됐든 사시겠다고 말씀하세요. 일단 사셔야 죽이 되든지 밥이 되든지, 뭐라도 하지 않겠어요?
K씨: (울컥 화를 내며) 돈이 없어서 이 지경까지 왔다고 말했잖아! 식구가 전부 길거리에 나앉게 생겼어! 시집와서 고생만 한 아내는 이제 빚쟁이한테 시달리고 있고, 한창 하고 싶을 게 많은 나이인 아들 여행 한 번 다녀오라고 용돈 주기는커녕 대학 등록금도 못 내주는 형편이고, 어린 딸내미는 남들 다가는 피아노 학원 하나 못 보내줘! 너무 미안하고, 미안하고, 정말 미안해 죽겠는데, 할 수 있는 게 없어. 아무 것도. 주변에는 더 이상 손 벌릴 사람도 없고, 끌어다 쓴 사채는 이자만 산더미처럼 불어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어……. 다들 떵떵거리며 잘 사는데, 왜 불행은 나한테만 오는 거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순전히 사기꾼뿐이고 남들이 다 잡는 좋은 기회는 오지도 않아. 너무 불공평하잖아, 이런 건……. (고개를 떨어뜨린다)

 


S#07. 회상

몽타주
철거되는 ‘주식회사 K’의 간판.
무릎 꿇은 채 정장 차림의 남자에게 빌고 있는 K씨.
어린 딸을 안고 억지로 울음을 참고 있는 K씨의 부인.
늦은 밤, 술집이 가득한 거리에서 지갑을 슬쩍 열어보고 친구들과 헤어지는 K씨의 아들.
K씨의 집 앞에서 문을 두드리는 여러 명의 남자들.
엉엉 우는 K씨의 딸.

F.O

 

S#08. 시간 매매 가게-낮

자리에서 일어서는 세일즈맨. 잠시 카메라 시야 밖으로 사라졌다가 손에 머그컵을 한잔 들고 나타난다. K씨에게 머그컵을 내민다.

세일즈맨: 드세요. 허브틴데, 진정하는데 도움이 될 거예요.
K씨:……. (마신다)
세일즈맨:(담담하게) 완벽히 공평한 세상이란 게 어떻게 존재하겠어요. 모든 사람들이 같은 순간에 같은 곳에서 같은 조건으로 태어나 같은 삶을 살다가 같이 죽지 않는 이상 말이에요. 아저씨만 힘든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아저씨보다 더 불행하고, 더 비참하게 살다 죽는 사람들도 더러 있겠죠.
K씨: (힘없이) 남들도 다 괴로우니까 참으라고? 하지만 안 그런 사람들도 있잖아.
세일즈맨: (고개를 끄덕이며) 맞는 말이에요. 모두가 힘들단 사실이 아저씨의 불행에 당위성을 부여해주는 건 아니죠.
K씨: …….(고개를 든다)
세일즈맨: 하지만 아저씨의 고통스럽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도 고통스럽게 만들 권리가 생기는 것도 아니에요.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셨어요? 미안하다, 말만 그럴싸하고, 사실은 편해지고 싶어서 아저씨 주변 사람들의 고통에는 눈감아버린 거 아니에요? (목소리가 고조되는) 아저씨가 이 세상을 떠나면 아저씨의 가족들은 얼마나 슬퍼할까요? 그들의 눈물이 마를 새가 있을까요?
K씨: 아니야! 나는…….
세일즈맨: (K씨의 말을 끊으며) 돈 때문에 죽어버릴 거라고요? 돈이 얼마나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건데요? 이 세상 모든 돈을 끌어와도 죽은 사람은 살릴 수 없어요. 아저씨가 살아 있으면 언젠가 볕들 날이 오겠지만 죽으면 그걸로 끝이에요. 완벽하게 끝. 남는 건 아무것도 없죠. 아, 죽지 말걸, 하는 후회조차 못한다고요.
K씨: …….
세일즈맨: (미소를 띠며) 재미있는 거 알려드릴까요? 아저씨 벌써 한 번 자살했어요. 말했잖아요? 단골이라고. (이죽거리듯이) 최소한 그건 지금처럼 시시한 이유는 아니었어. 돈? 차라리 실연이 100배는 낫겠다.

벌떡 일어서는 세일즈맨. K씨의 멱살을 잡아 일으켜 세운다.

세일즈맨: (위협적으로) 원래 이런 거 알려주면 안 되는데, 아저씨가 너무 딱해 보여서, 불법 저지르는 거니까, 제대로 봐요. 눈 돌리지 말고. (부드러워진 말투로 호소하듯이) 아저씨 이번이 마지막이란 말이에요. 기회는 두 번 뿐이라고, 말씀드렸잖아요.

