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시괴담이라는 것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카카오톡 등을 통해 퍼지는 모양새인데, 그 내용이 굉장히 섬뜩하다. 택시 뒷좌석의 손잡이 부분에 솜뭉치가 있어서 이게 무엇인지 냄새를 맡으면 쓰러진다는 것이다. 이렇게 쓰러진 승객은 인신매매나 장기매매로 팔려나가는데, 동네 구멍가게 주인도 당했다는 등의 내용으로 신빙성을 더한다. 물론 대부분은 괴담이다. 복수의 언론이 취재한 결과, 10년 전 있었던 범죄를 각색한다든가 최근의 범죄를 확대 과장한 내용으로 사실과는 거리가 있음을 확인했다.

카카오톡을 종료하고 트위터로 가 보면, 이곳은 대나무숲 열풍이 한창이다. 동종업계 종사자들끼리 아이디(ID)와 비밀번호가 공개된 공용 계정을 만들어, 누가 작성했는지 모르게 글을 올리는 것이다. 억울한 이들, 억압받는 이들이 대나무숲을 찾는데, 종류도 ‘신문사 옆 대나무숲’ ‘방송국 옆 대나무숲’ ‘연구실 옆 대나무숲’ 등으로 다양하다. 대선을 코앞에 둔 정국인데도, SNS가 비정치적 이슈인 ‘택시괴담’과 ‘대나무숲’이라는 화두로 수렴되고 있는 것이다.

주목할 것은 이러한 현상을 바라보는 정부와 언론의 태도다. 신문과 방송은 자신들이 사회정의의 수호자라도 되는 양 일제히 비판 일색의 보도를 내보내고 있다. 기사의 흐름도 마치 지령을 받은 듯 동일하다. 택시괴담의 내용을 인용한 뒤 이로 인해 불안에 떠는 시민들을 인터뷰하고, 엄벌이 필요하다는 치안당국 관계자의 발언으로 끝을 맺는다.

괴담을 비판하는 것은 언론의 책무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다면 언론의 직무유기요, 심각한 논리적 오류의 자행이다. 시민들은 택시괴담 때문에 불안에 떠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극도로 불안하기 때문에 아무리 터무니없는 괴담이라도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고 주위 사람들을 보호하고자 괴담을 확산시키는 것이다. 아내와 딸을 지키려는 소시민의 처절한 몸부림을 언론은 ‘법질서파괴’ ‘사회불안 조장’등의 단어로 규정한다. 저널리즘이 이래서는 안 된다.

시민들이 극도의 불안에 떨게 된 진짜 원인은 무엇인가. 언론이 사실을 은폐하고, 누락하고, 권력과 담합했기 때문이다. 언론이 회개해야 할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치안당국도 마찬가지다. 협상타결 직전인 노사분규 현장에 들어가 노동자들을 패고 군홧발로 마구 짓밟는 깡패와도 같은 공권력, 정작 내 가족은 지켜주지 못하는 무력한 공권력을 목격하는 국민들이 경찰보다 괴담을 더욱 신뢰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대나무숲도 마찬가지다. 사회적 약자들이 제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하는 현실에서 대나무숲의 등장은 필연적이었다. 이를 ‘사회적 분노 유발’이라고 비판하기에 앞서, 대나무숲을 찾을 수밖에 없는 이들의 하소연을 정부가 옹호했는지, 언론이 대변했는지 성찰하기를 바란다. 비판과 우려는, 그 다음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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