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락커'로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는 가수 박완규씨. 최근 스페셜 앨범 'Love Story'를 발표하고 '나는 가수다'에서 5월의 가수로 선정되는 등, 그의 인기는 날로 더해가고 있다.

하지만 그의 지난 10년 간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계속하기 위해 그는 계속되는 어려움을 견뎌 왔다. 대전에서 무대를 마친 박완규씨를 근처 커피숍에서 만나 그의 지난 삶과 현재를 주제로 대화를 청했다.

지금의 전성기를 맞기까지 힘든 시간을 보냈다고 들었는데

음악 하는 사람들은 대개 순진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음악으로 생각하고 음악으로 대화하죠. 그들은 문학작품이나 자신이 영향 받은 음악인을 보며 가치관을 형성합니다. 그러다 보니 세상물정에 밝지가 못합니다. 그들의 직업관 역시 평범한 사람과 달라요. 일반적인 직업관은 일자리를 얻고, 일해서 받은 보수로 생활을 유지하는 개념입니다. 그들은 생계를 걱정하기 보다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만 합니다. 그래서 많은 음악인들이 돈이 없어 생활고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저도 주유소에서 기름 넣으며 받은 돈으로 연습하고 공연했어요.

대형 음반사에 들어가 편하게 음악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음반 제작자가 음악인들에게 제안을 했을 때, 세상물정 모르는 음악인은 자신의 음악을 보장해 준다는 말에 솔깃해 계약을 맺습니다. 처음부터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펼칠 수는 없으니 적정선에서 타협을 합니다. 그런데 두어번 경계선을 넘더니 결국에는 그 경계선마저 사라집니다. 음반 제작자가 원하는 정도의 타협을 거듭 해주다 보니 자신의 음악 정체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결국 저를 포함한 수없이 많은 음악인들이 합리적이지 못한 가요계 시스템을 거부했고, 우리들은 자연스레 도태되었습니다.

힘든 상황에 음악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거의 10년 간 버티다가 재작년 12월 중순에 포기했습니다. 지금보다 어렸던 30대 초반에는 단순한 패기로 버텼어요. 젊은 몸에서 나오는 힘찬 기운으로, 아무리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으로 견뎌냈습니다. 점점 상황이 악화되니 나중에는 가족들 때문에 억지로 버티게 되더군요. 내 아이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데,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것이 음악밖에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정말 절박한 상황이었어요. 이 때의 마음가짐은 음악의 순수 목적에서 크게 벗어납니다. 노래하러 무대에 올라가서 머리 속으로 ‘이 노래를 불러야 50만원이 생긴다’라는 생각을 하니 점점 영혼이 고갈되어 갔습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듯이 영혼이 손실되면서 몸이 아프기 시작했어요. 끝내는 목소리조차 안 나오게 되었습니다. 더이상 무대에 설 수 없어 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바로 벼룩시장 구인광고를 찾아보고, 직접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 때는 정말 가수를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힘든 시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원동력과 계기는 무엇인가

가장 큰 원동력은 음악이었습니다. 정말 힘들 때마다 지난 시절을 되돌아 봤습니다. 내가 처음 음악을 시작했을 때 내 꿈은 무엇이었을까. 친구들과 처음 모여 합주를 했을 때 내 마음 속에서 무엇이 불타올랐나. 어차피 돈 되는 음악 하기를 바라지도 않았으니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하기 위해 조금 더 버텨보자는 생각으로 끝까지 버텼습니다.

거의 자포자기했을 무렵 제 인생의 멘토인 부활의 김태원 형님께서 저를 부르셨습니다. 저에게 다시 일어설 기회를 주시려고 했어요. 시작하기 전에 김태원 형님이 검증을 하셨습니다. 모든 기운이 빠져있는 동생에게 한 가지를 질문했습니다. 잘 할 수 있겠냐고. 예전같았으면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말했을 박완규가 우물쭈물 거리는 모습에 가슴이 무너지셨을 겁니다. 자신이 알던 박완규는 세상 모든 경쟁자를 씹어먹을 것처럼 달려들던 녀석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다시 되묻지도 않으셨습니다. 김태원 형님도 28년 동안 부활을 이끌어 오시면서 저보다 먼저 어려운 시기를 거치신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 다짐만 받으셨습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다시 음악에 미칠 수 있는지 물으셨어요.