홀린 듯이 세일즈맨을 쳐다보는 K씨.

 


S#09. 과거-병실-밤

멍한 표정의 K씨(O.L). 환자복을 입은 채 병실에 누워 있다.

의사(E): 상태가 안 좋으십니다. 안정을 취하셔야 돼요. 꼭 지금 들으셔야합니까? (한숨을 쉬며) 아내 분께서는 즉사하셨습니다. 아드님은 병원으로 호송 중에 과다 출혈로 사망하셨고요. 따님은 차가 충돌할 때 충격으로 튕겨져 나가 유해를 아직 못 찾았다고 들었습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병실 안 텔레비전에서 뉴스가 흘러나온다.

아나운서(E): 오늘 낮 3시 경, XX대교에서 5중 추돌 사고가 일어나 13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습니다. 그 중에 K 건설사 대표의 일가족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지고…….

 


S#10. 과거-한강 다리-낮

난간에 기댄 채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는 K씨. 맨발에 환자복 차림. 눈물로 얼굴이 엉망이다.

K씨: (실성한 듯 웃음을 흘리며) 아가야, 거긴 안 춥니, 아가야. 엄마랑 오빠는 따뜻한 침대 위에 누워 있는데 왜 너만 거기 있니, 응? 거기서 아빠 기다리고 있는 거니. 착하고 예쁜 우리 딸. 이제 피아노도 아주 잘 치는데. 이제 조금 있으면 방학식 때 학교에서 교가 반주도 한다고 신나 있었는데. 왜 거기 있니, 응? 왜 아빠만 여기 이렇게 서 있고, 왜 네가, 왜 전부……. 기다려라, 아가야. 아빠가 금방 갈게. 조금만 기다리렴.

난간 너머로 몸을 기울이는 K씨. 그의 어깨를 붙잡아 단박에 끌어당기는 손. 정장 차림의 세일즈맨. 돌아보는 K씨.

세일즈맨: (웃으며) 에이, 아저씨 위험하잖아요? 난간은 밟고 올라가라고 있는 게 아니라, 그만 다가오라고 서 있는 거라고요.
K씨: (분노하며) 네 까짓 게 뭘 알아! 내버려두고 네 갈길 가!
세일즈맨: 아저씨, 지나가면서 제 가게 보지 않았어요? 솔깃하지 않으시던가요? 무려 시간을 판다는데.
K씨: (흐느끼며) 시간이 다 무어야. 사랑하는 가족들이 전부 없어져버렸는데. 다 필요 없어. 다 필요 없다고!
세일즈맨: 아저씨 가족, 만나게 해드릴 수도 있는데요.
K씨:……. (절박한 표정으로 세일즈맨에게 매달리며) 그 말 사실인가? 정말로?
세일즈맨: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죠. 절 따라 오세요.

 


S#11. 과거-시간 매매 가게-낮

탁자 앞에 앉아 있는 K씨와 세일즈맨. K씨 앞에는 종이가 여러 장 놓여 있다.

세일즈맨: 제 말 다 알아들으셨죠? 사람의 인생이라는 건 참 오묘하고 복잡해서, 아마 똑같은 사람들의 집단이 둘 있고, 그 집단이 각각 똑같은 환경에서 산다고 해도, 두 집단 사람들의 인생은 전부 다를 거예요.

세일즈맨이 주머니에서 동전을 하나 꺼내 던진다. 그 동전을 손등에 올린 채로 다른 손으로 덮는다.

세일즈맨: (어깨를 으쓱거리며) 앞면일까요, 아니면 뒷면일까요? 모르시겠죠? 저도 몰라요. 그리고 이게 앞이든, 뒤든, 그건 별로 중요하지 않죠. 앞면일 확률도, 뒷면일 확률도 그저 똑같은 50%. 이게 앞면이라면, 그건 우연이고, 이게 뒷면이라면, 그것도 우연이죠. 하지만 이러한 필연이 아닌 선택지들이 모여서 하나의 거대한 결과를 만들어내요. 신기하죠? 그런데 본질적인 것들은 변하지 않아요. 그것도 참 신기하죠. 제 말은 그러니까, 아저씨께서 다른 생을 사신대도, 가족들은 변하지 않을 거라는 말이에요. 하지만, 그들과 살면서 일어나는 일들은 변하죠. 운명 같은 건 믿지 않았는데, 이 장사를 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삶을 보다보니까 믿어야하나, 싶기도 하더라고요.
K씨:…….
세일즈맨: 사담이 길었네요. 결정은 하셨어요?
K씨: (절망적으로) 내 전 재산을 털어도 고작 몇 분밖에 못 사. (사정하며) 외상도 가능한가? 내가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거기서 빚을 지더라도 갚도록 하겠어. 아니, 지금 생에 장기라도 팔아서 돈을 어떻게든 더 마련할 테니, 제발. 가족들을 전부 볼 수 있도록 몇 십 년만 팔아주게.

