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 기후변화, 환경 파괴. 기술의 발달과 함께 찾아온 현대 문명은 이처럼 커다란 골칫거리들을 함께 달고 왔다. 이와 같은 문제들은 책임 소재가 불분명하지만 현대 과학기술 문명의 어두운 이면임을 부정할 수 없다. 이 때문에 기술 회의론자는 과학기술의 발달을 현대 문명이 당면한 문제의 원인으로 지목하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착한 기술’이 있다면 어떨까.
 

▲ 라이프스트로우 /스미소니언 쿠퍼-휴잇 국립 디자인 박물관 제공


생명을 살리는 ‘적정기술’

라이프스트로우(LifeStraw)라는 발명품이 있다. 빨대처럼 물을 빨아들이면 오염된 물을 정수하는 라이프스트로우는 제삼 세계 빈곤층들에게 안전한 식수를 제공한다. 수인성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라이프스트로우는 다른 어떤 첨단과학보다도 소중한 기술이다. 이처럼, 첨단 기술은 아니지만 소외된 많은 이에게 필요한 기술이나 제품을 디자인하는 운동이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기술이나 디자인, 혹은 이러한 운동을 통틀어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라고 부른다.

간디의 물레와 최초의 적정기술운동

손화철 한동대학교 교수는 마하트마 간디를 적정기술의 원조라고 말한다. 간디는 영국의 직물이 들어오면서 인도의 경제가 망가진다는 것을 깨닫고, 직접 물레를 돌려 옷을 짓는 운동을 주도했다. 이 운동은 인도가 영국의 고도로 산업화한 방직산업에 의존할 필요성을 줄였다. 간디의 운동에 영향을 받은 에른스트 슈마허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는 책에서 ‘중간기술(Intermediate technology)’을 제안했다. 그는 대량생산기술의 환경 파괴와 자원 낭비를 지적하면서, 토착기술보다는 우수하지만 첨단 기술보다는 소박한 기술이라는 의미로 중간기술을 사용했다. 최근에는 현지 상황과 수준에 맞는 ‘적정한 기술’이라는 의미로 적정기술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

'소외된 90%를 위한 디자인’은 적정기술을 표현하는 유명한 캐치프레이즈다. 적정기술이 주목하는 대상은 세계의 수많은 빈곤층이다.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의 기술력, 경제력 차이는 갈수록 벌어지고 있다. 이들은 빈곤 때문에 기본적인 인권, 심지어는 생존권마저 위협받고 있다. 1차적으로 적정기술은 이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보장하기 위한 제품을 디자인하고 보급한다. 라이프스트로우와 같은 제품이 대표적인 예다.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라

라이프스트로우와 같은 기술이 ‘생존형 기술’이라면, ‘슈퍼 머니메이커 펌프(Super MoneyMaker Pump)’는 ‘생계형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슈퍼 머니메이커 펌프는 인력으로 농지에 물을 대는 펌프다. 사회적 기업 킥스타트(Kick Start)에서 개발한 슈퍼 머니메이커 펌프는 수많은 아프리카인의 농사 소득을 높였다.

저가 관개시설을 통해 수많은 빈곤층을 가난에서 벗어나게 한 IDE(International Development Enterprise)의 설립자 폴 폴락은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돈을 벌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라며 철저한 기업가 정신으로 접근해 적정기술 사업을 벌이라고 말한다. 물고기를 주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셈이다.

선진국에도 소외된 사람들은 있어

이렇게 제삼 세계와 개발도상국을 돕고자 시작된 적정기술은 선진국의 소외된 사람들을 위한 기술로도 발전했다. 미국에는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취업센터, 회의공간, 강의공간 등 다양한 목적으로 쓰일 수 있는 ‘일용직 노동자 센터’가 있다. 이 건물은 노동자들이 스스로 지을 수 있게 설계되었으며, 건물에서는 이민자를 위한 영어 수업이나, 법률적 도움 등이 제공되기도 한다. 카트리나 가구 프로젝트는 텍사스대학교와 아트센터디자인대학의 학생, 교수가 참여해 허리케인 카트리나의 폐허에서 재활용한 나무로 의자나 테이블 등의 가구를 만드는 프로젝트다. 이 외에도 다양한 적정기술이 선진국의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 사용된다.

인류를 위한 적정기술

인류를 위한 기술이라는 관점에서 적정기술의 범위는 다시 한 번 확장된다. 인류가 당면한 에너지 고갈, 환경 오염 등의 문제를 해결하려 개발되는 지속가능한 기술도 중앙집중식이 아닌 분산된 형태를 취하고 있다면 적정기술에 포함된다. 기존의 적정기술들은 슈마허가 제안한 ‘중간기술’로서의 성격이 강했다면, 이러한 기술은 ‘대안기술’로서의 성격을 강하게 띤다. 분산형 에너지 자급 시스템, 태양광 발전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특히 일본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전력의 자급을 위한 다양한 기술과 제품이 개발되었다.

적정기술의 핵심 가치, ‘지속 가능성’과 ‘인간에 대한 이해’

제삼 세계 빈곤층의 생존권부터 인류가 당면한 문제까지, 적정기술의 범위는 일견 중구난방식으로 일관된 기준이 없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적정기술은 몇 가지 원칙이 있다. 우선 적정기술을 바탕으로 한 제품이나 서비스는 작고 저렴해야 한다. 적정기술의 목표는 소외된 경제적 약자를 위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소비 수준에 가격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적정기술은 현지의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재료뿐 아니라 기술과 노동력까지도 현지화되어야만 해당 지역의 경제, 기술적 역량이 신장한다. 현지에 제품을 제작, 유통, 보급하는 연쇄적인 시스템이 만들어지면 지역 경제가 튼튼해지고, 시스템이 자립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 또한, 적정기술은 중앙집중식 대량생산이 아닌 분산형을 지향한다. 적정기술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독립성과 자립성을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적정기술은 현장성을 추구한다. 적정기술을 개발하려면 수년에 걸쳐 해당 지역을 방문하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 고찰해야 한다. 그들의 문화, 환경,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면 ‘적정하지 못한 기술’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칙의 바탕에는 적정기술이 추구하는 가치인 지속 가능성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자리잡고 있다.

실력과 팀워크, 통찰력 필요해

홍성욱 적정기술미래포럼 대표는 적정기술을 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실력을 충분히 쌓을 것, 팀워크와 역할에 대한 책임감을 가질 것, 인문학적인 통찰력을 겸비할 것”을 조언한다. 적정기술은 보기에 쉬워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가격경쟁력과 현지화를 위해 매우 높은 공학적 실력이 필요하며, 공학자 한 명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팀으로 일해야 하는 융합적인 분야이기 때문이다.

적정기술은 단순히 기술이라는 단어로 설명되지 않는다. 적정기술에는 다양한 인문학과 인간에 대한 이해가 녹아있으며, 적정기술의 목적과 가치의 최종적인 방향은 인간에게로 향해있다. 기술의 진보가 아닌 인간에게 가치를 둔 적정기술은 기술만이 아니라,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까지 함께 볼 때 그 의미가 온전히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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