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조정래의 첫 대하소설 <태백산맥>. 조정래 작가는 벌교를 배경으로 우리 근대사의 단면을 거침없이 보여준다.  벌교는 한국 근대사의 아픔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몇 안되는 곳 중 하나다.  벌교 속 <태백산맥>의 숨결이 남아있는 공간을 찾았다. 21세기를 사는 대학생에게, 그 숨결은 어떻게 다가올까.

▲ 보성여관 /선주호 기자

대전에서 4시간 거리. 무궁화 1441호가 겨울의 벌교로 쉬지 않고 달린다. <설국>의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벌교를 찾는다면 분명 이렇게 묘사할 것이다. ‘진트재 터널을 빠져나오니, 이곳은 꼬막의 고장이었다’ 꼬막은 벌교의 자랑이다. 매년 수만 명의 사람들이 꼬막 맛을 보러 벌교를 찾는다.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꼬막은 맛있는 먹거리에 불과하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꼬막은 벌교 주민의 생존수단이었다.

‘뻘밭이 깊으면 발이 그만큼 깊이 빠지는 걸 알면서도 들어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건 용기도 아니었고 무모함은 더구나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생계였다. 꼬막을 잡아야만 하루 목숨을 잇는 것이었다’

소설의 배경인 1950년 전후에 농지소유는 소작제도에 근간을 두었다. 그러다보니 재력과 신분의 귀천 역시 소작제도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농지를 소유하는 지주들의 횡포는 심각했다. 얼핏하면 계약을 어기기 십상이었고, 소작농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농지를 빼았았다. 농지를 빼앗긴 농민은 위처럼 꼬막을 잡으며 삶을 연명했다. 그들이 원한 것은 고작 밥 세 끼를 먹는 것이었다. 

소작농은 지주의 땅에 분노의 씨앗을 뿌렸다. 그들은 새로운 삶을 원했고, 모든 이가 평등한 세상을 꿈꿨다. 이윽고 좌익과 우익의 군사력, 그리고 세계경영을 도모하는 강대국 군사력이 벌교에 모여들었다. 농민이 뿌린 씨앗이 새빨간 꽃을 피우는 순간이다.

소화다리다. 100여 명의 사람들이 이곳에서 총살당했다. 살상의 이유는 단지 이념의 차이다. 이 1차선 다리를 보면 안타깝다. 역사의 하중이 다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듯하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소화다리는 결국 망가졌다. 심각하게 손상되어 차량이 그 위를 지날 수 없을 정도다. 다리의 역할은 단절된 지역의 연결이다. 그런 점에서 소화다리는 다리라 말할 수 없다.

얼마전 소화다리 옆에 2차선 콘크리트 다리 부용교가 덧붙여졌다. 이제는 사람도, 차량도 다리를 지나 강을 건널 수 있다. 이제 총성소리가 아닌 차량의 배기음이 들린다. 구시대의 다리는 버려지고, 새다리 부용교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허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겄구만이라. 사람쥑이는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허겄구만요’

과거의 벌교남국민학교는 없다. 빨치산의 인민재판도 없고, 심판의 총성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계엄사령군의 열병식도 더 이상 열리지 않는다. 학교는 구시대의 낡은 색을 벗어 던지고 알록달록한 색으로 새롭게 치장했다. 이제는 벌교초등학교다. 

운동장 한 편에 이승복 동상이 서있다. 한 때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치며 희대의 인기를 누렸던 그 아이다. 하지만 동상은 어느새 아이들이 빵빵 찬 축구공에 맞는 외로운 존재가 되었다. 청동색 몸과 달리 유난히 빨간 얼굴에서 오랜 세월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새로운 세상 속에 이승복 어린이는 어른들의 추억 속에 존재할 뿐이다.

중도방죽은 일본인 중도의 이름을 따 붙여진 간척지 방죽의 이름이다. 방죽 세우는 일이 힘든 일임에도 간척지 소작논을 우선 배당한다는 조건에 수많은 농민이 방죽 쌓기에 나섰다. 소유권도 아닌 소작권에 불과한데도 지원할만큼, 농민들의 농사를 짓고자 하는 열망은 간절했다. 하지만 해방 뒤, 중도가 떠난 후에도 그 땅은 농민의 손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은 지주들에게 논의 소유권이 돌아갔다.

‘워따 말도 마씨오. 고것이 워디 사람 헐 일이었간디라, 죽지 못혀 사는 가난헌 개 돼지 겉은 목심덜이 목구녕에 풀칠허자고 뫼들어 개 돼지맹키로 천대받아 감서 헌 일이제라… 하여튼지 간에 저 방죽에 쌓인 돌뎅이 하나하나, 흙 한 삽, 한 삽이 다 가난한 조선사람덜 핏방울이고 한덩어린디, 정작 배불린 것은 일본눔덜이었응께, 방죽 싼 사람들 속이 뭐쨌겄소’

중도방죽은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방죽 위가 넓고 평평해서 지금은 산책로로 쓰인다. 잠시 방죽을 따라 걷기로 한다. 왼쪽에는 강이 있고, 오른쪽에는 밭이 있다. 그 옛날 농민들이 일구어낸 간척지다. 소작농이 지주의 기득권을 상징하는 땅에서 새로운 세상을 바라며 뿌린 씨앗은 어떻게 되었을까.

깔끔하게 포장된 도로가 끝나고 비포장도로가 시작된다. 떨기나무 비슷한 정체불명의 난쟁이 식물이 여기저기 심어져있다. 누군가가 밟았는지 가지가 대부분 꺾인 모습이다. 방죽 끝에 다다르니 저멀리 벌교 읍내가 어렴풋이 보인다. 엇비슷한 난쟁이 주택들 사이로 아파트 한 채가 우뚝 서있다. 지금도 지난 과거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소작농이 어떤 씨앗을 뿌렸던, 콩 심은 데 콩 나는 법이다.

다시 벌교역이다. 일본식 소규모 역들이 으레 그렇듯 아담하다. 평화로운 이곳에서 소설은 긴 대장정을 마무리한다. 토벌대는 빨치산을 궁지로 몰고, 염상진은 수류탄으로 자살한다. 염상진의 목은 ‘악질 빨갱이 염상진 사살’이란 큼직한 글씨와 함께 벌교역 앞마당에 사흘간이나 내걸린다. 비참한 죽음이다. 아버지로부터 되물림 받은 가난을 탈출하고자 했던 염상진의 꿈은 결국 실패했다. 

▲ 현부자집 /선주호 기자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이념의 대립은 머나먼 이야기다. 하지만 손길이 닿지 않을 정도는 아니다.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무엇이 이념의 대립을 불러이르켰고, 무엇이 그들을 화나게 했는지.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귀를 막고 눈을 가린다면, 또다른 이념의 대립이 또다른 시대의 비극을 계속해서 낳을 것이다.

무궁화 1973호를 타고 대전으로 돌아가며 생각한다. 사회 초년생이 본 벌교는 과거완료형이다. 그리고 현재진행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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