잠시 고민하는 척 하는 세일즈맨. 그가 새로운 종이를 꺼낸다. 계약서라고 크게 쓰여 있는 종이.

세일즈맨: (종이를 들이밀며) 돈이 없는 사람을 위한 계약제 판매도 하고 있어요. 자세히 읽어 보세요. 주의 사항은 제가 직접 말씀드릴게요. 요즘은 이런 거 안 말해 주면 불법이라면서요? 까다롭다니까요, 정말.

세일즈맨이 형광펜으로 종이 몇 군데에 밑줄을 긋는다. ‘한 사람이 시간 매매 가게를 사용할 수 있는 횟수는 단 두 번. 세 번 이상 가게를 찾아오거나, 가게가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그 사람은 영업 사원으로 임명된다.’ 라고 적힌 글귀.

세일즈맨: 이 가게는 누구나 원하는 만큼 사용할 수 있지만, 계약제 판매를 한 순간, 이 조항이 효력을 갖게 돼요. 다음 인생에서 한 번 더 시간 매매 가게를 찾아올 수 있고, 이용할 수 있지만, 그 다음 생애는 절대 안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영업 사원은, 저 같은 사람을 말하는 거예요. 연말에도 못 쉬고, 아주 고약한 직업이거든요, 이거. (한숨 쉬며) 저를 담당했던 영업 사원이 어찌나 수완이 좋았는지 전 그만 세 번이나 가게를 이용하고 말았어요.
K씨: (고개를 끄덕이며) 이 정도는 얼마든지 지킬 수 있어. 당장 계약하지.
세일즈맨: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그렇게 자신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뭐 아저씨가 좋다고 하면 그만이죠. 저는 어차피 실적도 올려야 하고. 사실 요즘 사람들이 이 다리를 별로 안 찾아와서 다른 곳으로 가게를 옮겨야하나, 하고 고민하고 있어요.

계약서에 거침없이 서명을 하는 K씨.

탁자에 놓여 있던 시계가 시야에 비춰진다. 빠르게 되감기는 시계.

 


S#12. 시간 매매 가게-낮

눈물을 흘리고 있는 K씨. 세일즈맨은 그런 그를 가만히 보고 있다.

세일즈맨: (조용히) 이제 기억이 나요?
K씨: (흐느끼며) 어떻게, 어떻게 이렇게 불쌍하게…….
세일즈맨: 저번 생에 아저씨는 잘나가는 회사 사장이셨죠. 돈도 엄청 많았죠. 보셨잖아요, 몇 분이나 시간을 살 수 있다 그랬잖아요. (익살스럽게) 몇 분이면, 그게 도대체 얼마야?
K씨: (고개만 끄덕거리는)…….
세일즈맨: 계약서에 쓰여 있던 대로, 이번이 마지막 기회에요. 다음 생애에 아저씨의 가족이 전부 세상을 떠나도, 그래서 아저씨 홀로 남아도, 가족들을 다시 볼 기회는 주어지지 않아요. 저처럼 다리 위나 건물 옥상에 컨테이너 박스 하나 차려 놓고 뛰어내리려는 사람 어깨 붙잡는 일만 하면서 영원히 살아가야하는 거라고요.

세일즈맨의 쓸쓸한 목소리에 안타까운 표정으로 보는 K씨. 그가 탁자에 놓인 머그컵을 손에 쥔다. 이미 차갑게 식어 있는 차를 한 모금 마시는 K씨.

세일즈맨: (담담하게) 사람들을 구하면 매우 보람된 기분을 느껴요. 처음에는 그랬어요. 그런데 지금은 그런 느낌도 사라지고, 점점 우울해질 뿐이에요. 왜 그런 줄 아세요? 가게에 한 번 찾아온 사람은, 거의 대부분 다시 가게를 찾아와요. 아저씨 같은 사람은, 꼭 세 번 찾아오더라고요.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사람들에게는 힘든 일이 찾아와요. 그걸 어떤 방식으로 견뎌내는지의 차이죠. 아저씨는 죽음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어요. 분명 다음 생애에도 어떤 이유로든지 저를 찾아오시겠죠. 그래서 보여드린 거예요. 원래 전생을 보여주는 건 금기거든요. 덕분에 제 일만 더 늘어났지만.
K씨: 일?
세일즈맨: 영업 사원은 정해진 양의 시간을 팔아야지 사원 직에서 해고가 돼요.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행복한 해고죠. (웃는다) 금기를 깼으니 그 시간이 더 늘어났어요. 아, 정말, 누구 좋으라고 한 건지. 그냥 세일즈맨답게 시간이나 왕창 팔았으면 되는 건데.

