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아직 뿌리내리지 못한 산업혁명과 민주주의에 의한 성장통을 반영이라도 한 듯 예술 또한 끊임없이 고동치며 새로운 사조를 향해 나아간다. 1800년대는 예술뿐만 아니라 정치·사회·과학·철학 등 모든 삶의 양식이 강렬하게 변화하는 시기였다. 미술사에서는 유형적인 표현을 기피하며 대상을 객관적으로 표현하는 사실주의와 대상을 풍자하는 다다이즘이 성행했으며, 과학계의 영원한 뜨거운 감자인 진화론이 발표되기도 했다. 음악 분야에서도 이 시기에는 지난 4세기 동안 지켜온 전통적인 음악적 형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하는 시도가 성행했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일상생활 속 음악(Musique de tous les jours)’을 추구한 작곡가 에릭 사티(Erik Satie)가 있었다.

 

게으르고 자존심 센 소년

1866년 5월 17일, 사티는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의 옹플뢰르라는 항구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4살 때 파리로 이사 오지만, 이듬해 어머니를 잃은 그는 혼자 고향으로 돌아가 조부모 밑에서 유년기를 보낸다. 10살 때 옹플뢰르에 있는 레오나르 성당의 음악 총책임자였던 비노에게서 처음으로 음악 지도를 받고 음악에 흥미를 느낀 그는, 조부모가 사망한 후 아버지가 있는 파리에서 정식으로 음악 수업을 받게 된다. 그러나 3년 후 음악원에서 쫓겨나는데, 당시 기록에서 묘사되는 사티는 ‘재능은 있지만 게으르고 집중력이 없는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는 제적당한 이후 몇 번이고 다른 학과의 문을 두드리지만 결국 아무런 학위도 얻지 못한다.

사티의 작곡어법은 학교가 아닌 몽마르트르 언덕에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19세기 말 파리의 몽마르트르는 당시의 예술가들, 특히 혁명적이고 비관례적인 사상을 가진 자들이 모여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였다. 1887년 말 사티는 몽마르트르에 위치한 카페 ‘검은 고양이’의 부반주자로 고용된다. 어렸을 적 그는 사교성이 거의 없는 청년이었지만, ‘검은 고양이’에서 만났던 많은 예술인의 자유로우면서 풍부한 상상력과 개혁적인 논쟁으로 인해 점차 외향적인 인물로 변해갔다. 드뷔시와 피카소 등 저명한 예술가들과 친분을 쌓았으며, 또 직접 작곡하고 연주하며 자신만의 음악적 색채를 형성해 나가게 된다.

1890년 사티는 장미십자교단의 창시자였던 조세펭 펠라덩을 만났고, 그 이듬해 장미십자교단의 공식적인 작곡가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장미십자교단의 3개의 종소리>, <별의 아들> 등을 작곡하며 언론과 대중에게 교단의 음악 개척자로서 인정받는다. 그러나 바그너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교주 펠라덩이 그의 곡을 완전한 바그너적 음악이라 언급하자, 자신의 음악을 타인의 악풍으로 단정 지었다는 사실에 격분한 사티는 펠라덩과 절연함과 동시에 교단의 총책임자 지위에서 사퇴한다. 당시의 일간지 <질 블라스>에 “만약 내가 누군가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면 나는 이 자리를 통해 그 지도자가 바로 나 자신임을 밝힌다”라고 단호히 선언한 인터뷰는 자신의 음악이 타인의 악풍으로 설명되었을 때의 모욕감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는 1898년 몽마르트르를 떠나 파리 근교의 아르쾨유-카샹이라는 도시에 정착했으며, 카페의 피아노 연주자로 생계를 연명한다. 

 

불혹에 전성기를 맞다

40세의 문턱에 선 작곡가는 1905년 스콜라 칸토룸에 입학해 전문적인 음악 이론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42세가 되던 해 학위를 취득한다. 이 시기 이후부터 대표작 <3개의 짐노페디>를 포함한 사티 특유의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요소들이 들어간 작품이 집중적으로 탄생하며 전성기가 열렸다. 그중 네 손용 피아노곡 <승마복을 입고>와 <불쾌한 개요>, 피아노 독주곡 <새로운 차가운 소품들>은 자신이 발명한 대위법을 이용하여 작곡되었으며, 사티는 자신의 푸가 선율이 바흐의 푸가보다 낫다고 말하며 자신감을 드러낸다.

1911년 라벨과 피아니스트 리카르도 비녜스가 ‘자유음악협회’에서 연주한 그의 <사라반드>와, 같은 해 그의 오랜 벗 드뷔시에 의한 <짐노페디> 편곡은 드뷔시 본인도 놀랄 만큼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사티의 음악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음악가들이 그의 곡을 관현악곡으로 편곡하기 시작했으며, 1913년 사티와 절친한 사이였던 비녜스가 자신의 독주회에서 <4개의 엉성한 전주곡>을 초연하며 사티의 이름이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게 된다. 여러 출판사가 과거의 작품들을 엮어 출판했고, 작곡가 자신도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수많은 피아노 작품을 배출한다.

