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새벽 우리는 또 한 명의 학우를 떠나보냈다. 공교롭게도 우리를 슬프게 했던 소식들이 연이어 들려왔던 작년 4월과 같이, 올해 4월도 대지는 더없이 맑고 푸르며, 캠퍼스 곳곳에는 봄꽃이 만개해 있다. 이처럼 눈부신 계절, 아름다운 캠퍼스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고독하고 절망적인 공간이었다는 것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우리 곁을 먼저 떠난 김 학우를 추모하며, 다시는 이런 슬픈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구성원 모두는 각자의 삶을 뒤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 학교 학우들의 학업과 삶의 터전인 캠퍼스, 그것도 기숙사에서 우리 학우가 절망을 이기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러한 선택을 한 이유가 무엇이든 김 학우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했고, 도와달라는 무언의 절규를 인식하지 못했던 우리들은 학우와 공동체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개인주의에 매몰된 우리들의 삶을 반성해야 할 것이다. 학교와 제도의 책임을 묻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우리 학교가 스트레스가 많고 경쟁이 치열한 것은 사실이다. 다른 학교에 비해 더 심한지, 비슷한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많은 학생이 학업에 부담을 느끼고 있고, 몇몇 학생은 학업 부담이 한 원인이 되어 우울증이나 공황장애와 같은 정신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다. 영어강의 전면화, 차등수업료 제도 등 경쟁을 부추기는 제도가 학업의 스트레스를 더 크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단지 몇 제도를 수정하는 것만으로 우리 학교 학생들이 겪고 있는 학업의 부담을 모두 해소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학생들이 겪고 있는 정신적 스트레스는 원인이 복잡하고 해결이 쉽지 않다.

문제가 복잡하고 난해할수록 해결책은 원칙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 학교의 적지 않은 학생들에게 학업은 더욱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해, 혹은 더 나은 직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되지만, 학업의 진정한 대가는 진리 탐구 과정의 희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우리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면 좋은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좋은 직장에 취업할 수 있을 지 모르지만, 우리 학교의 존재 의의는 학생들에게 물질적으로 더 풍요로운 미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의 즐거움, 진리 탐구의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학교는 제도를 보완해나가야 하고, 학생들과 교수들은 동료, 제자의 고통에 좀 더 귀 기울이고, 누군가가 도움을 청해오기 전이라도 먼저 다가가 도와줄 수 있는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제도 개선과 공동체 의식의 제고만으로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는 안일한 기대는 버려야 한다.

4월의 비극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당면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한 선택 가능한 수단 가운데 자살은 없다는 것을 모두가 받아들여야 한다. 또한, 공부가 두려움의 대상, 경쟁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즐겨야 할 목적이라는 학문의 즐거움을 회복해야 할 것이다. 너무도 빨리 우리 곁을 떠난 김 군을 추모하면서, 우리 모두는 KAIST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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