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은 실학의 선구자였던 이익의 글을 접하고 실생활을 위한 목적으로 유교 경전을 공부할 것을 마음먹었다. 그는 관직으로 나아갔지만 1801년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 탄압사건에서 천주교인으로 지목받아 유배를 가게 된다. 다산은 유배기간 동안 학문에 정진해 유배에서 풀려날 때까지 500여 권의 책을 저술했으며, 유배에서 풀려난 후에도 자신의 학문체계를 정리하며 다양한 저서들을 내놓았다. 그중에서도 <목민심서>와 함께 손꼽히는 <경세유표>, <흠흠신서>는 다산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어 ‘일표이서(一表二書)’라고 불린다.

다산 초기 개혁안, <경세유표>

다산이 <경세유표>는 세 대표작 중 가장 먼저 쓰이기 시작했지만 완성되지 못한 작품이다. 총 44권 15책으로 구성된 이 책은 조선 후기에 만연했던 주자학의 말기적 폐단을 지적하고 중앙 법규의 개혁을 제시했다. 먼저 개혁의 원리와 전체적인 설명을 한 후, 기존 제도의 문제점 및 이와 관련된 실제 사례를 언급하고 뒤이어 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목민심서>가 기존 법의 테두리 안에서 시행될 수 있는 개혁안이라 한다면 <경세유표>는 보다 근본적인 체제를 바꿀 것을 제안한 개혁안이었다.

실학을 기반으로 한 구체적인 개혁안

<경세유표>에서 다산이 제시한 개혁안은 매우 구체적이다. 다산은 우선 조선 중앙관서들이 담당한 부분에 대한 개혁원리를 각각 제안했다. 또 그는 토지제도의 개혁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토지를 국유화하고 그 중 9분의 1을 공동경유지로 만들어 조세를 충당하며 나머지 토지의 수확물은 농민이 소유하게 하는 정전제를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농민과 토지에만 세금이 부과되는 조세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다른 분야에 종사하는 백성에게도 세금을 걷을 것을 권고했다. 또한, 환곡제도의 폐해를 비판하며 새로운 구휼제도를 제안하기도 했다.

백성을 생각하는 마음이 잘 드러나

<흠흠신서>는 다산이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 완성된 책이다. ‘흠흠(欽欽)’이란 걱정이 되어 잊지 못하는 모양을 말한다. 다산은 법의 집행과정 중 억울한 벌을 받게 될 백성이 나오지 않도록 항상 걱정해 신중해야 한다는 신념하에 이 책을 저술했다. 30권 10책으로 구성된 <흠흠신서>는 중국 법전 <대명률>과 조선 법전 <경국대전>에 나타난 형벌의 기본원리와 이념을 요약해서 서술했다. 그리고 자신이 곡산 부사와 형조참의로 있을 때 관여했던 사건들과 유배지 강진에서 있었던 판례를 중국의 판례와 함께 소개해 읽는 이의 이해를 도왔다. 아울러 다산은 사건에 이용되는 문서의 양식과 심문과정에서의 사실인정 기술 등을 상세하게 설명해놓아 <흠흠신서>를 이론만 있는 책이 아닌 실천서로 만들었다.

다산의 인본주의가 돋보여

<흠흠신서>에서 다산은 판결할 때 무엇보다 신중할 것을 강조했다. 판결 시에 범인에 대한 하찮은 연민의 정은 경계하도록 주의했으나 잘못된 판결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될 백성이 나오지 않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수사나 판결 과정 중에는 공정성을 으뜸으로 하고, 작고 세세한 일까지 정확하게 분석해 사건의 경위를 밝히고 현명한 판결을 내릴 것을 권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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