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평론 가작> 우원균 학우(생명화학공학과 학사과정)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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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평론 가작> 우원균 학우(생명화학공학과 학사과정) 시
  • 선주호 기자
  • 승인 2013.02.17 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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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우원균


텔레비전이라는 문명의 발전은 이 계절에 엄마와 아빠를 한 데로 모아 두었다. 이제는 그들이 같이 드라마를 보고, 맛있는 빵을 사다가 와인을 곁들이는 모습을 종종 본다.

어느 영화에서 시인이 등장해 이런 말을 했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잘 보아야 해요. 여러분은 사과를 본 적이 있습니까? 천 번? 만 번? 아니오. 여러분은 지금껏 단 한 번도 사과를 본 적이 없습니다. 사과에 대해 알고 싶어 하고, 이해하고 싶어한 적이 여러분은 아직 없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요새 어른들의 굽은 등을 유심히 들여다 보는 중이다.

긴 밤이 외로워 혼자 무뚝뚝한 골목을 걷다 보면 여러 사람이 눈에 띈다. 폐지가 수북한 수레를 끌고 가는 노인, 양 손에 과일을 들고 가는 누군가의 어머니. 한결같이 무슨 큰 고독이라도 등에 멘 양 무심한 표정으로 그들은, 말 그대로 끝이 없는 밤길을 헤쳐 나가는 것 같다. 그들이 처음 사랑에 빠진 순간, 아이를 낳고 기뻐하던 순간, 매미 소리가 시원한 여름날 마루에서 수박을 먹던 순간, 누군가를 떠나 보내던 순간, 그런 셀 수 없이 많은 조각들은 어느덧 태산이 되어 등 뒤에 서 있다. 과거는 계속해서 까마득하다. 어쩌면 내 눈이 조금 비뚤어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보고 싶은 대로 사물을 보는 경향이 있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점심 시간을 넘겨서 학교 식당에 가 보면, 그새 설거지에 요리에 바쁘던 아주머니들의 새로운 점심 시간이 시작된다. 그들은 어디 구석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떨군 채 식사를 한다. 내가 어머니라 불러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을 분들이라, 그 때마다 나는 밝은 인사조차 건네지 않는 내가 한스럽다. 핑계는 늘 그럴 겨를이 없다, 는 식으로 마련된다. 하지만 나는 내가 결코 그만큼 바쁘지 않다는 걸 충분히 안다.

가끔은 아침에도 불편한 감정을 맞이한다. 남들이 보통 이야기하는 기상 시간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이른 새벽부터 기숙사 사감이 샤워하는 모습을 종종 본다. 깡마른 몸에 척추를 그대로 드러낸 채로 그는 그 좁은 샤워실 안에서도 구석에 자리잡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샤워를 한다. 그렇게 마주친 게 여러 번인데, 언제나 마치 무언가에 쫓기듯 급하게 몸을 씻고 나서는 것이다. 역시 내가 아버지라 불러도 참 그럴듯한 연배이시라 나는 그 분의 그 습관이 사뭇 답답하다.

우리네 아버지이자 어머니로서, 그리고 지금껏 이 사회를 일구어 온 주인으로서 충분히 당당하셔도 되는데, 마치 그들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을 굳이 자처하려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프다. 여기에 나의 부모도 겹쳐진다.

얼마 전 아빠는 정년퇴직을 했다. 그 후로 아빠는 습관처럼 의미 없는 한숨을 내뱉는다.

그런 와중에 두 아들이 모두 집을 비우니 엄마는 괜히 마음이 허전한 듯 했다. 얼마 전 동생이 군대를 가면서, 엄마는 왜 아들을 둘씩이나 군대에 보내야 하냐며 투덜거렸다. 내가 제대를 해 걱정이 하나 줄어드니 또 하나가 생겼다는 말이었다. 다행히 지금 동생은 건강하고 씩씩하게 군 생활을 하고 있고, 시간이 꽤 지난 만큼 동생의 빈 자리는 이제 우리 가족에게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다만 주말에 해가 지면 어김없이 엄마는 전화기 가까이에 있다. 동생의 전화를 기다리는 것이다. 동생과의 통화는 항상 '사랑해, 아들.'이라는 말로 끝이 난다.

그간 집안을 채웠던 동생을 대신해 요새는 내가 종종 서울에 올라온다. 물론 내가 집에 있는다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다. 가끔씩 설거지를 하거나 청소기를 돌릴 뿐, 보통은 괜히 밤에 라면이나 끓여먹는다고 딸그락대어 엄마의 잠을 깨우기 일쑤다. 하지만 엄마는 그래도 아들이 집에 있는 게 좋은가 보았다. 가족이란 어떤 것이라는 걸 엄마의 얼굴에서 배운다.

오늘도 역시 서울의 집에 와 있다. 늦은 저녁을 먹고서, 조금 전까지 아빠의 이력서를 고쳐주었다. 아빠는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한다. 나는 이 시대에 그러면 아무것도 할 게 없을 거라고 늘 아빠를 나무란다. 그러고서는 이력서가 필요하다며 프린터 좀 고쳐달라는 아빠의 부탁을 며칠씩이나 미루기만 했다. 특별히 바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런데 왜였을까, 용돈 좀 달라는 전화 한 통이면 곧바로 회사를 나와 통장에 입금을 해주던 아빠와 달리 나는 자꾸만 게으르다.

