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카이스트문학상] 수필 부문 당선작/ 할미탕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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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카이스트문학상] 수필 부문 당선작/ 할미탕구야
  • 카이스트신문
  • 승인 2012.01.16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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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미탕구야

이석민(수리과학과 08)

 내 나이 스물 셋. 대학교 졸업반에 철도 들고, 어른답게 행동해야 될 나이지만, 사실 나는 그렇지 않다. 어렸을 땐 꽤 많이 어른스러웠던 것 같은데, 나이가 먹으니 달라지는 걸까? 난 언제까지 어린애고 싶다. 손자이고 싶다. 같이 사는 할머니와 투닥투닥 하는 손자.
 우리 할머니를 생각하면, 아 너무 귀엽다.
 사실 처음으로 드는 생각은 이것이다. 할머니랑은 기껏해야 방학 아니면 주말 밖에 못 보니까, 우리 할머니에겐 시간이 정말 빨리 갈 것 같아. 마치 이런 느낌 아닐까?
 ‘할머니, 드라마 몇 개 끝났는데, 벌써 가을이야.’
 살아서 맞는 몇 번의 가을인지 세기도 힘들 가을을 지내시다 보면, 나이 스물 셋이 가지는 가을에 대한 느낌, 적막감과 쓸쓸함 보단 어떤 더 쓸쓸하고 스산한, 낙엽의 무게가 느껴지지는 않을까?
 그래도 우리 할머니는 아직. 살아계신다. Alive. 산다는 느낌. 산다라는 말은 참 얼마나 활동적이고, 좋은 말인가? 어시장에 나온 물고기가 숨을 쉬려 팔딱팔딱 거리고, 바닷물인지 강물인지 모를 것들이 탁탁 튀기며 맞는 삶의 느낌이란, 참 아름답고 생명력 넘친다.
 나는 우리 할머니가 살아계신 이 모습을 보는 것이 너무 좋다.
 할머니가 할머니의 유일한 친구 강아지를 데리고 요 앞 공원에서 떨어지는 은행잎을 바라보는 게 좋다.
‘멀리 갈 필요 없이 요기 앞이 제일 이쁘다. 한번 가 보그라.’
 아직도 우리 할머니는 살아 계시는 구나. 떨어지는 노오란 은행 잎을 낭만에 찬 얼굴로 바라보며 기쁨을 표현하시는 할머니를 보면서, 난 기분 좋게 농을 한번 건넨다.
 ‘할미 여기가 뭐가 이뻐, 다른데 좀 더 좋은데 가면 훨씬 더 좋아. 여기 별로야.’
 그럼 귀여운 우리 할머니는 살짝 삐치시곤 한다.

 산다는 것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가 병상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4년을 침대에서만 계셨다.

 어렸을 때 바라본 우리 할아버지는 경상도 특유의 굉장한 호기의 사나이였다.
 할아버지 집 앞엔 기찻길과 일방통행 길이 있었는데, 일방통행 길에서 반대로 지나가는 차만 있으면 그 날, 그 운전자는 운전 다 했다. 길을 막아서며 당장 차를 멈춰 세우게 했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운전자를 마구 몰아붙이신다. 나이 60드신 할아버지가 정정하게, 우렁차게 버럭버럭 그러니, 운전자들은 깨갱 안하고 어찌 버틸 텐가.
 또 할머니가 얘기해 준건데 같이 전철을 타서도 장난 아니었다고 한다. 어른이 서서 가는데, 나이 어린 젊은이가 의자에 그냥 앉아 있으면, 그 지하철 칸에선 그냥 나오는 게 좋다. 할머니도 부끄러워서 옆 칸에 가서 앉고, 모르는 척하고 ‘거, 나 아는 척 마소,’ 하고 갔다고 한다. 지하철에서 껴안고 있는 젊은이들도 예외는 아니다. ‘니네 집 가서 그 짓거리 해라’ 며 마구 화내시는 할아버지를 보고, 할머니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고 한다. 뭐 사실, 덕분에 난 지금도 지하철에선 웬만해선 앉을 수 없다. 애정표현..도.
 그랬던 우리 할아버지가 나이 오래 먹고 얻은 손자인 나 앞에선, 어찌 그리 약해지셨던가.
 매 주말 할아버지 집에 가던 어린 시절, 할아버지는 우리만 왔다 하면 꼭 신촌에 나가셨다. 나이 60이 넘어서도 신촌의 그 젊은이들 사이에서, 또 어떻게 알았는지 치킨 할아버지가 파는 치킨 집이 맛있는 것은 아셔 갖고, 그 체인점에 가서 치킨을 한 마리 씩 사오셨다. 사실 요즘 나도 사회인이 돼보니 느낀다. 거기 치킨 한 마리 되게 비싼데. 우리가 맛있게 먹던 그 치킨. 나중에 우리 아버지께서 할아버지 이 카드 빚 갚느라 고생 좀 하셨지. 어쨌든 할아버지 집에 가는 낙이었다. TV에서 치킨 할아버지가 맛있다고 선전하던 그 치킨.
 또 우리 할아버지는 손자 손녀들이 티비 본다고 하면 100% 양보다. 그렇게 좋아하시던 뉴스나 우리가 맨날 ‘따까따까 따’라 부르던 일본 스모도. 아 100%는 아니구나. 그래도 ‘용의 눈물’ 할 때는 우리보고 들어가서 자라고 하셨다. 뭐 그래도 만화는 양 껏 봤지!
 그 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하시던 것은 나와 같이 자는 것이었다. 그냥 아주 가끔씩, 할아버지 집에 다른 친척들이 오셔서 자리가 없을 때, 나는 할아버지와 같이 자고는 했다. 할아버지가 워낙 좋아하셔서 썩 별로인 척을 하기는 어려웠지만, 사실 냄새가 좀 난다. 할아버지 냄새, 늙은 사람의 냄새. 할아버지도 아시는지 엄청 걱정하고 씻고 난리 나신다. 담배도 잠자기 한 시간 전부턴 안 태우시고 두 번 세 번 깨끗이 목욕재계하시고, ‘석민아 할아버지 씻었다’ 이러시고.
 그래도 사실 할아버지 방은 아늑하다. ‘용의 눈물’에서 보던 그 두터운 솜이불 또한 상당히 푹신해서 좋았다. 자다가 중간중간 깨셔서 손자 놈 걷어찬 이불도 덮어주시곤 하셨다. 또 아침에 일어나면서 창 밖으로 보이던 비 오는 모습과 밖에서 피시던 할아버지의 담배연기도. 지금 와 생각해보니 참 좋았던 것 같다.

