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연재-2]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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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 연재-2]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 선주호 기자
  • 승인 2012.11.06 13: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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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누구나 고등학교에서 한번쯤은 들어봤을 말이다. 한글시조 어부사시사에서 반복적으로 나오는 구절이다. 윤선도는 한반도의 땅끝에 있는 보길도에서 어부사시사를 집필했다. 윤선도의 혼이 녹아 있는 섬 보길도를 찾아 어부사시사와 윤선도의 생애 및 작품세계에 대해 알아보았다.

보길도, 어부사시사 그리고 윤선도

서울에서 천리길, 보길도 가는 길은 고생스럽다. 땅과 바다에서 움직이는 교통수단을 모두 이용하고 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보길도는 이처럼 외진 곳에 위치해 예부터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었다. 때문에 아직까지 순수한 천혜의 자연을 간직하고 있다. 윤선도 역시 보길도의 자연에 반해 이곳에 터전을 잡기로 결심했다. 원래 그는 청나라에 굴복한 인조에게 실망해 제주로 향하는 길이었다. 

‘수려한 산봉우리를 발견하고 들어가보니 골짜기는 널다랗게 트이어 진기가 눈에 넘치며 좌우에서 안은 듯이 흘러 들어온 시냇물이 합쳐 큰 강을 이루고 있다… 윤선도 선생은 이 곳이 살만하다고 여기고 이에 나무를 베어 길을 열어 그 동네를 부용동이라 하고, 격자봉 밑에 집을 지어 낙서재라 이름 하였다’ <고산연보>

보길도에 들어서니 상쾌한 바닷 바람이 불어온다. 가을바람에 휘날리는 갈대가 환영의 인사를 건넨다. 파란 하늘과 푸른 바다, 초록 산천이 어우러져 한 폭의 수채화를 그린다. 윤선도는 4계절을 10수씩, 총 40수의 연시조로 표현하고 어부사시사라 이름 붙였다. 보길도 자체가 어부사시사의 배경인 셈이다. 하지만 시조의 내용과는 다르게 고기잡이배가 한 척도 보이지 않는다.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이제는 보길도 사람 대부분이 전복 양식을 한다고 한다. 변함없는 강산 속에 사람만이 변할 뿐이다.

‘앞 포구에 안개가 걷히고 뒷산에 해가 비친다, 배 띄워라 배 띄워라, 썰물은 거의 빠지고 밀물이 밀려온다, 찌그덩 찌그덩 어여차, 강 마을의 온갖 꽃들이 먼빛으로 바라보니 더욱 좋구나’ <어부사시사 춘사1>

당대 최고의 엔터테이너, 윤선도

윤선도가 건설한 마을, 부용동으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그는 51세부터 섬을 7차례 왕래하며 부용동에 25채의 건물을 지었다. 대부분이 파괴되었지만 세연정과 동천석실은 이후 복원되었다. 부용동 초입에 위치한 세연정은 조선시대 정원으로 연회와 유희의 장소였다. 맑은 연못 위에 정자가 있고,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다. 윤선도의 조경에 대한 높은 식견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세연정보다 윤선도가 더 좋아한 장소는 동천석실이었다. 산 중턱에 위치해 부용동 일대가 보이는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하는 곳이다. 올라가는 길이 다소 험해 윤선도가 스스로 올라갔을지 아니면 가마를 이용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마을 어구 수리되는 곳에 널따란 담이 형성되고 있어 깊이가 한길에 이르고 있었는데 이 담가에 정자를 짓고 세연정이라 명명했다… 마을 북쪽의 산허리에 암석이 기암절벽을 이루고 있으며, 이 육중 석문을 지나가면 식물에 덮인 푸른 석벽과 층대가 나타나는데, 이 석벽 위에 소옥을 짓고 동천석실이라 명명했다’ <고산연보>

세연정에는 널따란 두 개의 사각 기둥이 있다. 악사들이 연주를 하고, 무희들이 군무를 추는 곳이다. 연못에 있는 작은 섬조차 춤추는 무대였다고 한다. 윤선도는 무대에서 술을 마시고, 배에서 춤추고, 정자에서 시를 읊조리며 휴식을 즐겼다. 조선시대 클럽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가끔은 고기잡이배를 타고 낚시를 하고, 산을 돌아다니며 꽃을 구경했다. 보길도 섬 자체가 윤선도의 개인 리조트였던 셈이다. 한양의 관리들은 윤선도가 즐기는 모습을 보고 부러웠는지 왕에게 윤선도의 유희 생활을 고발하는 항소를 올리기도 했다.

