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린 시아마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스크린을 채운 캔버스 위로 목탄을 쥔 여성들의 손이 움직인다. 그림의 형식은 초상화, 모델은 그들을 가르치는 화가 마리안느다. 제자들에게 둘러싸여 모델을 서던 중 그녀는, 누군가 자신이 그린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꺼내놓은 걸 발견한다. 한참 동안 마리안느의 동요하는 얼굴을 응시한 카메라는 이내 그림에 담긴 과거로 시선을 옮긴다.

긴 시간 나룻배를 타고 마리안느가 도착한 곳은 조용한 섬이었다. 어느 귀부인으로부터 이곳에서 자신의 딸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는 의뢰를 받았기 때문이다. 밀라노에 있는 정혼자가 초상화를 마음에 들어 하면 엘로이즈는 그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엘로이즈는 모르는 사람과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았기에, 화가에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으려 한다. 결국 마리안느는 자신의 정체를 숨긴 채 낮에는 산책 친구로 위장해 얼굴을 관찰하고, 밤에는 기억에 의존해 초상화를 그려낸다.

마리안느와의 산책은 한평생 수도원에 갇혀 살다 결혼해야 하는 엘로이즈를 세상과 연결한다. 달리기를 하고, 수영을 하며 매일 새로운 도전을 하던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 대해서도 알아가기 시작한다. 피사체인 엘로이즈를 바라보는 마리안느의 시선은 너무도 강력해 무력하게 굳어 있던 엘로이즈를 깨어나게 한다.

초상화를 완성한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진실을 밝힌 후 완성된 그림을 보여준다. 그녀의 초상화는 부드럽고 온화하며, 두 뺨에는 홍조를 띠고 있다. 지극히 남편의 평가를 의식한 결과였다. 엘로이즈는 자신의 본질을 담지 못한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다. 마리안느가 분노와 수치심에 초상화의 얼굴을 지우고 떠나려 하자, 엘로이즈는 본인이 모델을 할 테니 다시 한번 자신을 그려보라 제안한다. 이제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일방적으로 관찰했던 관계는, 서로가 서로를 응시하는 관계로 변한다. 마리안느가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엘로이즈를 관찰하면, 엘로이즈도 마리안느를 치열하게 바라보았다. 카메라는 마리안느의 시점에서 엘로이즈의 모습을 담아왔지만, 엘로이즈는 시선을 받는 입장에서 과감히 벗어나 마리안느에게 시선을 돌려준다. 이젤을 사이에 두고 대화와 눈빛, 숨결이 오갔다. 마리안느의 시선이 타율적인 삶을 거부하던 엘로이즈의 닫힌 마음을 열었듯, 엘로이즈의 시선은 마리안느가 진정한 예술가로서 거듭나도록 한다.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 동안 음악은 두 곡만 등장한다. 바람 소리, 붓과 목탄이 내는 소리, 인물들의 숨소리와 적막이 음악을 대신한다. 음악을 배제한 인물의 감정과 대사는 깊은 울림과 여운을 준다. 오랜 정적 끝에 처음 음악이 등장하는 순간은 수도원에서 접한 미사곡 외에 음악을 들어보지 못한 엘로이즈에게 마리안느가 비발디의 <여름>을 들려주는 장면이다. 엘로이즈는 폭풍이 몰려오는 광경을 묘사한 이 곡을 들으며 살아있음을 느낀다.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18세기 여성의 삶과 그 당시 생소했던 동성 간 연애를 다룬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삶과 사랑을 제한받는다. 그러나 한번 부조리를 의식하게 되면, 혹은 사랑을 시작하게 되면 다시는 그 가치를 몰랐던 때로 돌아갈 수 없다. 영화의 후반부는 전반부보다 더 격정적이고 아름답다. 그림은 점점 완성되어가고, 그들은 열정적인 사랑과 분노, 슬픔과 동시에 끝없는 무력감을 느낀다. 그리고 무력한 연인의 사랑은 기억이라는 방법으로 완성된다. 시간이 지나고 그들의 사랑은 더 이상 슬프지 않게 되어, 기억 속에서 평생 서로가 살아낼 수 있는 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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