 췌장암이었다.
 췌장이 어디에 붙어 있는 건지, 그리고 이게 암이 걸리면 어떻게 바뀌는지 알게 되었다.
그 조그만 주머니가 우리 몸 속안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 인슐린과 당 조절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4년간 절절히 깨달았다. 수술실에 들어가면서도 ‘그래도 나는 한나라당이다’ 하시던 우리 할아버지가 그렇게 수술을 마치고 병상에 누워계시니, 너무나도 나약한 한 명의 인간이었다. 상당히 안쓰럽고 참 복잡했다 생각이.
 혈당이 낮아지면 얼굴은 하얘지고, 온 몸에 힘이 없다. 초콜릿 초콜릿 하면서 할머니는 나를 찾고, 초콜릿 한 두 조각 드시면 또 괜찮아 지신다. 그 무렵 우리 할머니 주머니엔 초콜릿투성이였다. 또 혈당이 높아지기만 하면, 그것도 위험했다. 바로 인슐린 투여하고, 그러면 할아버지는 지쳐 주무시고, 그렇게 몇 년이 갔다. 참.
 중학교 때 그런 할아버지를 보면서 쓴 일기가 있었다.
 저렇게 병상에 누워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밥 해서 침대에 가져다 드려야 드시고(사실 밥도 죽뿐이다.) 초콜릿과 인슐린을 수시로 공급받으시면서, 초콜릿 지겹다고 역정만 내시고. 걸어 다니시지도 못하고, 똥 오줌도 옆 사람의 도움으로 간신히 다녀오시는 그런 삶. 저런 삶에선 사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할아버지는 저렇게 왜 사실까. 저렇게 누워있는 할아버지에게. 삶의 목적, 의미란 있을까? 라고 시작하는 일기였다.
 어린 나이에 병원에서 누워계신 할아버지만 보면서, 세네 시간을 보내던 나였다. 사춘기 무렵의 나이에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 나이의 난 삶에서 의미를 찾고자 했는데 우리 할아버지 삶엔 의미가 보이지 않았다. 참 아무 의미 없이 보낼 수 밖에 없는 어쩔 수 없는 삶이었다.
 그리고 그 일기는 중학생의 순수함과 단순함으로 끝이 난다. 그날 내 일기는, 생각해보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너무너무 슬프겠다. 아 갑자기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니 상상이 안 간다. 아 할아버지, 할아버지 가지 마요, 미안해요. 돌아가시면 안 되요, 할아버지 못 본다고 생각하니 끔찍해요. 할아버지 그냥 그렇게 저희 옆에 있어주는 게 할아버지 삶의 의미에요. 오래 옆에 있어줘요 라고 극적 결말을 이끌면서 끝이 났다. 어린 나이에 할아버지를 못 본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슬퍼졌던 것이다. 돌아가신 지 꽤 지난 지금도, 아 갑자기 슬프다. 할아버지 보고 싶네.
 마지막으로 할아버지, 할머니와 놀러 갔는데, 아마 북악산 뒤, 송추 쪽의 계곡이었다. 아프셨으니까 한 걸음, 한 걸음 힘도 없이 떼시면서 그 계곡을 갔었다. 그 때 참 아버지가 할아버지 업고 다니느라 힘드셨을 거다. 계곡에 도착하고는 탁상에 자리를 잡고 딱 누우시더니, 우리 아버지한테 부탁했다고 한다.
 ‘야 담배 한대만 줘봐라’
 아버지가 담배 한 개비를 드렸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그 담배를 피우시고는 몇 개월 안 가서 돌아가셨다. 어린 나이엔 아버진 왜 담배를 주셔서 라고 화도 났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만약 우리 아버지도 나에게 그리 부탁했다면 나도 한 대 드렸을 것 같다.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인생 사는 것이 다 그런 것 아니겠는가 하고 말이다.

