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 다시 격화된 영토분쟁... 누구의 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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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다시 격화된 영토분쟁... 누구의 땅인가
  • 이경은 기자
  • 승인 2012.09.12 01: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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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함에 따라 또다시 일본과의 독도 영유권 다툼에 날카로운 대립구도가 형성되었다. 1952년 우리나라 이승만 대통령이 독도를 포함한 독자적인 어업구역 평화선을 선포하면서 일본이 이를 항의하기 시작한 이래로, 독도는 끊임없이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동아시아에서 도서 분쟁이 이는 지역은 독도뿐이 아니다.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는 훗카이도 부근의 섬들(러시아 명칭 쿠릴열도)이,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는 조어도열도(일본 명칭 센카쿠 열도)가 분쟁이 되고 있다. 중국과 베트남 사이에서 무력충돌까지 불러일으킨 시사군도 분쟁이나 중국, 베트남, 필리핀 등 다수 나라의 주장이 뒤엉킨 난사군도 분쟁도 있다.

ⓒ 송채환 기자

한국(독도) vs. 일본(다케시마)

최근 우리나라와 일본의 독도 갈등은 일본 정부가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에 강경하게 대응하면서 급박한 정세에 들어섰다. 지난 3일 겐바 고이치로 일본 외상은 도쿄방송(TBS)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다케시마(독도의 일본명)는 에도시대부터 일본이 영유권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은 고대사부터 입장의 차이가 분명하다. 우리나라는 독도를 ‘우산도’, ‘석도’ 등으로 표기해왔으며, 일본은 독도를 ‘송도’, 울릉도를 ‘죽도’로 표기하다가 17세기 이후 명칭에 혼란을 겪고 1905년부터 독도를 ‘죽도’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나라는 다양한 고서에 표기된 우산도가 독도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우산도가 강원도와 울릉도 사이에 표기된 것 등 각각의 고서에서 우산도의 위치가 실제 독도의 위치와 차이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고서에 표기된 우산도는 가공의 섬이거나 독도가 아닌 현재의 죽도라는 것이다. 이때 일본이 주장하는 ‘죽도’는 독도나 울릉도의 일본 고서 표기방식 ‘죽도’가 아니라 현재 울릉도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부속 섬을 뜻한다.

고서의 문장 해석 자체도 문제가 되고 있다. 조선 시대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우산, 무릉 두 섬이 동해 가운데에 있고 두 섬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아 서로 왕래할 수 있으며 바람이 불고 날이 맑으면 바라볼 수 있다. 신라 시대에는 우산국, 혹은 울릉도라 불렀다(于山 武陵二島 在縣正東海中 二島相距不遠 風日淸明 則可望見 新羅時 稱于山國 一云鬱陵島)’라고 쓰여 있다.

이를 일본은 ‘울릉도와 죽도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아 동해안에서 바라보았을 때 두 섬을 바라볼 수 있다’라고 해석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동해안에서 보았을 때 울릉도에 가려 죽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을 바탕으로 ‘울릉도와 독도 사이의 거리가 멀지 않아 두 섬에서 서로를 바라볼 수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이런 식의 해석 논란이 계속되는 것이다.

일본은 1905년 독도를 무주지로 규정짓고 시마네 현에 편입했다. 우리나라는 외교권을 강탈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이를 막는 것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에 우리나라는 독도가 1900년에 대한제국 칙령 제41호에 의해 대한제국의 영토로 선포되었기 때문에 무주지가 아닌 유주지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칙령에는 ‘독도’ 대신 ‘석도’라고 표기되어있는데, 일본은 이 ‘석도’가 독도라는 증거가 없다고 반박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석도’가 독도를 울릉도 방언대로 표기한 것이라는 입장이다. 울릉도 주민들이 바위와 암초로 이루어진 바위섬 독도를 ‘돌섬’ 혹은 ‘독섬’이라고 부르던 것을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 ‘석도’라는 것이다.

전후 반환조약에 관한 부분도 논란이 되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은 항복하며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에서 일본이 포기하는 영토에는 독도가 명시되어있지 않다. 본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1차 초안부터 5차 초안까지는 독도가 표기되었다. 그러던 도중 정치고문 윌리엄 조세프 시볼드가 이를 재고해보라는 전보를 미국에 보냈고, 6차 초안에서 독도는 일본이 포기해야 할 영토에서 빠졌다. 그러나 영국, 호주, 뉴질랜드 등 다른 연합국들은 이 초안에 반대했다. 영국 정부는 미국 정부와 별개로 독도가 한국 영토에 포함된 지도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거듭된 초안 작성 끝에 결국 독도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한국정부는 주미한국대사를 통해 일본 포기영토에 독도를 넣어달라고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그런데 연합국 최고사령부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 일본의 영토가 아닌 지역을 명시한 지령 SCAPIN 제677호를 발표한 적이 있었다. 이 지령 3항에는 일본 영토 제외 지역에 독도가 포함되어있다. 우리나라는 이를 근거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서 규정한 일본의 영토에 독도가 제외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SCAPIN 제677호 5항에서 ‘이 지령에 있는 일본의 정의는 특히 지정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앞으로 본 사령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지령, 각서 또는 명령에 적용하게 된다’고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은 6항의 ‘이 지령 중의 조항은 모두 포츠담 선언 제8항에 있는 작은 섬의 최종적 결정에 관한 연합국 측의 정책을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때문에 한국의 주장은 무효라는 입장이다.

