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포용되지 못하고 있는 문화 다양성… 다문화와 관련된 개념적 혼란에 따른 오류들 많아

<편집자 주> 우리 학교는 세계화를 지향하는 만큼 다양한 국적의 학우들이 함께 생활한다. 따라서 다문화는 우리와 동떨어진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어우러지는 ‘다문화’에 대한 담론이 대두되는 가운데, 다문화란 과연 무엇이며, 그 문제점과 해결 방안에 대해 들어본다.
 

▲ ⓒ 이가영 기자

한국의 새로운 키워드, '다문화'

200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다문화'는 한국의 공론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 중의 하나가 되었다. 1990년대를 통틀어 2백 여 건에 불과했던 다문화 관련 언론 보도는 2007년에는 무려 3만 여 건에 육박하는 것으로 폭증했다. 2011년 11월 공식적으로 집계된 다문화 관련 연구 논문은 6천 여 건에 이른다. 다문화가 방송, 영화, 광고 등의 낯익은 소재가 된 지는 이미 오래다. 거의 모든 정부 부처와 지자체들은 경쟁적으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다문화 관련 사업에 적극 관여하고 있다.
 
한국, 동질화 압력이 강한 나라

이처럼 단기간에 다문화가 주류 담론으로 부상했다는 것은 놀랍고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의 근대화를 관류하는 키워드는 다문화가 아니라 ‘단문화’였기 때문이다. 압축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강요된 문화적 전체주의는 한국을 세계에서 유례없이 동질화의 압력이 강한 사회로 변모시켰다. 그 때문에 수많은 정치, 사회, 문화적 소수자들이 희생양이 되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런 이유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다문화라 함은 ‘다도(茶道)’나 ‘차(茶)문화’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동네 유치원의 꼬마들까지‘다른 것은 틀린 것이 아니며, 다름에 근거한 차별은 유치하다’는 것쯤은 다 아는 시대가 된 것이다.
 
다문화에 관한 토론과 합의는 어디에

 
주목할 점은 다문화가 화끈한 속도로 전파되고 관련 제도와 인프라가 속속 만들어지고 있음에도 정작 그에 관한 사회적 토론이나 합의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이다. 그 결과 누군가가 ‘있을 법하지 않은 일’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모순된 효과들이 만들어지고 있다. 
 
다문화 담론의 확산에 따른 모순된 효과
 
다문화 담론이 폭발적으로 확산하고 있음에도 이주민을 비롯한 하위문화 집단들은 여전히 주류 사회에 포용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들 대부분은 여전히 ‘합법적인 비존재’이거나 ‘권리를 가질 권리에서조차 배제된’ 사회적 타자들일 뿐이다. 그들에게는 거주할 자유, 노동할 자유, 가족과 함께 살 자유 등의 기본권 자체가 허용되지 않는다. 시민의 문화 다양성 에 대한 감수성과 수용성 역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이주민과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주류 사회의 친밀감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들에 대한 편견과 고정 관념, 피부색과 출신 국가에 따른 일상에서의 차별은 별로 줄어들지 않고 있다. 주류 사회의 한국인들에게 다문화 사회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더럽고 냄새나고 위험한’ 불온한 존재들일 뿐이다.
 
신화적인 단일민족주의에 근거하는 인종차별의 항존하는 위험성에 대한 국제 사회의 우려 역시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임에도 불구하고 문화적 개방성과 소수자 인권 분야에서 한국의 위상은 세계 최하위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것은, 이러한 모순된 효과들이 인종차별적인 국수주의자들의 정치세력화를 정당화해줄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외국인 반대’, ‘강제 귀환’, ‘민족 말살 중단’등의 자극적인 구호를 앞세워 다문화 담론의 확산을 저지하고 다문화 사회의 도래 자체를 부정하려 한다.
 
다문화사회 = 다문화주의?
 
다문화주의의 이름으로 우리를 당혹스럽고 불편하게 만드는 이러한 모순된 효과들이 만들어지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여러 이유 가운데 다문화 사회와 다문화주의에 대한 정확한 개념 규정, 그리고 그에 대한 사회적 토론이 부재한다는 점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다문화와 관련된 개념적 혼란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다문화 사회와 다문화주의 동일시하는 오류, 그리고 다문화주의와 다원적 단일문화주의(plural mono-culturalism)를 동일시 하는 오류를 들 수 있다.
 