힘들었던 시절을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똑똑해지지 못할 바에야 착하고 단순해지자는 생각을 했어요. 어느 순간부터 각 대학마다 실용음악과가 생겼습니다. 음악인은 음악을 하는 것이지 음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음악은 마음으로 느끼지 않고 머리로 하려고 하면 더 배우기가 어려워요. 학자들이나 전문가들처럼 깊이의 끝은 모르더라도 현상의 본질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마음으로 인식해야 좋은 음악이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로서 자식을 부양하기 위해서는 가요계 시스템에 대해 똑똑해야 했습니다. 계약서의 이익계산에 똑똑해야 했고, 음반 한 장이 팔릴 때 나에게 떨어지는 수당을 알아야 했습니다. 그러지 못해 제 아이들은 한 번도 안정적으로 살아보지 못했지만, 전 결코 음악에 똑똑해질 수는 없었습니다.

힘든 생활 속에서 얻은 결과는 딱 하나였습니다. 삶에 녹아나듯이 똑똑한 사람이 되지 못할 바에야 착한 사람이 되자. 인자무적이란 말이 있잖아요. 전 그 말을 믿어요. 착한 사람은 적이 없고 결국에는 승리한다는 말을 굳게 믿습니다.

지난주 화요일 온게임넷에서 처음 방송된 스타크래프트2 방송 ‘박완규의 스2LIKE’의 진행을 맡았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힘의 원천은

스타크래프트에 처음 도전했던 이유는 제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항상 떨어져 살다 보니 아이들과 대화하기가 어려웠어요. 그래서 게임으로 소통하려 노력했습니다. 음악으로는 아이들과 대화하기 어려웠습니다. ‘피를 부르는 음악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니?’라고 물을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웃음)

또 다른 이유는 새로운 세대와의 소통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학생들의 언어를 들어보면 거의 외계어 수준입니다. 그런 그들과 대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게임을 선택했어요. 중견가수라고 해서 40대 팬들만 콘서트에 찾아오지는 않습니다. 한 예로 조용필 형님의 콘서트에는 모녀가 함께한 경우가 빈번합니다. 어린 관객들과 소통하려면 그들의 언어와 취미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대마다 분명한 패러다임이 존재합니다. 지금은 돈과 권력이 아닌 언어와의 전쟁이라 생각합니다. 상호 계층간, 세대간에 언어 소통이 원활하지 못하니 사회에 여러 마찰이 생깁니다. 게임을 통해 기성 세대인 제가 신세대인 학생들과 새로운 언어로 소통하고 감성을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현재 학생-교수-총장 간의 신뢰가 붕괴된 KAIST가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학우들이 지녀야 할 것이 있다면

학생들간에 소통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학생 개개인마다 깊은 학문을 연구하다 보니 시간을 많이 낼 수 없을 거에요. 그래도 시도해 보세요. 저도 팬들과 항상 소통하려 노력합니다. 아무리 피곤해도 팬카페 ‘Rock will never die!’를 통해 팬들과 대화하려 합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짜투리 시간을 이용해 팬카페를 확인합니다. 맨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니 목 디스크가 올 정도에요.(웃음) 이런 노력이 있어야 기존 기성세력에 맞설 수 있다고 봅니다. 충분한 소통을 배제한 채 자신들의 똑똑함만을 무턱대고 관철시키려 하면, 기성세력은 그것을 이용하려 할 뿐입니다. 학생들 간에 소통을 하고 의견 통일이 우선시되어야 KAIST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KAIST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제가 요즘 제일 좋아하는 광고가 있어요. 초등학교 교실에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연예인이 꿈이라고 발표하고 있는 와중에 나레이션으로 ‘연예인도 좋지만 대한민국에는 과학자도 필요합니다’라고 나오는 광고입니다. 연구하던 학문이 인정을 받아 명예를 얻고, 부를 축적하는 모습을 바라며 공부하지 마세요. 여러분은 지금 현재가 가장 멋있습니다. 현대사회는 성공한 모습들만 빨리 이끌어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그 때까지 한참 걸리는 사람들이에요. 그 시기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KAIST 대학생들의 모습 자체가 멋있습니다. 그 자부심을 잊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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