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공주의 입술, 머리칼, 피부색으로 다시 읽는 독일 원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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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공주의 입술, 머리칼, 피부색으로 다시 읽는 독일 원작
  • 박소연 기자
  • 승인 2012.12.03 12: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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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문학의 거장 그림 형제의 백설공주가 탄생한 지 200년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백설공주는 디즈니에 의해 재탄생된 것이다.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를 쓴 이양호 작가는 그림 형제의 백설공주가 만만하게 각색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작가가 전하는 오리지널 백설공주를 정리했다.

▲ 빨간 입술, 검은 머리칼과 하얀 피부를 가진 백설공주 /이가영 기자

꼭 200년 전, 한 아가씨가 옷매무새를 새로 하고 이 세상에 나타났다. 남성들의 마음은 온통 그리 쏠렸고, 여성들의 마음은 부러움과 시샘으로 채워졌다. 모든 것들이 시간의 무자비함 앞에서 사그라드는데 이 마음만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더 선명해졌다. 그녀를 바라보던 남성도 여성도 속수무책이 되어 갔다. 끝내 남성은 그녀의 짝인 왕자와 그 자신을 동일시하고, 여성은 그녀와 동일시했다. 왕자 콤플렉스, 공주 콤플렉스가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 이렇게 마음을 쏟았으면서도 우리는 그녀의 이름조차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니! 우리가 모르는 것은 이것만이 아니다. 왜 그녀가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그녀를 죽음으로까지 몰고간 것이 무엇인지, 그녀에게 새 옷을 입혀 이 세상에 선보인 이가 어떤 사람인지도 우리는 모른다.

이른바 백설공주를 선보인 그림 형제는 예사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정신이었다. 형 야콥 그림은 독어독문학의 창시자로, 4천 쪽이 넘는 <독일어 문법>을 쓴 지성인이다. 괴테가 이 책을 본 뒤, 자신이 쓴 작품은 “거대한 고백의 단편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 책의 값어치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형이 지성적이었던 데 반해, 동생 빌헬름 그림은 감성적이었다. 그가 지은 <도이치 영웅전설>에 나오는 니벨룽겐, 지그프리드 등은 19세기의 시인, 예술가, 작곡가에게 큰 입김을 불어넣었다.

이렇게 두 형제는 따로따로 일을 하기도 했지만, 사실 그들은 거의 한 몸처럼 살았다. 한 집에서 살면서, 같은 직장에 다니고, 함께 책을 썼다. 그 대표적인 게 거언 200편의 옛이야기가 들어 있는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이야기 모음>과 <독일어 사전>이다. 이 사전은 깨알만한 글씨로 3만 쪽을 채우고 있는데, 지금도 독일어 사전 중 가장 크고 가장 권위 있는 사전으로 받아들여진다.

독일 민족과 관련된 인문학의 거의 모든 것, 즉 신화, 전설, 옛이야기, 독일어 사전, 독일어 문법이 모두 이 형제의 손을 거쳐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그야말로 이 두 형제에 의해 독일 민족의 주춧돌이 놓이고 기둥이 세워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림 형제에 대해 이렇게 장황하게 소개한 것은, 그들이 다듬은 이야기에 함부로 칼질과 풀칠을 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를 하고 싶어서다. 더구나 그들은 옛이야기를 한 번 쓱 내놓고 나몰라라 하지도 않았다. 45년에 걸쳐 여러 차례 그것을 깁고 다듬었다. 이제 이른바 백설공주 이야기로 들어가자. 

그녀는, 자연스런 과정을 거쳐 태어나지 않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난 뒤에야 이야기에 등장한다. 그녀를 세상에 나타나게 한 것은 한 여왕의 꿈이고 소망이었다. “눈처럼 새하얗고, 피처럼 붉고, 나무 창틀처럼 검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면!” 이 소망이 육화(肉化)되어 태어난 아이가 그녀다. 그 아이에게 여왕은 슈네비트현(Schneewittchen)이란 이름을 붙여주고 세상을 떠났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를 깊이 맛보는 길은, 소망이 육화된 아이의 이름과 여왕의 소망을 제대로 알고 느끼는 데 있다.

소망은 백옥처럼 하얀 피부, 장미처럼 붉은 입술, 숯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아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이미지는 섹시한 여성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이런 여성은 섹시하지도 아름답지도 않다. 우리나라 사람에게가 아니라 독일을 비롯한 유럽인에게 그렇다는 말이다. 백인들의 섹스 심벌인 마릴린 먼로를 떠올려보고, <미녀와 야수>에 나오는 아가씨들을 떠올려보면, 우리가 얼마나 이 이야기를 멋대로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들의 머리카락은, 금발이다.