현대 대부분의 사회는 다문화 사회
 
다문화 사회 자체를 부정하는 인종주의자들의 오류는 다문화 사회와 다문화주의를 개념적으로 동일시하는 데에서 발생한다. 다문화 사회란 정치적 신념, 하위문화, 다양한 지역 문화 등 삶의 각 영역에서 다원성이 혼재하는 사회를 일컫는 기술적인 용어이다. 이런 점에서 사람과 물자, 정보의 이동과 흐름이 일상화되고 지구화된 현대의 거의 모든 사회는 다문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다문화주의란 그러한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할 뿐만 아니라 적극 권장하는 정치적 지향과 태도를 의미한다. 이 두 개념을 구분하는 것의 중요성은 다문화주의에 대한 선호가 다문화사회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수 없다는 점을 명확히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찾아진다.
 
지구화된 현대 대부분의 사회는 다문화 사회이다. 그러나 다문화 사회라고 할지라도 다문화주의가 사회통합의 원리로 자동 채택되는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곧 다문화주의는 선택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다문화 사회는 다문화주의에 대한 선호와 관계없는 철회할 수 없는 현실성이다.
 
다원적 단일문화주의 vs 다문화주의
 
다문화 사회와 다문화주의에 대한 개념을 혼동해 동일시하는 것에 근거해 다문화 사회라는 현실성 자체를 부정하는 인종주의자들의 오류보다 감지하기 어려운 것은 다원적 단일문화주의와 다문화주의를 동일시하는 오류이다. 전자가 노골적이고 비현실적인데 반해 후자는 은밀하고 자기 기만적이기 때문이다. 다원적 단일문화주의는 다문화를 폐쇄적이고 자족적인 ‘단일 문화’들 사이의 상호 관용과 공존의 규범 정도로 축소해 이해하는 태도를 뜻한다. 다문화 축제 현장에서 목격되는 익숙한 풍경, 곧 같은 공간 안에 만국기가 휘날리고 독립된 국가 부스들이 설치되어 각 국가의 전통문화 아이템들이 전시된 풍경이 바로 다원적 단일문화주의의 이미지이다. 문화와 공동체에 대한 실체론적 신념에 근거해 기존 문화들 사이의 위계와 경계를 정당화시킨다는 점에서 다원적 단일문화주의는 기본적으로 단일문화주의에 다름아니다. 다원적 단일문화주의 다문화주의와 동일시될 때 ‘성공할수록 실패하는’ 다문화주의의 역설은 불가피해진다. 이주민과 사회적 소수자들은 문화적 동원과 동화의 대상 이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행해야 할 다문화주의란

다문화 사회라는 철회할 수 없는 현실성을 승인하고, 다원적 단일문화주의를 다문화주의와 동일시하는 개념적 오류를 수정할 수 있다면, 한국에서 다문화주의의 전망은 더욱 밝아질 수 있을 것이다. 그 경우 한국이 다문화 사회인가 아닌가라는 위험한 우문으로 비현실적인 퇴행을 시도하는 인종주의 집단의 정치적 입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다문화주의를 외국인들만의 문제로 제한하고, ‘노동력과 가임력있는 타 국가 출신 이민자들의 한국인 만들기’를 다문화주의 프로젝트의 주요 과제로 설정하는 다원적 단일문화주의자들의 영향력 역시 상대화될 수 있게 될 것이다.중요한 것은 우리가 모두 다문화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자명한 사실이 자동으로 ‘우리 모두를 다문화주의자’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다문화주의자가 되느냐에 따라 다문화주의는 정의로운 꿈으로도 악몽으로도 경험될 수 있다는 점이다. 다문화 사회 한국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다문화주의를 해야 할까? 고민과 토론이 필요한 시점이다.
 
글/ 한양대 글로벌다문화연구원 오경석 교수

오경석 교수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민주사회정책연구원 연구교수로 활동한 바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동북아시아의 근대화와 물>, <한국에서의 다문화주의: 현실과 쟁점>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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