포츠담 선언은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1945년에 연합국이 일본에 항복을 권고하는 내용과 종전 이후 대일처리방법을 담아 발표한 공동선언이다. 이 선언 제8항은 일본의 영토를 혼슈, 홋카이도, 규슈, 시코쿠 섬 및 연합국 측이 추후에 결정할 그 외의 작은 섬들로 제한했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후 이 선언을 수락했다. 우리나라는 SCAPIN 제677호가 포츠담 선언 후에 만들어졌으므로 3항에 구체적으로 언급된 일본 영토는 사실상 포츠담 선언 제8항에 표현된 ‘작은 섬들’을 정의했다고 본다. 일본은 6항 때문에 3항이 반드시 ‘작은 섬들’을 정의했다고 볼 수는 없다는 의견이다.

일본(북방영토) vs. 러시아(쿠릴열도)

일본 홋카이도 북동쪽에는 하보마이, 시코탄, 쿠나시리, 에토로푸 네 개의 섬이 있다. 그리고 이어서 유루푸 등 50개가 넘는 섬과 바위섬이 줄지어 있는데, 이를 쿠릴열도라 부른다. 러시아와 일본 간의 분쟁은 양국이 체결한 국제문서 조약의 해석과 ‘쿠릴열도’라는 영토의 해석이 문제가 된 것이다.

일본과 러시아는 1855년 러·일 화친조약을 통해 양국의 경계선을 에토로푸와 유루푸 사이로 확정 짓고 사할린은 공동운영지역으로 남겨두었다. 그러나 이후에 러시아가 사할린에 대한 식민화 작업을 계속하자 1875년 양국은 사할린과 쿠릴열도를 교환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일본은 러시아의 사할린 영유권을 인정했고 대신 쿠릴열도 전체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난 후에는 1905년 포츠머스 강화조약에 의해 사할린 남부지역도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1951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하면서 소련이 쿠릴열도를 점령했다. 그 후 일본과 연합국 사이에서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2조에는 ‘일본은 쿠릴열도와 사할린 섬의 일부 그리고 1905년에 체결된 포츠머스조약에 따라 일본에 주권이 인정되었던 주변 섬들에 대한 모든 권리와 법적 근거 및 주장을 포기한다’라고 적혀있다. 이 조항에 따라 일본은 쿠릴열도와 사할린 섬의 남부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잃은 셈이다.

그러나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는 일본이 포기한 영토가 어떤 나라에 귀속되는지가 명시되어있지 않다. 러시아는 1945년 얄타회담의 내용을 근거로 이 영토가 당시 소련(현재의 러시아)에 귀속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얄타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을 포함한 연합국 측의 지도자들이 나눈 회담이다. 이때 소련은 독일 항복 후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는 대가로 ‘사할린 남부지역과 그에 인접하고 있는 모든 섬의 소련에의 반환’과 ‘쿠릴열도의 소련에의 양도’를 연합국 측에 요구했다.

그러나 일본이 얄타회담의 당사자가 아니었으므로 일본은 이 협정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당시 소련이 샌프란시스코 평화회담에 가담하지 않은 점도 문제가 된다.

한편 ‘쿠릴열도’의 정의가 명확히 정해져 있지 않은 점도 논쟁거리가 되고 있다. 1855년 화친조약과 1875년 사할린과 쿠릴열도 상호교환협정, 1905년 포츠머스조약에는 쿠릴열도의 정확한 영토묘사가 없다. 홋카이도 북동쪽 4개의 섬이 쿠릴열도라고 인정되면 이는 러시아의 영토가 되고 반대의 경우에는 일본의 영토가 되는 것이다.

1956년 소련은 일본과 양국 간의 전쟁을 끝내는 공동선언을 하면서 선언문의 제9항에서 앞으로 일본과의 평화조약이 체결되면 하보마이 섬과 시코탄 섬을 일본 측에 반환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현재까지 양국 간의 평화조약은 체결되지 않고 있다. 2001년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두 섬을 반환할 수 있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으나 일본은 오히려 북방영토 4개 섬 모두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지난달부터 오는 17일까지 러시아가 사할린과 쿠릴열도 점령 전투에서 숨진 소련군을 기리기 위한 추모항해를 목적으로 이 지역에 전함을 파견하는 등 러시아가 실효지배를 강화해 양국 간의 갈등은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중국(조어도열도) vs. 일본(센가쿠열도)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도 일본과 도서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다. 양국은 일본 오키나와 서남쪽에 있는 8개의 무인도의 영유권을 놓고 다툼을 벌이고 있는데, 이 열도를 조어도열도라 한다. 조어도열도는 1969년 근처 해역의 석유 부존 가능성이 발표돼 주목의 대상이 되면서 중국과 일본의 영토 분쟁을 불러일으켰다.