다시 한 번 ‘바람’을 밝히면, ‘눈처럼 하얗고, 피처럼 붉고, 나무 창틀처럼 검은 아이’일 뿐이다. 붉은색의 이미지로 ‘피’를 든 것부터 심상치 않다. 붉은색의 아름다움을 말하고 싶었다면, 빨간 석류 알이나 빨간 장미에 비유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흰색, 붉은색, 검은색은 섹시함을 표상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들 색은 어떤 느낌을 주기 위한 것인가? 인간이 누구인가를 알려주기 위한 표식이고 표상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 세 색 사이에서 왔다갔다 한다. 그림 형제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 역시 세 색이 벌이는 싸움을 다루고 있다.

막 태어난 아이에게 주어진 이름, 슈네비트현은 슈네+비트+현으로 되어 있다. 현(chen)은 거의 모든 낱말 꼬리에 붙을 수 있는데, 이것이 붙어 있으면 그 낱말의 의미를 작게 하는 기능을 한다. 소룡(小龍)할 때의 小와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면 얼추 맞다. 슈네(schnee)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가리킨다. 문제는 비트(witt)인데, 이 낱말은 중세 독일어로 하얀색을 뜻하지만 단순히 색감을 표현한 말이 아니다. 독일 두덴(Duden) 출판사에서 나온 말뿌리 사전은 이 낱말이 ‘빛나는’ 뜻에서 나왔다고 밝히고 있다. 여름날 한낮에, 태양이 하얗게 되어, 흰 빛을 쏟아내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 낱말을 느낄 수 있다. 또는 크리스토프 키슬로프스키의 영화 <화이트>에 나오는 흰 빛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이 아이의 이름을 우리말로 옮긴다면 빛의 의미를 듬뿍 담고 있어야 하고, 작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야 한다. 물론 공주란 말은 들어가선 안 된다. (실제로 공주란 낱말은 이 이야기에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이런 것을 살려, ‘눈빛(雪光)아이’나 ‘흰빛아이’ ‘새하얀 눈아이’라 한다면, 이름을 우리말로 근사하게 옮겼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오고 보니까, 물음이 생긴다. 이 아이는 세 색이 뭉쳐서 생겨났는데, 그 아이의 이름엔 한 색만 나타내고 있다. 그렇다면 붉은색과 검은색은 어디로 간 것인가? 이 작품엔 붉은색이 3회 나온다. 붉은 피, 흰 두덩과 붉은 두덩으로 된 사과 하나, 붉게 이글거리는 신발.

한 쪽은 흰색으로 되어 있지만, 다른 쪽은 빨간색으로 되어 있는 의미심장한 사과. 어느 쪽에 독이 들어 있을까? 당연히 빨간 쪽이다. “그 사과는 겉보기에 무척 아름다워, 그것을 보기만 하면 누구라도 갖고 싶을 정도였어, 그렇지만 한 입이라도 베먹은 사람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었지. …(중략)… ‘자 보렴, 두 쪽으로 갈라서 붉은 두덩은 네가 먹고, 새하얀 두덩은 내가 먹도록 하자’ 그런데 그 사과는 붉은 쪽만 독이 있도록 만들어진 거였어. ‘새하얀 눈아이’는 아름다운 사과에 안달이 났지, 그 농사꾼 여자가 한 입 베먹는 것을 보고는, 더는 견디지 못하고 한 손을 뻗어서 독이 있는 쪽을 움켜쥐고 말았어. 한 입 깨물자마자 그 애는 죽어 땅으로 나동그라졌지”

이 장면 위에,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그 때 그 장면이 겹쳐 들어온다. 좋고 나쁨을 알게 하는 나무에 매달린 선악과. “이 열매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는 목소리. 그 열매를 먹은 뒤에 사람에게 찾아온 죽음.