계약서를 꺼내는 세일즈맨. 종이를 K씨의 앞으로 내민다.

세일즈맨: 자, 여기 있어요. 서명하고 싶으시면 얼마든지 하세요. 영업 사원이 돼도, 절 원망하시진 말고요.
K씨: ……. (세일즈맨을 본다)

 


S#13. 거리-밤

네온사인으로 가득한 길거리를 걷는 K씨.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세일즈맨(Out): 생명의 소중함이 어떻다, 신이 벌하실 거다, 따위의 거창한 이유를 갖다 붙이진 않을 거예요. 그런 식으로 설득할 자신도 없고, 저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으니까요.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예요. 아저씨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슬프게 하지 마세요. 아저씨의 고통보다 더한 고통을 그들에게 안겨 주지 마세요. 자살은 결심하는 순간부터 실행에 옮기기까지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고, 그에 필적할 만큼 괴롭고, 가슴에 사무치도록 외롭잖아요. 그것조차 견뎌냈는데, 다른 건 못 견디겠어요?

K씨 걷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S#14. K씨의 집-밤

울고 있는 K씨의 아내와 딸. 어른스러운 척 눈물을 숨기는 K씨의 아들. 모두 함께 얼싸안는다. 눈물을 흘리는 K씨.

 


S#15. 5년 뒤 길거리-낮

붕어빵 장사를 하고 있는 K씨. 행복한 붕어빵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작은 포장마차. 삶은 옥수수와 계란빵, 떡볶이와 꼬치 어묵 등의 분식도 곁들여 팔고 있다.

K씨: (손님에게 붕어빵을 건네며) 날씨도 쌀쌀한데 오뎅 국물 좀 드세요.
손님: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아뇨, 괜찮아요. 곧 집에 갈 거거든요. 아저씨는 언제 들어가세요? 밤늦게까지 장사하시는 것 같던데.
K씨: (웃으며) 이래봬도 불 가지고 하는 일이라서 별로 안 추워요. 조금이라도 젊을 때 더 벌어놔야죠. 저만 바라보는 가족들이 있거든요. 아니지, 이제 조금 있으면 아들이 아버지 용돈 쓰세요, 하고 월급 줄 날이 올 것도 같고.
손님: 아드님이 아주 효자신가 봐요. 저도 아들 둘 키우는데, 아직 중학생이라서 힘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사춘긴지, 엄마 말은 하나도 안 듣고. (한숨)
K씨: 원래 어릴 땐 다 그런 거죠, 뭐. 자식 힘 안 들이고 키우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힘들지 않은 사람, 하나도 없죠.
손님: (웃으며) 그건 그래요. 많이 파세요.
K씨: 다음에 또 오세요!

 

S#16. 한강 다리-낮

붕어빵이 가득 들어 있는 봉지를 든 채 주위를 둘러보는 K씨. 눈이 내리고 있다. 다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걸어도 찾는 게 보이지 않는지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난간에 기대어 선다. 강을 내려다보며 붕어빵을 먹는 K씨.

K씨(Nar): 강은 맑아 보이지 않지만, 무섭지는 않다. 몇 년 전, 이 평화로워 보이는 강이 나를 집어 삼킬 것처럼 보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따금 그 순간을 떠올릴 때면 지금도 오싹하곤 한다. 하지만 신기루처럼 사라진 가게처럼, 강에 대한 두려운 기억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가게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건, 장사가 안 된다고 했던 그가 정말로 가게를 옮긴 것일까, 아니면, 더 이상 그 가게를 필요로 하지 않는 내게 가게가 보이지 않는 것뿐일까.

다리 위를 천천히 걸어가는 K씨.

 


S#17. K씨의 집-밤

행복한 얼굴로 모여 앉아 과일을 먹는 가족. 창문 너머로 보이는 도심의 야경. 포근해 보인다.

 


S#18. 한강 다리-밤

눈이 덮인 컨테이너 박스. 요란한 등이 매달린 간판은 시간 매매 가게라는 글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화려한 야경.

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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