그새 아빠는 퇴직 전 다니던 회사 직원의 도움으로 간단한 이력서 양식을 얻어왔다. 이로써 두 자식놈 이만큼 키웠으면 어깨 당당히 펴고 된다는 나의 말은 가식이 되었다. 나는 결국 아빠를 위해 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 동생은 나라라도 지키지, 나는 대체?

내일 이른 아침 나는 학생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다시 대전으로 내려간다. 아빠는 아마 내일도 나를 터미널까지 데려다 줄 것이다. (언젠가 차 좀 바꾸라며 잔소리하던 못난 내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처음 터미널에 갈 때는 처음이라는 이유로, 그러다가는 버스 시간에 늦겠다는 이유로, 또 짐이 무거워 보인다는 이유로 아빠는 내가 대전으로 갈 때면 언제나 일찍 일어나 나와 같이 집을 나섰다. 사실 아빠가 일찍 일어나는 게 내 탓이 아니기는 하다. 그 습관은 아빠의 수십 년 인생의 투영일 뿐이다. 덕분에 나는 누구보다도 편하게 집과 학교를 오갔다. 다시 홀로 돌아가는, 그것도 당신의 회사가 아니라 집으로 돌아가는 아빠의 마음을 그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날이 지나치게 추웠고 내가 좀 못났을 뿐이다.

아까는 아빠가 한글을 한자로 고치는 방법을 물어보았다. 나는 이번에도 역시, 나중에 해 준다고 했다. 그리고 또 잊어버릴 뻔 하다가 이제서야 손을 댄 것이다.

아빠의 이력서를 본다는 것,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아빠는 십여 년 만에 모처럼 당신의 이력을 들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야 처음으로 아빠의 지난 세월들을 알게 되었다. 사람의 생은 그렇게 고작 종이 한 장으로도 적힐 수 있었다.

그리고 도중에 띄엄띄엄 자리한 몇 달씩의 공백. (IMF란 그런 거였다. 그 때 나는 몇 살이었던가.)

그게 너무 쓸쓸해서 나는 글씨라도 더 보기 좋게 하려고 틀을 이랬다 저랬다 했다. 뭔가 더 있어 보이게, 폼 나게... 정년퇴직 후 요새 아빠는 부쩍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히 거울을 보는 일이 많아졌다. 31년의 회사 생활. 아마 아빠한테도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부디 그 시간들이 너무 외롭지는 않기를 기도했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새삼 엄마의 생활도 들여다보게 된다. 내가 자주 집에 오는데도 불구하고 엄마는 언제나 반갑게 나를 맞이했고, 맛있는 밥상을 차려주었다. 그런데 정작 엄마는 식사를 챙기지 않았다. 몇 년 전 건선으로 고생하고부터 엄마는 식단 관리에 힘을 쓰고 있다. 그냥 야채를 이리 저리 썰어서 고구마랑 먹거나 한다. 그러고서 내가 밥그릇을 다 비우면 묵묵히 설거지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잘 먹겠습니다, 혹은 잘 먹었습니다,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가슴에 담아둔 말은 그 위로 다른 감정들이 낙엽처럼 쌓여 도통 꺼내지지가 않았다. 나는 그저 속으로만 감사할 뿐, 엄마는 그걸 당연히 알고 있으리라 여기며 스스로를 위로할 뿐이었다. 엄마니까.

매일같이 친구를 만나러 나가는 나를 엄마는 매일같이 배웅했다. 그러고서 엄마는 집에 혼자 남아 신문을 읽거나, 라디오를 듣거나, 목욕을 하거나 하며 시간을 보낼 것이었다. 청소를 하고, 빨래를 하고, 다시 또 식사를 준비하는 것이 곧 엄마라는 삶이었다. 엄마는 곧 집이었다. 어느새 엄마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아니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존재가 되어 있었다.

예전에 한 번은 산을 담은 사진이 필요해서 북한산에 가느라 오랜만에 엄마와 버스를 탄 적이 있다. 엄마는 고구마로 잔뜩 배가 부른 가방을 무릎에 놓고 다리를 곱게 모아서 내 옆에 앉았다. 내 덩치는 우람했고, 언젠가 그런 나를 낳았을 엄마는 참 작았다. 창문 밖을 바라보는 엄마의 시선에서 나는 얼핏 한 소녀를 본 것도 같다. 끊임없이 창가를 스치는 세월이 나는 괜히 미안했다.

나의 아버지와, 나의 어머니.

우리들의 아버지와, 우리들의 어머니.

아마도 나의 슬픔으로 타인을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각자의 삶의 방식이 있고, 굳이 매일같이 집을 나서 누구를 만나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좋은 곳에 가지 않더라도 그들에게는 충분히 하루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지나간 시간은 또 그대로 각자에게 어떤 의미로 남을 게 분명하다. 나는 가끔은 사람이란 게 한없이 고독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 마음의 여백을 천천히 더듬다 보면, 사람은 다들 그렇게 산다. 숱한 사연의 틈새에서 사람들은 굳이 시를 쓰지 않더라도 스스로 시가 되어 산다. 그리고 나의 부모는 이미 한참 전부터 잘 여문 시로 살아 왔다는 것을, 그 두터운 삶과 길고 긴 여백을, 나는 이제서야 안다.

하나부터 열까지 수없이 많은 마음을 함께 했던 가족이라는 존재가, 늘 나의 가장 가까운 곁에 있어 왔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이제는 내가 그들에게 힘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려 한다. 그렇게 매일을 감사하며 성실히 살아간다면 언젠가는 누군가 내게서도 우연히 시를 떠올릴 수도 있지 않을까.

아름답고 싶다. 모두가 다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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