조어도열도 근처에는 일본의 류쿠 섬이 있는데, 류쿠 섬은 예전에 류쿠 왕국이었다. 중국은 16세기 명나라 때 ‘명나라에서 출발하여 8개의 바위섬 조어도를 지나 류쿠로 간다’라는 기록과 1893년 청의 서태후가 조어도를 자국민에게 하사하는 내용의 칙서를 내렸다는 것을 근거로 조어도가 중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일본은 조어도열도는 류쿠 왕국의 영토였으며 1870년 일본이 류쿠 왕국을 병합하면서 영토권을 계승했다고 주장한다.

이후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1895년 조어도열도는 오키나와 현으로 편입되었고, 청과 일본 사이에는 시모노세키에서 강화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중에는 청이 일본에 대만을 할양하는 조항이 있었는데, 여기서 중국과 일본의 의견의 차이가 발생한다. 중국은 조어도열도는 대만 일부로 일본으로 할양된 것이라고 본다. 일본은 조어도열도가 강화조약과 상관없이 무주지로 판단되어 선점에 의해 취득된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항복하면서 1951년 미·일 강화조약으로 인해 조어도열도는 미국으로 영유권이 이양되었고, 일본은 대만의 영유권을 포기하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조어도열도는 오키나와 관할로 얼마간 미국 통치하에 있다가 1971년 미·일간 오키나와 반환협정 서명에 의해 일본령으로 편입되었다.

중국은 조어도열도가 대만의 일부이기 때문에 일본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한 후로 대만을 반환하면서 조어도열도도 함께 반환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일본은 조어도열도는 대만과 별도의 영토라고 이야기하며 1971년에 체결된 오키나와 반환 협정에 ‘조어도열도’가 명시된 점을 근거로 든다. 1895년부터 계속된 일본의 실효지배에 대해 석유 부존 가능성이 발견된 1969년까지 중국과 대만이 일본의 주장에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도 일본 측의 조어도열도 영유권 주장의 근거가 되고 있다.

조어도열도 문제는 국경선 문제와 함께 석유 관련 경제적인 손익문제가 얽혀있어 계속된 외교적 마찰과 민간차원의 항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1978년, 1988년, 1996년에는 일본의 우익 민간단체가 조어도열도에 등대를 설치했으며 1998년에는 홍콩의 시민단체가 탑승한 선박이 일본 해안경비대의 저지를 받은 후 침몰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지난달 24일에는 일본의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조어도열도에 대해 강력한 주권 수호 주장을 하자 중국 정부가 ‘자국의 영토주권을 파괴하는 행위’라며 강하게 반발하기도 했다.

ⓒ 송채환 기자

시사군도와 난사군도

중국은 일본이나 우리나라 외에도 여러 나라와 영토문제로 얽혀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중국 해남도 남쪽에 위치한 2개의 군도와 암초로 구성된 시사군도 분쟁이 있다.

시사군도 분쟁은 중국과 베트남 간의 분쟁으로 1970년대에 발생했다. 1970년 혹은 그 이전부터 중국은 시사군도의 동쪽 군도를 점령하고 있었고 베트남은 서쪽 군도를 점령하고 있었다. 1971년부터 동쪽 군도뿐 아니라 서쪽 군도까지 해양조사의 범위를 넓혔고, 1974년에는 중국 어선이 베트남이 점령하고 있던 서쪽 군도에 진입했다. 이에 베트남 해군이 동쪽 중국 어선에 발포했고, 본격적인 무력충돌로 이어졌다. 이 해전은 결국 중국의 승리로 끝났고 현재까지 중국이 실질적인 점유권을 행사하고 있다.

한편 난사군도의 영유권 분쟁은 훨씬 복잡하다. 난사군도는 남중국해의 남단에 위치한 해역인데 약 100개의 소도, 사주, 환초, 암초로 구성되어있다. 난사군도 분쟁에 연관된 나라는 6개국으로, 중국, 대만, 베트남, 말레이시아, 필리핀, 부루나이다. 이 분쟁 역시 조어도열도 분쟁과 마찬가지로 1960년대에 난사군도에 석유 부존 가능성이 발표되면서 시작되었다.

난사군도에는 각 나라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어 분쟁이 무력충돌로 이어질 위험성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난사군도에서 대만이 공개적으로 실탄 훈련을 벌이면서 특히 대만과 치열한 영유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베트남 정부가 이를 강력히 반발하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지난 5일에는 중국을 방문한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이 공동기자회견에서 중국과 아세안(ASEAN)이 난사군도에 대해 남중국해 행동수칙을 제정할 것을 촉구하는 발언을 해 주목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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