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하얀 메밀꽃 물결 사이로, 봉평을 사랑한 작가 이효석의 향내가 실려온다

가을이다. 이맘때면 많은 사람이 봉평을 찾는다. 흐드러지게 핀 메밀꽃과 봉평을 대표하는 작가 이효석의 흔적을 보기 위해서다. 이효석은 봉평을 배경으로 <메밀꽃 필 무렵>을 완성했다. 현재 봉평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한 마음에 메밀꽃이 만개할 즈음 그곳을 향해 출발했다.
 

봉평에서의 삶 14년
105년 전, 이효석은 평창군 봉평면에서 태어났다. 4살 무렵 부친을 따라 상경했지만, 2년 뒤 다시 돌아와 봉평면에서 서당을 다녔다. 이때의 이효석은 강에 가서 물놀이와 고기잡이를 하고, 풀밭과 거리를 뛰놀며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영서의 기억이라고 하여도 나에게는 읍내의 기억이 있고 마을의 기억도 있고 산골의 기억도 있으나 가을 기억으로는 산과의 청밀과 곡식과 농산물품평회의 기억이 가장 또렷하다’ - <영서의 기억>
 
이효석은 8살 때 집에서 40km 떨어진 평창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집에서 먼 거리 때문에 학교 근처에서 하숙하며 6년 동안 학교에 다녔다. 주말이나 방학에 집에 가면 학교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 밤늦게 도착했다고 한다. 소년 이효석은 길을 걸으며 푸릇한 들과 산, 메밀밭 등의 아름다운 자연을 가슴 깊이 새겨 두었다. 훗날 여러 작품에 이때의 경험을 녹였으며, 당시에 지났던 봉평장터, 노루목 고개, 흥정천 등은 <메밀꽃 필 무렵>의 배경이 되었다.
 
‘들은 온통 초록 전에 덮여 벌써 한 조각의 흙빛도 찾아볼 수 없다… 눈이 보얗게 깔렸을 때에는 흰빛과 능금나무의 자주빛과 그림자의 옥색빛 밖에는 없어 단순하기 옷 벗은 여인의 나체와 같이 것이…’ - <들>
 
세월에 따라 변모한 시골 장터
주인공 허 생원은 옷가지를 파는 장돌뱅이다. 대부분 장들이 5일마다 열리기 때문에 그들은 한곳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맨땅에 말뚝을 박고 휘장을 넓게 치고, 바닥에 멍석을 깔고 그 위에 팔 물건을 벌여 놓았다. 봉평장의 장돌뱅이들은 생선, 생강 등의 음식물과 더불어 다양한 생필품을 팔았다. 당시 교통이 불편해 봉평 주민이 생필품을 구하는데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허 생원은 말뚝에서 넓은 휘장을 걷고 벌여 놓았던 물건을 거두기 시작하였다. 무명 필과 주단 바리가 두 고리짝에 꼭 찼다. 멍석 위에는 천 조각이 어수선하게 남았다… 어물장수도, 땜장이도, 엿장수도, 생강장수도, 꼴들이 보이지 않았다… 축들은 그 어느 쪽으로든지 밤을 새며 육칠십리 밤길을 타박거리지 않으면 안다’  - <메밀꽃 필 무렵>
 
지금의 봉평장 모습은 과거와 사뭇 다르다. 명색은 5일장이지만, 관광객들이 끊임없이 오는 덕에 콘크리트 건물을 짓고 항시 물건을 판매하는 상인들이 늘어났다. 게다가 생필품을 다른 곳에서 사다 보니, 봉평장은 관광객을 상대로 지역 특산물을 파는 메밀전문 장터가 되어버렸다. 이곳을 수없이 다녔을 허 생원도 지금의 봉평장은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고속로에 깎여버린 가파랐던 고개
노루목은 허 생원이 봉평장과 대화장도을 오가는 길에 지났던 험난한 곳이다. 아울러 소년 이효석이 집에 가는 길에 반드시 넘어야 했던 고개이기도 하다. 그는 훗날 이곳이 무서웠다고 추억한다. 학교에서 새벽같이 출발해도 노루목에 이르렀을 때는 날이 이미 어두워진 후였다. 희미한 달빛에 의지해 나무가 우거진 고개를 홀로 넘는 일은 다 큰 어른도 마다할 일이다. 노루목 근처에 위치한 늪도 어린 이효석을 두렵게 했는데, 그는 당시의 기억이 인상 깊었던지 이를 주제로 한 수필을 작성하기도 했다.
 
‘노루목 고개를 바로 넘은 곳에 산비탈을 끼고 기다란 늪이 있었다. 이끼 끼인 푸른 물이 언제든지 고요하게 고였고 골과 잔버들이 군데군데 모였고 넓은 진펄이 주위를 둘러쌌었다. 부근에는 인가가 없어서 가랑비나 오는 진날이면 근처 일대가 더 한층 깨끔하고 무서웠다… 깊고 우중충한 늪 속에는 비록 이심이가 아니라도 확실히 두려운 그 무엇이 있을 것은 사실이다’ - <늪의 신비>
 
노루목은 찾아가기가 난해하다. 영동고속도로에 잘리고 묻혀 고개의 형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반쪽짜리 노루목을 주민에게 물어물어 마침내 찾을 수 있었다. 누가 보아도 사람이 올라가다 미끄러질 정도로 가파르지는 않았다. 산비탈을 끼고 있다던 늪의 흔적 역시 찾을 수 없었다. 기념비만이 남아 이곳이 한때는 험난한 고개였음을 알려준다.
 
‘장터에서 장터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 고개가 앞에 놓인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내렸다. 둔덕은 험하고 입을 벌리기도 대견하여 이야기는 한동안 끊겼다. 나귀는 건뜻하면 미끄러졌다. 허생원은 숨이 차 몇 번이고 다리를 쉬지 않으면 안 되었다’ - <메밀꽃 필 무렵>
 
상업적으로 이용되는 문학인의 생가
현재 이효석의 생가에는 그의 일가가 살고 있지 않다. 이효석의 부친이 오래전 집을 팔고 이사를 간 까닭이다. 새로 얹은 기와 때문에 집은 그다지 오래되어 보이지 않았다. 몇 년 전 지붕 누수 때문에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바꿨다고 했다. 뒤뜰의 장독대와 쌓여 있는 장작더미 덕분에 제법 시골집 분위기는 풍겼다. 마당 한편에는 물레방아가 있다. 허 생원이 서 서방네 처녀와 정을 나눴던 방앗간 물레방아를 재현한 것이 아니기를 애써 바란다. 플라스틱 수도꼭지에서 흐르는 물로 돌아가는 물레방아가 어딘지 부자연스럽다.
 
생가 바로 옆에는 메밀음식을 파는 가게가 있다. 주민의 말을 들어보니 생가에 사는 가족이 운영하는 곳이라고 한다. 이효석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생가가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다. 이곳에 이효석과 관련된 것이라곤 보존 상태조차 양호치 못한 집 한 채뿐인데 말이다.
 
작품 속 모습이 그대로 남은 봉평의 자연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봉평의 많은 곳이 옛 모습을 잃어버렸다. 세월의 흐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 해도, 지나친 관광 위주의 상업적 개발은 문제가 있어 보였다. 그 와중에도 봉평의 자연은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메밀밭, 푸른 산천은 여전히 아름답다. 이효석은 이 변함없는 자연을 동경해 봉평을 작품 속에 담아낸 것이 아닐까.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 <메밀꽃 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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