 할미탕구야
 이제 3년 차,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우리와 같이 사신다.
 나 할머니, 부모님, 동생, 그리고 강아지 뽀삐. 6명의 숨쉬는 생명체가 같이 사는 이 곳.
 난 이 곳의 잔소리꾼이다. 그리고 그 잔소리는 특히 할머니에 집중되어 있다.
 ‘아 할머니, 강아지 먹을 걸 막 그렇게 거실바닥에 던져주면 어떻게, 더러워.’
 ‘아 할머니 얘 커피 좀 그만 주라니까?’
 ‘아 할미 뽀삐 안 죽어, 그냥 지가 배고파지면 사료 먹겠지, 아 나한테도 스팸 안 해주면서.’
 아. 진짜 우리 할머니의 뽀삐 사랑은 장난이 아니다.
 맨 처음에 외로울 할머니 생각해서 강아지 분양 받으려니 반대하시던 게 누군데, 지금 와선 여행가자해도 강아지 혼자 놔두고 못 간다 하시고, 끔찍하다 끔찍해.

 할머니 연세도 이제 80 즈음이다. 되게 늙으셨다.
 통영의 부잣집 딸이었던 우리 할미. 일제 강점기 시절엔 학교도 다니면서 일본어를 배우셨다. 6.25를 겪으면서 잘 나가던 집안은 이북으로 들어간 사촌 오빠 때문에 무너졌다 한다. 어찌어찌 결혼은 해서 살고는 있었더니, 하나뿐인 아들놈이 민주화 운동 한다고 데모하다 감방에 들어갔고, 나중엔 할아버지 병간호로 그리 고생하시다, 그래도 요새는 집에 들여온 스마트 티비로 좋아하시는 티비 프로그램도 돌려보신다. ‘요샌 불후의 명곡이 나가수보다 낫더라.‘며 내게 불후의 명곡 봤냐고 물어보는 할머니. 휴, 저 스마트 티비 리모콘 사용법 가르쳐 드리느라 되게 힘들었는데.
 나이가 드셔서 이제는 걷고, 어딜 가시고, 생활 하는 게 쉬우신 일이 아니다. 방학 때만 되면 나와 할머니가 같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다. 가족들 다 일 나가시고, 동생은 학원가고 논다고 바쁘니 대학생 백수인 나만 집에 남아 있다. 막상 내가 어디를 나가려고 하면 할미가 가로 막는다. ‘어디 가나?, 언제 오노?’. 딱히 할 것도 없는데, 어딜 가겠어요. 그냥 담배나 한 대 피러 가는 거지.
 사실 집에 있으면 제일 고역인 게, 할머니와 같이 먹는 점심이다. 전라도에서 살다 오신 외할머니와 다르게 우리 할머니 음식은 사실 맛이 없다. 이젠 눈도 침침해지셔서 스팸도 곧잘 태우신다. 또 계란을 먹는데 혀 속에서 느껴지던 그 계란 껍질의 맛이란. 그래서 난 주로 시킨다.
 ‘할미, 우리 오늘 냉면 먹을까?’.
 그래도 열에 두 세 번은 할머니가 좋아하는 콩국수도 시켜드린다. 혼자 먹는 점심보다 손자하고 같이 먹는 점심이 좋다면서 맛있게 드신다. 나 없으면 시켜서 먹는 것도 못한다면서.
 가끔씩은 내가 담배를 피러 나갔다 오면서, 먹을 것을 사오기도 한다. 중고딩들이 많이 먹는 2800원짜리 ‘치킨 마요네즈’ 도시락. 그러면 할머니는 감탄한다. ‘아 이렇게 맛있는 것도 못 먹고 죽을 뻔했네,’ ‘할미, 내가 예전에도 한 번 사줘서 맛있다고 먹었잖아.’ ‘나 먹은 적 없다. 이거 처음 먹어본다!’. 할머니, 치매야?
 그렇게 먹는 할머니와 나의 점심시간은 이야기의 장이다. 집이지만 그래도 느껴지는 며느리 눈치와, 맨날 술 먹고 들어오는 아들, 이제는 혼자서는 쉽사리 무엇도 하기 힘든 세월 앞에서, 그 이겨내던 서글픔을 풀어내는 시간이다. 박경리씨와 자기랑 산으로 약초 따러 다닌 이야기, 일제 시대엔 어쨌고, 박정희의 내연녀가 누구였다느니 하는 야사도 들을 수 있다. 가끔씩 들으면 한 시간을 꼬박 들어야 하지만, 진짜 신기하기도 하다. 책으로 배우던 근 현대사를 할머니는 직접 겪으셨다. 간혹 할머니를 놀리면서 ‘와 할미가 역사네. 우리 할미 장난 아니네!’ 라고 하면, 할머니는 ‘고럼~’ 하고 더 얘기해주신다. 신기하고 재미있다. 우리 할머니, 손자랑 참 잘 논다.
 할머니가 나이가 드시며 보이는 특징이라 하면, 쉽게 삐치고, 쉽게 상처받는다는 점일 것이다. 나는 우리 할머니를 강하게 단련시킨다. ‘할머닌 나보다 뽀삐가 더 좋지?’ 그러면 할머니는 아니라고, 엄청 답답해 하신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모습이 재미있어서, ‘아니야 할머니는 손자보다 강아지 이 놈이 더 좋은 거야.’ 하고 애꿎은 강아지를 못살게 군다. 그러면 할머니는 조금 삐치다가 결국 폭발한다. ‘아휴 내가 몬 산다, 저 손자 땜에’ 그러면 나는 할머니에게 다가가지, ‘헤헤 할미탕구야, 할미 삐쳤어?’ ‘아주 임마가 할미를 갖고 노네’. 할머니가 한번 성을 내면, 풀린 거다.