‘윤선도는 일찍이 병란 때에 해로를 따라 강화도 근처까지 이르렀는데, 서울을 지척에 두고서도 끝내 달려와 임금께 문안하지 않았으며, 피난중이던 처녀를 잡아 배에 싣고 돌아갔습니다. 그리고도 그 일이 남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섬으로 깊이 들어가 종적을 감추고 유흥을 즐기고 있으니, 잡아다 국문하여 정죄하소서’ <인조실록>

맡은 바 책임에 최선을 다하는 윤선도

한양에서 윤선도의 행동은 보길도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관직에 나아가 청렴하게 일을 수행했고, 간신의 방해에도 왕에게 바른 말을 고하며 신하된 도리를 다했다. 이때문에 그를 시기하는 사람이 많아 계속해서 귀양 생활을 해야 했다. 그의 첫 귀양 생활은 그가 30세 되던 해에 시작되었다. 당시는 광해군의 정치가 어지러워 예조 판서 이이첨이 권세를 잡고 마음대로 휘두르던 때였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윤선도는 항소를 올렸고, 이이첨 일당에게 미움을 받아 귀양을 가게 되었다. 윤선도는 어려움이 닥쳐와도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은 확실하게 처리하는 소신이 있었다.

‘신이 보건대 근래에 팔다리 노릇을 하고 귀와 눈 노릇을 하며 목구멍과 혀 노릇을 하는 관리들이나 임금을 위해 토론도 하고 생각도 하며 규율과 질서를 세우고 관리 선발을 맡아 보는 사람들은 죄다 이이첨의 심복입니다… 전하가 신임하는 이상 그로서는 마땅히 당나라의 이필이나 육지처럼 나라에 충성을 다해야 할 것인데, 이처럼 나라를 저버리니 신은 몹시 통분하게 여깁니다’ <광해군일기>

윤선도는 귀양을 가거나 보길도 같이 먼 지방에 있어도 항상 왕을 생각했다. 그가 작성한 대부분의 한시에는 왕을 위하는 연군지정의 마음이 녹아있다. 심지어 자연을 노래하는 어부사시사에도 연군지정을 찾아볼 수 있다. 윤선도는 몸이 한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만은 왕을 위하는 충절이 깊은 신하였다.

‘흰 이슬이 내릴 즈음에 밝은 달이 떠오른다, 봉황루 아득하니 맑은 달빛을 누구에게 줄까, 옥토끼가 찧은 약을 속세를 등진 호객에게 먹이고 싶구나’ <어부사시사 추사7>

‘아아, 몸이 강호에 있어서 낭묘가 이미 멀어졌지만, 모든 소리가 다 잠잠해지고 밝은 달이 공중에 매달려 있을 때를 만나면, 언제나 아련하게도 하늘 한 모퉁이에 미인을 바라보노라 하는 의치가 일어나서, 곧 학가의 옥용과 봉림의 지우를 생각하게 됩니다’ <답인서정축>

보길도를 가기 전에는 윤선도를 그저 ‘한시만 잘 짓고, 융통성 없이 바른 말만 하는 사람’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어떤 상황이 닥쳐도 굴하지 않고 최선을 다하며, 쉴 때는 누구보다 화끈하게 노는 멋진 사람이었다. 항상 일에 치어 지친 현대인에게 있어,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과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윤선도의 모습은 꼭 본받아야할 가치 중 하나일 것이다.

윤선도가 보길도에서 기생들과 유희를 즐기던 세연정= 담양의 소쇄원, 영양의 서석지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전통정원 중 하나다 /선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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