제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은 당시 유럽의 음악계에 많은 저지를 가했으나, 에릭 사티에게는 오히려 긍정적으로 작용하였다. 당시의 엘리트층에 속하던 인물들과의 만남이 이뤄졌던 것이다. 이 시기에 사티는 저명한 러시아 발레 단장 디아길레프와 젊은 작가 장 콕토를 만나게 된다. 사티의 음악을 외부에 알리는데 사티 자신보다 적극적이었던 콕토는 자신과 친한 당시의 부유층들에게 사티를 추천하거나 자신의 저서에서 그의 음악에 대해 논했다. 또 디아길레프의 위촉으로 탄생한 마신느의 안무, 피카소의 무대 장식 및 의상, 콕토의 대본 그리고 사티의 음악으로 구성된 러시아 발레 <퍼레이드>를 통해 사티는 스타 작곡가로 급부상했다. 1920년에는 사티의 작품만으로 구성된 음악제가 두 차례에 걸쳐 개최되기도 하였다.

 

불청객 같은 음악

그의 음악은 지금까지 통용되는 전통적인 음악과는 거리가 멀었다. 19세기 말은 화려하고 웅장한, 형식적이고 감상주의적인 음악 어법만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던 시기였다. 그의 음악은 그 당시의 클래식보다는 오히려 뉴에이지 음악에 더 가깝게 들리며, 곡 전체에서 기존의 관습을 타파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눈에 띈다. 그의 단순한 음악 어법은 쓸데없는 겉치레는 모두 떨쳐버리거나 이를 비틀어 풍자하기도 한다. 음악과 작곡가의 권위를 끌어내리기 위해 곡에 우스꽝스러운 제목을 짓거나, 당시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이탈리아어 용어 대신 ‘불청객 같이’, ‘억지로 쓴웃음을 지으며’, ‘해골처럼’ 등 엉뚱한 지시어들로 악보를 채웠다. <바싹 마른 태아>에서는 음악의 거장들의 대중적인 선율을 패러디하고 풍자적인 주석을 다는 한편, 악보에 마디와 속도, 운지법을 삭제하여 작곡가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연주가의 창작 태도를 요구하기도 했다. 

1920년 사티는 다시 한번 음악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그가 발바정즈 갤러리에서 선보인 <실내장식 음악>은 전시회장 곳곳에 자리 잡고 있던연주자들에게 짧은 음악구들을 반복하여 연주하게 하였다. 이는 여태껏 음악이 연주회장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과거의 고정관념을 깨고 커다란 집합 속에 자리 잡은 하나의 장식적인 부분으로 해석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르쾨유의 위대한 선생님

오만하고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좋아하는 사티의 성격 탓에 펠라덩과 드뷔시를 포함한 많은 친구가 그의 곁을 떠났지만, 그의 실험적이고 풍자적인 음악은 주위의 젊은 음악가들을 끌어들였다. 프랑스의 작곡가이자 음악학자 루이 뒤레 등 6명은 사티의 정신을 잇는 ‘프랑스 6인조’를 결성해 음악 내의 과장된 표현을 없애고 인상주의 음악의 모호함을 탈피하려고 시도했다. 몇몇 프랑스 음악가들은 사티를 ‘아르쾨유의 위대한 선생님’이라 부르기도 했는데, 이들은 ‘프랑스 6인조’와 마찬가지로 ‘아르쾨유 학파’를 형성하여 사티의 음악 정신을 자신들의 예술의 정신적 기반으로 삼았다.

그는 음악 외의 분야에도 여러 영향을 끼쳤다. 듀셩, 피카비아 등의 다다이스트 화가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며, 가명을 사용해 다다이즘 전문지 <391>이나 대중문화를 다루는 <Vanity Fair> 등에 많은 글을 투고했다. 미국의 화가 겸 사진작가 만 레이와 함께 다리미에 굵은 못을 여러 개 박아 <선물>이라는 제목으로 전시회에 공개, 대성공을 거두기도 하였다. 프랑시스 피카비아의 다다이즘 영화 몇 편에 음악 자문을 맡았으며, 사티의 마지막 작품인 발레곡 <휴연>은 유명한 무성영화 감독 르네 클레르의 영화 <막간극>에 삽입되었다. 

1924년 초연된 <휴연> 직후 사티의 건강은 갑자기 악화되기 시작하였고, 이듬해 7월 1일 간경화증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프랑스 6인’의 일원 중 그와 가장 절친했던 미요와 사티의 몇몇 친구들이 그의 방문을 처음 열었을 때, 그들은 방안의 풍경이 하나의 거대한 거미줄 같았다고 한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빈 곳에 외롭게 놓인 침대와 책상 한 개, 열 두벌의 동일한 회색 벨벳 양복, 그리고 중고 피아노 한 대만이 실에 묶인 채 존재했을 뿐이었다.

 

“나는 늙은 이 시대를 살기엔 지나치게 젊다.”사티가 남긴 이 글귀는 기존의 전통과 형식에 맞서 개혁의 길을 가고자 했던 그만의 음악 세계를 잘 대변하고 있다. 이런 사티의 독특한 철학은 예술적 개혁의 길을 걷게 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것을 넘어 형식에 매여있는 모든 제약을 거부하는 혁신의 원동력이었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사티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나뉘고 있지만, 사티가 혁신과 변화를 통해 이런 그의 이상을 음악적으로 실현했으며 20세기 음악적 사고의 변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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