흰 색과 맞서있는 게 붉은색임을 이 장면은 말해준다. 검은색은 그렇다면 무엇을 가리키고 있을까? 이 작품에 검은 창틀을 제외하고 검은색이 나오는 것은 딱 한 번이다. ‘새하얀 눈아이’가 죽어, 난쟁이들이 그를 묻으려고 하는 장면에서다. “이 사람을 검은 땅 안에 파묻히게 할 순 없어. …(중략)… 그러고는 유리로 된 널을 산 위에 올려놓았어”

검은색은 그러니까, 땅의 색이고 죽음의 색이었던 것이다. 서양인들에게 검은색이 죽음의 색이라는 것은 그들의 장례식을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우리도 요즘에는 검은 상복을 입지만, 이것은 서양인의 관습이다. 이런 그들의 관습 때문에, 앞에서 필자는 ‘검은 머리’를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쓰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했다. 이것은 그냥 관념이 아니다. 실제로 70년대 우리나라 간호사들이 독일에 가서 일을 할 때, 검은 머리는 애로 사항 중의 하나였다. 환자들이 검은 머리 간호사를 불쾌하게 여기고 심지어는 거부까지 했다. 20세기에도 이랬다면, 몇백 년 전에는 이보다 훨씬 심했을 것은 불문가지다.

검은색이 땅의 색이라면, 흰 색은 하늘의 색이다. 눈이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것도 그렇고, 흰색의 속성이 빛이라는 것도 그렇다. 그렇다면 붉은색은? 피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의 색이고 정욕의 색이다.

‘새하얀 눈아이’가 흰 빛을 표상한다면, 그를 죽이려 드는 여자(일반적으로 마녀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이 작품에 마녀란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는 핏빛 즉 빨간색을 표상한다. 이 여자에게서 붉은색을 떠올리는 것은, 그녀가 빨간 빛이 도는 사과를 만든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질투심에 절어 있는 그녀의 삶 때문이다. 자기를 능가하는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질투와 오만으로 똘똘 뭉친 여자, 그래서 그런 사람을 죽이지 않고는 배겨낼 수 없는 여자를 붉은색으로 표상하지 않으면 어떤 색으로 그녀를 나타낼 수 있을까?

그녀의 삶을 이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작품 끝에 보면 아주 또렷해진다. ‘새하얀 눈아이’가 ‘왕의 아들’과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에서 일어난 일이다. 

“(결혼식장에) 들어서자마자, 그녀는 새하얀 눈 아이를 알아보았어. 두려움과 충격으로 그녀는 딱 달라붙어 조금도 발을 떼지 못했지. 그 여자 앞엔 쇠로 된 집안 신발(실내화)이 놓여 있었어. 쇠신발이 석탄불에 달구어진 채, 부젓가락으로 옮겨져 있었던 거지. 그녀는 붉게 이글거리는 그 신발 속으로 발을 들여 놓고 놀아날(춤출) 수밖에 없었어. 죽어서 땅에 널브러질 때까지 말이야”

이 여자는 빨갛게 달구어진 신발 속으로 발을 들여놓고, 그렇게 살았던 것이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지 않았는데도 그렇게 했던 그녀, 그녀의 성품에서 그 까닭을 찾지 않는다면 찾을 곳이 없다. 

신발은 신화를 비롯해서 옛이야기에 아주 많이 나오는 모티브다. 그리스의 이아손과 테세우스 신화, 구약성서의 모세 이야기, 신데렐라로 알려져 있는 재투성이(프랑스어인 신데렐라의 뜻이 재투성이다)에 나올 뿐 아니라, 삼국유사 속의 혜숙스님과 관음보살 그리고 서정주 시인의 시에까지 ‘신발’이 나온다. 한 마디로 동서고금에 두루 퍼져 있는 게 신발 모티브다. 신발의 의미가 모두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대체로 신발은 그 사람의 삶을 상징한다. 자기의 삶을 기록한 것을 ‘이력서’라고 하는데, 신발 리履 지나올 력歷 글 서書를 써서, ‘신발이 지나온 기록’이라 한 것도 이런 까닭일 것이다. 

이렇기에, 붉게 이글거리는 신발을 신은 여인의 모습은 그 여인의 삶이 그러했음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같은 마당에서 한 사람은 결혼식을 거행하는데, 한 사람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욕망을 어쩌지 못해 안달하다가 끝내 죽어 널브러지는 모습을 보며, 서양인들의 인생관을 우리는 조금 엿볼 수 있다.

이렇듯이 여왕의 소망에서 등장한 빨간색, 검은색, 하얀색의 세 가지 색은 이야기 전반에 등장하며 중요한 복선이 된다. 그림형제가 설치해 놓은 장치를 상기하며 오늘 밤 독일원작 백설공주를 다시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글/ 이양호 작가 (독일 만하임 발도르프 사범대 졸,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 저자)
정리/ 박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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