 할미랑 이렇게 투닥투닥 살아가는 것이 너무 좋다. 할머니가 아직도 가을에 떨어지는 은행잎을 보고 기분 좋아서 손자한테 자랑하는 모습이 너무 좋다. 강아지 데리고 아침마다 산책 나가시는 그 모습이 좋다. 점심을 같이 시켜먹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다. 뽀삐 갖고 서로 투닥거리는 것이 좋다. 할미를 놀려 먹는 게 좋다. 그래서 난 앞으로 더 까불 생각이다. 계속 이렇게 싸우고, 뽀삐를 질투하면서, 우리 할미 허리를 펴주고, 걷는 것 더 연습시킬 거다.
 그리고 이것은 할아버지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 산다는 느낌. 사람간에 갈등이 있고 티격태격하는 것, 아쉬움이 있고, 욕심이 있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 살게 만들고, 즐겁게 만든다는 것을 난 중학교 때 배운 것 같다. 편하고 공기 좋은 곳에 편히 사시라고, 조용히 혼자 무미건조하게 놔두는 것이, 할아버지처럼 침대에만 누워서 평생 그리 있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 할머니가 방에서 무언가를 쓰시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
 내가 할머니 뭐해 하면서 들어가자, 무언가 쓰고 계시던 것들을 후다닥 뒤로 숨기시고는 아무 것도 아니다 하시던 할머니. 왜 배고프나 하고 묻는 걸 보면서, 나는 짐짓 못 본 척 하고 슬그머니 할머니 옆으로 간다. 할머니 침대에 들어가, 할머니 다리에 누워, 할머니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에선 노래가 나오고, 그렇게 침대에서 할머니와 라디오 이야기를 나눈다. 한 숨 잤던 거 같다. 그리고 생각한다. 조금 서글픈 거다. 이제 내가 할머니 다리를 베고, 잘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이젠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다 잘 아니까.
 여든 된 할머니가 본 불꽃놀이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20층에 살아서, 아파트 너머로 근처에서 불꽃놀이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배란다에 쪼르르 서서 불꽃놀이를 바라보던 그 때 기억이 난다. 아파트에 가려 조금 잘 안보였는데도, 불꽃이 하나 올라갈 때마다 우와아~ 하면서 나이에 안 맞는 감탄사를 쏟아내시던 우리 할머니. 다음엔 같이 불꽃놀이나 해드릴까 하고 생각해본다. 근데 갑자기 할머니가 구경하다 말고 들어가신다. ‘할미 어디가, 안 봐?’ 다시 돌아오던 할머니 품엔 뽀삐가 안겨있다. 뽀삐야 같이 보자 하면서 뽀삐를 안고 오신다. 아 못산다. 내가.
 난 오래오래 우리 할머니 손자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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